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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12] I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I 요한 3,1-8
1바리사이 가운데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다. 2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3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4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 5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7‘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8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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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 및 복음 묵상테마] : 하느님 안에서 철이 든다는 것 <독서 : 사도 4,23-31 / 복음 : 요한 3,1-8>
오늘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하시며,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재작년 어느 날 급한 연락을 받고 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저희 수도회 선배 신부님의 어머님이 위독하셔서 병자성사를 주러 간 것입니다. 83세의 어머니는 장이 마비된 상태라서 오래 버티지는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병자성사 예식을 하면서 하느님 안에서 철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봄이면 꽃이 피고 가을 지나 겨울이 오면 나뭇잎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듯이,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이 하느님한테서 나와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여정에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알아듣는 것이며, 그렇게 허락된 삶을 충실히 다 살고 기꺼이 하느님 품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허락된 삶을 살다가 어느 때든 죽음을 맞이하고 하느님께 되돌아가야 합니다.
어머니께서는 몸이 불편한 가운데도 성호를 긋고 힘겹게 입술을 움직이며 기도문을 외우셨고, 또 메마른 입술 사이로 어렵게 성체도 영하시면서 마지막 순간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이마에 손을 얹은 다음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드렸습니다. 며칠 뒤 어머니께서는 선종하셨고, 하느님 안에서 평안한 안식을 누리고 계십니다............♧
[말씀자료 : 전진 신부(예수고난회)] |
[다해] 부활 제2주간 월요일 I 묵상기도방 |
시작기도 : ▷
예수님,
당신의 생애와 수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
하느님께로 가는 지름길을 보여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혼자 걸을 수 있다고 큰소리치지 않고
늘 성경 속에서 말씀하시는
당신께 귀 기울이며
겸허한 마음으로 배우는
아이의 자세를 잃지 않게 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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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 선교사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주님, 고국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그들에게 힘과 지혜를 주시어 주님께 대한 사랑 안에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을 전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소서.
오늘의 복음 : [다해] 부활 제2주간 월요일 요한 3,1-8
1바리사이 가운데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다. 2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3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4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 5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7‘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8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영적독서 : 조물주가 달아준 등불
조물주가 달아준 등불은 이미 빛을 내고 있다. 그런데 그동안 빛이 통하지 않는 물질로
이 등불을 가려왔고, 그러다보니 마침내 자신도 알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빛을 보지 못하도록 숨기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아버지께서 이 세상을 비추도록 친히 주신 빛을 숨겨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 빛은 결코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만드신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빛이 발산되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때로는 빛을 우리가 지닌 특별한 재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재능이 무엇인지
우리 자신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더라도 가까운 친구들은 잘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쓰고 어떤 사람은 다른 이들을 가르치거나 꽃꽂이를 한다. 어떤 사람은 어린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 있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준다. 이러한 재능은 모두 이 세상에 필요한 것들이다. 그래서 그런 재능이 부여된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드러내 보이고 함께 즐거워하라............[메릴린 거스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여덟 가지 열쇠'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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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부활 제2주간 월요일(2010-04-12) I 복음묵상방 |
유다인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풀어 준다. 그 대신 예수님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공동체와 함께,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더욱 용감하게 말씀을 전할 것을 다짐한다(제1독서). 니코데모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으로 상당한 엘리트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믿지는 못했다. 그러기에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조차 못 알아듣는다. 진정한 믿음은 성령께서 이끌어 주셔야 가능해진다(복음). |
<요한과 함께하는 묵상> : † 요한복음 - '생명의 책'
어제 부활 제2주일로서 우리는 주님부활의 팔일 대축제를 일단 마감했다. 무릇 부활축제의 기쁨은 성령강림대축일까지 50일간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지난 8일 동안 4복음서가 전하는 주님부활과 발현에 관한 성서말씀들을 묵상하면서 부활사건 자체가 초기교회의 제자들에게 차원 높은 신앙의 도전으로 부각되었음을 보았다. 그러나 여러 차례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제자들의 부활신앙은 고무되었다.
주님부활에 관한 성서의 기록들이 공생활에 비하여 짧고, 일관성이 부족하고, 내용상 서로간의 모순을 보이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요한 20,30) 목적을 가진 기록들이라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다. 이 생명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책이 또한 성서이다.
교회는 오늘 부활 제2주간 월요일부터 예수님의 부활사건에 관한 복음선포를 접어두고 성령강림대축일 직전인 부활 제7주간 목요일까지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얻게되길 희망하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작업을 시도한다.
생명의 의미를 밝히는 작업은 무엇보다도 이 시기동안 봉독되는 사도행전의 독서말씀과 요한복음서의 복음말씀으로 시도된다. 특히 '생명의 책'이라 불리는 요한복음에서 선택된(3장, 6장, 10장, 12-16장) 말씀들이 생명의 의미를 충분히 밝혀 줄 것이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시작으로 오늘 복음(요한 3,1-8)이 그 장(場)을 열고 있다.
문맥상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오늘 복음의 이전 부분을 잠시 보자. 거기에는 과월절을 맞아 상경하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머무시는 동안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고 이 기적들을 본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믿음도 아니고,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믿음도 아니다. 따라서 이 믿음은 영원한 생명과는 무관한 믿음이다. 그저 예수께 대한 호감(好感)이라 표현함이 적당할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사가는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2,24) 라는 표현으로 이 점을 암시하고 있다. 이 암시는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예수님의 언명(言明)이 있어야 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께 대한 호감(好感) 이상의 마음을 가진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와 묻는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2절) 이 대목은 어느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루가 10,25) 라는 질문과 비슷한 유형이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질문을 던질 만큼 준비되어 있지는 않다. 그것이 그가 밤에 예수를 찾아온 이유이다.
