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은 정말로 ,가장 소중하며 존엄한 순간인 것이다. 생명의고동 태동하는 숨결의시작 세상이라는 무대로의등장 ,이모든것을 소리(울음)로서 알리는것이다. 의미를 부여하면 할 수록 고귀한 사건의 첫번제 일인 것이다. 음정으로서의 피치는 a(라)음에 아주 가깝다고 한다.우리가 음을 사용함에 있어 a음을 기준으로한다. 연상해서 연구를 해보면 결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부분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생명의 존엄성을 소리로서 외칩니다.이는삶에대한 의지의 본능이요. 아직은 구체화되지 않은 또 진행이없는 그야말로 하얀,꾸밈없는 솔직한 절규인 것이다.그리고 앞으로 많은 가치를 창출해 나갈 ,최초의 표현인 것이다. 인간은 장성해 가면서 자기를 발전 시키고 자기표현을 하고 자아를 형성함에 어ㄸ한 방식으로던 노래가 개입 되어 있다. 그것은 처음 씨족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요즈음의 시각으로 보면 어설푸지만 그나름대로는 그시대에 맟는 노래가 각분야(사랑, 종교, 전쟁, 제전, 놀이, 농사, 사냥,고기잡이, 기타) 에 밀착되 오늘날까지 이른다.인간의생활 그 자체가 노래의 역사인 것이다.
우리민족은 노래와 춤을 좋아한다, 어느집단 어느시대에서도 노래는 조직의 융화나 시대의 흐름을 대변 하곤 했다.각지방에 남아있는 민요들을 볼것 같으면 우리조상들의 생활양식이나 감정 지방의 여러가지 특색들을 알 수 가있다. 서정적이고 흰옷을 잘입은 우리민족은 이처럼 노래가 민감하게 사회생활이나 개인생활에 밀착 되어 왔다.삼국시대의 여러 가사들 통일신라의 향가 고려시대의 시조창 그밖의민요 세종대왕때의 종묘제래악을 비롯한 여러 음악들 이처럼 우리민족의 음악사는 다시한번더 위대하다.다만 아쉬운것은 그 대중성이 어느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 이다.그것을 잘계승 발전 연구 했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듣고 있는 우리가곡도 서양음계에 자리를 내 주지는 안 했으리라 본다.구한말 기독교와 더불어 이땅에 들어온 찬송가는 우리나라의 서구음악의 시초가된다.이찬송가의 멜로디는 실용성있게. 정감있게 ,뇌와 가슴을 적잖이 자극을 했을 것이다.그렇게 쌓이고 쌓여 가곡이 주류인 우리나라의 음악사에 숙명적인 고리가 되며 모체가 되었던 것이다.
19세기말 한반도를 둘러싸고 강대국 들은 이권을 다투며 풍운이 감도는 구한말을 기점으로 시작되며 아울러 한국음악사(서양음악)가 시작 되었다. 일제하의 수난시대 독립운동의 만주시대 ,8.15해방의감격,6,25사변의처참함,국토의분단,그리고 4.19의거와 5.16혁명,조국의근대화,민주화 ,올림픽등 민족역사의 커다란 전환기에서 ,흐르는 강물처럼 ,민족의절규로 혹은 민족의소원 희망으로 ,미족의기쁨과 환희로서 우리민족의 가슴으로 도도히 흘러왔다.비록 찬송가 이기는 하지만 서양음악의도입이 비로소 노래라는 위치로 우리가슴에 자리잡은 것이다,(대중가요도 마찬가지임) 위기때는 힘을,격동기에는 용기를,환란의시대에는지혜를,암흑의시대에는 희망을,이렇듯 민족정서의 비타민역할을 우리가곡은 했다.
한국가곡은 우리민족의 얼과 슬기가 배어있고,조상의 심장이 뛰는 거울이요,공유의 정서와 삶과 애환의미속이며,희망의소산과,아울러 아름다운 유산인 것이다.그런고로 영원히 서로의 마음 어루만지고 ,기뻐게 ,힘차게,빠르게,느리게,부더럽게 ,크게혹은 작게 영워히 불러야 할 것이다.
한국 가곡사 - 조양 구락부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전문 교육기관 이다.(1909년)
창가가 점점 대중에 퍼지고 ,사람들의 관심을 가지면서 이에대한 연구와 학습은 당연하며 ,여러방면으로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으므로 보다더 체계적이며 제도권으로의 교육이 필연적으로 탄생했으니 이름하여 "조양구락부" 라 헀다.새로운 창가를제정하는 동시에 서양악기를 구입하고 악보를 편찬 하는 목적으로 뜻 있는 음악청년들로 시작되었다.조선악과와 서양악과로 나누어 현금,가야금,양금,생황,단소,풍금,바이올린,음악이론을 가르쳤는데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라고 명칭을 바꾸어 실질적인 음악전문 교육기관으로 발전 하였습니다.이전습소를 제1회성악과와 제2회풍금과를 나온 '염광섭'과 제2회 바이올린과출신인 '하대흥' 숭실학교 를나온 김인식 등이 교사로 활동했습니다.
제2회 출신인 이상준과 성악과와 기악과를 나온 난파 와 홍영우도 여기서 교편을 잡았다.
