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는 허술하고 답답한 구석이 적지 않음에도 괜찮은 영화입니다. 시각장애인 연기를 한 김하늘과 ‘누나들의 가슴을 뒤흔드는’ 유승호에게 눈독을 들였기 때문에 스릴러 영화답지 않게 별로 조마조마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힙니다. 무섭지 않고 포근함으로 감싸 안으려는 스릴러 영화이기 때문에 되레 무서운 생각을 지펴내는 것이죠. “스릴러 영화인데 어쩜 이렇게 따뜻하다니, 뭔가 있어!”
김하늘과 유승호 사이에서 ‘누나-남동생의 유사로맨스’가 빚어지는데, 스릴러라는 장르 안에서 생겨나는 ‘낭만’은 공포를 더 두드러지게 하는 장치이듯 이 ‘유사로맨스’는 무언가를 돋보이게 해줍니다. 그 ‘무언가’는 영화 처음부터 버젓이 얼굴을 내밀고 끝까지 함께하는 ‘연쇄살인자’와 맞물립니다. 달리 말해 김하늘과 유승호 사이를 아기자기하게 엮어주는 연쇄살인자의 존재는 그들 사이의 조금은 뻔한 달콤 쌉쌀함 때문에 도리어 연쇄살인자를 생각하게 되지요. 김하늘과 유승호에 한 눈을 팔면 이 영화가 담아내는 무언가를 보지 못합니다.(블라인드)
연쇄살인범은 ‘괴물’이 아니다
시각장애인이 겪는 일상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은 무척이나 반짝반짝 빛나는데, 얼핏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어려움과 이 사회의 편견을 꼬집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음의 장애가 진짜 장애”라는 희망의 집 원장의 말처럼 비장애인들을 돌아보게 하지요. 그런데 이 논리는 으레 이뤄지는 입바른 말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사실’이라면 어떨까요? 영화 <블라인드>가 으스스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의 장애가 진짜 장애“를 넘어 엄청난 문제라고 이 영화는 말을 겁니다.
거의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범인은 마치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범죄들이 이 사회의 그림자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법의 안쪽에, 이 사회의 뒤엔 언제나 범죄가 생긴다는 걸 일러주는 게 아닌가?
범인을 둘러싼 여러 조건들은 관객들의 등짝에 닭살을 돋아나게 합니다. 범인은 비싼 차를 두 대다 갖고 있으며 단독주택에 살 정도의 부유한 의사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회의 ‘상류층’이고 뭇사람들이 좋아하고 부러워하는 인물이죠. 남들을 제치고 꼭대기에 올라가 ‘인정’받은 이가 알고 보니 ‘연쇄살인범’이라는 설정은 오늘날 어떤 인간들이 만들어지는지 까발립니다. 겉으로 봐선 멀쩡하고 똑똑한데, 마음은 일그러질 대로 이지러진 이들이 드물지 않은 것이죠.
더 오싹한 대목은 이 ‘범인’은 결코 ‘괴물’이 아니라는 장면들입니다. 흔히 공포영화에서 ‘연쇄살인마’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삐뚤어지고 망가진 것처럼 그려지거나 왜 ‘몹쓸 놈’이 되었는지 알 수 없는데, 영화 <블라인드>에서는 범인이 사회구조와 맞물려 있다는 걸 꼼꼼하게 싣습니다. 임산부를 돌보고 생명이 태어나도록 돕는 산부인과 의사가 생명을 해치고 임산부가 될 수 있는 젊은 여성들을 죽이는데, 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면?
돈을 위해 사람의 몸을 단순히 물질덩어리처럼 취급하며 그렇게 다루고 있는 사회에선 겉으론 “생명을 귀하게”라고 중얼거리지만 속으론 “돈이 (안)되면 죽여라”를 외치기 때문에 범인은 이에 잘 따랐던 것이죠. 돈이 벌리지 않는 분만을 더 이상 하지 않는 산부인과 의사로서 낙태를 하는 모습과 여자들에게 약을 써서 기절시키고 죽이는 모습은 소름 끼치도록 겹칩니다. 범인은 현실사회에서 통하는 법의 이중성 더 밀어붙였을 따름이죠. 겉으론 친절한 데다 사람들을 돌보고 살리는 의사지만 속으론 이런 것에 끌리는 당신을 죽이고 싶은 인간으론 나아간 것이죠. 왜 비슷한 범죄들이 날마다 끊이지 않고 오르내리는지 떠올리게 만듭니다.
왜 경찰간부후보생 김하늘은 눈을 다치는가
영화 앞머리에서 김하늘은 동생에게 멋대로 쇠고랑을 채우는데, 이 모습은 그냥 우연이 아닙니다. 법은 언제나 자신의 권한을 넘어섭니다. 사람들에게 법을 지키도록 하는 ‘법집행자’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테두리를 넘어가버리죠. 용산참사라든지 쌍용사태라든지 요새 한진중공업까지 경찰들이 법을 지키겠다며 마구 몽둥이를 휘두르는 모습에서 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 들통 나고 과연 무엇이 정의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죠.
이 사회에서 법과 정의란 저 성냥불처럼 갸냘프고 야위지 않았나? 범인을 막고자 기름을 켜고 불을 켜도 별로 아랑곳하지 않던 범인이 '남의 사유재산을 부수는 짱돌'에 쓰러지는 건 생각보다 묵직하지 않은가?
그래서 경찰로 나오는 김하늘이 눈을 다치는 모습은 꽤나 큰 상징을 띤다 할 수 있습니다. 법이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면 눈이 멀게 된다는 뜻으로도 읽히며 법집행자들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얘기로도 들립니다. 왜냐하면 고작 간부후보생이었던 시절부터 저리도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는데 ‘법집행자’의 권력을 갖게 되면 얼마든지 떳떳하게 넘어가는 일들을 할 테니까요.
정의의 여신 조각은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정의의 여신은 모든 걸 보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은 언제나 ‘공정’하지 못하고 늘 예외가 있지요. 좋게 봐선 선입견 없이 판정을 하겠다는 것으로 여길 수도 있겠으나 정의가 있는 거 같지 않은 사회에선 앞을 보지 못하는 여신에게 ‘정의를 맡겨야’ 한다는 아찔함이 소용돌이칩니다. 정의를 지키려는 김하늘의 애씀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건 이 사회의 정의와 김하늘의 모습이 포개지기 때문이죠. 지배권력을 지닌 이들이 왜 ‘법치’를 떠들면서 정작 자신들은 법을 지키지 않는지, 그리고 왜 그들은 처벌을 받지 않는지 정의의 여신은 답을 하지 못한 채 오늘도 눈가리개를 하고 우두커니 서있습니다.
그러므로 법을 지키게 하고 정의를 이룩해야 하는 경찰은 사건이 끝나서야 뒤치다꺼리만을 합니다. 영화에서도 김하늘과 유승호가 어련히 범인을 물리친 뒤에야 경찰들이 들이닥치죠. 이런 법의 엉성함 때문에 사람들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법 ‘안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권력이 생긴 누군가 있으면 갑자기 더 친하게 구는 까닭이 여기에 있지요. 영화 마지막에 김하늘이 다시 경찰이 되고 유승호는 의경을 거쳐 경찰대에 들어가겠다고 말하는 대목은 흐뭇한 마무리가 아니라 법권력의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살기 힘들다는 서글픔인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