이는 유다인들의 지도자에 속하는 니고데모가 다른 유다인들의 눈을 피하고자 하는 속셈일 수도 있고, 니고데모 스스로가 지금까지 몸담아 왔던 유다교 신앙에 대하여 혼돈과 의심을 가지고 있다는 간접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가 던진 질문 이상의 차원으로 응수하신다.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절)
새로 태어나야 함의 의미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니고데모의 반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은 강행(强行)하신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5-6절) 이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영(靈)에 의한 삶을 영위하려 하거나, 하느님의 나라를 직관(直觀)하려 하거나, 하느님의 나라에 입적(入籍)하려 하는 자는 물과 성령의 세례(洗禮)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물과 성령의 세례'는 우선적으로 내적 변화를 통한 새사람이 됨을 의미한다. 니고데모에게 주어진 과제는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육체를 지배하는 율법에 의한 묵은 삶을 벗어버리고 영을 지배하는 사랑에 의한 새로운 삶에로 초대받은 것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수없이 많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일을 자신의 육과 피, 즉 자신의 힘과 열정만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다르다. 이들은 모든 일은 하느님과 함께 한다고 생각한다. 물과 영으로 재생(再生)의 삶을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적인 생명에 참여하고 또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생명이 인간 고유의 생명을 속박하는 것은 아니다. 이 생명은 오히려 인간에게 자유를 준다. 이 자유는 방종을 종용(慫慂)하는 자신의 '마음대로'가 아니라 율법과 격식과 겉치레를 초월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마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양심대로' 행하는 행동이다. 인간의 양심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원초적으로 심어주신 신성한 품위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말씀자료 : 박상대 신부 / 편집 : 까따꿈바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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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새로 태어남과 하느님 나라의 비밀
우리는 부활 팔일 축제 기간에 부활에 관련한 4복음서 말씀들을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교회는 부활 제2주간 월요일부터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에 관한 복음선포를 접어두고 성령강림대축일 직전인 부활 제7주간 목요일까지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얻게 되길 희망하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관련 성구 묵상을 할 것입니다.
그 첫번째 내용이 오늘복음인 요한 3,1-8(영적으로 새로 태어남)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함께 묵상하기로 하겠습니다.
주님은 공생활 기간 첫 과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 내셨습니다. 이로 인해 제자들은 주님을 더욱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종교 지도자들은 표징을 요구하며 주님께 도전했습니다. 주님은 과월절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표징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나약함을 아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만난 사람 중에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니코데모였습니다.
I. 밤에 주님을 찾아온 사람 : 니코데모
1. 니코데모는 누구인가?
"바리사이 가운데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다."(요한 3,1)
주님께서 과월절에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 만난 사람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그 중에서 대표로 한 사람만을 선택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선택한 한 사람은 전형적인 유다인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사이였고, 율법선생이었으며, 또한 유다인의 고급관리였습니다.
당시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하였으며 다른 사람들과 분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소수의 형제 집단을 이루어 살았는데, 당시에 이 집단은 약 6000명 정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로 인해 백성들에 크게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학적으로 보수주의자였고, 모세 오경의 정확한 의미를 밝히고 그대로 살려고 힘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준수를 위한 행위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결국 형식과 위선주의로 치우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장 엄격한 삶을 살면서도 하느님의 은혜와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니코데모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니코데모는 훌륭한 학자였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대부분 율법에 대해 조예가 깊은 전문가들이었습니다. 니코데모란 이름은 "백성들을 정복한 자"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으로 헬라식 이름이었습니다. 어떤 성서학자는 니코데모가 헬라식 이름을 가진 것을 보고, 그가 헬라 교육을 받았으며 헬라 문화를 접촉한 상류층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매우 부유했으며, 또한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율법 선생이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는 일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정치 지도자였습니다. "유다인의 관리"(아르콘)이란 말은 그가 최고의회(산헤드린)의 의원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유다인의 최고의회(산헤드린)은 유대교에 있어서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은 당시의 입법과 행정과 사법권을 가진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이단을 조사했으며, 사형을 제외한 판결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다와 로마 사이의 모든 공식적인 일들을 처리했습니다. 산헤드린은 오늘날로 말하면 국회와 법원, 그리고 대통령이 관장하는 행정부의 일까지 모두 관장한 명실상부한 국가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가 이러한 산헤드린의 의원이었다는 것은 그가 종교와 교육 뿐 아니라, 정치적인 위치에 있어서도 매우 탁월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니코데모는 종교적으로나, 교육적으로, 정치적으로 당시 유다인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2. 니코데모의 고백 :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님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요한 3,2)
니코데모는 밤을 이용해서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주님을 밤에 찾은 이유에 대해서 학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일부 학자들은 그가 밤에 주님을 찾은 것은 그가 사람들의 눈을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율법 전문가요 정치인이었던 니코데모가 정식 교육도 받지 않은 주님을 공식적으로 방문하는 일이 부담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둘째로 다른 사람들은 그가 주님과 충분한 대화 시간을 갖기 위해서 밤을 이용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낮에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바쁘게 지냈기 때문에,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비교적 한가로운 밤에 주님을 찾아왔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셋째로 현대 학자들 중에는 밤을 상징적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본문에서 밤은 당시 어두워진 종교 상태를 의미한다고 발합니다. 그들은 니코데모가 밤에 주님을 찾은 사건을 어두워진 종교 지도자가 빛이신 주님께 나아온 것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니코데모는 주님을 "스승님(랍비)"라고 부르면서 주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님"임을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니코데모가 "내가 안다"고 말하지 않고 "저희가(우리가) 안다"고 말한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학자들은 이러한 말을 보고 그가 주님을 찾은 것이 개인으로 온 것이 아니라, 어떤 짐단을 대표자로 왔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그는 율법 교사들과 정치인들 중에서 주님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주님을 방문했을지도 모릅니다. 