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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5. 묵상글 들 (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 잠자코 있어서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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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5.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잠자코 있어서는
오늘 복음은 중도 맹인이 다시 시력을 찾는 얘기입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 지나가시는 주님을 만난 것을 보면
주님을 만날 것을 기대하지도 부러 찾아간 것도 아니지요.
그리고 주님을 만나지 않았으면 다시 시력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요.
그러고 보니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주님이 없으면
시력을 되찾는 은총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맹인에게 은총은 그야말로 생각지도 않은 선물이요
꿈도 꾸지 않았는데도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은총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의 그는 미적거리다 기회를 놓치거나
은총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없었던 사람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잠자코 있으라는 사람들의 꾸지람에 간청을 그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소리로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이는 하느님 은총을 받게 될 때 우리가 갖춰야 할
양면적 태도 곧 수동성과 적극성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앞서 봤듯이 은총이란 뜻하지 않게 주어지는 선물이기에
은총을 받기 위해 놀부가 제비 다리 부러트리듯 해서는 안 되고,
흥부처럼 전혀 생각지도 않다가 주어지는 수동적인 것이어야 하지만
기도하지도 청하지도 않고 잠자코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칼 라너라는 분은 기도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렸지요.
"기도는 성사보다 중요하다. 많은 영혼이 성사를 받지 않고도 구원되지만,
기도 없이 구원받은 영혼은 결코 없기 때문이며 하느님의 은총은
본래 사람의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은총이 우리 행동에 선행되어 무상으로 주어짐이 사실이라면,
그 은총이 제일 먼저 일으키는 반응이 마음의 움직임인데,
이 움직임을 가장 간단하고 정확하게 일컬어 ‘기도’라고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잠자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욕심이 일 때는 잠자코 있어야겠지만
은총이 주어질 때도 잠자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은총에 맞갖은 열망과 갈망이 마음 안에서 일어나야 하고,
받고 난 뒤에는 오늘 맹인처럼 감사와 찬양이 솓구쳐야 하며
입술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맹인에게 베풀어진 자비는
단지 눈의 치유가 아니라 구원이었고,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보는 것이었는데
오늘 우리는 이런 맹인을 부러워하고 또 본받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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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5.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오늘 <복음>은 예리고의 눈먼 거지(바르티메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9)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11,1)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가까이 오자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 18,4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그의 믿음을 유도하고 고백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을 묻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청원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곧 첫째는 믿음으로 청하는 일이요, 둘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청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진정 청해야 할 바를 청하는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빤히 아시지만, 당신께 대한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거지 장님은 신뢰와 의탁으로 청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41)
그런데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보다’(anablefo)라는 단어는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다시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될 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분의 ‘사랑을 보는 눈’이 다시 보는 눈이요 새로운 눈이요 영적인 눈인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눈을 치유 받는 것을 넘어서, 영혼의 눈을 뜨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다시 보게 하고 구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42)
이제는 보려고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물질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이제는 ‘믿음’을 통해서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일이요, 지금 우리의 길을 동행하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주님을 “따라” 따라나서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 18,41)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고 있는 까닭입니다.
눈을 뜨지 않으려는 완고한 마음 때문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 막을 걷어 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기시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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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5.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혼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시력이 6.0인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는 아주 멀리 있는 것도 잘 봅니다. 그렇다고 그가 늘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기도 하지만 볼 것, 안 볼 것 다 보면 오히려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잘 보지만 혹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면 그는 불행합니다. 육신의 눈이 중요하지만, 내면의 세계를 보는 마음의 눈은 더 소중하고 내세의 세계를 보는 영혼의 눈은 더욱 더 고귀합니다. 우리는 감겨 진 영혼의 눈을 떠야 합니다.
어떤 눈먼 이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8,38).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이웃사촌’이라 했는데 아무래도 눈먼 소경은 이웃을 잘못 만난 것 같습니다. 유다인들의 표현으로 자비라는 것은 애간장, 애타는 심정을 말합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을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11.8)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애간장이 녹는 안타까움!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이며 사랑입니다. 눈먼 이는 바로 그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절박한 부르짖음을 외면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눈을 가졌다 할지라도 마음의 눈은 뜨지 못했으니 정작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외쳐야 할 사람은 눈먼 소경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웃의 마음을 읽고 그의 부족함을 채워야 할진대 시끄럽다고 야단을 치고 있었으니 그들이 소경입니다. 자비는 적선이 아닙니다. 함께하면 손해 볼 것 같아도 주님의 마음으로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의 필요를 절박함으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는 이들에게 이웃이 되어줄 수 있을 때 그들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눈먼 이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심정으로 발버둥치듯이 그렇게 절박하고 간절하게 매달렸습니다. '잠자코 있으라'는 꾸짖음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외쳤습니다.“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믿음은 군중이라는 장벽을 넘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군중의 손가락질도 마다하는 예수님께 대한 일편단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눈먼 이는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따랐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도 눈을 떠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뜨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이웃의 요구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영혼의 눈이 뜨여 내가 변하면 세상이 아름답습니다.‘잠자코 있으라’고 꾸짖기 전에 그의 처지와 절박한 마음을 공감하게 되고, 오히려 주님을 불러 세우고 주님께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시력을 키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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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5.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는 눈이 담당하고 있는 시각은 우리가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정보의 약 70%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두뇌 활동에서도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보통 사람이 하루에 접하는 시각 이미지가 대략 만 개 정도 된다고 하는데 대부분의 시각 정보는 스쳐 지나갑니다. 하지만 기억에 남기려고 보는 경우에는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해서 보고, 반대로 두뇌 활동을 쉬려고 잠을 자거나 깊은 생각이나 명상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눈을 감습니다.
눈이 먼 사람은 이렇게 생활하지 못하므로 불편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어렵습니다. 일을 할 수가 없으니 구차하지만 구걸을 해서라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리코에서 만난 눈먼 이는 자비를 청했고, 그 청원이 워낙 간절했던 덕분에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가 눈을 뜨고 볼 수 있도록 치유해 주셨습니다.
