<<정채원 시인>>
<<정채원 시인의 양력>>
* 1951년 서울에서 출생
*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 1996년 《문학사상》 등단.
* 시집 : 『나의 키로 건너는 강』, 『슬픈 갈릴레이의 마을』, 『일교차로 만든 집』, 『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정채원 시인의 시>>
감염/정채원
치료약도 백신도 없는 전염병처럼
사랑이 들끓어도
죽진 않았지
아니, 죽은 사람이 없다는 건 아니지
숨도 쉬고 커피도 마시고 장사도 하지만
다만 열은 내렸지만
사태 이전보다
영혼의 눈이 십리쯤 들어간 사람
오랜 세월 굳어진 돌덩이처럼
다시는 모래로 흩어지지 않으려는 눈빛을 가진
너를 읽고 난 후
밤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
다시는 강 건너로 돌아가지 못한다
참호도 대포도 없는 전장에서
나는 죽도록 달리다가 죽겠지만
아니, 운 좋게 살아남는다 해도
이전과 이후 사이
꿈쩍 않는 강화유리 벽에 몸을 던지고
또 던지다 잠을 깰까
해열제에 취해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일상 속에서
정지신호 지나
누군가 다가오면 멀리 돌아서 가는 길
파타 모르가나/정채원
여름에는 내 피로 너를 만들었고
겨울에는 뼛가루로 너를 만들었다
아니,
여름에는 얼음으로 너를 만들었고
겨울에는 모래로, 모래바람으로 너를
만들었다, 되도록 빨리 지워지는 너를
길 잃은 사막에서 쓰러지기 직전 나타나는
신기루 속의 신기루
달려가 잡으면 가시풀 한 줌으로 흩어지는
너를 알면서도
그런 줄 알기에 더 놓지 못했다
철창에 갇혀 온종일 커피 열매만 먹는 사향고양이는
오늘도 피똥 아니, 커피똥을 싼다
수도 없이 창자벽에 제 머리를 박으며
캄캄한 내장 속에서 발효된 내 편지는
차가운 혀를 사로잡을 만큼 중의적일까
하늘에 뜨는 태양과
바다에 뜨는 태양이 서로 마주보며
너, 가짜지?
얼굴을 붉히는 동안
한 걸음 다가가면 두 걸음 뒤로 물러나다
내장을 거칠 겨를도 없이
해가 지면 모든 게 지워지고
주름진 백지만 남게 되더라도
북극 얼음바다 위에 떠 있는 마법의 성을 향해
구절양장을 건너가는 우리에게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오늘은 얼음을 뚫고 뜨거운 커피가 솟구칠지도 모르지
* Fata Morgana : 마녀 모르간 또는 신기루라는 뜻.
제8병동-복숭아나무 아래/정채원
붉은 옷을 입고 누워있다
복숭아나무 아래
나 어릴 때 당사주를 보신 엄마는
누워있는 나를 보고 섬뜩하셨다지
그림 속에 누우면 죽는다 했는데
일찍 죽는다 했는데
누워있어도
붉은 옷을 입었으니
죽는 건 아니라 했다지
늘 어딘가 아플 뿐
오른쪽으로 누우면 왼쪽 옆구리가 시리고
바로 누우면 가슴이 막막해
잠 못 들고 뒤척일 때마다
꽃들은 다투어 피어나고
칼은 복숭아나무 가지를 자르고
나를 스쳐 지나가고
비 오듯 쏟아지는 꽃잎 아래
누군가 복숭아나무 곁을 지나며 말하지
잎새가 웅얼거린다고
가지가 자꾸 앓는다고
이따금 노래 소리로 들린다고
천 년 전 강가에서 들었던 그 비파소리라고
한평생 도망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그림 속에서
꽃 없는 엄동에만 나무 곁을 지나는 사람
비 온 뒤 떨어진 꽃잎만을 밟고 가는 사람
단물 흐르는 복숭아를 바구니 가득 따 담는 사람
각기 다른 자기만의 그림 속에서
나는 오늘도 바래진 붉은 옷을 입고
신음하며 누워있다
해마다 천도가 주렁주렁 익어가는 나무 아래
사해, 사해/정채원
사막엔 모래만 있는 게 아니다
삭망을 아는 달도 있다
너와 나 사이
타는 모래만 채워져 있는 게 아니다
영하의 밤도 있다
달려오던 전갈은 모래 속으로
재빨리 기호를 숨기고
너도 무엇이 두려운 거니?
