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숙근은 1887년 4월 3일(음) 조선 고종 24년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에서 선산(善山) 도호부사(都護府使) 해주오씨 정무공파 24세 오일영(吳鎰泳)과 온양정씨(溫陽鄭氏) 사이에 외동딸로 태어났다. 1904년 김좌진 장군과 결혼하기까지 17년간 친정 안성 덕봉리(덕뫼마을)에서 생활했다.
이러한 선비 집안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고 부족함이 없이 곱게 자란 오숙근은 결혼하자마자 새신랑 남편 김좌진의 일제 침략에 맞서 국권회복운동, 계몽운동, 독립운동 등에 따라 파격적인 행보를 곧바로 시작한다.
당시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 즉 ‘아내는 반드시 남편의 뜻을 따르고 좇아야 한다’가 일반적인 여자의 도리라 하여도 결혼과 동시에 벌어지는 급격한 변화는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보람도 있었겠지만, 참한 새색시 오숙근으로서는 상대적으로 더 힘들고 어려웠으리라 여겨진다.
더욱이 오숙근은 1930년 1월 남편 김좌진이 만주에서 순국하자 주변을 정리하고 서울로 귀국하여 대부분의 독립운동가 가족들이 그러하듯 어렵게 생활한다.
그런데 일제가 만주 땅에 모셔진 독립군의 묘까지 파헤친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부인 오숙근은 홀로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여 만주로 가서 김좌진의 유해를 모시고 와 조국 땅에 안장시킨 열녀가 된 것이다. 오숙근이 홀로 김좌진의 유해를 목숨을 걸고 봉환(奉還)하였음에 반하여, 위대한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의 유해와 묘소는 흔적조차 못 찾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오숙근의 행적은 더 소중하고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