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학 창달 및 향후 우리 문학의 나아갈 길 - 문학의 꿈, 새로운 기적의 희망 - 최원현 1. 들어가며 국력을 경제력이나 국방력으로 평가하지만 인간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문화적 경쟁력이 얼마나 있는가를 보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정답이지 않을까. 그러나 그 뻔한 정답을 대부분 무시하고 산다. 그렇다면 산다는 의미에서 벗어난 삶을 산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알게 모르게 그걸 지켜가며 살아가는 게 인간이다. 요즘 아이들이야 그렇지 않지만 60대 이상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나 어머니로부터 전해져 오는 옛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호랑이 이야기, 도깨비 이야기는 단골 메뉴였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거나 배웠고 어떻게 살고 싶은 지도 생각했다. 착하게, 아름답게, 정직하게, 그러면서 건강하고 멋지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내면 깊이 자리하게 되었고, 그 생각을 가슴에 품었고, 그건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남아있을 거였다. 그 생각이 무엇일까. 산다는 것,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것, 그런 우리의 소망이나 꿈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그런데 그런 도깨비, 호랑이가 사라져버린 지금 삶의 정서는 왠지 삭막함이 감돈다. 문학은 철학보다도 인간이란 존재가 무엇인가를 더 넓고 깊게 생각게 한다.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만으로도 우린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증명이다. 말로 하지 않아도, 글로 쓰지 않아도 해오고 있던 것, 그것은 문학이었다. 내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이 글자 없는 책이었고 그 분들의 일상 한 마디 한 마디가 대사였다. 초가지붕 처마 끝으로 내리는 빗방울, 기와지붕 선을 타고 내리던 빗방울,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 아침이면 재잘재잘 들려오던 새 소리, 한 가족이던 소와 개와 닭의 울음소리, 우린 이런 문학 속에서 살았다. 아니 문학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사는가? 사랑하며 산다? 무엇으로? 그래도 문학으로 산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이 달라졌을 뿐이다. ‘삶이 주는 기쁨은 인간이 맞닥뜨리는 모든 고통과 역경에 맞설 수 있게 하고, 그것이 삶을 가치 있게 만든다.‘는 서머싯 몸의 말에도 동의한다. 우린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삶, 그런 시대를 살아왔다. 그런데 그런 삶이 사실 문화가 되었고 문학이었다. 우리 고유의 정서와 사유가 담긴 것들, 그런 시대를 산 우리야말로 색깔과 소리와 향내가 가득한 전설적 문화 산물이었다.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있는 현대에서 지구가 앓고 있는 만큼 우리도 정서적 고향을 잃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향기 자욱한 옛것들이 사라진 틈에서 새것, 새로운 것에 적응하느라 바쁜 우리가 되어버렸다. 2. 우리 문학의 현황 2020년대 한국의 문학은 외형적으론 확실한 부흥기라 할 수 있다. 한국문인협회·국제펜한국본부·한국작가회의 구도로 구성되어 있는 우리나라 문인의 수만 봐도 한국문인협회 만도 1만5천명에 이르는 등 대단하다. 문학지도 수백 종에 이른다. 그러나 내용면으로 보면 문학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라던가 문인이 사회에 주는 영향력은 오히려 옛날보다 못 한 것 같다. 왜일까. 문학은 작품으로 말해야 하는데 조직의 크기, 등단연수 등으로 내용 외적인 부분에서 힘을 과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조직과 등단연수 다 중요하다. 하지만 크기만 했지 맛은 없는 빵을 먹는 것처럼 독자를 실망시킬 수 있는 여지들이 많은 게 현실이다. 왜 문인협회에 들어가지 않느냐는 질문을 해보면 들어가서 뭐하느냐고 반문한다. 들어가야 할 필요성, 들어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그와 조직의 관계에서 소통이 안 되고 있다는 것이고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고 다시 말하면 얻을 것이 없다는 것, 그러니 협회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문학 5단체는 한국문인협회(이사장 이광복 소설가), 국제펜한국본부(이사장 손해일 시인), 한국작가회(이사장 이상국 시인), 한국시인협회(회장 나태주 시인), 한국소설가협회(이사장 김호운 소설가)를 말한다. 