선교사로부터 서양음악을 배우기도한 이상준은 우리의고전음악을 채보해 1913년 "놀양"등 16곡을 채보해<조선속곡집>을 발간했습니다.뒤에<신유행창가><조선신구잡곡><보통악전대요>등을 펴내어 양악의 대중화에 기여했으며1918년에는 중등음악교재로의 "창가집"을 발간 하였다.이상준의 시곡으로된 "야구가" "효순"등 34곡이 실려있으며 개인 작곡집으로는 최초이다.
한편,1910년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음악과가 설립되어 ,1914년 임배세 김형준 정사인등을 배출 했으며,당시 서양음악의선각자로 활약한 음악가 중에 김영환을 빠떠릴수없는데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음악학교를 거쳐 유일한 관립 학교인 우에노음악학교에서 독일 ,일본교수들로부터 정규적인 지도를받고 귀국해서 연희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활발한 연주활동을 펴 초창기의 양악발전에 시금석이 되었다.
김영환은 피아니스트로서뿐아니라 창작에도 몰두해,학교교가라든가 간단한 가곡 등 도 작곡했으며,1919년 기독교 청년회관을 중심으로"경성악우회"를 조직해 홍난파 김형준 등과 그해 1월13일 차립연주회를갖고 조직적인 양악 보급운동에 첫 선을 보이기도했습니다. -
한국 가곡사 18.- 6.25동란중의 가곡 운동
2004/09/24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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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5월에 대구 문화관에서 하대응의 칸타타 "한마디 말씀" 이 자신의 지휘와 남산 합창단의 합창으로 발표되었고 10월에는 현재명의 창작 오페라 "왕자호동"이 서울시 공관에서 지휘 임원식 연출 이해랑 출연진은 이상춘 임만섭 이경숙 염경원 오현명 항병덕 김혜경 김학상 김정식등으로 초연되었으며,창작 오페라의 정착 가능성을 열었습니다.11월에는 김대근이 진해 해군극장에서,12월에는 김창섭이 독일가고을 가지고 부산 남성여중 강당에서 각각 독창회를 가졌습니다.이해에 경희 대학교에음악과가 신설되었고,이듬해에 수도여자 사범대학교에 음악과가 신설되었습니다.
1954년2월에는 최영섭 가곡집 "소라"가 인천 문화사에서 출판 되었으며,3월에는 조상현이 배제강당에서 슈베르트 가곡을 가지고 독창회를 열었습니다.
7월에는 "김형주동요곡집"이 "산비둘기" "보리밭 머리"등 32곡을 발간 했으며,11월에는 배제강당에서 한경진이 독창회를 가졌다,그리고 12월에는 서울 조선호텔에서 한규동 이관욱 부부 독창회와 이중창의 밤이 있었습니다.김순애의 첫 "가곡집" 은 국민음악 연구회에서 발간 되었는데 "모란이 피기까지는" "찣어짖 피리""파초" "물레" "진달래" "해당" "눈"등 10여곡이 수록 되어있다/ 이쯔음의 작풍이랄까 간단히 보면 무리없는 풍부한 멜로디과다할 정도의 화성 그리고 조바꿈의 견실한 효과,즉 수법적인 면에서 서구의 전통적 탈피를 구가하고 있는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55년1월에는 조대훈의 독창회가 조선호텔 에서,2월에는 한국작곡가 협회에서 제1회의 작곡발표회가그리고 3월에는 이점희가 대구국립극장에서 김성태의 "산유화"를비롯해 그밖의 우리가곡 만으로 독창회를 열었습니다.
1955년3월에 이흥렬이 "어머니의 마음" "바위고개" "봄이오면" 코스모스를 노래함"등이 실린 "이흥렬 가곡집"이 국민음악 연구회에서 발행 되었고,5월에는 김성태의 가곡 모음집 "봄노래" "한국 가곡집" 이 유정사에서 출판 되었다.그리고 음악에서의 필수인 레코딩도 이루어 졌는데,김성태의 "사친"등 8곡이 이루어짐,
7월의 김재희 독창회 (배제강당) ,8월에 있은 광복10주년 예술제에서 김대현 작곡의 교성곡 "광복10주년"을 뺄 수 없습니다.
9월에는 한규동이 펴낸 "한국 가곡집"출판 기념음악회가 서울 시공관에서
있었는데 금수현의 "그네" 김대현의 "새우" "자장가" 김동진의 "가고파" "내마음" "뱃노래" "봄이오면" "수선화" 김성태의 "꿈" "동심초" "사친" "산유화" "이별의 노래""즐거운 우리집" "진달래 꽃" "한송이 흰 백합화"김세형의 "밤" "물 긷는 처녀" "뱃노래" "옥저" "찢어진 피리" 김순애의"네잎 클로우버"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운영의 "가려나" "달밤" 임원식의 "아무도 모르라고" "얼레빛" 윤이상의 "고풍의상" "추천" 현재명의 "고향생각" "봄처녀" "그집앞" "산들바람"희망의 나라로" 그밖의 오페라 춘향전의 아리아등 50곡이 수록 되어 있다.이가곡집은 지금까지의 한국 가곡을 총 집대성 하였다는데서 그 한국 가곡사적 의의를 찿을 수 있을 것입니다.
