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 굴뚝 위로 내리는 눈/서대경-
1.
변두리 도시의 지저분한 거리 위로 눈이 내린다. 좁은 도로 양옆으로 낡고 더러운 간판들이 다닥다닥 붙은 상가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건물 사이 좁은 골목으로는 붉은 깃발을 내건 무당집과 세탁소, 전당포들이 어둡게 웅크려 있다. 허공엔 추위, 그리고 어지러이 얽혀 뻗어가는 전깃줄의 소리.
2.
상가건물 5층 창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한 아이가 창문을 빠져나와 창턱으로 올라선다. 아이는 보습학원 간판에 기대어 서서 하얀 침묵으로 뒤덮인 인적 없는 거리를 내려다본다. 아이의 이마로 전깃줄 그림자가 지난다. 창문 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른다. 아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허공의 눈발을 올려다본다. 전깃줄 사이로 보이는 허공이 기차가 지나다니는 잿빛 벌판처럼 보인다. 아이가 가방을 앞으로 고쳐 맨다. 창문에서 욕설과 함께 한 사내의 손이 튀어나온다. 아이가 안테나를 잡고 몸을 비틀며 사내의 손을 피한다. 아이가 웃는다. 전깃줄이 윙윙거린다. 아이의 몸이 허공 속으로 펄쩍 날아오른다.
3.
상가건물 2층 만화방 카운터 뒤에 앉은 사내가 화면이 흔들리는 소형 TV를 주먹으로 내리친다. 얼굴에 만화책을 덮고 잠들어 있던 내가 깨어 일어나 사내를 노려본다. 만화방 안엔 사내와 나 두 사람 뿐이다. 벌써 3시다. 나는 창문을 바라본다. 눈이 아직도 오는군. 차가 막힐 것이다. 목욕탕에 갔다가 이발소에도 들르려면 시간이 빠듯하다. 나는 그녀와 만날 시간과 장소를 떠올리며 서둘러 외투를 걸친다. 내게서 돈을 건네받은 카운터 뒤의 사내가 등을 돌린 채 소형 TV 위로 몸을 웅크린다.
4.
무당집 좁은 마당에 소녀가 앉아 있다. 상가건물 벽이 마당의 절반을 가려 마당 한쪽이 저녁 무렵처럼 어둑어둑하다. 잠시 구름이 열리면서 마당으로 희미하게 햇살이 비쳐든다. 그녀는 무릎 위로 깍지를 끼고 웅크린 채 눈동자에 어리는 귀신의 속삭임을 듣는다. 그녀는 눈을 감는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찬송가 소리. 박수 소리. 귀신들이 낡은 상가 교회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
5.
한 여인이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을 들고 예배실 문을 열고 서둘러 나온다. 우리 애가 또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선생님. 여인이 창문을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 문다. 여인의 시선이 무당집 마당에 웅크린 채 앉아있는 여자 아이에게 머문다. 가느다란 담배 연기가 풀어지며 창밖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녀는 바라본다. 그녀는 바라보고, 그녀는 욕을 내뱉고, 다시 바라본다. 창턱에 담배를 비벼 끄고 그녀가 돌아선다. 문을 열자 열기와 신음 소리와 박수소리가 그녀의 미소 띤 얼굴 위로 일제히 밀려든다.
6.
목욕탕 굴뚝 아래 사는 사내가 걸어오는 나를 내려다본다. 평소처럼 벌거벗은 채다. 미친놈은 추위도 못 느끼나봐. 나는 생각한다. 그가 손을 흔든다. 나도 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전에 썼던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와 <소박한 삶>이라는 시는 저 사내에게서 착상을 얻어 쓴 것들이다. 다음번엔 <목욕탕 굴뚝 위로 내리는 눈>이라는 제목으로 한 편 써봐야지. 목욕탕 문을 열면서 내가 중얼거린다.
7.
목욕탕 굴뚝 아래 사는 사내는 입을 헤 벌리고 굴뚝 아래 앉아 하늘을 뒤덮고 있는 전깃줄을 바라본다. 사내에게 그것은 서로의 다리를 물고 늘어선 이상야릇한 거미 떼를 연상시켰다. 그것들은 전신주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검게 나아가면서 눈발로 가득한 허공을 비밀스럽게 지배했다. 사내는 허공에 번뜩이는 전깃줄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전깃줄의 여정을 눈으로 쫓아 가다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아파트 단지와 공장지대의 그림자와 바람의 속삭임과 불 켜진 창의 신비가 언제나 그를 매혹시켰다. 사내의 벌거벗은 몸에서 김이 피어오른다. 눈 녹은 검은 물이 굴뚝을 타고 주룩주룩 떨어져 내린다.
