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0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사순절 제4주일)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민21:4~9; 엡2:4~10; 요3:14~21
우리는 지금 사순절의 한 복판을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메타노이아>, 즉 회개하는 시간인데, <메타노이아>는 “돌아섬”입니다. 말하자면, 빗나간 화살이 과녁을 바로 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연속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궤도수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우주선의 틀어진 궤도가 본래의 궤도로 수정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주선의 궤도는 처음에 조금 틀어졌더라도 이것을 방치했을 때는 본래의 궤도에서 너무 멀어져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별히 사순시기를 통해 우리의 삶의 궤도를 살펴보고 빗나간 궤도를 다시 리셋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궤도 수정은 알아차렸을 때 빨리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돌아서는 데는 2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정체를 똑바로 보고, 더는 이런 삶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결의와 이제 이런 지긋지긋한 삶을 끝장내야겠다는 결단을 통해서 하는 돌아섬입니다. 이것은 주로 자신의 현재 상태를 직시하고, 즉 자신의 깨어진, 위태로운 상태를 똑바로 보고, 더 이상 이런 삶을 살 수 없다는 결단에서 돌아서게 됩니다. 대표적인 모델이 “돌아온 아들”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보았을 때, 제정신이 들게 되지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자신의 몫을 탕진하고, 돼지 치는 사람이 되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배를 채우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 “아버지께로 돌아가야겠구나!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깨닫지요.
또 하나는 차원은 패러다임 쉬프트, 즉 보는 관점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점이 바뀌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을 쓴 스티븐 코비는 책에서 이런 예를 들고 있습니다. 어느 일요일 아침에 뉴욕 지하철를 탔는데, 승객들은 모두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지 신문을 보던지,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역에서 한 중년 남자와 그의 얘들이 탑승을 한 순간 전체 분위가 바뀌었다는 것이지요. 아이들은 왔다갔다 하고 물건을 팽개치고 큰 소리로 떠들고, 심지어 어떤 사람이 읽던 신문을 움켜잡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옆에 앉아 있던 아이들의 보호자인 중년 남자는 꼼짝 않고 죽은 듯이 가만히 있더랍니다. 모든 승객이 짜증을 내고 마침내 코비가 “이 아이들을 어떻게 좀 해 보시지요. 많은 손님에게 폐를 끼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야 이 남자는 “당신 말이 맞아요. 저도 어떻게 해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앞이 캄캄해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지금 막 병원에서 오는 길인데, 한 시간 전에 저 아이들 엄마가 죽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때 코비는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고, 다르게 느끼게 되었고, 다르게 행동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보는 관점, 패러다임이 바뀐 예인데, 이것은 사도 바울의 경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는 아주 열심한 바리새인으로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다 다메섹(다마스커스)에서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당신이 누구십니까?” 물었을 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바울은 그때부터 “보는 관점”이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그래서 핍박하던 데서 핍박당하는 사람으로, 열심한 바리새인에서 예수의 제자로, 율법의 의에서 믿음의 의로, 사람의 지혜에서 십자가의 어리석음으로 바뀌어집니다.