10월에는 조상현이 제2회의 독창회를 "슈만의 가곡의 밤"이란 타이틀로 배제강당에서,또 한경진의 독창회가 같은 장소에서,그리고 11월에는 김혜경 독창회가 서울대 강당에서,12월에는 한규동이 조선호텔에서"프랑스 가곡의 밤"을 열었다.또 한 중요한 것은 이해에 연세대학교에 종교 음악과가 신설 되었습니다.
1956년3월 양천종이 서울 시공관에서 독창회를 ,그리고 최영섭이 오페랏타 "운림지"를 서울 성좌사에서 출판 하였고,10월에 김상두의 제5회 독창회가(오페라 아리아의밤),11월에는 슈만 탄생100주년 기념음악회로 ㅇㅣ점희가 "시인의 사랑"을 가지고 대구 계성 강당에서,같은달 유태열이 독일 프랑스 가곡을 가지고 서울대음대 홀에서 독창회를 가졌습니다.
한편,윤용하는 "달밤" "산골의 노래"등 ,11월에는 조념의 가곡 "꽃초롱"등 9곡이 발표되었습니다.
1957년5월에는 손윤열 도미기념 독창회(영락교회) 마금희 독창회(서울 시공관) 6월에는 안경심 독창회등이 있었습니다.7월에는 김형주의 작곡 발표회에서는 가곡 "첫치마" "자장가" "옜이야기" "뱃노래" "추도" "고향"등이 발표 되었으며,이는 한국적인 정서와 서정을 바탕으로 한국가곡의 새로운 어법을 모색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로 받아 들여 집니다.
그리고 박중우가 서울음대 홀에서 "피아노 소나타" "바이올린 소나타" 한국가곡 몇점으로 발표회를 가졌고,10월에는 조상현이 서울대 강당에서 "브람스 가곡의 밤"을 가졌고,문위성 독창회가 김혜경 제2회독창회가 서울 시공관에서 있었습니다.
11월에는 이계석이 동요곡집 "잠자리"가예술교육 출판사에서 출판 되었고 12월에는손대업이 작곡집 제1집으로 동요곡을 주로 모음한 "새싹 노래선물"이 출판 되었습니다.그리고 11월에는유태열이 제2회독창회가 서울대 음대 홀에서,이광ㅇ옥 한규동 부부 독창회와 2중창의 밤이 부산제1극장에서 있었습니다.
1958년7월조상현의 독창회,김달성의 작곡 발표회가 있었는데 이자리에서"피아노 3중주곡" 연가곡 "사랑이 가기전에"등이 발표 되었습니다.
7월에는 서울 오페라단의 주체로 현제명의 오페라 "춘향전"이 서울 시공관에서 공연 되었는데 지휘에 현종건 연출에김학상 출연진엔 이경숙 장혜경 안형일 이우근 홍진표 김혜경 이영애 오현명 양천종 등이었습니다.그리고 이해에 특별한 연주회를 든다면 미국 성악가가 내한 하여 독창회를 열어 감명을 주었는데 5월의 리차드 턱커 와 9월의 마리아 앤더슨 이었습니다.
10월에는 이화여대 강당에서 김자경이 제1회독창회가,이상춘의독창회는 죠르다노 카치니,풋치니등의 작품을 가지고 서울시공관에서 각각 있었습니다.11월에는 "스페인 가곡의 밤"을 한경진이,또이상춘이 인천에서 제3회 독창회를 열었고 ,경희 대학교 음악과가 대학으로 승격한 것도 이해의 일 입니다. 한편 이무렵 소프라노 이경숙 이명숙 앨토 이정희 등이 미국 여러 곳을 다니며 활약을 해 미국 악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12월에는 "한국가곡 100곡집" 이 국민음악 연구회에서 발간 되므로 지금까지의 발전상을 총정리 하였다는 의미에서 탄력적인 토대를 마련 하였다는데서 상당한 의미를 부여 하고 싶다.등제된 작곡가를 볼 것 같으면 구두회 김규환 김대현 김동진 김진균 김성태 김세형 김순애 김형주 나운영 박찬석 박태준 윤용하 윤이상 이동욱 이상근 이호섭 이흥렬 장일남 정대범 정윤주 정희갑 조두남 채동선 최영섭 하대응 현재명 홍난파등 28명이다.
1959년3월에 박재열은 원각사에서 제1회의 작곡 발표회를 가졌는데 주로 기악곡 이었다.11월에는 마금희가 미국 카네기 홀에서 비발디 률리 헨델 사무엘 바버등의 가곡을 가지고 독창회를 열어 한국인의 성악적 기량을 과시 하였다.김자경은 제2회의 독창회를 이화여대 강당에서,고려오페라단은 서울 시공관에서 김대현의 오페라 "콩쥐 팥쥐"를 공연했는데 그진용은 지휘 김대현 연출 이진순 출연진은 박옥련 이동희 정문숙 장영 백석두 김대근 고형주등 이었다.
이래저래 동란을 거치면서도 우리의 음악인들은 각고의 노력과 고민의산물로 음악 발전의 역사를 쌓아 왔으며,우리가곡 또한 민족의 정서를 멜로디에 담으며 이가슴 저마음으로 저산맥 이강으로 굽이쳐 흐르며 민족의 감정표현 순화에 일조를 하며 발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무렵 주옥같은 가곡들이 솓아 졌는데,정윤주의 "석류" (1955) 이호섭의 "국화 옆에서" (1955) 윤용하의 "도라지꽃"(1956) 김달성의 "편편화심"(1957) 유신의 "바다"(1957) 하대응의"산"(1958) 김형주의 "임의 노래"(1957)"예전엔 미처 몰랐어요"(1958)"맘 켱기는날"(1958)김동진의"진달래꽃" "길" "초혼" "못잊어" 등이 있습니다.