니코데모는 주님을 "하느님이 보내신 율법 교사"로 인정했습니다. 당시에 니코데모는 공식 교육을 받은 율법 전문가에 속했습니다. 그러한 그가 아무 교육도 받지 않은 떠돌이 선생에 불과한 주님을 랍비로 인정한 것은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니코데모가 주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스승님으로 인정한 것은 주님께서 행하신 "표징" 때문이었습니다. 니코데모는 주님이 행하시는 표징들을 보면서 이러한 표징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면 행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비록 정부에서 인정한 교사는 아니었지만, 니코데모는 주님이 행하시는 표징을 보고 주님을 하느님이 보내신 선생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표징을 통해서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정직하게 마음을 열고 그 표징들을 보는 경우에 주님께서 메시아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니코데모는 정직한 마음으로 이러한 표징들을 지켜보았기에, 주님께서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것을 감수하고 주님을 찾아와서 진리를 배우려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니코데모에게 '새로 태어남과 하,님 나라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II. 새로 태어남과 하느님 나라
니코데모는 당시 유대인의 전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가장 엄격하게 지킨 바리사이였으며, 율법선생이었으며, 정치인이었으며 또한 부자였습니다. 그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이 행하시는 표징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표징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밤에 주님을 방문해서 주님과 대화하기를 원했습니다. 주님은 이때에 그가 깜짝 놀랄 만한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새로 태어남과 하느님 나라에 관한 진리였습니다.
1.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니코데모는 주님을 "하느님이 보내신 스승님"으로 인정했습니다. 주님은 그가 성령을 통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새성경에 "위로부터"라고 번역된 말(아노덴)은 "처음부터", 또는 "위로부터"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매우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 말을 "다시"라고 번역하는 경우, 우리는 "다시 태어남"은 모태에서 한 번 태어난 사람이 성령을 통해서 두 번째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이 말을 "위로부터"라고 번역하는 경우, "새로 태어남"은 땅에서 태어난 육신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기원한 초자연적인 생명을 받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로 이 말을 "처음부터"라고 번역하는 경우, "새로 태어남"은 철저하게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이 "처음부터(근본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남'의 의미를 이 중에 하나만 선택하기보다, 이 모든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 태어남'은 성령으로 두 번째(다시) 태어나는 일이며,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생명을 받는 것인 동시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이러한 '새로 태어남'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영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영적인 생명을 가진 사람만이 볼 수 있습니다.
2. 육신의 생명과 영적 생명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4-5)
그러나 니코데모는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주님은 새로 태어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을 뿐"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말은 비교적 우리가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양한 주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5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견해는 본문에서 말하는 "물"을 "육신의 출생"으로 보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본문에서 말하는 "물"을 어머니의 태에 있는 "양수"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물로 태어나는 것"은 아기가 모태에서 양수를 터뜨리고 나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물이 이러한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기 때문에 이 견해는 많은 지지를 받고 있지는 못합니다.
둘째 견해는 본문에서 말하는 "물"을 "물세례"로 보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본문에서 말하는 물을 교회에서 베푸는 세례 성사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서도 성사를 통해서 사람들이 새로 태어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물세례를 통해 사람이 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을 믿고 새로 태어난 사람들에게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표시로 베푸는 예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견해도 성경의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합니다.
셋째 견해는 본문에서 말하는 "물"을 상징적으로 보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본문에서 말하는 "물"을 "죄를 정결케 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물"을 "사죄"로 보고, "성령"을 "능력"의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도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정결케 되고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은 중생의 결과이지, 새로 태어남의 방편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넷째 견해는 본문에 나오는 "물"을 성령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물과 성령"이라는 구절을 "물", 곧 "성령"이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물"과 "성령'이라는 말을 반복 사용했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견해는 본문에 나오는 "물"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보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본문에 언급된 "물"을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새로 태어나게 할 때에 사용하는 "말씀"의 역사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말씀이 새로 태어남의 매개체가 된다는 사상은 성경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하느님께서 자녀들을 새로운 생명으로 낳으실 때에 "말씀"을 사용하신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요한 15,3 ; 야고 1,18 ; 1베드 1,23).
그러면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위에서 열거한 다섯가지의 주장들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면서 새로 태어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조심스럽게 결론을 말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느님은 먼저 사람의 마음속에 구원받을 수 있도록 "믿음의 씨"를 심어 주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이 믿음이 우리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에페 2,8).
둘째로 하느님은 하느님의 종을 통하거나 아니면 직접 말씀의 씨앗을 보내서 그 말씀과 이미 마음에 주어진 믿음의 난자가 결합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나서 하느님은 세 번째로 성령을 통해 믿음의 난자와 하느님의 말씀이 합쳐지고, 그 안에서 새로운 영적인 생명이 잉태하게 만드십니다. 이 생명은 육적인 생명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영적인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죄악에 물든 육적인 생명과는 다른 신적인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이 생명을 가진 자를 당신의 자녀라고 불러 주십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람들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부릅니다(2코린 5,17). 주님은 이러한 영적 생명을 가진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니코데모처럼 육적인 생명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려는 사람들입니까?