눈이 멀었던 사람이 눈을 뜨게 된 것을 두고 루카가 “예수님을 따랐다.”라고 굳이 보도하는 까닭은 그가 눈만 뜨게 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눈을 멀쩡하게 뜨고 있는 사람이라도 영적으로는 소경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 바리사이 같은 사람들이 그러했는데, 그들은 눈먼 이를 보게 하는, 그래서 신적 권능으로만 일으킬 수 있는 기적을 뻔히 보고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거짓 예언자로 간주하여 적대시하였고, 끝내는 사두가이와 로마 총독까지 움직여서 정치적 반란자로 죽여버리기까지 하였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는 반대로, 마카베오는 헬레니즘 시대에 사실상 무신론인 다신교 풍습을 강요받아서 분연히 일어셨습니다. 차라리 죽기로 작정할 만큼 그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에 동조한 형제들과 투사들은 혁명을 일으켰다가 희생당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신앙과 양심의 자유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보는 눈의 소중함도 배웁니다.
광범위하게 무신론과 우상숭배가 퍼져 있는 오늘날에도 육신의 눈이 멀쩡하면서도 정보의 홍수에 빠져서 올바른 지식을 얻기가 쉽지 않고, 더군다나 진리에 이르는 깨달음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오늘 복음의 눈먼 이의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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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5.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공지능에 관한 관심이 높아진 시기는 아마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 대결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알파고의 일방적인 승리를 보면서,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실제 그런 내용의 영화도 등장했습니다.
인공지능의 발달이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인간의 몫을 많은 부분에 담당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인간을 대신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알파고가 바둑만 잘 두지, 요리하거나 또 특별한 운동을 아주 많이 잘하지 못합니다. 이 영역까지 담당하기 위해서는 더 엄청난 데이터와 메모리가 필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전원 스위치가 꺼지면 잘하는 바둑까지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인공지능도 결국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고귀하며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인간을 완벽하게 대신할 수 없는데, 대신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피조물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그 어떤 것도 인간을 대신할 수 없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하느님께 더 굳센 믿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이 믿음 없이는 자신의 존재에 감사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하느님 창조 목적에 맞게 살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리코의 소경이 보여준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길 바라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에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대답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명의라도 곧바로 눈을 뜨게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먼저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진찰해달라고 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을까요? 그러나 무조건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강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신다면 분명히 자신의 눈도 치유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습니다. 주변에서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고 있지만, 그 방해에 굴하지 않습니다.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청할 뿐이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내 믿음의 정도를 따져 보았으면 합니다. 어떤 방해에도 상관없이 꿋꿋하게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온전하게 주님께 맡기고 있습니까?
주님의 말처럼,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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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란 바깥에 있는 어떤 것, 타인에게서 발견되는 어떤 것이다(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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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목이 마를 때 어떻게 해야 갈증이 해소될까요? 당연히 물을 마시면 됩니다.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마시면 갈증이 말끔히 해소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물을 마신 뒤에, “휴~ 이제 살 것 같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잠시 뒤에 또 목이 마르게 됩니다. 분명히 수분을 보충했는데도 말입니다.
사실 물이 혈류에 도달하기까지 20여 분이 걸립니다. 따라서 물을 마신 즉시 실제적인 갈증이 해소되지 않기에 또 목이 말라 물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물을 마시는 순간에 해소되는 것 같은 느낌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해, 착각이었습니다. 뇌가 물을 마신 결과를 예측해서 갈증을 해소한 것과 같은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몸이 나를 속이고 있으며, 이 속임에 쉽게 넘어가는 우리입니다. 착각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물며 세상의 거짓된 것을 구분하기가 어떻게 쉽겠습니까?
속임수에 넘어감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또 자책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집중하면 그만입니다. 그 후는 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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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5.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원숭이들에게 한 가지 실험을 하였습니다. 5마리의 원숭이가 우리에 있습니다. 가운데에 사다리가 있고, 그 위에는 원숭이가 좋아하는 바나나가 있었습니다. 한 마리의 원숭이가 사다리를 올라가서 바나나를 먹으려 했는데 위에서 물이 쏟아졌습니다. 다섯 마리의 원숭이는 모두 시도했지만 물만 뒤집어썼습니다. 그래서 이제 원숭이들은 사다리에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원숭이 한 마리가 빠지고 다른 원숭이가 들어왔습니다. 원숭이가 사다리를 오르려 하자 4마리의 원숭이가 말렸습니다. 사다리를 오르려는 원숭이는 4마리의 완력에 밀려서 사다리를 오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한 마리씩 빠져서 사다리를 올라가면 물을 맞는다는 경험을 한 원숭이는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 원숭이가 들어오면 모두들 새로 들어온 원숭이를 때렸습니다. 그것이 원숭이들의 규칙이 되어버렸습니다. 왜 원숭이를 때리는지 이유도 몰랐습니다. 사다리 끝에 맛있는 바나나가 있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사다리를 올라가면 물을 맞는지도 몰랐습니다. 다만 원숭이들은 새로 들어온 원숭이를 때리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원숭이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모습에서도 가끔 그런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존심 때문에, 편견 때문에 보고 싶은 것만 보려합니다. 운전하면 가벼운 접촉사고가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보험이 있기 때문에 쉽게 해결 할 수 있습니다.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미안하다고 하고, 피해자도 받아들이면 각자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별일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면, 피해를 입은 사람은 태도를 문제 삼습니다. 그러면서 나이를 이야기하고, 젊은 사람이 왜 그러냐고 합니다. 나이를 먹는 것이 벼슬이냐고 합니다. 그러다가 원인은 생각하지 않고, 서로의 태도와 나이를 들먹이며 다투게 됩니다. 부부 사이에도 서로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해하고, 양보하면 쉽게 해결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부부의 다툼이 커지는 경우는 예전의 일들을 꺼내기 때문입니다. 원인은 약속 시간에 일이 생겨서 늦은 것입니다. 예전에도 늦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시댁에 갈 때는 안 늦더니, 친정에 가려니 늦는다고 합니다. 사과하고, 이해하면 기분 좋게 갈 수 있는 여행이 감정이 상해서 가는 여행이 되었습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이란 말이 있습니다. 손가락은 달을 향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달을 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것은 원숭이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습니다. 이집트에서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데려오셨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신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이방인의 풍습을 따르게 됩니다. 자신들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니,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려고 했을 때, 달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 그들은 음식으로 더럽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 갔다.”