대략 동란중의 음악활동과 작품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해방과 격동기를 맞으면서 작품들도 즉흥적인 작품들이 많으며,작품이 태어난 동기들도 어려운 시절을 대변하는지라 더 값지다. 점차 안정을 찿으면서 연주활동이 활발해졌으며,대부분의 음악인들은 피난중에 있었으며 때문에 수복에 시간이 걸렸고 1950년대 까지는 모든 창조 작업이 정상 일 수 없었습니다.채동선은 1953년 부산 피난시절 모진 고생속에서도 한국 음악계의 앞날을 걱정하며 복막염으로 세상을 떠났으며,조두남은 피난지 마산에 눌러 앉아 지방 악단을 위해 헌신해 왔습니다.지금까지 보듯이 정상적인 음악활동 가곡활동은 어려웠으며 전쟁의 치유 보완 준비를 거쳐 그래도 1960년대의 음악활동과 가곡 운동은 많이 낳아 졌으리라 생각 합니다.
우리 가곡음악사의 한 이면
우리나라의 음악은
우리나라의 제식과 의례에 연주된 궁정정악과
우리민족의 민속문화 고유의 전통 민속향악과
중국의 당나라때까지에서 받아 들여 온 외래 당악과
중국의 송나라에서 받아 들여 온 외래 아악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악을 중심으로 한 궁중의 정악아악과
가사가곡 시조창 판소리 등을 포함하는 민속향악과
중국등 외국에서 받아들여 온 당래외악으로 대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우리음악의 여러 갈래중 정통향악가곡에 서양리트가곡을 받아들여서
탄생한 현대한국가곡에 얽힌 일면을 간단히 살펴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면하여 풀어내야 하는 온갖 문제들은
범주의 크기 넓이 깊이는 크든 작든 유사한 문제이고 사안임을 자주 봅니다.
우리는 역사계에서도 그렇지만 우리 음악계에서도 그런 사례를 봅니다.
제대로 순순히 눈을 감을 수 없었던, 짓눌린 억울함으로 한 많은 세상을 등진
음악인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이들중 피눈물을 삼키며 어느 해지는 뒷골목
에서 소주로 세상을 탓하며 술잔을 기울인 회한과 좌절의 삶을 살다 죽어간
경주의 토호 바이올린 음악가 이의성이 바로 그러한 한 사람입니다.
이왕 말이 난김에, 채동선 정성율 윤이상 제씨에 대해서도 간단히 살펴봅니다.
ㅡ 만날 한복차림의 샌님 채동선(蔡東鮮, 1901~1953)
채동선은 전라남도 보성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24년
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였습니다. 졸업 후 독일 베를린
슈테른쉔음악학원에 입학, 바이올린과 음악이론을 전공한 뒤 1929년에 귀국
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악리(樂理)와 실기를 가르쳤습니다.
1924∼1939년에 4회에 걸친 독주회를 가진 바 있으며, 광복 후에는 작곡에
전념하였습니다. 고려음악협회장·작곡가협회장·국립국악원 이사·예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는 등, 음악관련 활동을 하면서 작곡도 게을리하지 않아 많은
독창곡을 지어냈습니다. 특히, 성악곡 가운데에 <조국>과 <한강>의 교성곡
이있고, <현악4중주곡 제 1번>과 바이올린독주곡도 있으며, 우리 민요도
채보(採譜)한 바 있습니다. 노래집으로 <채동선가곡집(1964)>이 있는데,
추억·동백꽃·그리워 등 10곡으로 엮어졌었는데 1980년에 다시 출판된
<채동선작곡집> 속에 있는 '망향'이 가장 애창되는 가곡입니다.
1979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나의 애창곡도 망향입니다. 나는 4월만 되면 망향이 부르고 싶습니다.
채동선이 처음 작곡할때는 정지용의 시"고향"에다가 곡을 붙혔는데 시인의
월북으로 이 가사가 금지되는 바람에 박화목의 "망향"과 이은상의 "그리워"
로 개사되어 불려졌습니다. 채동선이 작곡한 우리가곡은 10곡이라 들었는데
그중에 6곡이 모두 정지용시인의 가사였기때문에 사장되다싶이 되었는데
이제 우리양악 100년을 읽으면서 고향(망향)외의 7곡도 메모해 둡니다.
1) 고 향 ------- 망 향(박화목 시), 그리워(이은상 시)
2) 향 수 ------- 추 억(이은상 시)
3) 압 천 ------ 동백꽃(이은상 시)
4) 다른 하늘 --- 그 창가에(모윤숙 시)
5) 또 하나 다른 태양 ---- 또 하나 다른 세계(이은상 시)
6) 바 다 ------- 갈매기(이은상 시)
7) 몽랑풍 ------- 동 해(이은상 시)
8) 산엣색시 들녘사내
ㅡ 경주 터줏대감 이의성(李義星, 1909.12.3~1976.2.25)
신라고도의 음악 터줏대감 이의성은 1909년 만석꾼 부자 이인범의 차남으로
경주면 서악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때 본명은 팔성이라 하였습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귀하게 자라 경주보통학교를 나와 서울로 진학하여 1927년
학창시절에 신차봉과 결혼하고 음악공부를 위하여 일본으로 유학하였습니다.