8.
「안녕하세요.」전깃줄에 매달린 아이가 사내에게 인사한다.「아저씨는 이런 거 못하죠?」사내는 엉덩이를 벅벅 긁으며 아이를 바라본다.「너 내려와. 내 전깃줄이야.」사내는 목욕탕 옥상 옆으로 뻗어가는 전깃줄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린 채 자신에게 혀를 낼름거리는 아이가 못마땅하다. 사내가 벌떡 일어서서 옥상 가장자리로 다가간다.「이 동네 전깃줄은 내 거에요.」아이가 원숭이처럼 재빠르게 손을 놀려 옥상에서 멀어진다.
「어디 한번 잡아 봐요, 바보 아저씨.」상가 건물 벽 사이 공중에 매달린 채 아이가 깔깔거린다. 하얀 눈송이가 아이의 몸 위로 내려앉는다.「나 바보 아냐.」사내가 고함을 지른다.「그럼 다음에 봐요.」아이가 손을 흔든다. 아이의 몸이 허공에 매달린 채 천천히 멀어져간다.「나 바보 아냐!」사내가 소리친다. 한 차례 돌풍이 일자 전깃줄이 일제히 윙윙거리며 사내의 벌거벗은 몸 위로 눈가루를 날린다. 사내가 씩씩거리며 머리를 턴다.「안녕! 잘있어요, 바보 아저씨!」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멀리 공장 지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가물거리는 잿빛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9.
깊은 밤의 거리 위로 여전히 눈이 내린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아 <목욕탕 굴뚝 위로 내리는 눈>이라는 제목의 시를 쓰고 있다. 담배를 물고 창가에 선다. 불 꺼진 상가건물과 목욕탕 건물이 내다보이고, 무당집 마당의 어둠 속에 소녀와 가방을 앞으로 둘러맨 아이가 나란히 앉아 있는 게 보인다. 나는 오랫동안 그들을 지켜본다. 파르스름한 눈송이가 아이들의 몸 위로 반짝이고 있다.
-눈/류인서-
눈이 온다
와서
먹어치운다
기둥 아래 남자를 먹어치운다
벤치뿐인 벤치를, 거기 붙은 빈자리를 먹어치운다
공터의 이글루 같은 자동차들을 먹어치운다
먹어치운다
엘니뇨와 라니냐의 소란한 탁자를 먹어치운다
던킨도너츠 가게 커피 한잔을 순식간에 먹어치운다
담벼락과 포장마차의 낡은 연애를
돌아와 쓰러져 눕는 반 토막 그림자를 먹어치운다
전화선 너머 국경 너머
둥지 밖 새들의 잔고를 먹어치운다
발 묶인 봄, 세상으로 가는 이정목을 먹어치운다
저의 근원, 북풍의 침대까지 남기지 않고 먹어치운다
다 먹어 텅 빈 눈의 식탁, 눈의 위장
소화불량
폭설이 온다
-눈/차창룡-
바다로 흘러가버리던 당신의 사랑이
오늘 이렇게 소복이 쌓여 있으니
세상 곳곳이 당신의 몸이어서 황홀함 한량없지만
차마 당신의 몸 밟고 갈 수 없음이여
빗자루로 당신의 몸 쓸어 한쪽으로 치우며
사랑은 결국 아픔임을 확인하고야 뼈저리다
바다로 흘러가버린 당신의 전생이
전생이 아니라 생생한 현생임을 알알이 만지면서
당신은 이렇게 사랑을 새하얗게 증명해야 했던가
미처 쓸지 못한 당신의 몸은 사람의 발에 밟혀
반들반들한 미끌미끌한 투명해지는 얼음
당신은 이렇게 사랑을 견고하게 증명해야 했던가
알 수 없다는 나의 표정이 당신의 얼굴에 비칠 때
당신은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있구나
오래 머무르고 싶다는 듯 땅위에 쌓였지만 끝내는
눈물을 데불고 바다로 흘러가는 사랑이여
-삼월에 내리는 눈/김진기-
차우차우* 만나기로 한날
삼월의 미간에 눈이 내린다
경칩 개구리 눈길에 미끄러진다
마음 조이던 어제의 빗발이
밤이 되자 흰옷으로 갈아입는다
남녘, 어린 꽃잎이
혀로 바람의 간을 보며 북상을 서두르다가
쏟아지는 눈꽃에 입술이 파랗게 질린다
겨울이 나프탈렌 향기를 온몸에 두르고
장롱에 몸을 누일 무렵
잔설이 오지랖 펄럭이며 가던 길을 되돌아온다
하늘이 하얗게 내려앉는다
한계령 봉우리는 폭설에 허리까지 내 준다
하릴없는 촌부들이 모여 앉아
미운 놈 싸대기 때리듯
힘껏 화투패를 치는 밤
한계령은 제 한계를 모르고
부산으로 내려가더니 껑충, 제주까지 건너뛴다
메고 간 옥양목 열 필을 다 썼다
오늘 칠장사 차우차우 눈 빠지게 기다리겠다
* 중국이 원산지인 개의 한 품종. 썰매를 끄는 개.