돌아온 아들의 모델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똑바로 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동시에 자신의 그런 모습을 스스로 정죄하면서 더욱 절망에 빠지지 않고 아버지의 자비를 힘입겠다는 진정한 겸손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이번 사순절에 이런 은총을 구하십시오. 자신을 똑바로 직면하는 용기, 그럼에도 절망에 빠지지 않고 아버지의 자비를 구하는 겸손, 이 두 가지는 돌아서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자 은총입니다. 이런 은총은 마침내 우리의 관점 자체가 변하는 패러다임 쉬프트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보는 관점 자체가 변하는 회개는, 엄밀히 말해, 우리 힘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도록 준비할 수는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마음,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려는 마음, 즉 바로 관상기도입니다. 관상기도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철저히 신뢰를 두고, 나를 잠시 스쳐가는 것들에 절대적인 권한(힘)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자 연습입니다. 비록 나의 생각과 느낌조차도 나의 정체성을 함부로 규정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결의에 찬 태도입니다. 우리가 묵상하는 책에서 아빌라 데레사가 계속 말하듯이 이것이 바로 겸손한 태도입니다. 이런 지속적인 겸손한 태도의 연습은 결국 우리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게 될 것입니다. 그 변화가 금방 오지는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식을 재구성하시어, 우리 안에서 패러다임 쉬프트, 관점의 변화를 허락해 주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비록 극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이런 차원들의 돌아섬 경험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이런 일들을 행하고 계시며,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 안에서 우리에게 돌아서도록 부추키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들의 활동을 알아차리든 알아차리지 못하든,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돌아섬의 연습을 계속하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 구약 민수기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들은 에돔 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 산에서부터 홍해 길을 따라 나아갔다. 길을 걷는 동안에 백성들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당시 지리적인 배경을 좀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오랫동안 진을 치고 있던 곳은 새내반도와 가나안 땅 사이 가데스바네아라는 곳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올라갈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기서 바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 길은 이미 가나안 사람들이 요새화 해놓은 난공불락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 바로 옆에 있는 에돔이라는 나라를 통과해서 요새화된 가나안 남쪽을 살짝 피해 가나안에 접근하려고 했습니다. 그 에돔 지역을 통과해 가게 되면, 가나안으로 바로 올라가는 ‘왕의 대로’라는 큰 길을 이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에돔에 사절단을 보내 에돔지역을 통과하는 왕의 대로를 아주 조용히 이용하려고 하는데, 허락해 주십사, 간청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이스라엘의 간청을 에돔 왕은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가데스 근처에서 오랜 시간 체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었던 아론이 죽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돔 땅을 밟지 않고 에둘러 가는, 아주 긴 우회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호르 산을 출발해서 홍해 길을 따라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둘러 가는 길이다 보니, 바로 가나안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오히려 왔던 길을 되돌아서 홍해 쪽으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그들은 에돔 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 산에서부터 홍해 길을 따라 나아갔다. 길을 걷는 동안에 백성들은 마음이 조급해졌다.”라고 말하는 겁니다.(개역성경에는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그 길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마음이 상하니라”고 했습니다.) “조급하다” “상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짤>이라고 하는데, 본디 그 뜻은 “(너무) 짧아지다, 좁아지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짜증이 나다, 안달이 나다”라는 뜻도 됩니다. 마음이 너무 짧아지고 시야가 너무 좁아지다 보니, 짜증이 나고 안달이 나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과정과 40년 광야생활 동안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기억하면서,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줄을 믿고 기다리며, 긴 시야로 자신들의 여정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장 눈앞에서 벌어진 일, 다시 말해, 지름길로 갈 수 없고 먼 우회로를 찾아 기껏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 일로 인해서, 마음이 좁아지고, 짜증이 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거의 패턴처럼 나오는 것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원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하면서,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습니까?” 40년 전 고리짝 얘기부터 끌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까? 먹을 것도 없습니다. 마실 것도 없습니다. 이 보잘 것 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이러면서 과거의 은총은 현재의 불평으로 이어집니다.
여러분, 이것이 분명 남의 얘기는 아니지요. 마음이 좁아졌을 때, 조급해지고, 짜증이 나고 안달이 났을 때,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면 수 십 년 전 일들까지 다 올라와서 우리의 원망과 불평에 기름을 끼얹습니다. 그러면서 남들이 자신의 삶을 다 망친 양, 누군가를 원망하고, 마찬가지로 현재의 모든 것을, 심지어 은총까지도 싸잡아서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받은 은혜도 “보잘 것 없는 음식”(바레헴 하켈로켈)이 되어 버립니다.