유학중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화동맹의 산하조직 음악가동맹에 가입하여 이쪽
인사들과 교류하며 민족음악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동경유학후 가정사정으로
체코행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하였습니다.
바이얼리니스트로서 강점 일제치하의 질곡과 음악집념에의 무산으로 오랫동
안 좌절하다가 일심당 악기점을 운영하며 음악관련 활동을 펼치면서
그가 일찌기 꿈꾸던 ㅡ 풍부한 문화전통을 간직한 경주를 신문화예술도시로
발전시킬 ㅡ 꿈의 경주예술학원을 설립해 한반도에서 민간 예술종합학교를
선도한 음악인이었으며 이땅에 지방화와 세계화를 앞당긴 선구자로서 민족
문화 건설을 온몸으로 실행하다가 동생 이칠성의 월북으로 연고제와 분단체
제의 이념갈등으로 희생되어 감옥살이를 하고 출소한 53년부터 76년 대구에
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이승의 좌절을 겪었습니다.
ㅡ 중공 혁명음악가 정율성(鄭律成, 1914.8.13~1976.12.7)
정성율은 전라남도 광주(光州)에서 태어났고, 초명은 부은입니다.
광주숭일보통학교를 마치고 1933년 항일운동에 가담한 형들을 따라 중국으
로 건너가 난징[南京]·상하이[上海] 등지를 전전하는 동안 크리누아에게 작곡
과 성악을 배웠습니다. 1937년 옌안[延安]의 루쉰[魯迅]예술학교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1939년 중국공산당에 입당, <옌안송> <팔로군대합창> 등을 작곡
발표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팔로군대합창> 중의 <팔로군행진곡>은 1949년
중국 건국과 함께 <인민해방군가>로 불려 오다가 1988년 중국 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에서 정식 군가로 비준을 받았습니다. 한때 문화대혁명에 협력하지
않은 죄로 시련을 겪었으나 다시 작곡활동을 개시하여 가곡·가극·영화음악분
야 등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부인 정설송(丁雪松) 여사는 주은래수상의
수양딸이며 비서로서 중국의 재외 대사급 외교관을 지냈습니다.
한국가곡의 새출발 그리고 이안삼
이안삼을 읽으려면 한국가곡사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만큼 한동안 방향을 잃었던 우리가곡사에 길을 낸 특별한 역할을 한 그이기 때문이다.
대중음악도 그렇지만 그것이 이태리의 가곡이라 할지라도 노래는 가수에 의해 시장이 만들어지며 발전한다. <비목> <목련화>로 클래식가곡이 호시절을 보낸 그 바탕에는 테너 엄정행의 대중적 인기에 편승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클래식작곡가들은 좋은 가곡만을 생산하면 시장은 자연스럽게 발전한다고 판단했는지 모르나, 엄정행의 흥왕과 관계가 있다. 우리 가곡사에서 보면 한국가곡은 해방이후 학교교과서 안의 음악이었다. 교과서밖으로 나와 극장에서 연주된 상품으로서의 노래가 된 것은 1970년대에 시작된 엄정행의 전국순회 한국가곡연주회를 통해서였고, 엄정행에 매료된 여성 팬들의 지지를 받으며 한국 가곡은 제1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1983년 엄정행은 MBC-FM에 <안녕하십니까 엄정행입니다>의 클래식 프로그람 진행자가 되며, 이때를 전후해 KBS-FM 등은 신작한국가곡을 찾고 소개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장일남, 최영섭의 가곡들이 등장하는 것도 이때다. 1987년 엄정행이 방송에서 물러나고 대학에 전념하고 사회적으로 상업방송 위주로 재편되면서 클래식프로그람이 밀려났고, 우리 가곡은 방송의 주 프로그람에서 밀려나게 된다. 세계 가곡의 발달사를 통해서 보면 유명 가곡은 뛰어난 성악가와 관계가 있었다. 델 모나코, 파바로티를 거치며 이태리 가곡이 세계 최고이 유명 가곡이 되듯이 우리 가곡도 유명 성악가오 함께 흥망을 같이 하고 있었다. 이것을 대중가요 작곡가들은 발전의 법칙으로 따랐으나 우리 작곡가들은 무시하는 경향이었다. 이 때문에 엄정행에 의해 일어난 80년대의 한국가곡 붐을 이어갈 토양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한국가곡의 한계만을 부각시키며 침몰하는 시기로 빠져들었던 것인데, 이런 시기 작곡가 이안삼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안삼의 등장은 우리 문화의 고정관념이나 공식에 대한 저항아의 등장같은 의미로 처음부터 받아드려졌다. 한국가곡은 예술가곡으로 성공할 수 없다고 우리 작곡가들이 자괴하던 시기에 그는 한국가곡 희망론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 동의를 얻을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서울 사람이 아니라 경북 김천을 본거지로 평생활동해온 고등학교 음악교사출신이었다. 이 때문에 지지자들이 전무한 이방에서 깃발을 들고 있었다. 