예전에 승강기의 게시판에서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더욱 푸르다.’ 모든 것이 푸르른 여름에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시련의 때, 고난의 때에는 유독 그 푸름이 돋보이는 나무가 있는 것처럼 주변을 보면 그렇게 자신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흐름에 따라서 흘러가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갈 줄 아는 용기와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흘러가는 삶은 살아지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자비를 청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편안하게 살아도 결국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소경은 주님께 간절하게 외칩니다. ‘주님 보게 해 주십시오.’ 주님은 소경의 간절함을 보시고, 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보아야 하는 것들은 ‘빠르고 편하고, 쉬운 길만은 아닐 것입니다.’ 비록 느리고,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굳이 당신의 힘과 능력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 세우신 질서와 법에 따라야 한다고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선택과 결정을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의 질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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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5.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개안의 은총, 개안의 여정
- 예수님이 답이다 -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삶중에
주님이신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개안의 은총, 개안의 선물, 개안의 감격, 개안의 기쁨을 노래한, 그동안 수없이 나눴던 제 행복기도중 일부 내용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린 어떤 눈 먼이의 심정이 이러했을 것입니다. 무지에 눈 먼, 참 역설적이게도 눈 뜬 무지의 맹인들 무수한 현실입니다. 인간의 근원적 질병이 바로 눈멀게 하는 무지입니다. 무지의 약, 무지의 죄, 무지의 병, 참으로 제가 많이도 강조했던 내용입니다.
개안의 은총, 개안의 여정입니다. 불교 용어지만 제 좋아하는 말마디중 하나가 눈이 열린다는 개안開眼입니다. 개안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참으로 예수님을 만날 때 개안의 은총, 사랑의 개안입니다. 개안의 은총, 개안의 여정은 그대로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여정이란 말과 통합니다.
역시 한 두 번의 개안이, 깨달음이 아니라 평생 개안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깨달을 ‘각覺’자 안에 볼 ‘견見’자가 들어 있습니다. 깨달음은 개안에 직결됨을 봅니다. 개안의 깨달음과 더불어 치유의 구원에 날로 자유로워지는 영혼들입니다. 참으로 빛이신 예수님을 만날 때 개안의 깨달음이요 인생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납니다.
오늘 복음은 ‘소복음mini-gospel’서라 할만큼 상징으로 가득하며 풍성한 깨달음을 선사합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어떤 눈 먼이가 상징하는 바 무지에 눈 먼 비참한 인간 실존, 바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여기서 제외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길이신 예수님을 만나 눈이 열리게 되는 극적 상황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오늘 복음입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 평생, 날마다 주님을 만나 눈이 열려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육신의 육안肉眼의 시력은 날로 나빠져도 영혼의 영안靈眼의 시력은 날로 좋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알려 주자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는 눈 먼 걸인입니다. 그의 눈뜨고자 하는 갈망이, 열망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습니다. 이런 갈망은 열망은 그대로 주님 향한 열렬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가 바칠 최종의 유일한 기도는 이 하나 자비송뿐입니다. 최종의 승리는 간절한 자에게 옵니다. 간절히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다시 연이어 자비송 기도를 바치는 눈 먼 걸인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만일 이런 간절한 부르짖음의 자비송 기도가 없었다면, 주님은 그냥 지나쳤을 것이며, 눈먼 걸인은 평생 무지의 눈 먼 상태로 비참한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도 부지기 수일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유래하는 미사 시작전 자비송이요, 동방 교회의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입니다. 다음 예수님과 눈 먼 걸인이 주고 받는 대화는 절실하기가 불가佛家 고승高僧들의 선문답禪問答같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제가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바로 무지에 눈 먼 우리가 바칠 유일한 소원입니다. 참으로 필요한 단 하나는 지혜의 눈, 혜안慧眼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개안이요 혜안慧眼의 선물입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간절한 열망의 믿음과 주님 은총의 말씀이 만날 때 개안의 선물입니다. 그대로 간절한 믿음으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개안의 선물입니다. 그는 즉시 다시 보게 되었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라나섰고 군중은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니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참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바야흐로 길에서 길이신 주님을 만나 눈이 열려 주님을 따라 나서는 개안의 여정이, 추종의 여정이 시작되었음을 봅니다. 새삼 주님을 보라 있는 ‘눈(眼)’이요, 주님을 찬양, 찬미하라 있는 ‘입(口)’이요, 주님을 따르라 있는 ‘다리(脚)’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그리스왕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치하에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재앙의 현실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들의 하느님 믿음의 상실과 더불어 세속화가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되니 순수한 믿음은 오염되고 저절로 변절變節, 변질變質, 부패腐敗가 뒤따릅니다. 다음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들은 이민족들의 풍습에 따라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우고,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을 저버리고 이민족들과 한통속이 되어 악을 저지르는 데에 열중하였다.’
반복되는 역사입니다. 흡사 오늘날의 광란狂亂사회, 중독中毒사회를 연상케 합니다. 제대로 된 정상 사회 현실이 아닙니다. 무지에 눈먼 자본주의 사회의 약육강식, 각자도생의 지옥도를 연상케 하는 미칠 광狂자 들어가는 광인狂人, 광기狂氣, 광신狂信, 광폭狂暴, 광분狂奔, 광란狂亂의 중독 공화국 같습니다. 부동산 광풍狂風을 어떻게 잠재울 수 있을런지요.
우리를 참으로 눈 멀어 중독시키는 무지의 탐욕, 교만, 질투, 분노, 증오, 이념, 광신등 끝이 없습니다. 참사람 하나 만나기 힘든 시절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주님을 만남으로 눈이 열려 참사람이 되어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몫을 다하며 제대로 살아가는 보물같은 이들이 그립고 그리운 시절입니다.
하느님이 사라진 중심 자리에는 무수한 악령들이 우상들이 자리잡기 마련이며 가속화되는 세속화, 중독화, 노예화로 서서히 자유를 잃고 참 왜소한 좀비로 전락해가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무지에 대한 답은 단 하나, 예수님과 함께 하는 개안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 자유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함으로 성인聖人이 되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개안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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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5.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려면 삶의 도전과 난관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보여 주십니다.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루카 18,39)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예리코의 눈 먼 이가 큰 소리로 자비를 청하자 사람들이 그를 꾸짖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그로서는 목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데 군중에게는 그저 소음처럼 들렸나 봅니다.