무엇을 기다리는 거니? 고도가 되어
사해야 할 그 무엇이 있어
사함 받아야 할 그 무엇이 있어
핑크색 뿔방울뱀 사이드와인더*는
고리처럼 구부린 전신을 모래 위로 내던지며 간다
재빨리 먹잇감에 독니를 꽂는 냉혈은
달빛을 흡혈하는 야행성이다
사막에 던진 신의 물음표
우리는 사해로 전진한다
살아 움직이는 끔찍한 부호를
달빛 모래 바다에 던진 까닭을 묻고 싶다
*sidewinder : 교묘하게 구부린 몸을 옆으로 던지며 이동하는 모습 때문에 붙여진 이름.
뜨거운 모래 위에서 이동하기에 유리하다.
벌레구멍/정채원
과거로부터 온 나비가
내 이마에 살풋 앉는 아침
고요한 미열이 있다
두 개의 번개가 동시에 머리 위로 떨어져
사과를 꿰뚫는 구멍이 날 때
보이지 않던 것이 얼핏 보일 때
말랑거리며 머릿속을 관통하는 벌레가 있다
꿰뚫려도 통증을 모르는
피 흘려도 눈을 감지 않는
시간과 공간의 벽을 뚫으며
기차가 달려간다
울지마라 울지마라
사과가 끊임없이 꿈틀거려도
변하지 않는 건 변하지 않는 것
내가 백 년 달아나는 동안
네겐 한 계절이 흘렀다 해도
변하는 건 변하는 것
죽는 건
죽어서도 다시 날아오르는 것
갈 수 있는 끝에서 끝까지
존재하지 않는
터널을 뚫는 것,
아무도 노래하며 지나가지 않는다 해도
축제/정채원
온종일 망고를 생각하다
머리끝에서부터 조금씩 불이 붙기 시작한 사람
발은 조금씩 차가워지고
냉기는 발목을 타고 위로 위로
불붙은 머리 속에서
눈동자만 얼음사탕처럼 빛난다
유리처럼 투명한 내화벽을 몸 안에 세우고
불과 얼음은 서로를 노려본다
녹아 흐르는 내부
연기인지 수증기인지 모를 뿌연 풍경 속으로
노란 장화를 신고 걸어가는 너의 뒷모습이
어슴푸레,
망고!
얼레 줄은 이미 다 풀렸다
북극의 8월/정채원
팔을 한껏 벌리고
8월이라고
얼음이 녹는다고
훨훨 춤을 추었나
발밑에서 얼음 갈라지는 소리
북극곰은 어떻게 물개를 잡을 수 있나
발판도 없이
너는 무얼 사냥할 수 있나
발밑에서 얼음 갈라지는 소리
해빙이라고
북극에서 발판도 없이
8월이라고
나를 막지 말아요/정채원
가슴에 구멍을 뚫으면 피리가 되지
몇 개를 막으면 노래가 되지
노래에 구멍을 뚫으면 춤이 되지
자면서도 멈출 수 없는 춤
떼 지어 다녀도 늘 혼자인 춤
구멍이 다 막히는 날
노래도 춤도 다 막히고,
막이 내리지
다음 공연은 아직 미정
DMZ/정채원
너와 나 사이
금지된 땅이 있다
발목이 잘려나간 고라니가 절룩거리고
짐승 같은 꽃이 핀다
너와 나 사이
서로 부둥켜안은 유골이 묻혀 있다
눈감고 앉아서도
수천 번 철책을 넘은 적 있다
폭풍 지뢰 너머
바람의 손을 잡고
너와 나 사이
분계선이 있다
한시도 내 너를 잊은 적 없다
장미의 배경/정채원
장미를 그릴 때 너는
뒤에 숲을 그리곤 한다
숲이 없다면 장미는 너무 초라해
지루한 숲에라도 기대야겠지
차라리
물속의 장미
구름 속의 장미
사막의 장미
숨이 차고 목이 타겠지만
오늘은 잿더미 속의 장미를 그리기로 한다
잿빛은 장밋빛과 너무 다르지
내 장미는 잿더미와 잘 어울려
잿더미 위에 피어난 심장
불타고 난 뒤 아직도 피 흘리는
새벽 두 시 칠흑의 장미
그 부서진 심장으로 나는
가장 향이 강한 향수를 만들지
장미의 배경에는
숨어 울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와 몇 번 눈을 마주친 적이 있다
이승 아닌 듯한 곳에서
혹등고래/정채원
이따금 몸을 반 이상 물 밖으로 솟구친다
새끼를 낳으러
육천오백 킬로를 헤엄쳐온 어미 고래
물 밖에도 세상이 있다는 거
살아서 갈 수 없는 곳이라고
그곳이 없다는 건 아니라는 거
새끼도 언젠가 알게 되겠지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그 혹등이 없다는 건 아니라는 거
그것도 더 크면 알게 되겠지
어미는 새끼에 젖을 물린 채 열대 바다를 헤엄친다
그런 걸 알게 될 때쯤 새끼는
극지의 얼음 바다를 홀로 헤엄치며
어쩌다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묻지 않을 수도 있겠지
코고는 소리 윙윙거리는 소리 울음소리 신음소리가 섞여
긴 노래가 되고
예언처럼 멀고 먼 주름투성이 바다