III. 육적 출생과 영적 출생
1. 육적 출생과 영적 출생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요한 3,6-7)
니고데모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는 말을 육신적인 차원에서만 이해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말하는 새로 태어남은 육신의 출생이 아니라, 영적인 출생을 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육신을 통해 육적인 생명이 탄생하듯이, 영을 통해 영적인 생명이 탄생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성령을 통해 다시 태어난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를 보고 들어갈 수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새로나야 한다"고 하신 말은 성령을 통한 재출생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니코데모에게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그러면 왜 하느님 나라는 육적인 눈으로는 볼 수 없고, 성령을 통해 태어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까? 흔히 "육신"(flesh)이라는 말은 "우리의 살이나 피부"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용되는 "육신"은 이와는 약간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육신이란 말이 인간의 살이나 피부 뿐 아니라 "인간 전체(몸, 혼, 영)"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창세 2,24)을 보면 하느님은 결혼 제도를 만드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4) 이 때에 "둘이 한 몸이 된다"는 말은 성적인 관계를 통해서 하나가 되라는 의미도 되지만, 원래는 남자와 여자가 전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육신"이라는 말은 우리의 살이나 피부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인격 전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육신"의 의미는 인간의 타락 후에 그 의미가 다르게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느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들은 에덴에서 쫓겨났으며, 모든 환경은 사람이 살기에 어려운 환경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육신"은 의보다는 죄를 더 따르는 성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타락 후에는 "육신"이라는 말이 "부패한 인간 본성을 좆아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타락 이후에 사람들은 육신은 영의 요구보다는 부패된 죄성을 따라 충동적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하느님은 그들을 떠나셨고, 인간의 역사는 극도로 부패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예레 17,9).
주님께서도 인간의 마음속에는 "온갖 더럽고 악한 것들이 가득 차 있으며, 이러한 것들이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한다"고 하셨습니다(마르 7,21-23).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하느님의 뜻을 따르거나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로마 8,9). 이런 점에서 주님은 부패한 육적 생명으로는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그 나라에 들어갈 수 도 없다"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3.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하느님은 부패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두 가지 중요한 일을 하셨습니다. 첫째로 하느님은 주님을 속죄 제물로 삼아 모든 사람들의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둘째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그들이 부패한 죄성을 이기고 하느님의 뜻을 행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성령은 부패한 인간의 본성에 와서 그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시며, 복음을 믿게 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을 믿은 그들이 죄를 극복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성령의 활동을 가리켜서 "위로부터 태어남"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신자들의 안에 들어와서 그들을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만듭니다. 이렇게 태어난 영적인 생명은 하느님과 그 나라를 볼 수 있게 되며,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새로 태어난 생명은 죄를 이길 수 있으며, 하느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위루부터 태어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4. 바람과 성령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 3,8)
그러나 니코데모는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바람의 예를 들어 성령의 활동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영"이라는 말은 "루아흐"인데, 이 말은 "영"이라는 뜻과 "숨", "호흡", "바람"이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성령의 활동이 바람, 또는 호흡의 활동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에 하느님의 영은 물과 우주를 "바람"처럼 운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드신 후에도 그 코에 "호흡", 즉 "바람"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또한 하느님은 에제키엘 예언자가 보는 앞에서 "생기"를 불어오게 해서 마른 뼈들을 살아있는 큰 무리로 만드셨습니다.
주님께서도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제자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는 "바람"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바람은 임의로 불어댑니다. 바람은 동에서 서로 불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그 방향을 바꿀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기상 관측을 통해서 바람의 방향을 예측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바람의 방향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바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바람이 어떤 존재인지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바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람이 우리를 스치며 지나갈 때에 시원한 느낌을 받고, 또한 그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바람이 지나가면서 이루어 놓은 일들(물건을 날게 하거나 더운 땀을 식혀 서늘하게 하는 일 등)도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성령을 통해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 모두 이와 같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바람과 같은 성령의 활동을 통해서 세상을 만드셨으며, 그들에게 생명을 주셨고 지금도 그 만물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또한 성령은 부패한 인간 속에 찾아와 그들을 회개시키고 주님을 믿게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사람 안에 새로운 생명과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어 새로운 사람이 되게 만듭니다.
우리는 성령을 볼 수 없으며,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령께서 이루어 놓으신 결과들을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성령의 열매를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자료 : 두올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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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이야기 중에 아라비안 나이트라는 동화가 있는데 이 내용을 보면, 어떤 왕이 있는데 세상살이가 별 재미가 없어서 사람들에게 자기를 1000일 밤 동안 즐겁게 해주는 사람에게 큰상을 주겠다고 하여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진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 중에도 "40인의 도적과 알리바바"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굴을 열기 위한 주문은 바로 "열려라 참깨!"였습니다. 그 외에는 아무리 "열려라 들깨" "열려라 콩" "열려라 옥수수"... 그 외에는 아무리 해도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열려라 참깨" 보다 더 신기한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여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복음은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1. 니코데모는 누구입니까?
