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차산역 내 단골 백반집은, 주말은 단체 손님으로 만원 이라서, 일반 손님읕 받지 않아, 장터국밥에 갔더니 등산객이 많아 겨우 앉아서 장터국밥(9,500원)을 먹고는 다이소에 축의금 봉투를 구입차 갔다.
작은누나 칠순잔치에 축의금 넣을 봉투인데 '늘 내 곁에 있어 줘! 고마워! 사랑해'에 꽂혀 사게 됬고, 면도기 등을 사면서 손자 3명에게 줄 선물을 샀는데, 셋째는 자동자, 둘째는 손V, 큰손자는 나무 장식이었다.
전체 비용은 7,000원이 들었고 신문에 싸고 포장지에 넣어서 테이프를 붙혀야 하는데 테이프가 잘 안 보여,
진땀을 흘렸고 그러다 보니 예상 외출시간 보다 30분이 늦은 오후 4시 40분에 집에서 나왔다.
오랜만에 양복을 입었고 버스를 타고 가천대에 내려서 전철을 탈 계획인데 배가 아파 잠실역에 내렸고 급해서
'장애인 화 장실'을 이용하여서 대변의 위기를 모면했고, 전철로 복정역에서 환승해 서현역에 갔다.
4번 출구에서 6분이 소요되어 5분 전, 오후 6시에 도착하니 내 두딸 가족 7명이 와 있었고, 누나부부와 두딸 가족 9명이 일찍 와 있었다. 큰누나의 2남 2녀중 1남 2녀가 왔고 부부와 아들포함해 6명이었다.
큰형의 1남 2녀중 2녀의 부부가 와서 4명이고 둘째형은 왕래하지 않아 오지 않았고 셋째형의 1남 1녀는 모두
왔고 가족 은 4명이었고 동생은 제수씨가 오셨고 1남 1녀 모두왔고 6 명이 와서 37명이다.
37명은 우리 7남매 가족이 참석한 전체 인원이고 누나가 동호인회원(탁구, 수영)과 가까운 후배 8명이 와서
총 45명이 참석했다. 누나의 장녀가 내게 축사를 부탁해, 어제서야 급하게 쓴 글은 다음과 같다.
제 누나인 홍선자 여사는 음력 1955년 3월 1일생으로 생일은 음력으로 보냅니다. 음력을 양력으로 변환하면
4월 22일생으로 5남 2녀 중 5번째인 둘째딸로 정선읍내 문화 슈퍼 자리에서 태어 났습니다.
누나가 3살때, 정선읍내 중앙에 위치한 병원인 '전의원' 자리로 이사하여 정선초.중.고를 다녔고 정선농고 잠업과 재학때 정선군 면대항 체육대회의 마지막 종목인 '계주'에서 정선면 마지막 주자였습니다.
누나가 바톤을 받았을때 앞선주자가 반 바퀴나 앞서 있었습니다. 막판 스퍼트가 좋은 누나는 200미터를 조금씩 간격을 줄이더니 추월해 우승했는데 당시 그 경기를 보신 분들은 지금도 애기들 하십니다.
저와 누나는 단칸 셋방에서 살았고 경제력이 없는 부모님께 월급을 드려야 생활을 할수 있었고 큰형님이
아버지가 물려 주신 정선집을 팔때 누나가 돈을 일부 챙겨 아파트을 사서 셋 방살이를 면했습니다.
누나보다 4살 많은 5촌 조카딸의 집을 봐 주다가 강도를 만나, 충격을 받은데다가 아버지의 결혼 성화에 현재
매형과 결혼을 했고 큰딸 혜림이가 출산한지 얼마 안되서 시어머니께서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시어머니께서 잠실 장미아파트 상가에서 야채가게를 하고 있 었는데 가게를 문을 닫을 수 없는 상황이라, 장사를 해 보지 않은 누나가 혜림을 등에 엎고 억척스럽게 장사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하남시가 동부읍시절 매형이 정통 속셈학원을 차렸는데 누나의 내조는 형용할수 없을 정도였고 큰형의 둘째딸을 교사로 근무시킨 적도 있었으며 누나보다 10살 연하 외조카도 데리고 살기도 했습니다.
누나보다 2살 많은 오빠인 셋째형이 오랜기간 정신병원 입퇴 원할때 누나부부가 보호자 역할을 자청했고,
형이 이혼하고 자녀들과 사는 모습이 안스러웠던지 많은 시간을 같이 살며 오빠 뒷바지 했습니다.
형의 아들과 딸이 분가이후에도 누나는 형과 같이 살면서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고 형이 세상 떠나기 직전까지
만 2년동 안 누나부부가 대소변을 받아냈고 욕창치료하고 누구도 할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제 아내의 경우 1년 시한부선고 받고 24년을 살다가 1년 5개월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코로나 한창일때 간병인을 구하지 못하자 올캐와 시누이 관계에 불구하고 누나가 1주일넘게 간병을 해 줬습니다.
