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 때 왔던 곳을 이번에는 넷이서 모여 왔다. 코로나 검사도 하고 달력도 얻고,..
구룡사 구절초 꽃축제 가설 무대가 소슬하다.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만나는 구절초 꽃들 -( 산지기의 사진으로 만나다.)
구절암 들어가는 입구, 기와불사가 한참이다.
구절암에 모셔진 경허선사 진영
구절산 구절암 가는 길에 피어난 구절초 꽃밭. 꽃무릇 꽃은 지고 새싹만 나온다.
구절암에서 바라보는 전망 (산지기 사진에서)
구절암에서 간단한 점심 요기를 하고 뒷산의 산신바위와 산신각을 거쳐 정상(355m)까지 올라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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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선사>
경허대선사 ㅡ 출처: 위키백과에서
경허(鏡虛, 1849년 ~ 1912년)는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한 대선사이다.
1849년 전주 자동리에서 아버지 송두옥(宋斗玉)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산(礪山)으로, 속명은 동욱(東旭)이다.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다.
9세 때 경기도 의왕시 청계산에 있는 청계사로 출가하였다.
<깨달음>
1879년 11월 15일, 동학사 밑에 살고 있던 진사인, 이 처사(李 處士)의 한 마디,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 이 한마디를 전해 듣고는, 바로 깨달았다.
콧구멍 없는 소(牛無鼻孔處: 우무비공처)는 중국 법안종의 종주 법안(法眼) 선사의 어록에 실려 있는 선어다. 당시 경허의 시봉을 받들던 사미승 원규는 경허의 사제인 학명의 제자였고, 이처사는 사미승 원규의 속가 아버지였다.
천장암 (천장사)
1880년 어머니와 속가(俗家) 형님인 스님이 주지로 있던 연암산(燕巖山) 천장암(天藏庵:천장사)으로 거처를 옮긴다. 천장암은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장요리 연암산에 있는 도량으로 백제 무왕 34년인 633년 백제의 담화선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이다.
경허는 연암산 천장암의 작은 방에서 1년 반 동안 치열한 참선을 한 끝에 확철대오하게 되고 "사방을 둘러 보아도 사람이 없구나"라고 시작하는 오도송을 짓는다.
천장암에서 경허의 '삼월(三月)'로 불리는 수월스님과 혜월스님과 만공스님이 출가하여 함께 수행하게 된다.
제자들과 함께 천장암에서 지내다가 개심사 부석사 간월암 등지를 다녀오기도 하였는데 이 때 경허스님과 제자들간의 많은 일화가 전한다.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保任)을 마치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
한동안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돌연 환속하여 박난주(朴蘭州)라고 개명하였고,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함경도 갑산(甲山)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나이 64세, 법랍 56세이다. 저서에는 《경허집》이 있다.
경허의 세 달 :
경허 선사의 수제자로 흔히 '삼월(三月)'로 불리는 바,
혜월(慧月, 1861년 - 1937년),
수월(水月, 1855년 - 1928년)·
만공(滿空, 1871년 - 1946년) 선사가 있다.
경허는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했다.
삼월인 제자들도 모두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이들 역시 근현대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들이다. 이밖에 법제자로 월정사의 한암 스님이 있다.
1904년 7월 15일, 같이 수행하던 만공스님에게 전법게(傳法偈)를 주고서, 천장암을 홀연히떠났다.
법자(法子) 만공(滿空)에게 준 전법게:
수산 월면에게 글자 없는 도장을 부쳐 주고 주장자를 잡아 한 번 치고 이르기를
"다만 이 말소리가 이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또 말해 봐라. 이 무슨 도리인가?"
또 한 번 치고 이르기를 "한 번 웃고는 아지 못해라, 낙처가 어디인가.
안면도의 봄물 푸르기가 쪽과 같도다." 하고 주장자를 던지고 흐음하고 내려오다.
현재, '북송담 남진제'의 두 큰스님의 경우에, 송담스님은 경허(75대)-만공(76대)-전강(77대)-송담(78대)의 계보이고, 진제스님은 경허(75대)-혜월(76대)-운봉(77대)-향곡(78대)-진제(79대)의 계보이다.