그는 바리사이파 사람입니다. 그 당시 유다사회에 바리사이들은 6,000명 정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팔레스티나에는 150-200만 명이 살았고, 그 중에 60만 명이 유대인이었는데 바리세인이 6천명이라면 100분의 1입니다. 따라서 바리사이들은 특권층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윤리적으로 높은 수준에 살았고 경건한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또 랍비였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높은 종교적 열정을 채우기 위해 많은 것을 알아야 했고 따라서 그들은 율법을 많이 공부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구약을 이용해서 6,000가지의 율법을 만들었으며, 그 중에 중요한 것이 613개이며, 적극적으로 "해라"는 율법이 248가지, "하지 말라"는 율법이 365가지였으며, 이것을 예수님은 "조상들의 전통"이라 하였고, 이것이 A. D.200년경에 기록된 것이 "미쉬나"이고, 이 미쉬나를 해석한 것이 "탈무드"입니다.
그 재미있는 것 중에는 안식일에 여인은 거울을 보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안식일에 거울을 보다가 흰 머리카락을 뽑으면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안식일에 1Km이상 여행을 하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1Km가고 쉬었다가 가면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 되지 않습니다. 또 안식일에 물건을 공중에 던질 때 같은 손으로 받으면 안식일 법에 저촉되나 다른 손으로 받으면 저촉되지 않는다....이런 웃기는 모습은 그들이 얼마나 하느님의 법을 잊어버리고 자기네들 외식주의 빠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그는 또 성경에 "유다 최고의회 의원"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그는 "산헤드린 70인중의 한사람"으로서 오늘날 우리로 말하면 국회의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의 뜻은 "백성의 정복자"로 이미 백성 위에 군림하는 자였으며, 인간적으로 볼 때 성공한 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교육을 잘 받은 자요, 부지런하고 경건한 정치가, 성공한 인생 탄탄 대로를 달리는 그가 왜 예수님을 찾아 왔겠습니까?
그것은 외견상으로 볼 때 완전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삶속에 채워지지 않는 영적 갈증이 있었고, 영적 상실감에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아담의 타락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담의 타락은 우리로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욕심의 죽음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었고, 하느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다 하나의 근원을 찾는 몸부림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만 아니라 과거의 선조들 또 앞으로 이 땅을 살아갈 인류들 모두는 찾는 데에 열중하게 될 것입니다.
2. 밤에 찾아온 니코데모
니코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오는데 밤에 찾아 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밤에 찾아 왔을까요? 너무나 잘 아는 내용입니다. 낮에는 보는 눈이 많아서 몰래 밤에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위를 노출시키지 않고 주님을 만나려고 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즉, 체면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와 체면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을 알면 나의 고객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예수를 믿는 신자라고 하면 나의 지역구안의 유권자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갈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 스승님(랍비)
니코데모는 예수님에 대하여 먼저 스승(랍비)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니코데모의 겸손을 의미하는 것이며, 예수님에 대한 존경의 표시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님"이라고는 하고 있지 않습니다.
2) 저희가
니코데모는 "내가"라고 하지 않고 '저희가' 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가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생각합니다"라는 말속에서 자신을 익명의 한사람으로 대중 속에 숨기는 간접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아니라 "내가" 되어야 합니다.
3)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오신 선생이라는 말은 구약 시대의 에언자들이 하느님의 보내심을 받았던 것처럼 당신은 하느님의 보냄심을 받은 예언자 중의 하나로 안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만 하면 당시의 존경을 받던 유다 고급관리의 믿음으로는 대단한 믿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까지 주님을 메시아로 보고 있지 못하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聖人으로 인정하지만 그들에게 참생명이 없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하느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4)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는 성귀에서 보듯이, 니고데모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징이 대단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하는" 예언자 즉 인간의 한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을 볼 수 있습니다.
5) 알고 있습니다.
니코데모는 "알고 있습니다"는 말로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이 얼마나 허망한 이야기입니까? 니코데모는 나는 당신이 이런 사람 인줄 압니다. 그래도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고 있지만 그것은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안다는 것이 부정확하고 제한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이야기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영적으로 깨닫는 것은 다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압니까? 많은 것을 안다고 하지만 아직도 우리의 지식은 무궁무진한 우주 속에 한 단면을 알기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인공위성을 만들어 사용하고, 인공 심장을 만들어 쓰는 시대가 되었지만 인공혈액은 만들지 못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혈액 합성의 가능성은 전혀 없으며 혈액의 보존 기술의 진보만을 예견해 볼 따름이라고 한다(동아1996.10.14 횡설수설)
이렇게 니코데모는 오히려 자신의 아는 것 때문에 주님을 바로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심지어 주님이 '위로부터 내어나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서는,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라고 할 정도로 영적인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따라서 신앙은 우리가 아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아심에서 출발하며 하느님의 주권과 의지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선언
니코데모의 이야기에 예수님은 선언적으로 하나의 眞理를 선포하십니다. 이것은 니코데모에게 하나의 수수께끼였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는 새시대의 새로운 선언이었습니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아멘 아멘 레고"라는 이 말은 마태 31회, 마르코 13회, 루카 6회, 요한 25회 사용된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한 표현 방법입니다. 이 말은 "확실히"라는 뜻으로 신적인 기원을 가진 하느님의 진리를 선언하실 때에 말씀을 시작하는데 사용하신 표현입니다.