그러나 그 5단체도 사회에 국민에 독자에게 진정한 마음의 지주가 되지 못하고 있고 수많은 문학지들이 매월 나오고 있지만 그걸 애타게 기다리거나 빨리 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도 드물다. 물론 그것들보다 더 재미있고, 쉽고 편하게 접할 수 있는 문화거리들이 많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넘쳐나는 먹을거리 중 그래도 언제든 먹고 싶은 좋은 음식 하나쯤은 있고, 수많은 노래가 있지만 내 애창곡이 있는 것처럼 문학도 그러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언제부터 우리 문학이 이리 사랑을 잃어가고 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 문학은 크게 중앙문학과 지역문학으로 나눌 수 있다. 문학에 무슨 중앙과 지역이 있을 수 있는가 할 수 있지만 지역적인 한계들이 독자도 갈라놓을 수 있고 문학의 향유 내지 수용이나 보급적인 차원에서도 지역한계를 넘을 수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책을 출간해도 서울에서 하는 경우와 지방에서 하는 경우 그 보급에도 차이가 나는 것도 있고, 또한 서울에서 활동하는 작가와 지방에서 활동하는 작가의 활동영역 한계도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많은 시간이 지나 절대평가가 될 때에는 또 달라지겠지만 당면한 현실 곧 지금이라는 시간의 영역에선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런 한계의 극복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필자가 수필가인 만큼 수필부문을 예로 들어본다면 수필 전문잡지가 30여종인데 대부분이 서울에서 발행되고 있고 지방 영역이 훨씬 큰데도 대구의『수필세계』,『수필미학』, 전주의 『수필과 비평』, 제주의『수필오디세이』, 부산의『에세이문예』, 인천의『에세이포레』등일 뿐이다. 충북지역에도 수필 전문 잡지는 없다. 수필가인 김홍은 교수가 발간하는『푸른솔문학』이 수필 중심 종합지일 뿐이다. 그러나 다행히 지방자치제하에서 양상이 많이 변하고 있다. 문화의 중심도 바뀌고 있고 운영주체도 변하고 있다. 오히려 최근에는 지방의 문학상들이 큰 상금으로 주목을 받고 있고, 지자체들이 대거 상금을 제공하며 문학상을 장려하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지역문학은 어떻게 자생력을 키우며 지역 특성을 살리면서 문학중심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현재 지역의 문화는 문화원 중심, 예총 중심, 문인협회 중심, 문화재단 중심, 지자체 중심, 개별 문학단체 중심 등으로 다양하게 추진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수혜자도 많아지고 해서 굉장히 활성화 된 듯도 보이나 추진 주체에 따라 동일한 목적으로 추진되는 것이 양립하기도 하고 중복되기도 하며 예산의 낭비 및 비효율성을 초래하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이를 통괄하고 조정하는 조직적 관리체계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각 단체마다 유사한 사업을 경쟁하듯 하는 경향도 있고 전체적인 통합 평가 또는 조정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지역문화 발전을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되어 지고 또 정치적 힘까지도 합류하여 일시적 가시적일지라도 문화적 시류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3. 충북지역의 문학 1) 충북의 문인들 충북은 우리나라의 중간지역으로 백제, 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며 고유의 풍성한 문화적 유산을 품고 있는 지역이다. 그래선지 여러 정신적 문화유산이 병합된 다양한 민족혼이 발현되어 문학에도 흘러들어왔고 많은 훌륭한 문인들을 배출했다. 벽초 홍명희(괴산.소설) 정지용(옥천.시) 김기진(청원.시) 조명희(진천.시 소설) 이무영(음성.소설) 오장환(보은.시) 박재륜(충주.시) 유재형(진천.시) 등 한국문단사를 빛낸 작가들이 충북 출신이다. 그런가 하면 1950년대에 등단한 김사달(괴산.수필) 전예근(중원.동시) 박재용(청주.동화) 김태길(충주.수필) 신동문(청주.시) 신경림(중원.시) 조남두(단양.시) 유흑열(소설) 유승규(옥천.소설) 김영옥(영동.시) 송도(영동.수필) 구석봉(영동.소설) 유종호(충주.평론)를 비롯하여 1960년대에 등단한 조장희(청원.동시) 김문수(청주.소설) 최창희(음성.소설) 이상범(진천.시조) 조상기(진천.시) 박용삼(영동.시 시조) 홍기삼(청주.평론) 양채영(충주.시) 박희선(영동.소설) 안수길(청주.소설) 윤종혁(영동.시) 안장환(충주.소설) 오탁번(제천.시 소설) 등은 한국문단을 빛냈고 지금도 빛내고 있는 분들이다. 물론 70년대, 80년대 이후 현재까지도 계속 수많은 훌륭한 문인들이 충북의 자랑이 되고 있다. 오늘의 충북지역 문학이 이만큼 자리를 잡게 된 데는 그 선배 문인들의 공을 결코 잊을 수 없다. 2) 충북의 문학단체 충북지역 문인들의 구심점이 되어주었던 것은 문학단체다. 충북문인협회와 내륙문학회가 그 중심이었다. 내륙문학회는 1971년 11월 향토문학의 질적 향상 방안을 고심하던 충북 문인 6명(박재륜 강준형 강준희 양채영 정기환 홍해리)을 발기인으로 하여 창립되어 바로『내륙문학』창간호(72.