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 예찬론자의 깨달음>
[1] 가끔씩 편식하는 이들을 본다. 어릴 때 내가 존경하던 시골 목사님이 한 분 계셨다. 어느 날 그 목사님과 나랑 동갑이던 그분의 딸과 우리 아버지와 나 넷이서 난생처음 식당엘 같이 간 적이 있다. 소고기 국밥을 시켜서 먹는데, 목사님 딸이 국 속에 들어 있는 파를 다 끄집어내어 자기 아버지 국 속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항상 덕스러운 얼굴만 보여주신 목사님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2] 그래서 눈짓을 하고 꼬집으면서 딸의 철없는 모습을 우리 두 사람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무던히 애쓰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알고 보면 난 더한 사람인데 말이다. 어릴 때부터 난 물고기 종류는 고등어와 꽁치 외엔 전혀 못 먹었다. 밥상에 생선요리가 올라오면 그 좋지 않은 냄새 때문에 식사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생선이든 회든 탕이든 뭐든지 먹질 못해버릇했다. 그 습관을 고치기 위해 아버지께서 때리기도 하고 협박도 하셨지만 불가능했다.
[3] 군생활을 하는 동안 생선조림이나 튀김이 나오는 날이면 난 그 냄새들 때문에 하루 종일 기분이 언짢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습관은 지금도 계속해서 쭉 이어지고 있다. 집회 강사로 가서 식사대접을 받는데 생선집으로 데려가면 자초지종을 말하고 다른 식당엘 간다. 철이 없어서가 아니라 전혀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생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정도라면 곤란할 때 억지로라도 먹으면 된다. 하지만 내 경우엔 냄새조차 맡지 못할 정도로 입에 댈 수가 없다.
[4] 미국에서 911이 터지기 1년 전, LA에 있는 교회의 담임 목사 후보로 선을 보러 간 적이 있다. 그때 예배를 마친 후 장로님들이 일식집으로 나를 데려가는 것이었다. 최고의 대접을 한다는 게 내겐 악몽의 순간이었음을 그들은 몰랐을 게다. 그분들에게 잘 보이려 간 사람이 일식을 못 먹는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정말 힘들고 고통스런 순간이었지만 억지로 회를 삼켜야만 했다. 난생 처음 먹어보는 생선이지만 정말 다신 먹지 말아야겠다고 재다짐한 순간이었다.
[5] 여수박람회가 열리던 해 학교에서 교수 퇴수회를 그쪽으로 갔다. 바닷가니까 당연히 횟집으로 갔는데, 나 말고도 회를 잘 못 먹는 비회파 교수들이 있어서 가까이 있는 삼계탕집으로 가서 옻닭을 시켜먹었다. 다음 날도 횟집에 가길래 비회파 교수들과 다른 식당엘 가서 또 옻닭을 주문해서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그런데 퇴수회를 다녀와서 몸에 옻이 올라서 병원까지 가서 치료받고 약 먹을 정도로 10일간 곤경에 처한 적도 있다.
[6] 2004년 쯤, 아이들 교육을 시키느라 나와 떨어져 살던 아내가 막내를 데리고 한국엘 잠시 나온 적이 있다. 뭘 먹고 싶냐고 물었더니 아구찜이 제일 먹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아꾸찜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가보니 메뉴판에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주인한테 물었다. 생선 종류를 전혀 못 먹는데 혼자 짜장면 시켜 먹을 수 있냐고 말이다.
[7] 당연히 퇴짜를 맞았다. 그러자 아내가 다른 음식점으로 가자며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다른 음식을 먹은 적도 있다. 이처럼 나는 무조건 고기를 좋아한다. 육식 말이다. 고기라면 뭐든지 좋다. 무엇보다 나는 돼지고기가 좋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이 귀신을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하심으로 2천 마리 가까이 되는 돼지들이 산비탈에서 바다로 떨어져 죽은 사건이 나오는데, 그 내용을 볼 때마다 아까운 생각이 들 정도이다.