군중의 꾸짖음에도 그는 지치지 않고 움츠러들지 않고 계속 외칩니다. 자기 목소리가 예수님의 귀에 전달될 때까지, 자기의 절박함과 간절함이 예수님 마음에 닿을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겠다는 태세입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41)
예수님이 그를 데려오라고 하셔서 무엇을 바라는지 물으시자 그가 즉시 대답합니다.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갈망이었겠지요. 많은 경우 사람들은 뭔가를 바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정확히 표현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바라는 바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제대로 내면화되지 못한 까닭입니다.
예리코의 눈 먼 이는 장애를 안고 구걸하며 살아가는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뜻이지요. 다시 보고 싶다는 바람, 원의, 갈망이 결정적인 때에 그의 뼛속을 뚫고 나와 예수님 앞에 펼쳐졌고 예수님은 즉시 그의 청을 들어 주십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닥친 암울한 역사를 들려 줍니다.
"임금은 온 왕국에 칙령을 내려, 모두 한 백성이 되고 자기 민족만의 고유한 관습을 버리게 하였다."(1마카 1,41-42)
마카베오기는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이 헬레니즘 시대에 겪었던 고난의 역사를 들려줍니다. 당시 유다 지방에 그리스 문화를 강요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과 그들에 맞선 민족적 항쟁이 줄거리지요.
이스라엘은 창조주이시며 유일하신 한 분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으로서 그분만을 섬기라고 불리운 신앙의 민족입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점령당한 왕국들에게 모두 한 백성이 되라 하고 각 민족마의 고유한 관습을 버리도록 한 칙령은 그들에겐 날벼락과 같은 도전이었을 겁니다. 게다가 더욱 슬픈 일은 이를 찬성하고 자청하여 끌어들인 이들이 동족 안에서 나왔다는 점이었지요.
"그들은 음식으로 더렵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갔다."(1마카 1,63)
오늘 독서의 대목에서도 드러나지만, 대부분의 전쟁사가 그렇듯 마카베오기 안에는 수월히 읽어나가기 어려울 정도의 격심한 전쟁과 잔인한 박해, 처절한 죽음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중요하고 또 소중한 이유는 민족적 정체성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배반하라고 시시각각 조여 오는 악의 폭력 앞에서 목숨을 던져 신의를 지킨 이들의 존재를 통해, 지금 이 세상의 흐름을 주도하는 권력과 재물의 드센 유혹에 맞서 하느님 백성인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다종교사회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이스라엘의 이런 결의가 많이 생소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과의 관계와 율법은 자기들이 누구인지 규정하는 생명이었지요. 민족의 생명인 정체성을 생명을 바쳐 지켜내는 것이 신앙의 정당한 표현이었을 겁니다.
이스라엘은 외세의 침략과 박해, 죽음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지치지 않고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일어섭니다. 죽음도 그들을 막지 못했지요. 자신이 바라는 바를 정확히 알고 하느님의 뜻 안에서 내면화한 이는 어떠한 거센 저항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생명을 지키는 일이니까요.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신앙과 사랑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때때로 세상은 장애물과 걸림돌을 던집니다. 모두가 열광하고 추구하는 물질주의가 경쟁과 약육강식의 폭력을 부추기고, 서로 사랑하라는 하느님 말씀을 낡은 종교적 관념 안에 가두어 버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로 신의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마카베오 시대 못지않게 어렵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각자 희생과 결단을 마냥 미룰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꾸짖음과 저지에도 자신의 갈망을 존중하고 에수님을 불렀던 예리코의 눈 먼 이나, 죽음의 위협 앞에서 신앙의 항쟁사를 이어간 순교자들처럼 충실함과 용기를 청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뜻 안에서 바라는 바를 그분께서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이라 믿고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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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5.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18,41)
예리코의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얘기를 듣고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8,38)
사람들이 그를 제지하자,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치유사화'입니다.
지금 내 안에서 일어나야만 하는 아름다운 '구원이자 부활'입니다.
다시 보게 된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어둠에서 다시 빛을 보게 된 해방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예수님께서 지금 나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신다면, 어떤 대답을 드리겠습니까? 지금 나에게 필요한 '가장 소중한 한 가지'를 청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청하겠습니까?
그 가장 소중한 한 가지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찾아보고, 그것을 주님께 청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청하기에 앞서 먼저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리코의 소경처럼 먼저 '자비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이렇게 청합시다.
"주님, 이 불쌍한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가장 소중한 한 가지'를 청합시다!
그리고,
가짜에 현혹되거나 가짜를 따라가지 말고,
진실을 볼 수 있고 따를 수 있는 눈을 청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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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5.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운전을 하다가 터널에 진입하였는데, 갑자기 앞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조등도 켜져 있었고, 터널 안에 전등들도
이상 없이 불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두운 거지?’
알고 보니 강한 햇볕에 눈이 부셔 썼던 선글라스 때문이었습니다.
쓰고 있던 선글라스만 벗으면 될 일을
기계의 오류나 터널 자체의 문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창피하고 우스운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판단 또한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처럼 어떤 상황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잘못보다는 세상과 주변의 문제점을 먼저 생각합니다.
나는 잘하고 있는데, 주위에서 도와주지 않는다거나
내 생각을 받아 주지 않는다며, 실망하고 짜증을 부립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리코의 눈먼 이가 예수님을 찾아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닌 듯합니다.
“다시” 볼 수 있기를 청하지요. 볼 수 있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마지막 수난 예고(루카 18,31-34 참조)
바로 다음에 예리코의 눈먼 이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이곳 예리코는 갈릴래아를 떠나 사마리아를 거쳐
시작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루카 9,51─19,27 참조) 중 마지막 장소입니다.
이렇게 루카 복음사가는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을 거치며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삶을
바라본 사람들에게,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예리코의 눈먼 이를 빗대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제대로 보고 있는지 묻습니다.
예수님을 본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욕심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야 합니다.
욕심과 욕망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예수님과
세상을 바라보았기에 예루살렘에서의 비극은 발생합니다.
그 색안경을 벗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요.
세상이 달라지려면 자신이 제대로 보고 있는지,
자신의 색안경이 어떤 색깔인지 바로 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주님, 제가 제대로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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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5.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을 고쳐주셨는데, 그는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보는 눈이 있었다. 그래서 끈질기게 애원하였다. 그는 인간의 힘으로는 시력을 회복할 수 없고 하느님의 거룩한 능력과 권능으로서만이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나아가듯 예수님께 나아간다.