문화는 같이 목소리를 내주는 동료가 있을 때 번서할 수 있는데 그는 새 토양에서 어느날 불숙 싹을 낸 특별한 식물같았다. 이 때문에 그가 한국가곡에 대한 목소리를 낼 때, 한마디로 음악인들은 그를 장외의 작곡가로 쉽게 보았다. 그가 처음 한국작곡가회, 한국창작100인회나, 서울작곡가회, 한국예술가곡연합회 등에 속하는 중견작곡가였으나 기악곡이나 실내악곡을 쓰고, 대학에 적을 두고 활동하는 직장의 무게로 자곡가의 값을 평가하는 우리 토양에서 그는 택도 없는 언더였다. 그가 무슨 일을 하던지 반작할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생각하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안삼은 특별난 장외였다. 처음부터 음악계 보다는 음악시장을 그는 주시햇고, 그들과 함께 음악운동을 펼쳤다. 그는 역으로 한국의 작곡계에 왔다. 이미 21세기의 문화주류가 되어버린 인터넷동호회를 자신의 호의적 지지층으로 재편했다. 그는 가곡아카데미나, 동호인들의 가곡교실, 또는 음악감상회, 발표회 등에 지도자로 참석했다. 그들에게 도움을 주며 편이 되었고, 그들과 한호흡 속에서 공유하는 문화를 만드는 동역이 되었다. 동호인들은 처음은 음악교양인이 되기를 원했고, 조금이지만 연주기술을 배우고자했다. 이안삼은 동호인들이 한국음악, 한국가곡에 대해 아는 소리를 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도왔다. 그는 성악동호인들이 노래를 배우고자 하는 것을 알았고 그들에게 성악인들을 소개해서 같이 노래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 과정을 통해 음악동호회와, 성악가들이 그의 우호세력들이 되었다. 이안삼은 이들을 연합한 음악시장을 담보하고 등장하고 있었다.
다 아는 일이지만 우리나라 작곡가들은 하나의 생산자이다. 생산을 하고 그 다음문제에서 대책없이 쩔절매고 있다. 모든 부분에서 시장 없는 생산자는 다같은 운명이다. 이안삼은 생산자로 우리 음악계에 온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 시장을 갖고 이런 문화운동으로써의 한국가곡 시장을 제시하며 시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안삼은 처음부터 언더가 아니라 오버그라운드의 작곡가였던 것이다. 2004년 광화문에 작곡연구실을 내고 활동을 시작했을 때 대부분의 방송이 주목하고 있었고, 그와 활동을 같이 하는 성악가들이 한 그룹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한국가곡 중흥에 동료작곡가들을 모아들이는 일을 하게 됐다. 그의 힘은 음악시장에 있었다. 전시대 선배들의 가곡이 방송에서 유명해지면서 유명해졌다. 이안삼에 의해 시작된 한국가곡운동은 음악애호가들에게서 먼저 유명해지고 방송관계자들에게 알려지는 그간의 방법과는 정반대되는 성공과정으로 존재했다. 이 때문에 작곡가 이안삼은 2004년이후 특별하게 많은 가곡발표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그 발표회현상은 이안삼 신드롬같은 것이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 가곡사에서 이안삼이 어찌했기에 이안삼 신드롬이 불어닥친 것일까? 2000년 초까지만 해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안삼의 한국가곡 발표회는 가곡의 운명을 바꿔놓을 정도로 혁명적인 것이었다. 클래식 방송에서 그동안 <비목>과 <그리운 금강산> <내맘의 강물> <고향의 노래> 등이 장수하고 있었다. 우선 그런 방송판도에 변화가 온 것이다. 이안삼의 <사랑이여 어디든가서> <그대 어디쯤 오고 있을까> <내 마음 그 깊은 곳에> 등 새 가곡들이 밀고 일어섰다. 이안삼이 누구야? 라는 생각은 이때부터 작곡가들의 화두였다.
그동안 우리 가곡은 작곡가의 계획이 있고, 시를 찾아서 입히는 식이었다. 어떤 경우는 곡이 먼저 씌어지고 시가 나중에 채택되기도 했다. 그리고 작곡가는 작곡가고 시는 시인의 것 그것이었다. 가곡은 시에서 출발한다. 시인의 정서, 인토네이션을 작곡가가 노래로 불러내는 작업이다. 그래서 모든 가곡은 시가 어머니다. 역사적으로 성공한 우리 가곡을 살펴보면 작시자아 작곡가가 정서적인 교유를 하던 막역지기의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를 무시한 가곡은 기계적인 노래가 되고 1회용으로 대부분 끝나는 운명을 맛봤다. 이안삼의 가곡들은 그동안의 우리 가곡과 다른 출생을 하고 있다. 그의 가곡들을 살펴보면 알게 되지만 그는 서울에 올라오면서 시를 쓰는 사람들과 교유했다. 기존하는 시에 곡을 붙인 것이 아니라 그가 참여한 가곡동호회 등의 자리를
통해 시를 쓸수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는 “예술로서의 시가 있고, 노래하는 시가 있다”고 말한다. 예전 시골 아낙들이 흥얼흥얼 혼자 신세를 담아 흥얼거리던 노래가락같은 노래말이 노래시라는 지론이었다. 이 때문에 이안삼은 음악애호가들과의 교류 중에 스스로 가곡에 맞는 노래시인들을 만들어냈다. 대부분의 그의 가곡들은 시인들의 시였다기 보다 이안삼의 가곡을 통해 시인이 된 사연을 가지고 있다. 이안삼의 가곡은 모두 이런 식구성이다.