봄)를 냄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래 56호의 문학지를 출간하고 내륙문학상을 운영하고 있다. 단일 명칭으로 가장 오래된 문학단체인 셈이다. 충북문인협회는 1957년 충북문화예술협회로 창립(1.10) 하였다가 1.24일 충북문화인협회로 이름을 바꿨는데 2.24일 전국문총 충북지부로 되었다가 1958년 충북문화인협회로 개칭하였다. 그러다가 1962년 1월 20일 충북문인협회가 되었다. 현재는 한국문인협회 충북지회로 되어있으며,『충북문예』(74.10.충북문인협회)가 1976년부터『충북문학』으로 발간되고 있다. 충북지회 산하엔 청주(57). 영동(70). 충주(71). 제천(76). 괴산(79). 진천(80). 단양(88). 음성(88). 옥천(99). 증평(04). 청원(04)문인협회 곧 한국문인협회 충북지회 산하 지부들이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문학동인으로 전술한 내륙문학회(71) 외에 괴산문학회(78). 중원문학회(79). 뒷목문학회(80), 충북숲속아동문학회(83). 충북수필문학회(84), 여백문학회(86). 행우문학회(87). 보은문학회(88). 문향회(91). 충북시조(93). 충북민예총(94). 충북여성문학회(95). 사람과시(95). 청풍문학회(96). 충북소설가협회(96). 둥그레시동인회(96). 중부문학회(97). 푸른솔문학회(99). 시사랑문학회(99). 심향문학회(2000). 풀꽃동인회(01). 음성수필문학회(08) 등이 활동을 하고 있어서 서로간의 선한 영향력으로 충북지역 문학의 큰 틀을 이루고 있다 하겠다. 모든 문학회가 자체 문학지를 발간하고 있는 것도 창작의욕과 문학인구의 저변 확대 및 문학의 지경을 넓히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하겠다. ㈜ ( ) 안의 숫자는 창립연도임. 3) 충북의 문학상 문학상은 문학 활동의 꽃이라 할 수 있다. 충북지역의 문학상으로는 충북수필문학상(94.충북수필). 내륙문학상(96.내륙문학). 충북문학상(97.충북문인협회). 홍은문학상(99.푸른솔문학회). 청부문학상(99.청주문인협회). 푸른솔문학상(04.푸른솔문학회). 충북여성문학상(04.뒷목문학회). 올해의 여성문학상(04.충북여성문인회), 송강정철문학상(15.푸른솔문학회) 등이 운영되고 있으며, 충청북도학생문학상(충청북도교육청)과 2019년부터는 충청북도와 한국소설가협회가 무예소설문학상을 공모하여 시상하고 있다. ㈜ ( ) 안의 숫자는 창립연도임. 4. 문화 공간으로서의 지역과 문학 충북 지역은 문화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위치적으로는 유일하게 바다와 접하지 못한 지역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내륙문화로 자리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바다가 없는 만큼 무심천과 남한강이 흐르고, 소금강, 괴강, 제천천이 젖줄이 되어 주었다. 속리산(보은), 월악산(제천), 소백산(단양), 계명산(충주), 두타산(진턴), 백악산(괴산), 우암산(청주), 대성산(옥천) 등 산자수명의 아름다운 청정지역으로 인심 좋은 양반의 고장이다. 세계기록문화유산인 직지(直指)의 지역으로 정지용문학관(옥천), 오장환문학관(보은), 조명희문학관(진천)과 영동문학관(영동), 원서문학관(제천), 21세기문학관(증평), 김득신문학관(증평) 등 곳곳에 문학인을 기리고 문학정신을 선양하는 문학관이 있다. 뿐인가. 국립청주박물관(청주), 충주박물관(충주)을 비롯하여 특성을 살린 청주의 고인쇄·잠사박물관, 충주의 커피·술·한글·무술박물관, 진천의 종·화폐박물관, 음성의 의약·철박물관, 괴산의 한지, 제천의 차(茶), 수안보의 곤충, 단양의 낚시, 괴산의 농업박물관 등 타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박물관의 지역이기도 하다. 교육적인 부분에서도 청주의 충북대학교와 청주대학교, 한국교원대학교, 공군사관학교, 충북보건과학대학교, 충청대학교, 서원대학교, 꽃동네대학교를 비롯하여, 제천의 대원대학교, 순복음총회신학교, 세명대학교, 음성의 강동대학교, 극동대학교, 옥천의 충북도립대학교를 비롯하여 건국대(충주), 우석대(진천), 유원대(영동), 한국교통대(증평·충주), 한국방송통신대(청주), 한국폴리텍대(청주·충주) 등 대학교의 캠퍼스가 있는 교육 중심 지역이기도 하다. 이런 지역적 특성을 가진 충북 지역은 홍명희의《임꺽정》, 이무영의《농민》, 김기진의 《해조음》, 김문수의《만취당기》같은 소설을 낳는 산실이 되었고, 정지용, 오장환, 신경림, 이상범, 오탁번 등의 시인과 유종호, 홍기삼 같은 문학평론가, 김사달, 김태길, 송도 같은 수필가가 좋은 작품으로 한국문단을 부흥케 했다. 그러나 요즘 이 시대는 전자매체 영상문화의 시대가 되면서 활자매체인 문자문화는 문학적 영향력을 잃어가기 시작했고 특히 젊은 층에서 종이책이 소외를 당하면서 출판시장까지도 급격하게 큰 위험에 빠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대중적 문학의 향유조차도 한계에 몰리게 되고 고급한 수준으로 격조 높은 취향을 자랑하던 문학은 나아갈 길을 놓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런 시점에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텔레비전이 나오자 라디오의 시대는 갔다고 했지만 교통수단이 자가운전의 시대로 바뀐 요즘엔 오히려 라디오의 청취율이 높아지는 것처럼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수요층이 창출되기 마련이고 거기에 따른 새로운 생산체계로의 변화와 발전도 따르기 때문에 그걸 빨리 찾아내어 침체 공백기를 최소화하고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겠다. 