뻔하고 모호한
젖은 몸뚱이는
이따금 물 밖으로 힘껏 솟구친다
다른 세상을 흘낏 엿보면서
그렇게 숨을 쉬면서
공무도하記/정채원
가는귀먹은 귀에 검은 이어폰을 꽂고
횡단보도를 건너간다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포장마차
오뎅 국물과 소주잔을 건너간다
얼얼한 목구멍으로 언 별을 잔뜩 삼키고
동짓달 그믐밤을 건너간다
은하수를 건너 건너
간신히 다시 밝은 아침
입안에 군별이 가득 들어 있다
밤새 타들어 가던 머리 풀어헤친 여인이
강을 건너간다
주머니에 돌멩이를 가득 채운 채
그대, 나를 건너지 마오
상비약/정채원
심혈관 속에서
나비가 날아다닌다
손목이 펄럭펄럭한다
생명보험 증서가 아무리 뒤져도 나타나지 않는데
압화로 눌러놓은 시편들이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는데
예상보다 너무 일찍 와버린 이별이 있고
맘 단단히 먹고 대비해도 좀체로 달려들지 않는 눈사람 괴한이
골목 끝에 우두커니 서 있다
눈물이 몇 줄기 녹아흐른 채로
넘기다 목에 걸려버린 혈압강하제와 오메가3처럼
늘 끼고 다니는 것들
안 먹으면 불안하고
복용해도 복용해도 중단이 없는
기억들, 슬픔들, 회한들
단번에 종량제 봉투에 넣어버릴까
만지작거리다
결심한 듯
불경과 성경이 있는 서랍 깊숙이 넣어버린다
알록달록 어제와 오늘이 오색으로 충돌하는 구절양장 헤매며
불안이 날개치지 않는 날은
더욱 불안하다
물질은 비물질을 껴안고 운다/정채원
두개골 속 1.5 킬로 고깃덩어리가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도대체 사랑이란 게 있긴 있는가
이런저런 것들을 캐묻는다
자다가도 묻고 울다가도 묻고,
이 세상에 보이는 건 모두 가짜 아닐까
이 얼음 같은 사탕도 착각 아닐까
물질이 자유의지를 갖고 물질을 와드득 깨물고
물질과 비물질이 서로 밀고 당기고 엎치락뒤치락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또한 누구의 희미한 기억 속일까
무중력의 공간을 달려가는 그리움은
백만 미터고 천만 미터고 거침없이 계속 달려간다
잡을 수가 없다, 그대여 슬픔이여
내 육신은 고작 백 미터도 도망치지 못하는데
생각의 꼬리에 매달려 캄캄한 우주를 홀로 유영하는
나는 누구의 꿈속에서
그림자의 그림자를 보고 있는 것일까
에포케!*
다시 동굴로 들어가자
뇌가 평생 갇혀 사는 그곳으로,
살아서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그곳에서
낡은 세포는 다 갈아치운 새 물질로
내일은 붉은점모시나비 애벌레가 될지도 모른다
*에포케(epoché, epokhế, εποχη)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판단중지(判斷中止)를 뜻하는 말
썩어도 건치/정채원
이빨 하나도 빠지지 않은 두개골이
눈구멍 속으로 나를 빨아들인다
그가 끼었던 반지와 팔찌와 목걸이들
함께 싸늘히 진열된 채
나를 파고 또 판다
썩지 않는 구멍들
그 고리 속으로 나를 휘돌린다
나를 가둔다
죽어서도 출토되지 않는 집착이 있어
살 뜨거운 것들을 씹어 삼키려는가
이빨 하나도 잃지 않은 너는
어쩌다가 살부터 다 빼앗기게 되었나
영영 흙이 되지 못하는
흙투성이 황금반지와 팔찌만 거느린 채
제 안에 묘혈을 파고 또 파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팽팽하게 마주 보고 있다
결코 한 발짝도
건너편으로 끌려가지 않겠다는 듯이
서로에게 한없이 끌려가는 듯이
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정채원
쉬지 않고 내리는 빗물이 사막에 수백 개의 호수를 만든다. 우기가 끝나면 가장 깊어지는
수심을 들여다본다. 떨어져 있는 호수와 호수가 하얗게 타는 모래 밑에서 서로의 냄새를 더
듬는다. 바다에서도 본 적 없는 주황물고기가 헤엄쳐 다니는 사막 호수, 석 달이 지나면 사
랑은 말라 버리고 모래에 처박힌 바퀴는 점점 더 꼼짝달싹 못할 것이고.