2)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말은 '다시 태어난다' '새로 태어난다'는 뜻으로서, 게네세는 "나다"라는 말이고 "아노센"은 "다시", "완전히 새롭게" 또는 "위로"라는 뜻으로 영어에서는 이를 "Born again" 즉 "다시 나다"라는 말로 번역하였고 새번역성경은 "위로부터 태어나다"라는 말로 번역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일차적으로 위로부터 하느님으로부터 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신적 기원을 가지는 것이 되다는 것이고, 성령에 의해서 근본적인 심령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저스틴 이후 많은 신학자들은 세례와 연관시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죄를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입니다. (티토 3,5) :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또 이 말은 "옛것의 반복이 아니 전혀 새로운 완전히 새사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2코린 5,17) :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또 "어린아이와 같이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1베드 2,2) :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또 "생명에 이르는 씨앗"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1베드 1,23) :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또 "생생한 희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1베드 1,3)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3)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느님 나라를 본다는 말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의미로 "본다"는 "경험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 "하느님의 통치"가 있는 곳입니다. 그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임재가 있는 곳인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3. 니코데모의 변화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과 니코데모의 대화를 생각하겠지만 먼저 성급한 결론을 내리면 니코데모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뒤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변한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1) 예수님이 과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유다인과 논쟁이 났을 때에 니코데모는 일어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변호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요한 7,50-51)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2)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다음에 제자들도 모두 도망하였으나 니코데모는 몰약과 침향을 가져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를 준비하였습니다. (요한 19,38) "그 뒤에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가 가서 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밤중에 몰래 왔던 모습과는 얼마나 대조되는 신앙의 사람이 되었습니까?
우리는 앞장에 이어 '물과 성령'에 관련하여 두 번째 관점의 묵상을 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복음은 사실 매우 난해한 내용으로 많은 신학자들 사이에서 조차도 문제가 되고 있는 내용인데 이 시간에는 그러한 견해를 하나하나 짚어 보면서 복음의 의미를 자세히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앞장에서 예수님께서 (요한 3,3)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더 깊은 묵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했을 때에 니코데모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요한 3,4)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여기서 니코데모는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의미는 "다시 난다" 즉 두번 난다는 양적 의미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이와같은 사오정 소리를 할 수 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미는 좀 더 깊은 의미로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난다" "똑같은 몸으로서 영적으로 거듭 태어난다"는 의미로서 사용되었습니다.
(요한 3,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1.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예수님은 "위로부터 태어난다"라는 용어 대신에 이번에는 "물과 성령으로"라는 용어로 풀어서 해석해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물과 성령으로라는 용어가 더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성령으로"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종종 "영" "성령"등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별로 우리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않지만 "물"이라는 용어는 본문에서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아야 하는 말로서, 그 해석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봄으로서 참된 예수님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정결의 의미라는 해석
우리가 아는 대로 물의 일차적인 의미는 씻는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즉 죄 씻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회개가 없이는 씻을 수 없습니다. (마태 4,17)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따라서 예수님도 처음의 말씀이 바로 이 회개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즉 물로 거듭난다는 것은 회개하여 죄 씻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2) 물세례라는 해석
A. 세례자 요한에 대한 언급으로써
예수님 당시를 생각해 볼 때에 "물"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생각하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유대 전체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고, 누구나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것에 대한 언급을 함으로써 유다인의 생각을 정화시켜 주려 하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로서 정화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의 사제나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거부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생각에는 "우리는 성별된 자들인데 무슨 회개를 또 하느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루카 7,30)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
또 반대로 종종 당시의 유다인들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 자체가 천국에 들어가는 표로 여기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이를 분명히 알리시기 위해 물로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마르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즉 당시의 세례자 요한의 세례에 대하여 주님의 태도는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의미 없는 것도 아니요, 반대로 세례자 요한의 세례만으로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니라는 명쾌한 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B. 오늘날의 물세례와 관계해서
"물"이라는 말속에서 물세례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우리 가톨릭에서는 7성사라고 하여 일생 7번의 성사가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인 세례성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 말씀에서와 같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한다고 하면, 물세례를 받지 못한 자는 지옥에 간다는 말이 되고, 구약 시대의 신자들은 모두 지옥에 간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따라서 물세례 자체가 구원에 이르는 방편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믿음을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표시하는 표(表徵)이며, 동시에 교회의 정당한 일원이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세례는 구원의 방법이 아님으로, 즉 물세례를 받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극단적인 생각에서, 교회에 등록도 안하고, 세례도 않받고, 직분도 받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유로 말씀드리면, 한 여자가 남자와 함께 사는데 있어서 결혼식 또는 혼인 신고도 하지 않고 사는 것과 똑같습니다. 함께 살면 부부요, 국가에서도 사실혼 관계를 인정해 주니까 그냥 살아도 실질적으로는 별문제가 없는 것같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한 것이 아닙니까? 바로 물세례도 그것이 비록 구원을 받는 방편은 아니지만 분명히 정당한 예표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3) 물이 성령을 의미한다는 해석
이것은 웨스트라는 성서학자의 해석인데 물이 종종 성령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요한 7,37-39) "축제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는 일어서시어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께서 아직 와 계시지 않았던 것이다."
(이사 44,3) "내가 목마른 땅에 물을, 메마른 곳에 시냇물을 부어 주리라. 너의 후손들에게 나의 영을, 너의 새싹들에게 나의 복을 부어 주리라." 그리고 (이사 55,1)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술과 젖을 사라"는 말씀도 인용하는데 분명 성령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물론 니코데모는 이사 44,3. 55,1을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물과 성령"으로는 "물 즉 성령으로"라는 말로 해석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이렇게 "물과 성령"을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할 것입니다.