-눈/박정석-
도시의 심장 같은 로터리에 차가 엉켜 있고
트레일러가 지저분한 백합꽃을 돌돌 말면서 지난다
눈이 어깨 위를 마지막으로 밟고 갈 때
가로수는 순종적으로 눈을 턴다
내리는 눈이 인간을 밟는다
나는 환호한다
매저키스트처럼
그러나 누군가는 슬퍼해야한다
하얀 눈과 하얀 눈 사이에서 차는 납작해지고
타기도 전에 얼어버린 하얀 불꽃이 침엽수림에서 솟아오른다
어깨도 없이 눈을 맞는 가로수의 자세
나로부터 멀어지는 이야기
눈은 도시를 중독시킨다
아파트는 밀가루를 뒤집어쓴 거인 같고
버스는 조랑말처럼 몰려다니고
눈이 설탕이라면 아이스크림 동산을 만들 수도 있다
생각하는 사람처럼 눈을 맞는 자세에 대하여
사랑하는 사람처럼 눈을 녹이는 몸짓에 대하여
연습하는 대신
눈사람이 만들어진다
눈을 녹여 커피를 타 마실 일도 없는 도시
캠프에 온 것처럼 낯설다
-불가능한 눈이 내린다/권현형-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눈이 파란 남자의
이국적인 미소에 답하고 그리고 영원히 사라진다
파리 시내에서 혼자 사는 어린 모델이 방금 전까지
빵이 담긴 비닐 봉지를 들고 횡단보도에 서 있었다
갓 구운 그녀의 목소리에서 어떤 악취도 맡을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어
아침으로 만들어 먹기 좋았다는 불면증 레시피
접시 가득 담긴 고통의 밤이 빨강 물감으로 물든다
포크와 나이프와 요구르트와 사과 반쪽과,
그녀가 도트 문양 스카프로 덮어 놓았던
도자기 시루에서 징그럽고 무섭고 괴기스러운
콩나물이 새까맣게 올라온다 머리를 짓누르는
모자를 벗기자 해맑고 무덤덤한 얼굴의
그녀가 난생 처음 괴성을 지른다
역겨워, 지겨워, 잔인해, 예뻐, 버림받았어,
그래서 뭐?
I Go Deep 자신이 쓴 단어들 속으로
자신의 기원 속으로 그녀는 들어 가버렸다
그녀가 사라진 거리에 불가능한 눈이 내린다
나도 사실은 정말 너무 외로웠다 역겨웠다
지금까지 여기까지 살아남은 자가 될 줄이야
그래서 뭐?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윤제림-
강을 건너느라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섰을 때
말없이 앉아 있던 아줌마 하나가
동행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한다
눈 온다
옆자리의 노인이 반쯤 감은 눈으로 앉아 있던 손자를 흔들며
손가락 마디 하나가 없는 손으로
차창 밖을 가리킨다
눈 온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 있던 젊은 남녀가
얼굴을 마주 본다
눈 온다
만화책을 읽고 앉았던 빨간 머리 계집애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든다
눈 온다
한강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이 가끔씩 지상으로 올라서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數千) 수만(數萬)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三月)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네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눈 내리는 마을/김정란-
일년 내내 눈 내리는 마을이 있어요.
거기선 눈물을 흘릴 수 없지요.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가슴의 깊고 끈적거리는 물이
희고 가벼운 날개로 바뀌어 버리거든요.
그 마을의 하늘엔 늘 해 두 개 달 두 개가 떠 있어요.
밤도 낮도 없어요 그리곤 반짝이는 눈이
하루종일 조용히 조용히 내려요.
눈은 쌓이지 않아요. 한 번 있었던 걸로 족하다는 듯
바닥에 닿으면 아슴하게 사라져요.
마을은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아요 그냥 조용해요.
그 마을은 어떤 빛으로 빛나는데요.
저절로 빛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어디서 빌려온 건데
아무도 어디서 빌려왔는지 몰라요.
아마 가슴의 상처 밑에 고여 있던 걸까.
그 상처가 이상한 말의 통로라는 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거든요.