모래바람 속으로 눈썹에 내려앉는 모래를 깜빡이며 걷고 또 걷는다. 건기 뒤에는 우기를,
우기 뒤에는 건기를 마련한 건 누굴까?
그러나 건기를 지나도 또 건기, 우기를 지나도 또 우기, 그런 마을도 있다. 모두가 메말라 기
억의 핏줄까지 마른 잎맥처럼 부서져 허공으로 흩어지던 마을, 혹은 젖고 젖고 푹 젖어 푸른
곰팡이가 수국 꽃송이가 되다 쉰 밥덩이가 되다 수심 알 수 없는 웅덩이가 되던 마을, 모두가
제 안에 익사해 퉁퉁 불어 터지던 마을, 살아도 살아도 살아본 적 없는 사람들이 죽어도 죽어
도 죽어 본 적 없는 얼굴로 분노의 고무줄을 계속 잡아당기던 마을, 의심을 풍선처럼 계속 불
어 결국 터져 버리던 마을, 욕망을 계속 가열해 사랑하는 이들을 다 태우고 깨진 유리창과 검
은 재만 남기던 마을,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도망치듯 떠나온 그곳.
우기가 끝날 즈음, 도망쳐 온 사람들의 사막에 피어나는 석 달 동안의 오아시스. 짧은 천국은
서서히 말라 가고 갈라터진 바닥을 보이겠지만, 얼핏 본 주황물고기는 사람들 머릿속에서 계속
헤엄쳐 다니겠지, 다음 우기를 기다리면서
레몬과 세숫비누/정채원
레몬 한 방울
금속성 생활에 떨어지면 산소가 발생하지
푸른색 리트머스를 붉게 물들이듯
붉어지는 눈자위
쓴맛이 나는 비누로 닦아줘요
슬픔의 단백질을 녹여
미끌미끌한 표정을 갖고 싶을 때,
붉은 적의를 푸르게 바꾸려는 듯
깨진 창문으로 날아가려고
물질이 다른 물질에게 고백을 내놓고
물질이 또 다른 물질에게서 상처를 받는
일상은 거품투성이
오늘은 산성 중성 염기성 가운데
어떤 표정이 어울릴까요?