이럴 때 지역은 향토적 친밀감과 유대성의 동류항적 분위기로 공간을 활용하고 홍보하며 더 긴밀한 관계 속에 문화결속을 다질 수 있게 된다고도 볼 수 있다. 지역문화가 중앙문화만 못하다고 할 수 없다. 물론 차이가 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지역만이 낼 수 있는 맛과 멋이 있기 때문에 그걸 차이라고 할 수도 없다. 오히려 독특한 문화유형, 특별한 문화양상으로 높이 평가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되듯 그 지역만이 낼 수 있는 맛과 멋은 문학에서도 그렇게 나타날 수 있다. 그 지역에서만 출토 되는 옛 유물로서의 가치는 다른 지역의 그 무엇과도 바꾸거나 비교될 수 없는 것처럼 문화도 오히려 상호 어울리는 조화로 함께 가치를 높일 수 있다. 무심천이 만들어 내는 문학이 있는가 하면 속리산 월악산이 만들어내는 문학이 있을 수 있고 충주의 커피 박물관, 술 박물관, 한글박물관, 무술박물관, 청주의 고 인쇄박물관, 잠사박물관이 있기 때문에 태어나는 문학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은 중앙보다 못한 문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도 만들어낼 수 없는 문화를 만들어내는 곳이라는 말이다. 그걸 한 지역 만으로가 아니라 지역과 지역을 개체로 활용하면서 그것을 연합하고 융합하여 특별한 빛깔과 향기를 내는 문화로 창출해 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실 문화공간만 보더라도 지역별 문화공간이 놀랄 만큼 잘 되어있는 것을 본다. 군 단위, 작은 시 단위에도 문화예술회관이 없는 곳이 없다. 물론 인구가 많지 않아 이용도가 낮고 향유하는 계층이 많지 않아서 크게 활성화 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특성을 살려 소규모로 아기자기한 공연이나 행사를 친밀도 높게 펼쳐내는 문화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장점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문학은 개인적 성취도가 높은 것이므로 고도의 자기 투자가 없으면 안 된다. 2020. 11. 21. 중앙선데이. 15면에는 눈에 띄는 기사가 있었다. 제주에 있는 <생각하는 정원> 성범영 원장의 이야기였다. 이 정원은 1995년에는 중국의 장쩌민 주석이 다녀갔고. 1998년에는 후진타오 부주석이, 그리고 2005년에는 당시 저장성 서기였던 시진핑이 방문을 했다는 곳이란다. 어떤 곳인데 그랬을까. 세계적인 여행 플랫폼 트립 어드바이저(TripAdvisor)의 2020년 트래블러스 초이스 어워드에 선정되었고. 9월엔 한국관광공사 선정 코리아 유니크 베뉴(Korea Unique Venue) 곧 국제행사에 적합한 독특한 장소로 선정된 곳이란다. 그런데 이곳을 만든 성범영 원장은 고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인데 그의 말이 놀라웠다. 1968년부터 이곳을 개간하고 가꾸기 시작했다는 그의 말은 높이 올려다 보이는 경지의 말씀으로 들렸다. “우리 정원이 유명한 건 단순히 아름다운 분재 작품을 많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돌 하나 나무 한 그루를 놓을 때도 나는 수십 번 수백 번 생각합니다. 혹여 바로 옆 나무의 빛이 퇴색하지 않을지, 전체의 구도를 해치지는 않을지, 더 나아가 네 계절을 다 돌았을 때 그 나무가 변화할 모습까지도 그려봅니다. 그래서 정원을 가꾸는 건 사람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손톱 발톱 빠지고 손목 부러지는 건 다친 것도 아니고, 병원에 입원한 것만 12번, 수술만 7번을 했어요. 여기 조성하는데 15톤 트럭 1만대 이상의 돌이 들어갔죠. 높은 곳에서 작업하려면 돌은 미리 다듬어놓고 크레인에 올라가서 돌을 하나하나 쪼아 맞춘 뒤에 시멘트 반죽을 붙입니다. 그 과정이 얼마나 지루하고 힘든지... ”라고 회상했다. 참으로 우공(愚公)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의 말을 읽으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돌 하나 나무 한 그루를 놓을 때도 나는 수십 번 수백 번 생각‘한다는 그, 그것은 ’혹여 바로 옆 나무의 빛이 퇴색하지 않을지, 전체의 구도를 해치지는 않을지, 더 나아가 네 계절을 다 돌았을 때 그 나무가 변화할 모습까지도 그려‘보기 때문이란다. 글을 쓰는 우리가 과연 이런 정신이나 마음으로 펜을 잡고 문장을 만들어내고 있을까.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는 자신의 정원을 위해 ’손톱 발톱 빠지고 손목 부러지는 건 다친 것도 아니고, 병원에 입원한 것만 12번, 수술만 7번을 했‘다고 했다. 이걸 조성하는데 15톤 트럭 1만대 이상의 돌이 들어갔다고 한다. 작가로 말하자면 이건 독서량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정원이라는 글 한 편을 쓰기 위해 그 전초작업으로 15톤 트럭 1만대 이상의 돌을 준비하는 노력과 마음, 과연 우리는 그러고 있는가. 거기에다 그는 높은 곳에서 작업하려면 돌을 미리 다듬어놓은 후 크레인에 올라가는데 거기서 다시 돌을 하나하나 쪼아 맞춘 뒤에 시멘트 반죽으로 붙인다고 했다. 