이안삼의 특성은 그가 시장 위의 작곡가라는 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시장이 그의 작품들을 모두 상품으로 받아드리고 우리 가곡무대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통한다는 말이다. 우선 그의 가곡들은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멜로디로 저작된다. 시장은 대중성에 의해 지배된다. 우리 가곡이 불려지지 않는 것, 특히 유명하다는 대학에 재직중인 교수들의 가곡이 발표를 위한 곡으로 끝나고 마는 것은 무조화성을 동원한 새로운 가곡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험적이고 시도하는 가곡은 전공자들을 위한 것일 수는 있으나 시장에서는 철저하게 배척된다. 시장에서는 실험적인 낯선 불편함이 아니라 부르기 편한 색깔이 특별한 노래다. 이 때문에 당대에 통하는 가곡이 되기 위해서는 유행하고 있는 대중음악을 관찰하고 그들과 같이 갈 수 있는 변화의 감각을 가져야 한다. 이안삼의 가곡은 대중성에 근거를 두었다. 뿌리ㄹ르 대중성에 두고 클래식화한 여러 가지 변용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다. 또 호 불호에 대한 의견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를 말하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의 가곡이 쉽게 우리에게 들려오듯 결코 어려운 것은 아니다. 나는 그를 뛰어난 어렌지(arrange)능력자라고 보고 있다. 클래식 가곡과 뮤지컬, 대중음악의 중간지대에서 아름다운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그대 어디쯤 오고 있을까> <내 마음 그 깊은 곳에> 등이나 그가 팝과 클래식가곡의 중간음악을 선포하고 내놓은 클래팝의 곡들<마음하나> <금빛날개>, <그 사람> 등을 비교해보면 그의 가곡들이 같은 높이 같은 생까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수 있다.
쉽게 말해 그의 가곡은 시장에서 출발했다. 그가 시장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시장사람들과 같이 만들었다. 이안삼을 살펴보면 그는 서울에서 가곡작업을 시작할 때 그의 가곡을 보급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구비한 상태에서 등장하고 있다. 그의 주변에는 작시라는 것을 고민하는 노래시인들이 결성되어 있었다. 박병순, 정완영, 정치근, 문효치, 김종해, 안문석, 일중, 김경희, 김명희, 전경애, 홍금자, 한여선, 김필연, 이재성, 황여정,이향숙, 노중석, 김연수, 박문재, 윤은경, 하옥이, 이시섭, 이후재, 서공식, 황명휸, 장정문, 엄원용, 이영기, 신영옥, 이한숙, 라홍연, 김기배, 이광수, 권택희, 신일웅, 장장식, 김종선, 이인자, 이상목, 김민정, 김원도, 송재학, 강현국, 현기홍, 민병도, 나영호, 김영준이 그들이다. 그리고 박세원, 김인혜, 김영미, 최현수, 김학남, 김향란, 강무림, 김요한, 이영기, 신용란, 차수정, 허미경, 이재욱, 조혜령, 강혜정, 송기창, 박영국, 이아경, 유승공, 김현주, 이현, 김승철, 이화영, 유미자, 김영옥, 최자영, 김명현, 길민호, 이미영, 전기홍, 이진희, 조정순, 백준현 등 성악가들과의 연대, 그리고 아트힐, 노래의 날개위에, 가곡사랑 등 인터넷가곡동호인 모임과의 포괄적 연대는 거대한 그의 시장이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그의 가곡들은 그동안의 우리 가곡들과는 성격이 다르게 세상에 등장했다. 그동안 성공한 우리 가곡은 먼저 방송이나, 개인발표회를 통해 상당기간 불려지면서 음악애호가들에게 알려졌다. 반면 이안삼의 가곡들은 음악애호가들의 음악회에서 상악가들에 의해 초연으로 소개됐다. 말하자면 생산자에게서 소비자에게 직접 연결이 되는 방법이다. 그런만큼 청중을 통해 즉각 어떤 반응으로 나타났다. 이안삼의 가곡은 방송에 의해 유명해져서 청중이 찾은 것이 아니라 청중들에 의해 유명해져서 방송에서 곡을 찾는 역순으로 유명 가곡이 됐다. 클래식 가곡이지만 대중가요와 같은 방법으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가곡 작곡가로써 이안삼은 2000년까지는 전혀 주목되지 않았다. 초창기 성가곡 <선하신 목자>로 알려진 그는 서울에 본거지를 정할 때까지 합창곡 <메밀꽃 필무렵>으로 거론되고 있을 정도였다. 그는 2000년 3회 발표회를 영산아트홀에서 가진 이후 2004년 12월 시인과 작곡가와 연주자들을 연합하여 <포럼 우리시 우리 음악>이라는 단체를 창립했다. 시인들이 노랫말을 쓰고 작곡가들이 그 시에 곡을 붙이고 연주자들이 연주를 하는 단체가 포럼인데,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여 이루어지는 이 시스템은 가곡을 사랑하고 애호하는 일반 청중들이 가곡작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시장의 감각과 요구를 알게 된 작곡가들에게는 작품의 방향성을 알게 된 것과 창작의 필요성으로 작용해 더 좋고 많은 작품을 쓰려는 노력으로 작용했다.