본문에서 “보잘 것 없는”(켈로켈) 이라는 말은 “무가치한” 혹은 “경멸받을만한”이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 보잘 것 없는 음식이 단지 우리가 먹는 음식만이 아니라 실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음이 좁아지고 원망과 불평은 우리 자신을 이렇게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심지어 경멸받을 만한 것으로 보게 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백성 중에 보내 물게 해서, 많은 백성들이 죽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본문은, 백성이 원망했다고 하나님이 바로 불뱀으로 복수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너무 문자에 매이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이 조급해져 원망과 불평이 일어났고 그 결과는 죽음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도 말씀하지요.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원망과 불평 그 자체가 이미 심판의 결과일지 모릅니다. 어둠을 더 좋아하고 어둠 속을 행하는 것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원망과 불평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얼마나 지옥을 체험하는가요?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할 때 우리는 얼마나 지옥을 체험하는가요? 바로 그것이 이미 불뱀에 물린 상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백성들이 많이 죽어나가자, 사람들은 모세에게 몰려와 이 뱀이 물러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고,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매달라고 합니다.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그것을 장대 위에 달아 놓았는데,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물린 사람은 그 구리로 만든 뱀을 쳐다보면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뱀에 물린 사람이 모세가 만들어 세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고 쳐다보지 않으면 죽는다는 이 이야기도, 주술적 신앙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구리뱀과 관련하여 주술적인 신앙 행태가 오랫동안 남아 있습니다. 열왕기하 18장 4절에 보면, 그로부터 몇 백 년이 지난 후, 남유다에서 히스기야 왕이 일련의 종교개혁을 단행하는데,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모세가 만든 구리뱀을 산산조각을 내버렸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몇 백 년 동안 모세의 구리뱀을 마술적으로, 주술적으로 사용해 왔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주술적인 치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에게 장대에 달린 구리뱀을 보라고 한 것은, 자기몰두에서, 자기집중에서,자기상처에서, 자기연민에서, 자기비난에서, 십자가에 달린 분을 바라보라는 뜻이라고 오늘 요한복음은 설명해 줍니다. 둘째 아들이 자신의 현 상태를 똑바로 보았다는 말은 자기몰두, 자기집중, 자기상처, 자기연민, 자기비난에 빠졌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자기를 똑바로 보고, 그런 자기를 받아줄 아버지를 기억하고, 아버지에게 돌아갔기 때문에 제정신이 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아빌라 데레사가 말하지요. “당신을 이끄시는 분이 호의를 베풀 때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면 당신은 겸손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그분의 특별한 배려를 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호의를 받아들여 기뻐한다면 당신은 겸손합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상징이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해보려고 애쓰는 그 자체가 바로 심판이라 말해줍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은 앉은 자리에서 시선을 돌려 장대에 들린 구리뱀을 보라고, 그러면 산다는 처방을 받습니다. 이 처방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늘 위에 있는 것도, 바다 건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중에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당신들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당신들의 입에 있고 당신들의 마음에 있으니, 당신들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신30:14 참조) 예,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구리뱀을 쳐다보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어떤 어려운 행위가 아니라 그냥 선물을 받는 것이라고 사도바울도 에베소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가 산을 옮기는 엄청난 행위를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가 어떤 깨달음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총은 받을 수 없습니다.
불뱀에서 구리뱀으로 시선을 옮기는 일은 아주 구체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걱정과 염려 가운데 수없이 올라오는 생각에서 거룩한 단어로, 한 마디 말씀으로 시선을 옮기는 일이고, 자기비난과 자기연민이 올라올 때, 천천히 부드럽게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끊임없이, 실망하지 말고, 이것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돌아서고, 돌아서고, 돌아서는 일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물린 상처를 직시하더라도 그것만 보고 있지 마십시오. 기둥에 달린 뱀, 즉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를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아픔만을 쳐다보지 말고, 그분의 아픔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구원은 여러분의 행위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것으로, 여러분의 행위로, 여러분을 덧보이게 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자동적으로 그 구습으로 돌아가더라도(우리는 수없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겸손히, 주님의 자비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작품임을,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만드셨음을 기억하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마음과 생각이 좁아진 채 한 평생을 살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그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억울한 삶인지를 깊이 깨닫게 하시고, 매순간 우리의 눈을 내 상처와 자기연민에서 하나님의 선물인 십자가로 옮길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