그 과정이 너무너무 지루하고 힘들지만 그는 그걸 다 해냈다고 한다. 우리의 문화를, 우리의 문학을 살려내고 부흥시키고, 내 문학의 성취를 가져 오려면 바로 이런 심고와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문화공간을 성범영 원장의 눈으로 마음으로 손으로 보고 해낸다면 어떤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을까. 그것을 설령 우리가 직접 누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만들고 가꾼 그것들은 우리의 후배 후세들이 누릴 것 아닌가. 5. 지역문학으로서의 한계성 극복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문학 또한 최소한 거기에 미친 사람 한둘은 있어야 일이 된다. 특히 지역문학은 헌신적인 누군가의 노력이 없으면 발전은 고사하고 시작조차 할 수 없다. 무언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거기 분명 거기에 미친 사람이 있었던 것이고 뭔가 조금은 잘 되고 있다면 그런 사람이 몇은 된다는 말일 수 있다. 충북지역의 문학 또한 그렇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최근 20여년만 살펴봐도 금방 눈에 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필자가 아는 김홍은 교수도 그런 한 분이 아닐까 싶다. 그가 창립한 푸른솔문인협회는 이젠 충북지역에서 상당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으며 지역문학 속에 탄탄한 뿌리와 가지를 자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알기로 푸른솔문인협회는 1999년 9월 9일 회원 20명이 푸른솔문학회를 발족시킨 것으로 김홍은 교수가 고문으로 초대회장은 정태익, 부회장은 박미향, 사무국장 장재섭으로 출발하여 어느새 창립 20주년(2019)을 넘은 것으로 알고 있다. 충북대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교실에서 김홍은 교수로부터 강의를 들은 수강생들로 시작된 모임으로 ’예술은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지적능력과 소양을 갖춘 인간화, 전문화를 이뤄 자신이 갈고 닦은 지식을 지역사회에 펼침으로서 삶의 질을 높여 준다. 아울러 문학인으로써 지역민들이 보다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마음을 갖게 하고, 이를 통하여 자아 성찰을 이루어 가는데‘ 목적을 두고, 회원 간의 친목과 지역사회에 봉사하며, 자아계발을 통해 문학예술인의 긍지를 높이며, 지역문화예술 발전에도 기여하면서 참된 인간의 발자취 만들기를 하자는 뜻을 실천에 옮기고 있는 모임이다. 창립과 함께《푸른솔문학》을 창간(2000.5.20.)하여 많은 등단 작가를 배출했고 홍은문학상(1999). 푸른솔문학상(2004). 송강정철문학상(2015) 등을 운영 시상하고 있다. 어떻게 이만큼의 활성화가 이뤄졌고 20년이 넘도록 개인적 문학회인데도 이렇게 잘 운영되고 있을까. 그것은 바로 여기에 미친 김홍은 교수의 힘에 다른 여러 힘이 가세하여 이룬 성과라 할 수 있다. 문학행사를 해도 분명한 목적을 두고 한다 했다. 곧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이웃을 즐겁게 만든다는 생각, 문학회 활동으로 지역사회의 문화를 높여 간다는 생각, 공동문학 활동을 통하여 개인의 문학위상도 높여 간다는 생각. 문학정서 함양을 높여 문학의 등불로 밝은 사회를 만들어 간다는 생각, 그리고 문학 할동을 통하여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며 즐거움을 나눈다는 생각으로 임하기 때문에 즐거움과 행복을 동반하는 아름다운 모임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지역문학은 작은 단위의 특징인 결속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지금의 내 수고가 내 고향, 내 후배 및 후세들을 위한 초석이 됨을 생각하면서 나의 최선이 단체의 발전임을 동류항으로 모으는 것이어야 한다. 고로 지역문학의 한계는 곧 나의 한계로 나의 협력과 헌신이 먼저여야 하고 그래야 나도 커지고 지역문학도 커질 수 있다. 물론 지역적 한계를 생각할 수도 있으나 1일 생활권 하에서 이제는 그게 큰 제약이 될 수 없고 SNS를 통한 동시적 교류가 가능한 지금의 상황이라 옛날과 같은 한계나 경계가 문제될 수도 없다고 본다. 오히려 얼마나 큰 열정과 참신한 아이디어로 임하느냐에 성취의 문의 크기가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충북지역에는 청주를 중심으로 한 푸른솔문인협회와 같은 문학 동인이 아주 많고 거기에 역사 깊은 내륙문학회를 비롯하여 조직적인 충북문인협회를 중심으로 한 시·군 문인협회가 활성화 되어 있는 만큼 여느 지역보다 막강한 문학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지역이며 특히 1시간 내외로 서울과 연결되는 지역 특성을 갖기 때문에 여타 지역보다 훨씬 유리한 점이 많은 지역이다. 따라서 충북지역의 지역문학으로서의 한계 극복은 내 지역 문학에 얼마큼 충실한가, 내 개인적 문학에 얼마나 열정적인가에 달려있다고도 할 수 있다. 6. 