우리 가곡사에 창작벨트가 하나 만들어진 효과가 이 포럼의 등장일 것이다. 이 포럼의 결과로 서울과 지방까지 시인과 작곡가가 협동하여 창작곡을 만드는 운동이 번져나가 현재는 이 포럼효과는 우리 작곡계의 경향이 되었다. 이 포럼을 활용하여 이안삼은 기계처럼 다양하고 많은 가곡들을 쏟아낸다. 그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가곡을 작곡한 작곡가로 알려져 있는데, 대략 1천여곡에 이를 것으로 알려진다. 여곡에 이른다.
이안삼의 가곡을 읽다보면 그의 가곡의 성격성에 주목하게 된다. 그는 시인에게서 작품이 가진 선율이나 색깔 보다 그 시가 말하려는 성격을 더 중하게 보는 특성이 있다. 그의 가곡은 친절한 서두와 메시지적 종장 등 모든 곡이 계산된 구성법칙으로 완성된다.
그는 청중에게 친절하나 따뜻한 서정이나, 평온한 수채화적 가락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와 얘기를 해보면 그가 얼마나 직선적이며 자기의 메시지에 얼마나 단순하게 직통으로 연결하고 드는지 알게 되는데 그의 노래에서도 직통으로 주제에 멜로디를 끌고들어가 설득하고 강조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가곡의 대표작으로 통하는 문효치 시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를 보면 이안삼의 특성과 시인의 메시지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폭발하듯 강렬한 성격성을 띠고 웅변하듯 사로잡아버리는 힘을 느끼게 된다. 솔직히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를 들으면 이안삼의 가곡세계, 자곡가의 성격, 인생관까지 모두 집작이 되어지고 느껴진다. 그만큼 이 가곡은 성공했고, 또 그만큼 자곡가 이안삼을 이 가곡 속에 가두는 역할도 했다.
나는 2007년인가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를 들으면서 이안삼이 이후 어떤 방법으로 이 가곡의 성공에서 벗어날까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이안삼은 그 이후 참 많은 작품을 쓰고 있다. 아마 최고의 다산능력을 가진 작곡가일 것이다. 끊임없이 자기 혁신과 자기 변화를 위해 실험적 노력을 하고 있는데 가곡 모두 시장의 감각에 연을 두고 만들어진다. 이 때문에 천의 색깔, 천의 목소리를 하고 있어도 감각적이고 성격적이며 쉽게 혀에 와서 감기는 편한 가락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현재 두 가지 실험을 하고 있는 작곡가로 알려진다. 하나는 애초에 영어로 시를 쓰고 그 영어에 곡을 붙였을 때 우리 가곡의 세계화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살피는 작업이고, 또 하나는 클라팝이라는 클래식에 팝의 감성적 멜로디를 접목하며,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살릴 수 있는 새 장르의 가곡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그간에 해 오던 기존의 작업과 함께 새로 시작한 두 실험은 앞으로 어떤 결과를 우리 가곡사에 더할지 현재로써는 예측할 수 없다. 이번 작곡 발표회를 통해 이런 고심의 작업을 이안삼은 어디까지 보여줄지 우리는 기대를 하고 있다.
서양음악이 학교에서 정식 교과로 채택된 것은 1904년이다. 물론 그 전부터 미션계통의 학교에서 조금씩 가르쳤다. 당시 학교 졸업식에 창가를 했으며, 신문의 학생 입학 광고에 창가라는 과목이 포함되어있다. 창가라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노래 한다는 뜻이지만 당시는 음악을 한다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일제하에서도 음악시간은 창가 시간으로 통용되었으며, 해방 전까지 그대로 사용되었다.
시대는 변했으며 세상은 많이 바뀌어져, 새로운 물질문명의 개화 바람을 타고 서양음악에 뜻을 두 사람들이 많이 나와 곳곳에서 열의를 보이면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서양음악은 발전에 속도가 좀 붙었다고 할 수 있다. 이시기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김인식을 들 수 있다.
당시 평양에 장로교 예배당이 세워지고 그 안에 보통학교(초등학교)를 설립하여 찬송가를 가르쳤으며, 뒤에 중학교가 설립되어 정식으로 교과목에 창가시간이 채택되었으며, 김인식도 이 중학교에서 배출된 사람이다. 그는 음악에 남다fms 재능을 보여 재학 당시, 선생을 대신해 학생을 가르쳤다고 한다. 선교사들로부터 외국 가곡과 찬송가 및 음악이론을 배워 우리의 민요형식을 빌어 당시의 창가조의 가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1904년 19세 때 자신의 시에 ‘학도가’를 작곡해 대중에 유행시켰으며, 양악의 선각자 역할을 했다.
1 학도야 학도야 저기 청산 바라보게
고목은 석어지고 영목은 소생하네.
2 동반구 대한의 우리청년 학도
놀기를 좋와말고 학교를 나가보자.
창가가 학교 교육의 한 과목으로 채택되어 가르치게 되자, 한층 더 발전을 보였는데 그것이 창가집의 발간이다. 오늘날 교육부에 해당하는 한국학부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음악교재인 “보통교육 창가집 제1집”이 정부인쇄국 인쇄로 발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창가집이 발행된지 33개월 후, 1910 치욕의 한일합방으로 일본의 창가를 그대로 받아 드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