누가 지나가느냐고 눈먼 사람이 묻자, 사람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37절)고 알려주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었다(38절).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말렸다. 그들은 눈먼 거지가 시끄럽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시면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을 다시 믿게 하시려고 빛이신 분이 이 세상에 오셨다. 매일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구걸하던 그 사람이 이제 하느님의 선물을 받게 된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이렇게 청하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그가 믿음이 구원을 주었고, 그다음에 시력을 되찾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41절)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권위로 말씀하셨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42절) 이 말씀은 인간의 권한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권위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 누가 이런 권위 있는 말씀을 한 적이 있는가? 주님은 하느님께 기적의 능력을 청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능력으로 그의 시력을 되찾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무슨 일이든 하셨다. “다시 보아라!” 이 한마디가 눈먼 이에게는 그대로 빛이었다. 참 빛이신 분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보게 된 그 사람은 어떻게 했는가?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43절) 한다. 그는 이중으로 눈먼 상태에서 벗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육신의 눈먼 상태뿐 아니라, 마음의 눈먼 상태에서도 벗어난 것이다.
그에게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았다면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에 군중도 모두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고 한 것을 보면, 그는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 것이다. 오늘 복음의 눈먼 이가 그토록 부르짖어 눈을 뜨게 되는 은총을 받았다면 우리의 눈은 어떠한가? 사물을 쳐다보는 눈은 볼 수 있다 해도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은 얼마나 밝은가? 그러기에 우리도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간절한 기도를 자주 바쳐야 할 것이다. 우리의 눈이 이제 주님의 참모습을 볼 수 있고, 그 신비를 깨달아 알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삶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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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5.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 41)
떨어져내리는
꽃잎도
나뭇잎도
하느님을 향한
기도가 된다.
다시 보아야 할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다.
죽음을 통하여
사랑을
다시 보게되는
내면의
시간이다.
우리자신이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에
제대로 믿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절실히
필요하다.
볼 수 없기에
또한 제대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참된 사랑을
필요로 한다.
사랑의 치유는
간절함에서
비롯된다.
간절함과
간절함이
만나는 것이
영혼의 참된
만남이다.
내면과 내면이
만나는 것이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찬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함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다.
믿음은
다시 볼 수 있는
삶의 기쁨이다.
다시 볼 수
있는 우리들이
삶에 진정
감사할 수 있다.
주님과
우리자신이
원하는 것은
다시 볼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것이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믿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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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5.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루카 18,35-39).”
‘어떤 눈먼 이’의 이름은 ‘바르티매오’입니다(마르 10,46).
이 이야기의 상황을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과 바르티매오의 만남을 ‘우연’으로,
또 바르티매오가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잘 활용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과 바르티매오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섭리’입니다.
<하느님(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연이란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이야기 뒤에 나오는 ‘예수님과 자캐오가 만난 일’도
‘우연’이 아니라 ‘섭리’입니다.>
사람들은 바르티매오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부를 때,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고 하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를 뜻하는 말입니다.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이미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고,
소문만 듣고서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었고,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절하게 희망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지만,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바르티매오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바르티매오의 상황에서,
“구세주 빨리 오사 어두움을 없이 하며” 라는 성가 91번의 가사가 연상됩니다.)
아마도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다리면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 상황을, 바르티매오의 간절한 기도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신 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바르티매오가 응답한 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데,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를 부르신 일이
먼저 있었고, 바르티매오가 그 부르심에 응답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의 바로 앞을 지나가신 것은
바르티매오의 간절한 희망과 기도가 이루어진 일입니다.
희망과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면,
그 다음에는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앞을 못 보는 바르티매오의 처지에서는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부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이라고 해도,
우리 쪽에서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바르티매오를 꾸짖은 일은, 예수님과 바르티매오가
만나는 것을 방해하는, 즉 하느님의 섭리를 방해하는 ‘걸림돌’입니다.
사람들이 바르티매오를 꾸짖은 것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사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그랬거나,
아니면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바르티매오의 말을,
몇 푼의 돈을 얻으려고 하는 말로 생각해서
“지금은 그런 일로 예수님을 방해할 때가 아니다.” 라는 뜻으로 그랬을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바르티매오를 꾸짖은 사람들은
예수님과 바르티매오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었습니다.
<뒤에 나오는 자캐오의 이야기에서도
사람들이 예수님과 자캐오 사이에서 장벽이 되고 있습니다(루카 19,3).>
이 일에서, 예수님께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제자들이 꾸짖은 일이 연상됩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 10,13-14)”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통로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만일에 통로가 되기는커녕 가로막는 장벽이 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루카 19,40-43).”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예수님을 따랐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십자가를 향해서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다는 뜻이고,
바르티매오가 정말로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던 일은
‘메시아이신 분의 뒤를 따라가는 일’이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앞을 못 보는 상태에서 구걸을 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이,
‘볼 수 있게 되어서 새 직업을 얻고, 구걸을 하지 않고 살게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르티매오는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만일에 그가 볼 수 있게 된 다음에, 새 인생을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떠나서 새 직업을 구했다고 해도 잘못한 일은 아닌데,
만일에 그가 실제로 그렇게 하면서, 궁극적인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았다면, 이 이야기는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볼 수 없다가 예수님 덕분에 볼 수 있게 된 일 자체는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지 못한다면,
지상에서 눈을 고친 일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마태 16,26).>
여기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네가 믿고 청하는 대로 내가 너의 눈을 고쳐 주겠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너의 눈을 고쳐 줄 테니 이제부터는 더욱 굳은 믿음을 갖고서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의 눈을 고쳐 주신 일은 ‘구원의 시작’입니다.
‘구원의 완성’은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집니다.
바르티매오는 바로 그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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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5.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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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5.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영적인 눈을 뜨는 순간 우리 삶은 새롭게 시작됩니다!
육체적으로 눈먼 사람보다 더 가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신적, 영적, 신앙적으로 눈먼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외관상으로는 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체를 봐야 하는데, 한 부분만 뚫어지게 바라봅니다.
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데, 자신의 편협되고 왜곡된 관점을 끝까지 버리지 않습니다.
한 걸음 물러나서 쳐다봐야 하는데,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바로 또 다른 형태의 눈먼 사람의 모습입니다.