연표 :
1849년 전라북도 전주 자동리 출생
1857년(9세) 경기도 의왕시 청계산에 있는 청계사로 출가
1879년(31세) 11월 15일, 이처사의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 한마디를 전 해듣고 깨달음
1886년(37세) 6년 동안의 보임(保任)을 마치고 무애행 시작
1902년(53세) (서산 고북면 연암산) 천장암에서 혜월스님에게 혜월이란 법호와 전법게를 내림
1904년(55세) 7월 15일, 만공스님에게 전법게를 주고 천장암을 떠남
1912년(64세) 4월 25일, 환속하여 훈장을 하다가 열반
관련 문화재:
구미 금강사 금란가사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33호)
소설:
최인호, 길없는 길 : 1980년대에 발표된 최인호의 대표작으로, 발간 10년 만에 100만부가 팔린 불교소설이다. 주인공은 경허이다.
경허연구소가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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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의 소설 『길없는 길』 (전4권 중)에서 득도 부분 들여다 보기
1. 경허는 간밤의 긴 상념속에서 정좌하여 앉아 있을 때부터 머리 속으로는 삼매(三昧)에 들어 있으면서도 한 손으로는 줄곧 일곱 알의 단주를 돌리고 있었다.
아직도 미진하여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초조한 경허의 마음 속에 하나의 문장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不曾說一字’
긴긴 하룻밤을 삼매에 들어 이것인가, 아니면 저것인가, 저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면 그 무엇인가 일심으로 마음을 살피고 있던 경허의 가슴 속에 부처의 마지막 말 한마디가 단락(段落)처럼 들려왔다.
‘나는 일찍이 한마디도 말한 바가 없다.’
부처는 숨을 거둬 입멸하기 직전 주위의 제자들에게 입을 열어 그렇게 말하였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소설가 최인호가 경허(鏡虛)의 어디에 그렇게 매료되어 불교입문서 아니 해설서 같은 불교 소설을 썼을까?
『길 없는 길』은 소설이 아니라 불교, 그 중에서도 선학(禪學)에 관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구한말 한국 근대 선승의 계보를 잇고 중흥시키는데 우뚝한 산봉우리 같은 스님이다. 우리는 예산 수덕사의 만공스님이나 김일엽 스님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듣지만 만공스님의 스승이 경허선사 임을 잘 알지는 못한다. 더구나 그의 사상과 내면세계를 알 수는 더더욱 없는 일..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 오늘 경허라는 한 인물을 생각케 하는 우연한 만남이 구절산 구절초 꽃보러 와서 생각지 않게 이뤄진다. 이 무슨 인연인가.. 물론 작년 이맘 때에도 다녀간 곳인데도 말이다.)
(작가의 붓끝에서 부처의 설법은 계속된다.)
아난다의 말을 듣고 나서 부처는 마지막 가르침을 펴시었다.
이것이야말로 부처 최후의 설법이며 그의 최후의 유언이었다.
“나는 일찍이 한마디도 말한 바가 없다.
너희들은 다만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만을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이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중심으로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며 다투지 말아라.
물과 젖처럼 서로 화합할 것이요,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돌지 말아라.
함께 내 교법을 지키고 함께 배우며 함께 수련하고 부지런히 힘써 도(道)의 기쁨을 누려라.
나는 몸소 진리를 깨닫고, 너희들을 위해 진리를 말하였다. 너희는 이 진리를 지켜 무슨 일에나 진리대로 행동하여라.
이 가르침대로 행동한다면 설사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는 항상 내 곁에 머루르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나서 부처는 잠시 쉬었다 다시 이어 말하였다.
“죽음이란 한갓 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육신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태어나(生) 늙고(老) 병들어(病) 죽는 것(死)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여기에서 죽더라도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해 진리와 깨달음의 길에 살아 있을 것이다.
내가 간 후에는 내가 말한 가르침이 곧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경허의 마음 속에 2천년도 훨씬 전에 죽은 한 사람의 마지막 음성이 불이 되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50여 년의 세월 동안 팔만경전의 대사자후를 설하였으면서도 부처는 어째서 유언으로 그러한 말을 남기셨을까.
경허의 마음속에서 은산(銀山)이 와르르 소리내어 무너지고 철벽(鐵壁)이 우르르 소리내어 깨졌다.