우리 문학의 나아갈 길 우리나라 현대문학은 1970년대가 가장 생동감 있는 문학의 시대가 아녔을까 싶다. 1955년에 창간되었던『현대문학』, 1966년 창간된『창작과 비평』, 1968년에 창간된『월간문학』, 1970년 창간된『문학과 지성』, 1972년에 창간된『문학사상』, 1973년에 창간된『한국문학』등의 잡지들이 문학 활동을 선도하며 한국문학의 자양분을 넉넉하게 만들어 주었고 그런 잡지들을 중심으로 많은 시인, 소설가 등 작가들이 비교적 활발한 발표를 할 수 있었다. 수필의 경우도 이 시기인 1971년에 한국수필가협회도 창립했고 바로 그해 4월『수필문예』가 창간되었으며, 다음해인 1972년에는 수필 전문잡지인 월간『수필문학』도 창간되었으니 문학이 문화의 중심으로 부각되던 때라 할 수 있다. 그 후 1980년대를 거치며 많은 문학잡지들이 태어났는데 2000년대 이후 잡지 중심의 문학은 오히려 쇄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이유는 인터넷 등 온라인을 기반으로 하는 환경이 분위기를 압도하게 되자 문학 매체의 변화와 함께 문학 수용자의 의식도 변화하게 되었다. 종이 잡지가 더욱 큰 위기를 맞게 되었고 한국문학의 정체성까지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까지 되었다. 문학의 본류가 활자에서 온라인으로 옮겨져 가는 불안에 문학의 위기를 어떻게 수용하고 적응하고 선택할 것인가의 고민도 앞에 놓이게 된 것이다. 진화인가 퇴보인가, 살아날 것인가 주저앉고 말 것인가. 비단 방법론적인 문제만도 아니고 단순한 선택의 문제도 아니다. 수요자인 독자 곧 문학시장에 내놓을 상품을 고전적 방법으로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변화에 적응 내지 순응하거나 능동적으로 앞서 나가는 방법을 찾아낼 것인가에 고민이 따르는 것이다. 독자는 오로지 좋은 상품을 골라 사는 즐거움을 누릴 특권이 있다. 작가가 그렇지 않다고 항변해도 통하지 않는다. 우리 문학의 빠른 변화는 작가가 아니라 독자의 자연스런 선택에 따라가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필름이 돌아갈 때 그림이 1초에 16장이 지나가면 에니메이션이 되고, 그게 1초에 30장의 속도로 지나가면 영화가 된다고 한다. 만일 1초에 200장이 지나가게 되면 현실이 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 눈이 읽어낼 수 있는 최대치가 1초에 200장이기 때문이란다.(신용목 <삐삐의 안부> 중. 한국문학 2020. 하반기호) 독자는 작가에게 아무것도 특별히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멈춰있는 그림 한 장씩 보는 것보단 에니메이션이 있다면 그저 그걸 보려할 뿐이고 영화가 있다면 그걸 보려 할 뿐이다. 우리 현실이 에니메이션이나 영화보다 훨씬 변화 많은 보여 짐이라고 해도 문학작품으로 보여 지는 것과는 다르다. 문학의 위기는 어쩌면 그런 선택에서 제외되는 불안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 문학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정통문학에 퓨전이 가미된 문학을 독자는 원할까. 아니 문학이 발전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문학이 인간정신의 가장 고양된 수준을 반영하며 그것은 고적(孤寂)한 창작실에서 자신과의 치열한 대결을 통해 산출되는 독자적인 생산이라는 전통적이고 고색창연한 인식‘(김종회)이라는 관념을 고집하고 있어야만 할까. 문학이 지켜야 할 본연의 가지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인간의 내면을 값있게 가꾸는 문학의 근원적 사명‘(김종회)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는가. 그래도 특히 지역문학을 염두에 둔 우리 문학의 나아갈 길을 생각한다면 몇 가지 대안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첫째는 충북에는 많은 문학관이 있는 특히 테마 문학관이 많다. 전국에는 각 지역을 대표하는 문학관이 80여개 있다. 이곳은 많은 문인과 문학 애호가들이 언제든 맘만 먹으면 찾아올 수 있는 곳들이다. 만일 그곳을 보다 접근성 있는 공간인 문학의 입구로 만들 수 있다면 분명 문학 내지 문화 향수 인구를 다양하고 폭넓게 늘릴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 향수 인구의 지경을 넓혀주는 일이다. 같은 시기를 정하여 일제히 지역적이면서 전국적으로 문학 행사를 펼칠 수도 있고 거기서 펼쳐졌던 문학을 중앙무대로 옮겨 함께 누리는 마당을 만들어 줄 수도 있다. 마치 미스트롯이나 미스터트롯과 같은 경연의 큰 잔치로 만들어보는 방법이다. 시 낭송, 백일장, 각종 공연 등의 문학제를 시대에 맞는 그리고 새로운 수요층을 창출하는 기획의 문학제로 펼쳐내는 것이다. 둘째로 향토성을 살린 그 지역만의 특별한 축제이되 전국에서 그것을 누리러 찾아오게 하는 시도이다. 부산이나 부천영화제, 통영이나 대관령 음악제 등이 지자체의 특성을 살리면서 성공한 것처럼 문학 또한 그런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전국에서 이런 시도가 많이 이뤄졌던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도 잘 되지 않았다면 왜 그랬을까에 대한 원인규명을 철저히 하여 발전적 재 시도를 한다면 길이 보이지 않을까. 