제 딸도 있고 아내의 여동생도 있지만 누나가 간병을 자청했습니다. 매년 김장을 해 주고 있고 매형한데 옷이
크다는 이유로 많은 옷을 저에게 줬고, 큰누나나 큰형수에게 옷과 특산 물을 챙겨 주었습니다.
우리집안 장손인 조카가 외국에 장기간 근무로 제사나 차례 를 지내지 못해, 저와 누나는 어머니 기일인 매년
가을에 고향에 가서 부모님 산소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음식 장만은 대부분은 누나가 합니다.
7남매지만 저와 누나가 집안 대소사를 거의 다 이끌어 왔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자 경제사정이 어려운
동생에게 어머니 모시는 조건으로 남은 재산을 넘겼고 제가 부담하는 벌초비를 가끔 도와 줍니다.
누나는 몇해전에서야 집을 장만하였는데 역시 또순이 답습 니다. 두 딸을 모두 결혼시켰고 손자 2명과 손녀
1명을 두고 있습니다. 저희 7남매중 해방둥이인 둘째형과 작은누나와 저만 생존하고 있습니다.
큰형이 26년전에 타계했고 이어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으며 17년전에 막내인 동생은 심근경색으로 돌연사했고
4년전 셋째 형이 돌아 가셨고 작년에 큰누님을 돌아 가셔서 둘째형이 있지만 실질적으로 둘뿐입니다.
나보다 두살 많은 누나는 이기보다 이타로 살아왔고 부모님 과 형제 자매 및 조카들까지 따뜻하게 성심 성의
것 해 왔습니다. 오늘이후 부터 누나가 자신만을 위해 행복하게 오랫동안 잘 살았으면 합니다.
누나의 칠순잔치를 준비를 한 두딸부부와 자리를 빛내주신 여러분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누나의 건강과 가정의 평화를 위해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이 성원으로 제가 선창하면 '잘 살아'로 해 주세요.
칠순연은 오후 6시부터인데 조금 늦게 오신 분이 있어서 부페에서 식사했고 사회는 누나의 큰사위가 맏았고
스타트는 누나 사진을 중심으로 영상을 만들어서 시청했는데 박수가 나올 만큼 잘 만들었다.
이어 큰딸이 엄마에게 감사패 증정이 있었고, 작은딸이 꽃다발 전달식이 있었고, 손녀가 할머니에게 자작 편지를 읽고는 유치생인데도 영어를 잘해서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해 축하하여 박수 받았다.
큰누나의 장남이 사회를 잠시 맡아, 누나의 자손 7명이 3번 무릎 꿇고 절을 했고(배례: 拜禮), 술을 따라주었고,
케익에 초를 켜고 생일 축하 노래 부른후, 절단식하고 매형이 '축사'를 했는데 긴 편이었다.
내가 뽀뽀해라고 하자 손자들까지 가세하여 시도가 있었고, 앞서 소개한 내 축사는 누나의 둘째 사위가
노트북에 글씨를 크게 해서 읽게 좋게 해 줬으나, 조금 보기는 했지만 볼수없는 여유가 돼 버렸다.
누나는 지인들에게 잘 살던 이야기를 해 왔는데 단칸 셋방 이야기에 대해 불만이었는데 내 의도는 어려운
상황에서 누나 덕분에 전세를 면한 것을 부각한 시도였다. 내가 원고대로라면 7~8분 분량이었다.
원고 무시로 두배 이상 길어져서 지루한다는 평가를 받았고, 어제 참석한 조카들의 이야기를 가급적 자제를
했다. 누나의 큰딸은 잘했다고 했고, 제수씨는 내 육성이 세상떠난 동생과 같다며 눈물을 흘렀다.
매형의 건배 제의 등으로 행사는 오후 8시가 조금 넘어 종료되었고 누나와 내 손주 6명이 별도의 장소에서
잘 노는 모습 을 보니 보기가 좋았으며, 누나가 조카들의 모든 손주에게 5 만원권 지폐를 주었다.
나는 갖고 있는 돈이 없어 오랜만에 만난 3째 형의 손주에게 1만권 5장을 주는데 그쳤고 근처에 누나의 둘째딸
집에 가서 둘째사위와 둘이서 소주와 맥주 마셨고, 누나는 큰누나의 장남 차타고 귀가했다.
나는 누나의 큰사위의 차로 귀가했고 큰딸가족은 자정에 대구집에 도착해 개드릅 잘 챙겼다. 아침엔 7남매중
6남매의 가족 단위로 사진을 단톡으로 보냈고 기념품중 수건은 큰누나의 장남이 스폰했다.
오늘은 원문이 길어 뉴스는 생략하며 오늘은 마치 5월 하순 같은 완연한 봄 날씨가 이어지는 가운데 일교차가
크게 벌어 지겠고 서울 낮 기온 24도로 4월의 첫 일요일 오후는 행복하 게 잘 보냈으면 합니다.
♧https://youtu.be/q1X0z-lCz58?si=xMxWApd8ZWFKOV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