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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640571
“2000년 국제법정 이후, 특히 2010년대 들어 위안부 피해 증언의 기록과 영문 번역의 중요성이 커졌어요. 국내 여러 학자와 정의기억연대 등 관련 단체에서 재촉성 격려가 이어졌지만 여러 일정과 이유로 선뜻 나서지 못했죠. 할머니들의 입말에는 한국인조차 알아듣기 어려운 방언이나 토속어가 많아요. 그걸 영어로 표현할 분은 위안부 문제와 현안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서 우리말과 영어를 모두 아주 탁월하게 잘하시는 분이어야 했는데 적임자를 찾는 게 쉽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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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쪽 리뷰팀은 2000년 국제법정 증언팀에서도 함께했던 까닭에 “할머니들의 증언에 대한 애정이 깊다”고 했다. 그러나 번역 작업은 녹록지 않았다. 한국어와 영어의 언어구조 차이가 큰데다, 할머니들의 구술은 단어의 생략, 시간과 공간을 수시로 넘나드는 기억, 사실 확인이 필요한 대목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입말은 문법에 맞지 않는 비문도 수두룩하다. ‘텍스트’(문자)가 아닌 ‘콘텍스트’(맥락)를 이해하는 게 필수적이었다. 구술에서 생략된 낱말은 대괄호 안에, 몸짓과 표정 묘사나 간단한 해설은 소괄호 안에 삽입하고, 자세한 배경 설명이 필요한 대목은 일일이 주석을 달았다. 양 교수는 당시 고민을 이렇게 회고했다.
“저희가 증언집(한국어판)을 만들 때 가장 큰 유혹은 독자들이 알아듣기 쉽게 문장을 윤문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술을 매끄러운 문장들로 고치면 증언자의 언어가 아니라 저희(증언팀)의 언어가 돼버리죠. 저희는 독자들에게 피해 생존자의 언어를 연결해드리고 싶었어요. 거기에 그치지 않고 피해자들의 육체성, 어떤 정서, 언어와 인지까지 전해주는 매개자, 브리지(다리) 같은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최소한의 개입’ 원칙이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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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할머니는 ‘군인들이 나래비(줄)를 섰어. 성병 검사를 받았어’ 이렇게만 구술했는데, 미국 쪽 번역팀에서는 ‘그들이 성병 검사를 받기 위해서 줄을 섰다’는 식으로 번역한 거예요. 이때 성병 검사를 받은 주어가 ‘그들’(They)인지, 증언 당사자 할머니가 포함되니까 ‘나’(I)’ 또는 ‘우리’(We)라고 해야 하는지도 논쟁거리였죠. 미국 쪽 젊은 번역자들이 전체 상황이나 맥락을 미처 이해하지 못했을 수 있다 보니 번역문 초안에도 편차가 있었죠.”
방언과 토속어, 우리말 고유의 느낌을 살리면서도 정확한 뜻으로 옮기는 건 더 큰 장벽이었다. “할머니들이 쌀을 사는 걸 ‘쌀 팔아온다’고 말하는데, 미국 쪽 젊은 번역자들은 문자 그대로 ‘할머니들이 쌀을 판매한 것처럼 ‘sell’로 옮긴 경우도 있다”는 전언은 상대적으로 평범한 일화였다. “전라도 출신 할머니가 어떤 장소를 ‘해사무리’라고 말한 것은 전라도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알 수 없어 그냥 포기하고 썼어요. 그런데 번역팀 초고에선 그걸 ‘해산물’(seafood)이라고 번역한 거예요.”(좌중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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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팀과 리뷰팀 각각의 전문성과 특장점을 극대화한 긴밀한 소통은 우리말 특유의 언어 감각까지 되살린 영어 문장들을 만들어냈다. 예컨대 “그런디 [고자 영감은 ] 어디 갔다가 틸릉틸릉틸릉 와서는, (…) 아이구, 지그 어매가 죽어 논게롱”(최갑순)이라는 말은 “But then [this impotent old man] went somewhere else and came trot-trot-trotting back, (…) aigoo~ now that his mom was dead and gone”으로 번역됐다.
양 교수는 “번역팀과 리뷰팀의 관계가 업무 분장뿐 아니라 ‘증언의 세대 계승’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평가했다.
“2000년 국제법정 당시 제가 이끌었던 한국의 증언팀이 20대 대학원생들이었어요. 다시 20년이 지나서 이번 미국 쪽 번역팀 참가자들도 현재 박사 과정이거나 이제 막 박사학위를 받은 젊은 세대거든요. 한국·중국·일본·미국까지 혈통과 문화적 배경도 다양합니다. 그런 분들이 위안부 문제에 관심과 전문성을 갖게 돼 앞으로도 계속 연구와 교류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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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교수는 “현재로선 일본과 협상을 잘해서 과거사 문제를 풀어가는 건 난망하다. 일본 정부에 기대할 게 별로 없다”고 했다.
“결국 한국과 일본의 시민사회의 역할과 연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유엔이나 국제 인권기구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한국의 위상과 포지션을 늘려나가야죠. 또 (진실을 알리고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콘텐츠를 갖는 게 중요합니다. 법학이든 문학이든 기록물이든, 다양한 분야에서 지식과 담론을 생산하고 연대를 확산할 수밖에 없어요. 저희는 앞으로도 전시 성폭력과 인권을 논의하는 자리가 더 많아질 것이란 희망을 가지고 있고, 그런 희망이 있으니까 이런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대단하시긔!!!
멋지시냄!!!
증언의 시대계승이라니 감동이긔
기사좀보고왔어요 꾸준히 이어지면 좋겠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