최근에 제정된 이 지역의 무예소설문학상은 겨우 2회를 공모했지만 대단한 호응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매년 진행되고 있는 충북예술제와 시화전, 한글백일장, 문학상 등도 지역 특성을 살리며 전국단위로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재정적 문제의 극복이 또한 필수다. 하지만 아이템만 잘 설정하면 지자체나 문화재단, 향토기업 등에서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많다. 얼마큼 향유 층을 자극할 수 있는 테마를 선정하여 지역민에게 어필할 수 있느냐의 가능성이 관건일 수 있다. 필자도 심사를 위해 지역 여러 곳을 방문해 보았는데 그때마다 부러움을 느낄 때가 많았다. 많은 지원을 받고 있어서다. 그 지역만의 문학상 상금 1천만 원을 매년 개인이 제공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도 많다는 말이다. 넷째,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능력이다. 지자체의 문화인식도나 공동체적 유대를 끌어낼 수 있는 요인 중 가장 큰 것이 문학 유산이나 문학인의 향토적 연고다. 문학관이 그렇고 박물관도 그렇다. 문학상도 마찬가지다. 대중적 수요와 지역적 특성을 통해 문학적 효율성을 사회적 확산으로 끌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향토기업인들에게 문학을 사랑할 수 있는 전도적(傳道的) 기회를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기업가는 지역을 위한 봉사로 지원할 수 있고 문학은 그 힘을 받아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사랑이다. 사랑의 힘이 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내 지역을 위한 사랑, 문학에의 사랑도 위기라는 지금이 기회의 때인 것인지도 모른다. 7, 나가며 지난 2020년 11월 5일 우리 시대 최고 지성으로 꼽히는 이어령(86) 전 문화부 장관은 조선일보 100주년 타임캡슐에 ‘날개에서 품개로’라는 제목으로 200자 원고지 1장 분량의 편지를 넣었다. 그는 이 편지에 ‘품개’라는 사전에 없는 말을 지어 50년 뒤를 살아갈 젊은 세대에게 화두로 던졌는데 “날개는 날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것은 “둥지 속에서 알을 품고 있는 날개는 날개가 아니라 품개”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날개보다 더 소중한 날개 ‘품개’라는 말을 50년 뒤 이 세상을 살아갈 젊은이들에게 남기려 한다”고 했다. “우리말 사전에는 없는 이 새로운 말 ‘품개’가 너희들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도 했다. 이 타임캡슐은 50년 후인 2070년에 개봉된단다. 문학은 새로운 상상을 불러내는 능력이요 힘이다. 문학적 상상력으로 씌어졌던 공상과학소설이나 공상과학만화가 거의 다 현실화 되었지 않는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 실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문학도 큰 전환기를 맞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문학의 위기를 독서시장의 축소로만 보는 경향도 있지만 그보다 문학의 위기는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이 변화를 이겨내지 못하면 그게 문제다. 변화를 수용하고 적응하는 정도만이 아니라 미래 세계를 여는 것처럼 이 변화를 주도해야 할 거고 그 변화의 주체가 되어 우리의 흐름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작가와 독자의 구분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도 큰 문제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이 사라진 이 시대의 문학시장은 모두가 작가이고 서로 독자이고 서로 생산자이고 소비자의 세상이다. 그렇다면 그게 정녕 위기일까. 자급자족이 아니라 공유의 시대, 마치 수많은 아바타를 만들어 제1의 나, 제2의 나가 시대 속에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더욱 최선을 다하고 더 확실히 해내는 것이고 더욱 전문성을 확보하고 살리는 것이고 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적응하며 뒤처지지 않는 것이고 흐름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흐름도 이겨내는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이어야지 않을까. 문학은 어디서든 싹트고 자랄 수 있는 생명력이 있다. 척박한 땅에서도 기름진 땅에서도 거기 맞는 싹을 틔우고 자라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다. 인공지능이 소설을 쓰는 시대다. 인공지능에게 인간은 바둑도 지고 장기도 졌다. 그러나 인간 고유의 심성을 무엇이 넘볼 수 있는가. 지역의 문학은 그곳에서만 필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운 유일한 꽃이다. 다른 곳으로 옮기면 자람도 향기도 잃을 수 있다. 그 보배로움, 그 소중함을 잘 지켜내면서 그 향기로움을 멀리 멀리까지 펼쳐내어 행복함을 나누고 그래 멀리서도 그 향기를 따라 찾아오는 매력의 문학이 되게 하면 그게 활성화이고 발전이 아니겠는가. 