눈물이 탄산과 반응할 때는 염기로
하품이 암모니아와 반응할 때는 산으로
매혹과 환멸 사이로 외줄을 타는
마음은 양쪽성 물질이 되고 싶은가 보다
변검쇼 1/정채원
오늘은 석민이지만
어제는 명호였지요
원래는 영섭이예요
지금 당신에게 영섭이가 말하는 거예요
영섭이의 말은 믿어도 돼요
석민이는 늘 쥐색 정장 차림
바지 주름 칼날 같이 세우고 다니는 사람
명호는 무릎 튀어나온 코르덴바지에
담뱃재 희끗희끗한 티셔츠 바람
회칼로 반대파의 목을 따고도 귀갓길
말기 암 어머니 전화 목소리에 귀가 젖는 사람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벙어리에게
맘 놓고 속내 다 털어놓듯
비밀처럼 꽁꽁 숨긴 당신의 아픔
다 털어놓아도 돼요, 영섭에게
이제는 당신의 눈빛만 보아도 다 알아듣는 영섭에게
석민이도 아니고
명호도 아닌
영섭이가 지금 말하는 거예요
당신을 진정 사랑해요
아니, 결코 널 용서할 수 없어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지금은 문 닫을 시간입니다
널 죽여 버릴 거야, 오, 오…… 당신을 사랑해요
영섭이의 말은 믿어도 돼요
끝없는 계단/정채원
영문도 모르고 반짝이던 유리날개들
내 귓불에 매달린 나비 귀걸이와
물빛 노트를 쥐여주고
그가 손을 흔들며 돌아섰을 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
나도 난간에 기대 손을 흔들었지
그가 계단을 다 내려가
문을 열며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나를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었을 때
웃으며 한 발 내디뎠지
나는 구르기 시작했지
문은 반쯤 열린 채
닫히지 못하고 있지
그는 구르는 나를 올려다보고 있지
지금도 구르고 있지
여긴 어디쯤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아직도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지
반쯤 닫힌 문 앞에서
문고리를 잡고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지
언제쯤 나는 바닥에 닿을 수 있나
언제쯤 어혈을 풀 수 있나 나는
언제쯤 나를 다 쓸 수 있나
밥을 먹을 때도
동사무소에 갈 때도
잠을 잘 때도
나는 끝없이 계단을 구르고 있지
그가 눈을 떼지 못하고 있지
문을 닫지 못하고 있지
간을 보다/정채원
신맛이 강할 땐 얼차려를 시키고
비린내가 날 땐 식초를 한 스푼 넣고
누가 애탕 맛을 탓하랴
덜 익은 사랑도
곯아버린 사랑도
손맛에 달렸다
금슬이 너무 좋은 옆집 부부에겐 식초를 찔끔 쳐야겠다. 낮이고 밤이고 개 닭
보듯 하는 아랫집 걔들에겐 핫초코가 필요해. 시럽을 듬뿍 뿌린 신에 대한 맹신
은 당뇨를 불러올지도 몰라. 피검사 결과 신은 죽었다고 외치려나. 구경꾼들에
겐 식초와 설탕을 번갈아 쳐도 뒤끝은 씁쓸하지. 까칠한 입맛을 어찌 다스릴까.
거품만 부글거리다 가라앉고 나면 처음과 다름없이 쓸쓸한 모래알들만 입안에
서 쯧쯧거리고
무명가수들이 순회공연하는 무대 위에서
백댄서들은 다친 발목이 아물 만하면 춤을 추고
아물 만하면 또 춤을 춘다, 너무 익어
내일이 망가질 때까지
불멸의 피클은 존재하지 않아
달아나는 시간을 붙잡아 당절임을 하고 초절임을 해도
유리병 속에 밀봉된 허무는 나날이 풍만해지고
그래, 이만하면 이번 생은 충분히 슬펐어
세상 여기저기 찔러봐도 눈물이 더 짜질 건 없어
그럭저럭 살 만해
견딜 만큼 간이 맞아
물질은 비물질을 껴안고 운다/정채원
두개골 속 1.5킬로 고깃덩어리가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도대체 사랑이란 게 있긴 있는가
이런저런 것들을 캐묻는다
자다가도 묻고 울다가도 묻고,
이 세상에 보이는 건 모두 가짜 아닐까
이 얼음 같은 사탕도 착각 아닐까
물질이 자유의지를 갖고 물질을 와드득 깨물고
물질과 비물질이 서로 밀고 당기고 엎치락뒤치락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또한 누구의 희미한 기억 속일까
무중력의 공간을 달려가는 그리움은
백만 미터고 천만 미터고 거침없이 계속 달려간다
잡을 수가 없다, 그대여 슬픔이여
내 육신은 고작 백 미터도 도망치지 못하는데
생각의 꼬리에 매달려 캄캄한 우주를 홀로 유영하는
나는 누구의 꿈속에서
그림자의 그림자를 보고 있는 것일까
에포케!
다시 동굴로 들어가자
뇌가 평생 갇혀 사는 그곳으로,
살아서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그곳에서
낡은 세포는 다 갈아치운 새 물질로
내일은 붉은점모시나비 애벌레가 될지도 모른다
투병/정채원
붉은 파도가 반쯤
눈물이 반의 반
그리고 성분을 알 수 없는 불투명한 물질이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몸 깊은 곳
순간순간 그들이 섞여지는 비율에 따라
아침엔 어깨가 결리고
밤에는 심장이 아프다
오늘도 누군가 입을 벌려 돌을 던진다
돌이 만드는 파문에 불투명한 물질이 쏟아지고
눈물이 몇 방울 떨어지고
붉은 파도가 방파제를 뛰어넘는다
돌팔매가 돌팔매와 만나 또 다른 돌팔매를 부르는 이면도로,
가슴이 욱신거리고
박동이 빨라지다가 실금이 간다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틈으로 다 흘러나와
서로의 상처를 손가락질하는 구부러진 적의들, 성혈로 빚어진
상처투성이 인간들이 흉터 없는 타인을 갈망하는가
세상은 목마른 내 손바닥에 금 간 잔을 올려놓는다
그러나 어쩌다 오늘은 황금비율?