영적인 눈을 뜨기 전까지 우리네 삶은 많은 경우 피곤합니다.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왜냐하면 육의 시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은 찬탄과 즐김의 대상이 아니라 사사건건 극복과 도전의 대상으로 다가옵니다.
영적인 눈을 뜨기 전까지 우리네 삶을 어쩔 수 없습니다.
여기 치이고 저기 차이고 아등바등 그렇게 이 한 세상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을 뜨는 순간 우리 삶은 마치 날개를 단 것 같은 삶으로 변화됩니다.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특별한 체험 한 가지를 하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절대적인 대상이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전에는 꼭 있어야 될 것들이었는데, 이제 없어도 견딜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을 뜨면 좋은 것이 무엇보다도 불평불만이 없어집니다.
부족해도 좋고 남아도 좋습니다.
날씨가 추우면 추운 대로 좋습니다.
더우면 더운 대로 괜찮습니다.
재산이 많으면 많은 대로 좋습니다.
그러나 없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고통이 있어도 견딜만합니다.
고통이 없으면 감사하면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렇게 자비하신 하느님을 향해 우리의 눈을 뜨는 순간 우리 삶은 새롭게 시작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매사에 초연해질 것입니다.
고통의 유무, 상처의 유무에 상관없이 충만한 평화와 기쁨이 찾아들 것입니다.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눈을 감고 지내는 우리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나 자신의 내면에 긷든 악을 솔직히 들여다볼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주 눈을 감아버립니다.
이웃들 안의 존재하는 어두움과 강함을 들여다볼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눈을 감아버립니다.
내 약함과 형제의 부족함을 견뎌내기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눈을 감아버립니다.
오늘 다시 한번 용기를 내서 힘차게 눈을 뜨기 바랍니다. 아이들은 무서운 장면 앞에 눈을 감아버립니다.
그런 아이를 엄마가 품에 안고 어루만져주면 아이는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눈을 뜨게 됩니다.
어머니의 위로와 격려에 힘입어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으로 인해, 나약함으로 인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사랑 많으신 하느님의 품에 푹 안길 때만이 우리는 다시금 눈을 뜰 수가 있습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더 이상 지난 상처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나를 홀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이상 형제를 단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웃을 비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눈뜬다는 것은 내 부족함과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부족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사랑에 힘입어 다시금 새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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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5.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그리스도인이 누구나 다가오기 쉬운 사람이어야 하는 이유
오늘 복음은 우리가 미사 때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하는 기도의 모태가 되는 내용입니다.
예리코의 한 소경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군중에게 알게 되고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습니다.
사람들은 좀 조용히 하라고 꾸짖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보시고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경의 믿음이란 바로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해도 주님은 내가 청하기만 하면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해도 상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목소리에 흔들렸다면 그는 그만한 축복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을 이 소경은 어떻게 가질 수 있었을까요?
한 분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모녀가 그분에게 찾아와 상담하였답니다.
어머니도 우울증 증세가 있으시고, 딸도 대인기피증이 있어 사회생활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최면을 걸어 딸의 무의식 세계를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딸이 청년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더니 급기야는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의 기억까지 이야기하였습니다.
“아 답답해. 아 답답해. 너무 비좁아…. 그런데 어떤 여자의 음성이 들리는데, ‘넌 죽으면 안 돼. 넌 죽으면 안 돼. 넌 살아야 해. 넌 살아야 해.’ 이런 음성이 반복해서 들려요.”
이 말을 듣자 함께 있던 어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딸을 잉태하고 있을 때 자신이 배를 어루만지며 자주 했던 말이랍니다.
당시 남편은 외도하고 있었고 아내의 임신도 자신의 아이가 아니리라 의심하여 낙태하라고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넌 죽으면 안 돼. 넌 살아야 해.”라고 하며 아기를 낳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여자 청년은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내면의 상처를 지니고 있어서 당당히 사람들과 맞설 수 있는 용기가 없어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이 생겼던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이렇게 아이가 태중에 있을 때부터 형성되어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서도 여전히 계속됩니다. 아버지의 이미지가 곧 세상의 이미지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두려운 존재가 되면 세상도 그렇게 됩니다.
『벼랑 끝, 상담』에 ‘분노조절장애와 망상으로 학교 선생님을 아빠라고 믿는 딸’의 내용이 나옵니다.
집도 부유했고 아이도 행복했습니다.
아이는 과학자가 되는 게 꿈이었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그런데 항상 자신의 성이 왜 아빠가 아닌 엄마 성을 따르는가가 궁금했었습니다.
결국, 중3 때 엄마에게 이 사정을 물었고 엄마는 언젠간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진실을 이야기했습니다.
아빠는 본래 미국에 살림이 있는 사람이었고 한국에서 사업하다가 엄마를 만나 다은이를 낳은 것입니다.
이때부터 다은이는 아빠를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여겼습니다.
아빠가 미국에 갈 때 왜 엄마가 그리 불안해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점차 아빠는 사업도 실패해서 다단계를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단계에서 만난 여자와 또 바람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다은이는 친구들이 이 사정을 알까 두려워했고 그래서 친구들을 멀리했으며 조금씩 아버지에게 막말하였습니다.
학교에서 분노조절장애로 사고를 치는 다은이의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은 유일하게 역사 선생님이었고
다은이는 역사 선생님을 자기 아버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있는 아버지는 가짜라고 여겼습니다. 조현병 증상까지 온 것입니다.
다은이는 급기야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부모에 의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은이에게 더 큰 상처를 입혔고 돌아와서는 아버지를 칼로 찌르겠다면 설쳤습니다.
아버지가 딸이 찾지 못하는 곳으로 집을 나와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미국 집에도 이 사실이 알려져 미국으로도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딸은 청년이 되어서도 폐인이 되어 어머니가 더는 볼 수 없어서 상담소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최고야 원장은 우선 역사 선생님이 다은이의 친아버지가 아님을 깨닫게 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역사 선생님을 설득하여 DNA 검사를 진행했고 그제야 다은이는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가라앉혀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사과를 받도록 했으며 최면 명상을 이용하여 과거의 일들을 잊고 아버지를 이해하도록 했습니다.
서른 번이 넘는 이 과정을 통해 다은이는 아버지도 아버지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고
사랑하지는 못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은이 아버지도 외도를 멈추고 다단계에서 나와 직장에 취직하여 다은이에게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아버지와 아주 친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용서를 청했고 변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자 다은이도 다시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었습니다.