부처의 팔만장경은 다만 뗏목에 지나지 않는다. 바다를 건너기 위해 갈대와 나무를 엮어 만든 뗏목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가 말하고자 하는 진리를 어찌 팔만의 설법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저 외양간에서 들려오는 소들의 울음소리를 내가 팔만 가지의 대장경으로 표현하여 묘사한다고 하더라도 소의 울음소리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팔만가지의 대장경도 소의 울음 한 소리를 나타내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지난 밤 내가 보았던 그 참혹한 아비규환의 지옥도 팔만 가지의 경전으로 묘사해 보일 수가 없음이다. 부처는 유언으로 그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스물아홉의 나이에 태자의 몸으로 왕궁을 버리고 출가하여 목숨을 걸고 진리를 찾아 헤맨 끝에 출가한 지 6년 후, 서른 다섯의 나이에 커다란 보리수 아래에서 ‘부처’가 되었다. 더 이상 도달할 수 없는 최고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45년 동안 팔십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그는 자신이 깨달은 최고의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 쉬지 않고 설법함으로써 살아 생전 팔만의 대장경을 남기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팔만 가지의 대장경도 그가 깨달은 진리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대장경이 진리의 문 앞에까지 끌고 갈 수는 있어도 그것을 눈으로 직접 보여줄 수는 없음이며, 대장경이 진리의 물 앞에까지 끌고 갈 수는 있어도 그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부처는 45년간 자신이 깨달은 최고의 진리, 그 하나를 다른 사람들도 깨닫게 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하고 논리를 구사하고 때로는 직관에 호소하면서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 팔만 가지의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여 설법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 되었음이다.
그러므로 그는 열반에 들기 직전 그와 같은 수수께끼의 유언을 남기는 것이다.
‘나는 일찍이 한마디도 말한 바가 없다.
너희들은 다만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만을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이제 나는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
아홉 살의 어린 나이로 어머니의 손을 잡고 뜻 모를 동진 출가를 하였다면 이제 나는 서른한 살의 나이로 활연히 제2의 출가를 단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경허는 하룻밤 내내 꼬박 새우면서 정좌하였던 가부좌 자세를 풀고 일어나 소리내어 헛간의 문을 확짝 열어제쳤다.
그러자 찬란한 새벽빛이 기다렸다는 듯 헛간의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왔다.
바로 오늘 아침이 대발심(大發心)의 첫 출발이다.
경허는 병중에 드신 옛은사 스님 계허를 찾아 한양 청계사로 가는 발걸음을 돌려 스승 만화스님이 있는 동학사로 되돌아간다.
“나귀의 일이 다 끝나기도 전에 말의 일이 닥쳐왔도다(驢事未去 馬事到來)
영운 선사의 ‘나귀의 일, 말의 일’이란 화두를 선택하여 방문을 걸고, 용맹정진으로 들어갔던 1879년 7월, 그로부터 10개 월 간 경허에게는 뜻밖의 일이 생긴다
방문을 닫아걸고 수마(睡魔)의 조복(調伏)을 받고자 턱밑에 날카로운 송곳을 세워놓고 용맹정진하던 경허에게 탁발 나가는 학승과 동행했다 돌아온 사미승 동은에게서 들은 한마디 질문에 그만 활연대오한다.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요.“
이 우연한 한마디가 시위를 떠난 활처럼 날아가 단박에 명중되어 경허의 한 복판을 꿰뚫었다.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조차 없다’는 말을 들은 순간,
경허는 “나귀의 일이 다 끝나기도 전에 말의 일이 닥쳐왔도다(驢事未去 馬事到來)라는 영운 선사의 ‘여사마사(驪事馬事)의 화두를 비로소 타파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30년 동안 검을 찾아 헤매던 영운 선사가 어느 날 문득 본 복숭아꽃을 함께 보게 된다. 그 순간 경허는 옛 부처들과 조사들이 남긴 1,700개의 공언들을 천천히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으며, 그 순간 단 하나의 의심도 없이 그 모든 공안들이 확연히 풀리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순간 경허는 춤을 추면서 벌떡 일어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때가 기묘년(己卯年:1879) 11월 15일 야반 삼경.
스승도 없는 31세의 청년승이 마침내 도를 깨달은 것이다.
이듬해 1880년 초봄, 32세의 청년승 경허는 갑자기 동학사를 떠나 천장암(天藏庵)으로 간다.
천장암을 보임처(保任處)로 삼고 수행을 계속한다. 물론 속가의 어머니와 형이 있는 데라서 찾아간 것은 아니란다.
천장암은 (충남) 서산시 고북면에 있는 마치 제비가 날개를 펼치는 있는 형상이라 하여 이름지어진 연암산(燕巖山) 속에 숨어있듯 있는 작은 암자다.
(신풍) 구절산의 구절초를 보러 왔다가 뜻밖에도 구절암에서 경허선사의 발자취와 마주한다.
그 인연이 다시 최인호의 ‘길없는 길’ 소설책을 뒤적거리게까지 한다.
여전히 까막눈에 귀머거리임에는 변함없지만.
구절초 하얀 꽃속에서 연꽃 향기를 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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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작가의 눈물맺힌 사연을 간직한 구절초 들국화 꽃 하얀색이 더욱 안쓰럽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