[7] 지난 주 토요일 고기집엘 갔는데 이런 간판(아래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다. “어차피 인생은 고기서 고기다.” 내가 좋아하는 참 재미있고도 백 번 천 번 옳은 문구다. ‘인생은 고기서 고기다.’ 그렇다. 고기 없인 살 수가 없다. 인생은 다 먹자고 사는 것이다. 그것도 고기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거 아니겠나! 천국에도 내가 좋아하는 삼겹살이나 돼지갈비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돼지의 참 맛을 알지 못하고선 인생을 논하지 말라. 이렇게 내가 고기 예찬론자가 된지는 오래다.
[8] 내가 왜 고기를 그렇게 좋아하나 생각해봤더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서 그런 거 같았다. 구약에 '번제'란 제사가 나오질 않는가. 그 시대에 얼마나 많은 소나 양들이 하나님께 바쳐졌을까? 우리 하나님이 고기 냄새를 무지 좋아하실 거 같다. 번제단에서 고기 타는 냄새가 온 천지에 진동할 때 하나님께서 진노를 누그러뜨리시고 흐뭇해하시면서 그들의 죄를 사해주셨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를 보면 하나님 마음을 너무도 잘 알 거 같다.
[9] 난 누가 음식을 대접한다고 할 때에 돼지고기 집으로 데려가면 제일 기쁘다. 맛있는 고기 굽는 냄새가 날 때쯤이면 벌써부터 군침이 돌아 참기 힘들어진다.
창세기 4장에 가인과 아벨의 제사 사건이 나온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가 뭘까? 오랜 세월 동안 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이 가인은 짐승으로 바치지 않고 농산물로 바쳐서였기 때문이라고 해석해왔다.
[10] 우리 하나님은 고기를 좋아하셔서 고기 타는 냄새를 맡으시면 즐겨 사람들의 죄를 사하신다고 말이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정말 최고로 정확한 100점짜리 정답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도 정말 나처럼 고기 냄새를 좋아하셨을까? 농산물을 태워서 드린 제물보다 고기를 태워서 드린 제물을 차별화해서 좋아하셨을까? 물론 아니다. 우리 하나님이 고기 냄새를 좋아하셔도 아니고 피의 제사를 기뻐하셔서도 아니다.
[11] 그럼 두 사람 제사의 차이는 뭘까? 가인은 평소 악한 자인 마귀에게 속하여(요일 3:12) 경건치 않고 악하게 살았던(유 1:11) 사람이었고, 아벨은 평소 믿음의 사람이었고 의로운 삶을 잘 산 신앙적인 인물이었다(히 11:4b). 무엇보다 창세기 5장에서 우리는, 가인이 농산물 하나만(an offering) 달랑 바친 반면, 아벨은 양의 첫 새끼들(firstlings)과 그들의 기름들(fat portions)까지 구별해서 바쳤음에 주목해야 한다.
[12] 우리말 성경이 번역을 잘못해서 다 단수형으로 해버렸으나 원문이나 영어역엔 모두가 복수형임을 놓쳐선 안 된다. ‘양의 새끼들’, 그것도 ‘첫 것들'을 한 마리도 아니고 복수형으로 바쳤으며, 또 '그 기름들'까지 하나님께 바쳤다. 여기서 ‘기름’은 짐승의 제일 소중한 부위인 창자나 신장을 감싸는 모태와 같은 역할을 하기에 역시 짐승 중 최고의 부위에 해당함을 기억하라. 한 마디로 아벨은 가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한 제물을 드렸단 말이다(히 11:4a).
[13] 대상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니 말이다. 반면 가인은 자기가 수확한 농산물 중 하나만 달랑 가져와 바쳤다. 하나님께 속한 믿음의 사람과 마귀에게 속한 자가 바치는 내용물에 두드러지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성경은 잘 보여주고 있다.
제물을 바치는 자의 믿음도 중요하고 그 믿음의 사람이 구체적으로 바치는 제물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14] 우리가 참 믿음의 사람이라면 매일 매순간 하나님의 자녀답게 의롭고 경건한 삶을 잘 살아야 하고, 그런 인격과 믿음으로 아벨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구별된 최고의 것들을 우리의 전심을 담아 드려야 한다.
이후로 하나님께 예배와 찬양과 헌금을 드릴 때 어떤 믿음의 자세와 구체적인 열매로 행해야 할 것인지를 깨닫고 새기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