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에 관한 시모음 27)
억새꽃을 보며 /이재환
벌 나비가 찾지 않아도
사랑받는구나
화려한 꽃이 아니어도
감탄사가 절로 나는구나
달콤한 향기가 없어도
내 마음을 사로잡는구나
온 산이 울긋불긋 불꽃을 피웠는데
하얀 서리맞고 눈꽃을 피웠구나!
억새 꽃 /은파 오애숙
해 질 녘
내 그대의 모습
백발 무성함에 넋 나감
그대 진정 알고나 계시는지
석양 빛 물든
그대 아름다움에
도취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을 내게 의미하는 가
금빛 분가루
휘날리는 내 그대
가슴으로 아량의 여운
이 가을 녘 물밀듯 스며들 때
낙조의 황혼빛
슬픔의 비애로 흐르매
그대가 영원히라는 말 대신
손사래 치는 내임 같은 까닭인 걸!
억새꽃 인연 /이원문
못 잊을 하얀 날
처음이 바래면
그리 되는 것인지
억새꽃에 숨은 모습
야위어 가고
인연의 그 옛날
첫 노을 찾는다
빛 바랜 하얀 날들
이제 잊어야 하는지
잊어야 하나
억새 /杜宇 원영애
저것이 억새라니까
억세게 재수 없는
억새가 파도인양 흔들리고
그 파도에 뛰어든 재수 없는 년
바다에 서방 잃고
먼바다만 바라보다
흔들리는 파도에 정신 놓은
포도청에 넣을 양식 다 떨어지고
아이 하나 낳은 것
가뭄에
핏줄 덩그러니 가죽 위 드러나고
그래도 좋다고 히죽히죽 웃더니만
새마을 노래
새벽 종소리 들었는지
억새밭 지나 어디로 갔나
그 해
해괴한 소문 많더니만.
억새의 힘 /안영준
작은 바람에도
올곧은 성정을 굽힌
가녀린 노구는
춤추듯
부드러운
허리 놀림 한다
넘어져도
훌훌 털고
일어서는 강인함
서로를 부축하면서
겨울 노래 부른다
골바람 속
과거를 회상하면서
자유로운 구속을
맘껏 즐기며
험난한 계절을
무던히 넘기고 있다
물억새의 노래 /홍성란
시달리는 건 억새꽃일까 마냥 부는 강바람일까
저 보드라운 자세도 헤어지는 시늉이니
어느 때 헤어질 것인가
아무도 모를 시한
헤어진다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 거라면
영영 헤어진 아버지처럼은 말고
한동안 보이지 않는 게
헤어지는 거라면
해 뜰 때 나간 사람 돌아와 문을 여는
훗날 어느 백년까지 헤어지련다 헤어지련다
늦콩 둔 저녁을 지으며
마음 단단히 먹고
산비탈을 지키는 억새 /박정재
갈바람이 차게 느껴지는 아침
하얀 머리 세월 개의치 않고
산비탈 해묵은 밭을 지키며
함께 모여 떠오르는 해를 맞는다.
아침 햇빛에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을 흔들며
주인 없는 산비탈 돌밭을
아름다운 풀밭으로 만들었다.
개펄의 갈대의 장단에 맞추어
억새가 부르는 노랫소리에
지나던 길손이 발걸음을 멈추고
함께 즐기며 감상을 한다.
저물어 가는 가을의 서쪽 하늘
붉게 물드는 산비탈을 지키는
억새의 하루도 끝을 맺으며
늦가을은 겨울로 가고 있다.