결국 좋은 대학에 들어가 과학자가 되는 꿈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이미지는 분명 아버지에게 얻습니다. 어머니는 어차피 아이와 하나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가는 다리라면, 아버지는 세상으로 가는 다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나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누가 형성해 주어야 할까요?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주님께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직자들이 자비로워야 하는 이유는 그 성직자들을 보고 신자들이 하느님의 이미지를 그리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어린이들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이 단상에 올라와도 모자를 달라고 해도 다 받아줍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교황님에게 다가오기를 꺼리고 왜 어떤 이들은 교황님의 모자도 받고 교황님 자리에 앉아보기도 할까요?
교황님이 좋으신 분이란 믿음은 어디서 얻은 것일까요?
저는 아버지에게서 얻은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예수님도 그런 자비로운 분일 것임을 믿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세상의 반대를 무릅쓰고 주님께 모든 것을 청할 믿음을 지닌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을 키워줄 아버지가 되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편안하게 여겨질 수 있도록 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그들이 예수님께 자신 있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편안하게 다가올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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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5.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소경은 그분의 오심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그분께 청합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청하는지 몰랐습니다.
그저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기를
예수님께 간절히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는지 확인하십니다.
사람은 쉽게 얻은 것을 쉽게 대하게 됩니다.
자신이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르며 청할 때,
그는 자신이 무엇을 받은지도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어떤 희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아는 만큼 분명해지고
분명해지는 만큼 구체적인 희망으로 다가오며
희망이 구체적인 만큼 오늘 현실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소경에게 하는 질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전해집니다.
우리는 어떤 희망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가진 희망을 통해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리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만큼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소중히 대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의 희망이 더욱 분명해질 수 있기를
그리하여 이미 받은 선물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오늘 주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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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5.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제1독서 (1마카1,10-15.41-43.54-57.62-64)
"안티오쿠스는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웠다. 이어서 사람들이 주변의 유다 성읍들에 제단을 세우고, 집 대문이나 거리에서 향을 피웠다.
율법서는 발견되는 대로 찢어 불태워 버렸다. 계약의 책을 가지고 있다가 들키거나 율법을 따르는 이는 누구든지 왕명에 따라 사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 그들은 음식으로 더럽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 갔다." (1마카 1,54~57.62~63)
마카베오 상권은 '왕조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
마카베오 상권은 B.C. 2세기 3세대에 걸친 유다 왕조의 역사를 이야기 형태로 전한다.
이 가문은 마카베오(유다의 별명인 '망치'에서 유래함) 가문 또는 하스몬 가문이라 불린다.
한 가문에만 초점을 모으는 것은 그 가문의 후손들에게 이스라엘에서 종교적, 군사적, 정치적 권위를 주장하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일 수 있다.
마카베오서의 구조에서 책의 목적이 드러난다.
마카베오 상권은 셀류코스 왕조의 통치자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에 의해 야기된 위기와 마따디아에 의해 시작된 저항을 묘사한 뒤에(1,1-2,70) 유다 마카베오(3,1-9,22), 그의 형제들인 요나단(9,23-12,53)과 시몬(13,1-16,24)의 반란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하느님이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사용하시어 셀류코스 왕조의 억압을 제거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고, 유다의 대사제가 이 가문에서 나오게 된 경위를 설명한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하느님의 고유한 왕조를 대표한다.
마카베오 상권의 전망은 5,61-62에서 밝혀지는데, 여기서 요셉과 아자리야는 군사적인 용맹을 떨치려고 하였으나 패배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유다와 그의 형제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하느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람들의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사제 마따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들(요한,시몬,유다,엘르아잘,요나단) 그리고 시몬의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이다.
이 책은 유다와 요나단과 시몬을 이스라엘에 '구원'을 가져다 준 인물로 제시하는데, 이때의 구원은 적대적인 정치적, 군사적 힘에서 해방되는 것으로서 이 세상의 역사에서 이해된 구원을 가리킨다.
세 형제는 군사, 종교, 정치 문제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요나단은 빈틈 없는 정치가이다. 시몬은 새로 세운 유다 행정부를 강화하고 조직화한다.
이 책의 설화 문체는 성서의 역사서들인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를 모방하여 이스라엘의 과거 영웅들과 마카베오 왕조 사이의 지속성을 제안한다.
이 계획에서 중요한 요소는 '성서적인 재창조', 곧 마카베오 왕조의 행위들이 성서의 초기 영웅들의 말과 행위와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의도적인 노력이다.
주축이 되는 메시지는 마카베오 왕조가 이스라엘의 과거의 위대한 유산을 승계한다는 것이다.
마카베오 상권의 주요 본문은 칠십인역 그리스어 성서의 본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마카베오 상권이 본디 히브리어로 작성되었으나 나중에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셈족화된 그리스어로 작성되었을 수도 있다.
현재의 본문은 '성서 그리스어'로 씌어 있으며 그리스어 성서의 초기 역사서들의 그리스어 본문과 매우 유사하다.
이 책은 B.C.134년부터 104년까지 유다의 대사제였던 요한 히르카누스의 공적을 요약하는 말로 끝난다.
이 책은 요한 히로카누스 재위 당시나 그 직후, 곧 기원전 1세기 초에 작성되었을 것이다.
이 책에는 여러 개의 '공적' 문서들(8,23-32;10,18-20,10,25-45;11,30-37; 11,57-59; 12,5-23;13,36-40 참조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 문헌들의 진정성 문제가 논의되고 있지만 최근 학계의 동향은 기본적으로 진정한 문헌이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시, 담론, 기도는 저자가 자유롭게 작성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성서의 예들을 본보기로 사용하고는 있지만).
어떤 학자들은 마카베오 상권 1-7장과 마카베오 하권 3-15장에서 저자들이 공통되는 원천을 사용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카베오 상,하권의 복잡한 전승을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가 그 원천이 된 본문을 되찾는 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마카베오 상권의 제1부는 1장 1절 -2장 70절까지 이며, 위기와 저항을 다루고 있다.
