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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들의소리 【김좌진 金佐鎭 (1889 ~ 1930)】 "북로군정서사령관으로 청산리 독립대첩의 불멸의 영웅"
씨알 추천 0 조회 228 24.06.08 10:14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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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4.06.08 14:54

    첫댓글 김좌진 장군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 가 강제로 해산된 이후, 17세에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가문의 땅을 나눠 주고 자신의 집에 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 사업도 활발히 펼쳐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자유시 참변(소련영토인 ‘자유시’에서 독립군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학살당한 사건)을 계기로 반공산주의 성향을 가지게 된 이 후 반공산주의적 성향의 독립운동을 하였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공산주의자 박상실 에 의해 만주 해림에서 1930년 암살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산리 대첩 이후 장군은 북만주의 ‘밀산’을 거쳐 다행히 소련령 '자유시' 에는 가지 않았기에, 자유시 참변(1921년)에 휘말려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유시 참변'으로 억울하게 죽은 옛 전우(봉오동 전투)들을 보며 ‘반 공산주의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김좌진 장군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족총연합회 주석 등 ‘만주의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약하면서, 1925년 신민부 와 1929년 한족총연합회 등을 창설하고 반일 독립운동을 했는데 무장 독립운동을 위해ㆍ자금을 모집하는 길은 험난했다

  • 작성자 24.06.08 14:59

    그의 마흔 살 죽음은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의 미움을 받았고, 이에 ‘박상실’에 의해 만주 해림 에서 1930년 41살의 나이로 암살을 당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대한민국 내 통설이다.
    사실 한국에서의 호평에 비해, 연변의 조선족들은 ‘김좌진 장군’에 대한 평이 그다지 좋은 것 같지는 않다. 일본 측 문서에는 ‘빈주 사건에 대한 보복’이 김좌진 장군 암살의 원인이라고 분석했다.(이는 공산당 측의 의견도 동일하다) ‘빈주사건’이란 만주의 빈주현에 거주한 우리 동포들을, 일본군도 아닌 김좌진 장군계 군인들이 학살한 사건 이다.
    당시 만주 한국인 동포들은 대부분 ‘중국인의 소작인’ 신세 인지라 지독하게 빈곤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좌진 장군의 부대 는 동포들의 '궁핍한 사정'을 고려 하지 않고 '독립 운동 자금 모금을 강제 했었다고 한다. 결국 만주의 빈주현 에 거주하던 동포들은 김좌진 부대의 독립자금 강제징수’에 분노하여 신민부 를 탈퇴을 선언하는 지경에 까지 이른다. 이후 김좌진 장군은 사람들에게 마왕(魔王)ㆍ폭군 같은 별명까지 얻었고, 결국 신민부는 해체되게 된다. 그렇게 김좌진 장군은 일본과의 ‘무력투쟁’을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다.

  • 작성자 24.06.08 15:04

    그러나 부작용도 일으켜서 많은 사람들의 앙심을 품게 만들었던 듯 보인다. 일반동포들은 표면적으로는 독립운동 단체라고 존경하는 척하면서도 내면으로는 공포와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김좌진 장군은 심지어 이 일로 사형을 구형 받는 지경에 처한다. 독립운동자금을 모집에 협조를 하지 않으면 ‘협박과 테러’를 하며 위협을 했고 끝내 거부하면 죽여버린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 한인들은 비록 만주에 거주했지만 처음에는 '해마다 독립운동 기관'인 정의부나 신민부에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독립성금을 냈었다. 하지만 점차 그 정도와 부담이 커졌던 듯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순박한 동포들도 우리 무장대오의 지나친 위력과 침탈을 당하게 되자 점차 반발심이 생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독립군이 자기 집이나 동네에 도착하면 비밀리에 왜놈에게 고발하는 악풍까지 생겼다.(백범 김구의 증언) 일본군의 자료에 의하면 ‘김좌진의 키는 약 185cm, 얼굴은 타원형이고 눈빛이 형형하고 사람이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인상이며 총명함이 출중하고 좌담에 능하며 특히 해학과 유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라는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 작성자 24.06.08 15:07

    일본군이 가지고 있던 김좌진 장군에 대한 정보는, 사실 김좌진의 최측근 이라 여겼졌던 ‘이정’ 이라는 일본 측 밀정의 밀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정’은 북로군정서 당시 ‘김좌진의 중요한 군대 참모’로서 ‘진중일지;라는 자신의 일기에 당시 '독립군들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일들을 자세히 서술했다. 이는 당시의 ‘만주 독립군들의 실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고, 이 자료를 제공한 인물이 ‘이정’ 인데 그가 밀정 이라니.... 김좌진의 측근 ‘이정’이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사실이 황당하고, 이 것만 봐도 김좌진 장군은 어떠한 형태로든 결국 암살 될 수 밖에는 없었던 운명이 아닌가 싶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 김좌진 장군이 비록 흠이 없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처절한 궁지에 그가 몰려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ㆍ김좌진 장군을 일부에서 '마적단 두목'으로 매도하는건 진짜 가슴 아픈 일이다. 독립투쟁사의 위대한 영웅 김좌진 장군은 '매일매일 죽음의 문턱' 에서 삶과 죽음을 벗 삼아 살았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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