억새에 기대어 /민경환
추억은 면역력이 짙다
계절은 이리도 무작정이다
빛살은 아린 솜방망이다
바람은 왜 생겨나
이리 아무것이나 흔드는가
늘 새 귀한 시간은 하찮게 스치니
찬 가슴은 일렁이는데
생을 토로하는 것은 천치나 할 짓이다
흔들리는 몸에 의탁하려는
저 잠자리 하, 끈질기구나
흔들림이구나 살아 있음이구나
나와 같구나
흐르는 대로 몸 주며 사는 것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로구나
텅빈 네 뼈대가 자랑스럽다
둥글게 이 마음 비끌어 맨다
갯가 새처럼 이러히 깃털 한 닢 떨군다
스산함이 아 이런,
상서로워 지려는구나
흔들리는 것이로구나
초본의 정념은 그런 것이러구나
보아하니 서로 천진난만이로구나
핑크뮬리(분홍 억새) 들판에서 /은파 오애숙
내 그대를 향한 고백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파스텔톤 온화한 부드런
네 빛깔에 빠져드는 맘
그 옛날 하늬바람 결
연한 파문돌이 휘날려
그대 향하던 때 휘돌아
한아름 안고 있으려니
아주 먼 그 옛날 추억
살며시 다가 오는 것은
그 옛날 젊음이 그리워
그때로 가고픈 까닭인지
도시의 쳇바퀴 벗어나
갈 길섶 자생해 휘날리는
분홍억새 또다른 네 이름
핑크뮬리 바라보는 심연
그 옛날 풋풋했던 시절
사랑한다 내게 고백했건만
무심한 척 돌아섰던 기억에
너의 꽃말이 휘날리누나
억새꽃의 겨울 /이원문
그렇게 하얀 숱으로
마음 빼앗던 꽃이었는데
이 마음 빼앗느라 눕기도 했었고
하얀 숱의 억새꽃
하얀 물결의 그 언덕
이제 아무도 겨울 바람에 춥구나
승학산의 억새군락 /오수열
몇 개의 부그러움이 지나가고
허물 많은 시절도 다 보내고
이제 가진 게 없이
육신의 잔병까지도
승학산 골짜기에 묻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어스름 달빛이 내려도
나는 그것 개의치 않고
혼자서 달을 맞이 하였습니다
창문에 비치는 달빛이
내 머리맡에서 서성거리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억새에 몸을 맡겨봅니다
가을은 가을인가 봅니다
서늘한 바람이 기웃거리면
억새군락은 어느새 내 곁에 서서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억새 /이재환
차가운 된서리
하얗게 머리에 이고
움츠린 몸
허리도 꾸부정하고선
백발의 어르신이
자식을 기다리네
5월 억새에게 내미는 시 /임지나
할머니들 아직 하늘로 올라가지 마세요
똑똑 분질러져도 자꾸 휘어져도 같이 살아요
저는 꽃의 키만큼도 닿지 않은 걸요
사람이 사람을 뚫고 나오는 걸 알았네요
할머니의 뻣뻣한 발등에서 푸른 순이 올라오는 걸 봤어요
오늘은 밀알만 한 무당벌레가 어디서부터 기어 왔는지
얇고 가는 마른 대를 타고 끝까지 올라가더군요
모든 것들은 꼭대기라는 정자(亭子)를 향해 나는 걸 좋아하지요
그러다 갑자기 날개를 펼치고 붕붕대네요
늙어서 너무 길어진다고 말씀하지 마세요
누구에게나 넓은 등이 되어 주셨잖아요
쓸쓸한 할머니의 은비녀 사이로 저수지도 보이네요
저수지는 삶이 관통한 듯 여지없이 파랗군요
누런 풀들 사이로 제 눈에 막 들어오고 있어요
그것은 드문드문 보이는, 만질 수 없는 영애(令愛)같은 고움
잠겨 있는 옛날이야기 같은 거죠
패물 상자처럼 언제까지나 우리 꽉 끌어안고 있기로 해요
몇 해가 흘렀는지 알 수 없지만 늙수그레한 풀과 호수는
이 계절을 처음 앓는 듯 쑥스러워하네요
아, 저 성성한 머릿결 같은 햇빛 약하지만 발걸음 소리 내는 풀
꿀을 머금고 있는 공기. 바람과 나부대는 나무는
저를 교란 시켜요 할머니
저는요, 조용히 또 임신하고 싶어요
억새의 춤사위 속에서 /藝香 도지현
세월은 때로 허무를 불러온다
청춘은 어느새 노인이 되고
흑단 같은 머리에 서리꽃이 피었다
삶에의 허무 속에서
이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초조함
아직 가슴의 열정은
소멸하지 않고 불씨로 남았는데
쇠진한 몸은 껍데기 뿐이니
남은 불씨만으로도
불꽃을 피워 열정을 사르리라
하얗게 재가 될 때까지
저 억새의 춤사위 속에서
마지막 열정을 태우고 있는 내가 보인다
마치 혼 불처럼……
억새꽃빛 서천에 놀이나 좀 비낄까 /고재종
알밤 다 쏟아버린 밤송이 같은
마음의 거처를 찾아
십실월의 억새밭에 든다.
이 쓸쓸한 봉두난발의 바람집에서
내 어쩌려고 고향을 느끼는 건
내 안에 든 행려나 남루 때문일 터.
먼 데서 아주 먼데서
내 안으로 속삭여 오는 바람은
시퍼런 초록으로 뻗치던 억새밭에
마른 울음이나 치고, 그 울음에
나도 뭔가 한없이 떨리는 게 있지만
내 몸의 새것들을 누더기로 만들고
나날의 새 길들을 흙먼지로 뒤덮고
비로소 눈이 보이는 나는
억새 속에 고개 떨군 귀신과
망나니가 보인다.
알밤 다 쏟아버린 밤송이 같은
마음의 거처에 누우면
훗날 거기 바람도 없이 억새도 없이
억새꽃빛 서천에 놀이나 좀 비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