그 통로를 통해서 그 마을 사람들이
천 년 전과 천 년 뒤로 말을 보내고 받는다고들 하거든요.
그 말들이 어쩌면 맥락과 맥락 사이에서 빛을 만들어낸 걸까.
아주 먼 곳에서 시작된 빛을 받아서?
아, 그래요. 아직 공식화된 건 아니구요.
그 빛은 안에서 밖에서 빛나요.
아주 이상한 빛이에요.
그건 먹을 수 있어요.
먹으면 배가 부르냐구요. 아뇨, 그렇진 않아요.
그냥 진실에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들죠.
그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집 안에서 살면서 집 밖에서 산답니다.
모두들 너무나 사랑해서 그래요.
그 마을 사람들 살을 보셨어요?
만지면 살짝 지워져요. 만지는 사람을 받아들이느라고 그래요.
그리곤 다시 생겨나요. 다시 주기 위해서요.
내가 당신 어깨에 머리를 올려놓으면
내 머리에 맞게 당신 어깨가 안쪽으로 물러서요.
그리곤 당신 팔이 내 허리를 안으면
내 허리는 툭 잘려요. 소리까지 들리는 걸요.
싸래기 눈 바삭바삭 소리내며 동구 밖에 찾아오는 것처럼
그 마을에 살러 가시지 않을래요?
흰 눈 종일 조용조용 내리고
상처들이 비밀스럽게 편지를 주고받는 곳.
당신도 나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상한 빛을 생산하는 기이한 발전기가 되는 곳.
-문득 나무 그늘 아래 저녁 눈 내릴 때/박주택-
이 거리, 노래가 되다 만 빛들이
갈 곳을 잠시 잃어 가야 할 곳을 찾지 못한 사람과 섞인다
천천히 길들 나무들의 눈빛에 힘입어 길게 뻗어 있음을
자랑한다, 길을 노래하는 자 불행했다
기적을 기대하는 자 나무 그늘 아래 잎사귀에 덮이고
무엇이 되고 싶었던 자 모자를 무릎 위에 얹은 채
자신의 차례에도 입을 다문다, 저녁 눈 내리고
함부로 어깨를 부딪는 저녁 눈 내리고 이제 더 없이
자신을 불러줄 사람을 찾지 못할 때
어느덧 이것이 생의 하루가 아니라
생의 전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음에
길은 구부러진다, 이제 어디론가 향해 걸어가는 것은
길이 시작된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다시 돌아가는 그 길로 걸어갈수록
자신이 가야 할 곳과 가까워졌음도 깨닫는다
저녁의 함박눈 내리고 헤매임 가운데 만난
빛 하나 호흡을 불어 만든 눈빛을
물 위에 풀어 놓는다
-눈 녹은 마른 숲에/박지현-
서릿발 무너지면
황토빛이 드러난다
ㅎ, ㅎ, ㅎ 언 손 녹이는 바람이 불고 있다
아직은 풀리지 않는
단단한 심줄의 땅
차고 투명한 강물 속에
엎드린 피라미 떼
지느러미 파닥파닥 물풀 하나 흔들어놓는,
저 겨울 껍질을 깨는
뾰족한 눈 하나 있다
눈 녹은 마른 숲에
텃새 다시 날아오르고
뿌리를 감싼 물이 하늘 높이 차올랐다
아득히 잊었던 얼굴
연초록 물이 든다
꽁꽁 막힌 길을
송곳으로 뚫는 소리
노랗게 물드는 그 울타리 긴 둘레로
가파른 숨결 고를 때
천지가 다 환하다
-겨울 눈/이경우-
눈이 군홧발로 온다
나는 장군의 군화를 밟아
추락한 놈이다
장군의 군화를 만져 출세한 놈들도
장군의 군화를 닦을 때마다
침을 뱉는다
침을 뱉아야 군화는 광이 났다
-눈처럼 하얀 혹은 까만/김기상-
염소가 새끼를 낳았다
어미의 가느다란 다리 사이로 빼꼼히 첫눈에 담았을 땅이
그를 받아낸 것이다
괜찮여 맘 푹 놓고 얼른 나오라니께
땅은 그랬을 것이다
정말 맘 푹 놓고 새끼는 나왔을 것이다
겨울의 언 땅인 줄도 모르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몸을 무작정 던졌을 것이다
언 땅이 받쳐 든 새끼를 얼마나 부지런히 핥아댔는지
닳고 단 어미의 혀가 새끼의 까만 몸에서 반짝거린다
땅도 무던히 마음 졸였나보다 질펀하게 녹아있다
담장 옆 목련 꽃봉오리
보송보송한 털옷 한꺼풀 벗어주고.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