충북지역만큼 그런 자원이 풍부하고 풍성한 곳도 없을 것이다. 그런 환경도 쉽지 않다. 천혜의 위치와 인심 그리고 환경들이 대한민국 중심부를 뜨겁게 하면 결국 전체가 문학으로 뜨거워지지 않겠는가. 임보 시인의 시 한 편으로 우리 문학인이 그리고 문학이 나아갈 길을 생각해 본다. 수십 권의 시집을 이미 간행하셨다고요? 참, 대단하십니다. 수많은 문학상을 받으신 바 있다고요? 참, 훌륭하십니다. 거국적인 큰 문학단체의 장이었다고요? 참, 위대하십니다. 80이 넘은 문단의 원로 시인이라고요? 참, 존경스럽습니다. 그러나, 참 시인은 작품의 분량이나, 수상의 경력이나 감투의 관록이나, 등단의 이력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가 참 시인인가요? 불의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는 지사인가요? 세상을 등지고 고고하게 살아가는 은자인가요? 지사도 은자도 참 시인의 요건은 아닙니다. 참 시인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시에만 매달린 순진하고 명청한 시쟁이입니다. 시를 생각하느라 끼니를 잊기도 하고 시를 엮느라 밤을 지새우기도 하지만 세상이 알아주기를 크게 바라지 않고 세상이 몰라봐도 크게 낙심하지 않는. 한평생 한 편의 명품을 벼리기 위해 더운 영혼을 쏟는 시의 대장장이 시의 구도자(求道者)입니다. [ 꼰대 시화 -36 ] . < 참 시인 > / 임보 전문 그런 바보스러울 만큼 한 가지에 미칠 수 있는 열정이 있을 때 개인도 지역도 나라 전체도 문학의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이라 생각 된다. 그게 이 시대에 문학이 낼 수 있는 기적 같은 힘이 아닐까. 참고 문헌 김종회, 문학 향유의 확장과 지역문학 창달, 2017. 문덕수문학관 개관17주년 기념강연문. 푸른솔문학회 다음카페, http://cafe.daum.net/greenpine1999 김종회, 향토성의 문화 공간과 지역문학 창달, http://cafe.daum.net/francisba/SL2Q/ 김홍은, 문학의 정체성-충북을 중심으로 한 문학의 발자취, http://blog.daum.net/hekimkk/160 김홍은, 충북수필문학회 탄생의 배경과 발자취, http://cafe.daum.net/greenpine1999 김성곤, 변화의 시대에 살펴본 한국문학의 나아갈 길, blog.naver.com/youkki66/40013038631 최원현 nulsaem@hanmail.net 수필가. 문학평론가.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사)한국수필가협회 월간 한국수필 주간. 사)한국학술문화정보협회부이사장. 사)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조연현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상록수문예대상·펜문학상 수상.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외 17권. 《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 등 문학평론집 2권. 《문학에게 길을 묻다》등 총 20권. 중학교 국어교과서, 도덕 교과서, 고등학교 문학상, 국어 및 중국 동북3성 중학생 글짓기 및 대학수능 문제집 등에 수필들이 실려 있음. |
첫댓글 ’돌 하나 나무 한 그루를 놓을 때도 나는 수십 번 수백 번 생각‘한다는 그, 그것은 ’혹여 바로 옆 나무의 빛이 퇴색하지 않을지, 전체의 구도를 해치지는 않을지, 더 나아가 네 계절을 다 돌았을 때 그 나무가 변화할 모습까지도 그려‘보기 때문이란다.
글을 쓰는 우리가 과연 이런 정신이나 마음으로 펜을 잡고 문장을 만들어내고 있을까.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는 자신의 정원을 위해 ’손톱 발톱 빠지고 손목 부러지는 건 다친 것도 아니고, 병원에 입원한 것만 12번, 수술만 7번을 했‘다고 했다. 이걸 조성하는데 15톤 트럭 1만대 이상의 돌이 들어갔다고 한다. 작가로 말하자면 이건 독서량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정원이라는 글 한 편을 쓰기 위해 그 전초작업으로 15톤 트럭 1만대 이상의 돌을 준비하는 노력과 마음, 과연 우리는 그러고 있는가. 거기에다 그는 높은 곳에서 작업하려면 돌을 미리 다듬어놓은 후 크레인에 올라가는데 거기서 다시 돌을 하나하나 쪼아 맞춘 뒤에 시멘트 반죽으로 붙인다고 했다. 그 과정이 너무너무 지루하고 힘들지만 그는 그걸 다 해냈다고 한다.
지역의 문학은 그곳에서만 필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운 유일한 꽃이다. 다른 곳으로 옮기면 자람도 향기도 잃을 수 있다. 그 보배로움, 그 소중함을 잘 지켜내면서 그 향기로움을 멀리 멀리까지 펼쳐내어 행복함을 나누고 그래 멀리서도 그 향기를 따라 찾아오는 매력의 문학이 되게 하면 그게 활성화이고 발전이 아니겠는가. 충북지역만큼 그런 자원이 풍부하고 풍성한 곳도 없을 것이다. 그런 환경도 쉽지 않다. 천혜의 위치와 인심 그리고 환경들이 대한민국 중심부를 뜨겁게 하면 결국 전체가 문학으로 뜨거워지지 않겠는가.
충북지역 문학의 역사와 현황,
걸출한 문인들의 내력을 일부나마 보게되었습니다.
더욱이 김홍은 교수님의 노고가 지역 문학의 과실로 주렁주렁 열리기 시작하여 기쁘고 감사합니다.
푸른솔문인협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