위기(1,1-64)의 발단은 시리아의 임금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율법을 준수하고 성전에서 예배하며 할례를 실천하는 유다인들의 생활 방식을 없애려고 한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B.C.336-323) 부터 안티오쿠스 4세(B.C.175-164)에 이르는 헬레니즘 역사에 대한 묘사는 오만("그는 마음이 우울하고 오만해졌다")과 죄악("그들은 세상을 악으로 가득 채웠다")의 주제를 부각시킨다.
안티오쿠스는 무엇보다도 악인이지만, 1장 11-15절에서는 그의 계획에 동조한 유다인들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자, 가서 우리 주변의 민족들과 계약을 맺읍시다"(1,11).
그의 계획은 율법 대신 이민족들의 규정을 따르게 하고, 경기장을 세우며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전통적인 유다 종교)를 저버리는 것이다.
위기는 1장 16-40절에서 커진다.
B.C.169년 안티오쿠스는 이집트를 쳐부수고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성전을 약탈한다.
그 결과 "야곱의 온 집안은 수치로 뒤덮였다"(1,28).
그런 다음 안티오쿠스는 167년에 계속해서 예루살렘을 약탈하기 위하여 '조공 징수관'을 파견하고 항거하는 유다인들을 25년 이상 괴롭히게 될 군사 요새, 곧 성채를 쌓는다.
그 성채는 "성소를 위협하는 복병이 되고 이스라엘을 늘 괴롭히는 흉악한 원수가 되었다"(11,36).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고 성전 근처에 성채를 쌓은 안티오쿠스는 1장 41-50절에서 성전 예배와 희생 제사를 바치지 못하게 하고 안식일과 유다의 축제들을 지키지 못하게 하며, 남자 아이들을 할례 받지 못하게 하고 정결법을 지키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1장 51-61절에 따르면 안티오쿠스는 이 칙령을 내린 뒤에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가져오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우고, 유다 전역에 분향 제단들을 세우며, 율법서를 찢어 불태워버리고 제 아이들에게 할례를 베푼 여인들을 사형에 처한다.
안티오쿠스의 칙령을 묵묵히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과 자기네 종교 전통을 충실히 지키기 위하여 기꺼이 죽기로 작정한 이들이 있었다(1,62-63).
위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린 것이다"(1,64).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18,35-43)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41ㄴ)
마르코 복음의 병행 구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자 바르티매오는 겉옷조차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다(마르10,50).
즉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외침에 응답해 주시자 너무도 기뻐한 나머지, 밤에는 이불이 되고 낮에는 거지 행세를 할 수 있는 유니폼이며 생계 수단인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께로 달려 갔던 것이다.
그렇게 달려 온 바르티매오에게 예수님께서는 소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물으신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자기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인식하고 있는지 알고 싶으셨다.
이에 대하 바르티매오는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마태20,33; 마르10,51)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소원을 구체적으로 고백했다.
희랍어에서 '보다'는 뜻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동사가 '블레포'(blepo)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접두사 '아나'(ana)가 붙은 '아나폴레포'(anablepo)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바르티매오가 보기를 간절히 원했다(I want to see)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데, 여기서의 용례는 단순히 '보다'는 뜻보다는 '다시 보다'(see again)는 뜻을 지닌다(사도9,12.17; 22,13).
이것으로 보아 그는 전에는 소경이 아니었지만 소경이 되었고, 따라서 눈을 뜨고자 하는 욕구가 다른 사람보다 더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원문에는 '해 주십시오'에 해당하는 동사 '텔로'(thelo; want, desire)가 생략되어 있는데, 이 '텔로'(thelo)가 접속사 '히나'(hina)앞에 있어야 완전한 문장이 된다.
그러나 소경이 이렇게 '텔로'(thelo)를 생략하고 짧게 말한 것은, 자신의 소원을 말하는 것이 너무나 급했고 절박했기 때문이다.
♣ 우리가 진정 갈망해야 할 것 ♣
예수께서는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분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길가에서 구걸을 하던 눈먼 이가 그분께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습니다(18,38).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칩니다(18,39).
예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하시어, 그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18,41) 하고 물으십니다. 그리고는 그의 원의대로 다시 보게 해주십니다. 예리코의 소경은 다시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그저 '지나가는 나자렛 사람 예수'(18,37)로 보았던 군중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주님"(18,39.41)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예리코의 소경이 다시 보기를 바란 것은 실은 주님과의 일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청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의 눈을 떠서 주님을 알아뵙기를 갈망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갈망해야 할 것은 현세 물질이나 권력과 명예가 아닙니다. 우리가 갈망해야 할 것은 주님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 집중해봅시다. 예수께서는 수난을 향한 구원의 여정을 가시면서도 길가에 버려진 이들을 보고 계셨고, 군중의 환성에 잘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은 이들의 외침을 ‘멈추어’ ‘다가가’ 들어주셨습니다. 그분은 이 모든 이들을 관대하게 받아들이시는 한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을 갈망하는 이들의 거룩한 목마름을 지나치지 않으셨지요.
우리네 삶이 영적으로 성숙하려면 예수님의 이런 처신과 말씀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그에 따라 살아가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순례가 우리 모두를 하늘나라로 이끄셨듯이, 우리도 일상의 모든 움직임이 하느님을 품은 천상순례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이 곧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인 셈입니다. 이 순례는 다른 이들의 갈망을 채워주기 위한 사랑의 순례입니다.
늘 사랑을 품고,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며, 견디고 기다리면 사랑을 낳습니다. 우리가 갈망해야 할 것은 사랑이신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소명은 주님의 사랑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나누고 전하는 일입니다. 이 갈망을 주고받는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처럼 가던 길을 멈추는 것입니다.
나 자신과 이웃을 사랑으로 치유하고 행복하게 하려면 ‘멈추어야’ 합니다. 자신을 하느님 앞에 두고, 하느님의 사랑을 내 안에 모셔들이도록 멈추고, 애정 어린 눈길로 다른 이들의 아픔과 한숨소리를 보고 들으려고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멈춤으로써 다른 이들 안에 있는 하느님의 갈망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멈추는 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사랑의 행위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그저 스쳐지나가는 분으로 보지 말고, 내 영의 눈을 뜨게 해주실 주님으로 고백하며 갈망해야겠습니다. 그분을 갈망하기 위해 나의 발걸음을 멈추고, 그분의 갈망을 발견하기 위해 멈춰야겠지요. 멈추어 자비이신 그분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기도하며, 그분을 갈망하고 이웃의 갈망에 다가가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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