우가 그쳤다 다시 몰아쳐도 맥박이 일정하고
돌이 날아오는 방향을 알 수 없어도
혈압이 오르지 않는다, 약간의 어지럼증은
고독을 텅 빈 흉곽 안에 걸어 잠그기에 효과적이다
-옥상과 반지하 사이 방황하는 커서가 있다/정채원-
왼쪽이 웃을 때
오른쪽은 방금 따귀를 얻어맞은 얼굴로
시퍼러둥둥한 오늘도
어금니가 0.01mm쯤 갈렸겠지
이가 나날이 조금씩 짧아진다는
주식시장의 개미처럼
이를 악물고 영끌, 영끌!
삶은 어째서 늘 투자한 만큼의 이윤을 불러오지 못하는 걸까
손가락은 애지중지 삼시세끼를 챙기는 동안
두개골은 우주를 떠도는 미아가 되어
뜬구름 속 개 울음소리나 잡으러 다니다
코 베어가는 줄도 모르고
뒤통수가 녹아내리는 줄도 모르고
당신만을 사랑해요!
모니터에서 화살표가 깜빡거리며 손짓하지만
비상 착륙할지도 모른다, 모든 짐 다 버리고
세상의 댓글은 늘 마감 직전이다
옥상과 반지하 사이 눈 감고 뛰어내리는 낙숫물
짜릿한 낙차가 있어
오한과 발열을 거듭하며
오늘도 멈추지 않고 굴러간다
전신거울 파는 곳/정채원
코를 비추면 무릎이 지워지는 아침나절과
옆구리를 비추면 머리가 사라지는 저녁
겨우 얼굴과 상반신만 비추는 거울이 걸린
현관을 지나
밖엔 태풍주의보
우산을 써도 우산을 쓰지 않아도
전신이 젖을 때
이 도시에 불시착한 사람들은
보송보송한 날들을 떠올려야 할까
마냥 쏟아지는 비를 즐겨야 할까
살이 부러진 우산을 여전히 움켜진 채
패잔병처럼 비를 피하러 들어선 곳이
전신거울을 파는 곳이라니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숨고 싶어도 숨을 곳이 없다
타인의 눈동자 속에서
살이 부러진 표정이 번들거리고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물을 뚝뚝 흘리며 들어서도
반신은 숨길 수 있는 곳
젖은 손을 비추면 부르튼 발을 숨겨주고
구겨진 셔츠를 벗으면 뜨거운 미역국을 한 대접 내어주는
인공바다/정채원
가라앉지도 떠오르지도 않는 시간
꼴깍 꼴깍, 자꾸 손을 휘젓네
여기 봐요 나 좀 봐요
생각이 바닥에 닿질 않아
아무도 없네, 손을 잡아주는 이
그저 웃으며 나를 자꾸 밀어넣네
찡그린 두 눈썹 사이로
네 물안경은 최신형이구나
수영복 꽃무늬도 아주 화려하구나
페리로 한 시간도 더 걸리는
글램핑 리조트, 파도를 가르며 마침내
파도 없는 바다에 도착한 우리
가라앉지도 떠오르지도 않는 영혼들
내가 잠시 빌린 백조도 유니콘도
웃고 있네, 내장도 두뇌도 바람인 애인들
먼 바다까지 나를 두둥실 태워갈 듯
물결을 가르던 허풍선이들
손을 내미는 척 멀어지면서, 매 순간 저 먼저 떠내려가면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우리가 언제 만난 적 있었나요?
당신의 꼬리지느러미를 잘라 끓여먹었던가요?
혹시 태평양 횟집에서
디지털 파도소리 요란한 카페 라메르에서
짜지도 쓰지도 않고 밍밍한
가짜바다, 모래대신 시멘트가 밟히고
밤에도 낮에도 잠잠 잠들어 있는 바다
물밑에서도 발을 휘젓지 않는
우아한 비닐백조의 수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