4) 말씀이 물이라는 해석
이 말은 물이 상징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으로서, 하느님이 인간을 다시 태어나게하는 방식은 항상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119,50) "당신 말씀이 저를 살리신다는 것 이것이 고통 가운데 제 위로입니다."...즉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물세례가 아니라 (야고 1,18)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고, (1베드 1,23)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그 외에도 '말씀이 물'로 표현된 성경 구절을 찾아보면, (시편 119,9) (요한 15,3) (에페 5,26) 등이 있습니다.
이상의 내용에서 우리는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요약하면 일차적으로 정결케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물세례와도 연결될 수 있으나, 물세례는 그것이 오해의 소지가 될 수 있음으로 주의하여야 하고, 가장 적절한 해석은 성경 말씀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즉 우리가 "타시 태어난다"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바로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3.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바로 사람의 공로가 중생의 동력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그 동력원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에페 2,8-9) :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말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선택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사람의 공로로 나는 것이 아닌 위로부터 나는 것이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택에 의한다는 것입니다.
(로마 9,11-16) 레베카가 한 남자 곧 우리 조상 이사악에게서 잉태하였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이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선택의 뜻을 지속시키시려고, 또 그것이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부르시는 당신께 달려 있음을 드러내시려고,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 하고 레베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우를 미워하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느님 쪽이 불의하시다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
2) 타시 태어남의 신비성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요한 3,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즉 성령의 역사는 바람과 같다는 말씀이며, 여기서는 a.주권적이다. b.신비하게 작용한다. c.저항할 수없다 : 폭풍우와 태풍같이 d.불규칙적이다 : 잔가지를 흔드는 봄바람같이 때로는 태풍같이 e.눈에 보이지 않는다. f.불가사의하다 :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다. g.없어서는 안된다 : 봄바람이 잠자는 나뭇가지를 일깨워 싹을 틔우듯이 h.기운을 북돋아 준다.
이러한 사람만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느님 나라를 경험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 "하느님의 통치"가 있는 곳입니다. 그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현존함이 있는 곳인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4. 다시 태어남의 특성. 표징은 어떠한가?
어떤 사람들은 생활 방식의 변화를 먼저 언급합니다. 세상적인 것들을 끊는 것 즉, 음주와 흡연을 금한다던가, 도박을 끊는다던가, 다른 비신앙적인 것들을 끊는 것을 그 증거로 말합니다. 물론 그런 것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남이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시 태어남이란, 신앙적으로 되는 것, 즉 전보다 주일 참례를 잘하고, 성경을 더욱 가까이 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남은 또한 그 이상입니다. 물론 다시 태어난 자는 더욱 신앙적이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또 마음의 변화를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시 태어남으로 인해 "전에 사랑하던 것을 미워하고, 미워하던 것을 사랑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매우 그럴듯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이렇 언급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다시 태어남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 유다인의 중에서도 바리사이요, 랍비인 니코데모에게, 신앙생활에 완벽에 가까운 사람, 설교자에게 교훈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신 데에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태어남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죄인 안에 어떤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본질로 재창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2베드 1,4)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 3,6)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겉사람의 개혁, 자연인의 교육, 옛 사람의 정화...등의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본질적으로 바뀐 새사람의 창조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낳으심입니다. (야고 1,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또 그것은 성령의 출산으로서,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2코린 5,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성령으로 새로 태어남이란 하느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요. 하느님의 가족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 태어난 자 안에는 두 가지 성품,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있어서 서로 대적하게 된다고도 합니다. (갈라 5,17)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즉, 옛 성품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은혜뿐이며, 새 피조물을 먹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뿐이다.
오늘복음의 묵상을 종합하겠습니다. 1.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정결케 씻는 회개, 말씀, 성령으로 새로워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사람의 공로가 아닌 전적으로 하느님의 성령의 은혜을 알아야 합니다. 3. 다시 태어남은 생활의 변화, 신앙 생활의 변화, 마음의 변화를 다 포함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런 자는 이미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아멘)...............◆
[말씀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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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와 함께하는 묵상> : † 새롭게 다시 태어남(Born again)
우리는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다시 태어나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보다 강조하신 진리가 거듭나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요한 3,7)" 이 짧은 본문 안에 3번씩이나 "당신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영어성경에서도 "유 머스트 비 본 어게인(You must be born again)."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나도 좋고 다시나지 않아도 좋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반드시 다시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경험하기 위해 우리가 다시나야 할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는데, 다시나지 않으면 완전히 멸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그래서 다시 새로나지 못하면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볼 수도 없거니와 결국 멸망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멸망하지 않으려면 다시 태어나야 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나는 주제와 연결해서 아주 흥미 있는 삶의 표어를 썼습니다. "두 번 태어나면 한 번 죽고, 한 번 태어나면 두 번 죽는다."
이런 고백을 서로 만날 때마다 자주 했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제 2의 죽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 2의 죽음이란 묵시록에서 말하는 '두번째 죽음'으로서 묵시록의 독특한 단어입니다. 요한묵시록에만 두번째 죽음이란 단어가 몇 번씩 거듭 등장합니다.
제일 대표적인 구절은 요한묵시록 21,8입니다. "비겁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역겨운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못뿐이다. 이것이 두 번째 죽음이다." 묵시록의 기자는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죽음 다음에 오는 제 2의 죽음이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그 심판의 결과로 하느님의 영원하신 진노와 심판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의 대전 앞에서 죄를 범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하느님의 영원하신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서야 하고 그 죄에 대한 하느님의 영원하신 진노를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한 번만 태어난 사람. 다시 말해서 세상에 태어나서 거듭남 없이 그냥 살다가 간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무슨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야 합니까? 네, 그렇습니다. '위루부터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거듭태어나야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드라마틱하며 가장 중요한 사건. 곧 거듭나게 되면 두번째 죽음은 없습니다.
물론 다시 태어나도 사람은 결국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죽긴 죽어도 그는 하느님의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상급과 하느님의 위로를 받는 영생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24)... 그러므로 한번 태어나면 두 번 죽습니다. 그러나 두 번 태어나면 한 번만 죽습니다. 왜 다시 태어나야 합니까?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는 이 새로 태어난다, 다시 태어난다, 거듭난다는 단어에 대해 보편적으로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거듭나는 것을 내가 노력해서 어제보다 오늘 좀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난다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거듭나는 것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새것,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창조, 뉴 크리에이션(new creation)입니다. 새로운 창조는 개선이나 개혁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새로운 창조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거듭남이 새로운 창조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 이 말씀이 그리스도교 본질을 향한 바오로 사도의 중요한 선언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의식(儀式)의 수준이 아닙니다. 할례를 받느냐 안 받느냐, 세례냐 영세냐의 수준이 아닌 것입니다. 오직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자가 중요합니다. 새롭게 창조된 사람. 곧 위로부터 새로 태어난 사람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좀더 나은 사람(better person)의 수준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된 수준입니다. 새사람(new person), 새것(new being), 곧 새로운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새로 태어날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니코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육적 출생과 영적 출생을 비교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요한 3,5-6)
그런데 이 물과 성령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놓고 성서학자들이나 사목자들이 고민을 많이 합니다. 물은 무엇을 의미하고 성령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떤 분들은 물은 물세례이고 성령은 성령세례를 가리키므로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다 받아야 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한편 물은 아마도 하느님의 말씀의 상징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 어머니의 물, 곧 양수에서 태어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느 날 육체적 출생을 했던 것처럼 내 일생의 어느 날에도 영적 출생이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 육체적 출생이 필요했던 것처럼, 내가 하느님나라의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영적 탄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는 말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이것이 어떻게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하느냐'에 대한 주님의 대답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는 것과 그것을 믿는 자가 성령으로 난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주님이 든 예가 모세가 구약시대에 광야에서 뱀을 들었던 기록입니다. 그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왜 뱀을 들었습니까? 이집트 땅에서 빠져나와 광야를 행진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태도를 보면, 한 단어가 그들의 삶의 태도를 모두 상징해 줍니다. 그 단어는 '원망'입니다. 이집트 땅에 속박되어 노예생활을 하던 그들이 하느님의 기적적인 능력으로 자유를 얻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을 향해 가면서도 그들은 계속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불평과 원망의 대상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느냐 하는 목표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작은 고통을 견디면 약속의 땅이 기다린다고 약속하셨는데도 말입니다.
그들이 맨 처음 광야생활을 하자마자 먹을 게 없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이 만나를 주셨습니다. 저들은 만나를 보고는 "저게 뭐냐?"고 서로 묻다가 만장일치로 그 이름을 '저게 뭐냐'로 결정했습니다 그게 '만나'의 뜻입니다. 처음에는 만나를 맛보고 그것이 꿀송이와 같다고 감탄했습니다. 조금 있다가는 그것이 기름 맛 같다고 시큰둥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나자 마침내 '이 보잘것 없는 양식'이라고 불평을 합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민수 21,5)...이와같이 사람들은 자기가 받는 축복에 익숙해지면 그 축복을 축복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틀림없이 그랬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꿀맛 같다고 한 식물을 나중엔 보잘것없는 하찮은 것이라고 싫어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느님이 가장 진노한 부분이 그 대목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불뱀을 보냈습니다. 그 뱀이 물기 시작하니까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치료의 희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부르짖습니다. "하느님, 용서해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그때 하느님이 모세에게 주신 메시지가 "너는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입니다.(참고로 새번역 성경 민수 21,8의 불뱀은 오타인 것 같습니다. 구리뱀으로 수정해서 읽으십시오)
하느님은 모세에게 불뱀에게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장대 끝에 구리뱀을 매달라고 했습니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응답했을까요? 아마 틀림없이 많은 사람들은 "내가 안 찾아간 병원이 없고 안 써본 양약, 한약이 없는데 장대 위에 구리뱀을 쳐다보면 살아? 그건 미신이다." 그러면서 죽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아주 단순한 마음을 가진 한 사람이 "야, 우리가 아무리 해도 살길이 없었잖아? 하느님의 말씀이야. 전능자 하느님 , 창조주 하느님의 처방이야. 한번 그대로 해보자." 하고 어린아이 같은 단순함을 가지고 쳐다봤습니다. 그랬더니 새로워졌습니다. 통증이 없어졌습니다. 병이 나았고 모든 것이 새로워졌습니다... 바로 이 사건을 말씀하시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사람의 아들도 들어올려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란 곧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마다 '사람의 아들(인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런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장대 끝에 구리뱀을 매다신 것처럼,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을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을 죄인처럼 매단 십자가입니다. 여기에 십자가의 패러독스가 있습니다.
죄인인 인간을 위하여, 하느님의 처벌과 영원한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죄인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입니다. 그런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은 거듭난 사람입니까? 당신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 영적 사람입니까? 그래서 당신은 꿀송이 같은 복음을 맛보셨습니까? 십자가를 경험하셨습니까? 하느님의 아들을 만나셨습니까? 당신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셨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진정코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 거듭태어난 영적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 죽지 않습니다. 알렐루야!................◆
[말씀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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