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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F4는 넷상의 역덕후들이 말하는 '명나라의 멸망을 결정적으로 이끈' 암군들입니다.
대체 어떤 실정들을 저질렀기에 저런 악평들을 듣게 되었는지 간략하게나마 다루겠습니다.
참고로 멤버들은 정덕제, 가정제, 만력제, 천계제 이 4명의 황제들로 되어있죠.
- 명 무종 정덕제 주후조 -
생몰 : 1491 - 1521
재위 : 1505 - 1521
F4 대망의 첫타자, 정덕제 주후조입니다.
사실 태자 시절에는 자질이 매우 뛰어났다고 합니다. 선정으로 이름난 자기의 아버지 홍치제도 기대할 정도로...
그러나 점차 성장하면서 경전 읽기를 게을리하고 놀기를 즐겨하면서 환관들과도 어울리는 게 점점 심해졌는데...
결국, 홍치제 사후 황제로 즉위하면서 고삐풀린 망아지마냥 더더욱 자기 멋대로인 생활을 즐겼다고 합니다.
'표방' 이라는 화려한 별궁을 만들어 환관들은 물론, 각지의 미희들을 불러 하렘물을 찍기도 하고...
친위 호위대 중 색목인 출신 관리의 아내나 딸을 빼앗아 자신의 수청을 들게 하기도 하고...
더군다나 제일 압권인 건.... 자신에게 '주수(朱壽)' 라는 제 2의 이름을 붙이며... 이른바 부캐를 만들고서는...
그 부캐라 할 수 있는 '주수' 에게 위무대장군의 직위를 내리고, 군대를 끌고 출정할 때에도 주수의 이름으로 출정합니다.
또 황제 '주후조' 본캐로서 주수에게 출정명령을 내리고, 부캐 대장군 주수로서 황제에게 표문을 올리기도 하는가 하면...
그 주수를 태사로 임명하고 이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투옥시키는 등 이른바 혼자놀기의 진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은거 다하며 잘 놀던 정덕제는 뱃놀이하다 물에 빠져 구조된 뒤 그 후유증으로 사망...
그런데... 기존의 '명의 암군중 1인' 이라는 평가와 다르게 최근엔 그렇게 암군은 아니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제 멋대로 행동하고 환관들을 가까이에 두기는 했어도 국가의 정무와 관련된 보고는 별궁에서도 꼬박꼬박 잘 받았고
이동양, 양정화 등 명재상들을 중용하며, "놀지 말라" 는 조언은 빼고 신료들의 의견도 대부분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내려진 '무종(武宗)' 이란 묘호에 맞게 병사들에 대한 포상도 자주 내렸고, 변방 순찰을 자주 다녔으며
'주수' 라 자칭하며 군대를 끌고 나선 대외원정에서도 수차례 승리, 군 통솔에도 일가견이 있음을 보였죠.
그 외에도 군내 문제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그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데에 관심을 쏟았다고 합니다.
- 명 세종 가정제 주후총 -
생몰 : 1507 - 1567
재위 : 1521 - 1567
성화제의 4남이자 홍치제의 이복 동생이 되는 흥헌왕 주우원의 차남
즉, 전임 황제인 정덕제의 사촌동생입니다. 정덕제가 후사를 남기지 않아 보위를 이었습니다.
즉위하자마자 '대례의 의' 로 자신의 친부인 흥헌왕 주우원을 황제(예종)로 추증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황제로서의 정치적 공헌이 아예 보이지 않는 막장 실정들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독실한 도교빠였습니다. 정사를 논하기 보다는 도교의 교인들과 도사 무리들과 어울렸습니다. 사이비...
여성의 월경액과 젖, 다른 분비물과 화학반응을 일으켜 조제하면 불로불사의 약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12-14세의 궁녀들을 모아 궁녀들의 월경혈(;;)을 억지로 짜내기까지 하는 미친 행각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궁녀 16명한테 원한을 입고 살해당할 뻔 하다가 황후 덕분에 살았는데(임인궁변-壬寅宮變)
그 황후가 이후 사건의 뒷처리를 하면서 아무 관련 없는 가정제의 애첩들까지 죽여버린 것이 드러나자,
이 일로 앙심을 품고 황후전에 불을 내서 의도적으로 황후를 죽이게 했다는 의혹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당시는 '북로남왜' 라 하여 몽골과 왜구의 잇다른 침입으로 나라가 어지러운 상태였는데
그럼에도 불구, 점점 도교에만 심취하면서 도사와 어울리고 선단 제조에만 진력하여 재정을 낭비했습니다.
그런데... 수은같은 중금속 가득한 선단을 그렇게 먹고도 오히려 도사들보다 장수, 환갑 직전에 사망합니다.
그나마 장거정, 척계광 같은 명재상, 명장이 있어서 나라는 겨우겨우 굴러갔습니다.
그런데... 묘호가 '세종(世宗)' 이라는 것이 정말로 충공깽...
- 명 신종 만력제 주익균 -
생몰 : 1563 - 1620
재위 : 1572 - 1620
할아버지였던 가정제, 아버지인 융경제의 뒤를 이어 명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10살의 어린나이로 즉위, 재위 초반에는 장거정이라는 유능한 재상이자 정신적 아버지를 곁에 두고
국방 강화, 일조편법, 전국적 인구조사와 토지측량 실시 등 개판 5분전인 명나라를 일으켜보려고 했으나...
장거정 사후, 장거정의 개인적 축재 사실이 드러나게 되자 신하들의 도덕성에 불신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만력제 본인은 정치에 대한 환멸을 느껴 30여 년간 업무 파업에 들어갑니다.
이로써 교육, 형법, 민법, 감찰, 개발, 건설, 국방 등 모든 행정기능과 사회질서가 혼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30여 년간 직무 수행을 거부했던 덕분에 많은 관리들, 심지어 재상들도 황제의 얼굴을 잊을 정도였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황릉 건설 비용과 황족들의 각종 의전비로 국가 재정의 파격적인 낭비...
그렇게 나라를 말아먹으면서 만력제 본인도 자기가 아무것도 안하고 있었단 것을 자각하고 있어서였을까요?...
본인 송덕비에 "짐의 공덕이 너무 크므로 세상 말로 표현할 수 없도다." 라는 글귀를 남기게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상 명나라 멸망에 직접적인 기여도가 제일 높았다고 볼 수 있는 황제였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고려천자' 란 말을 들어가며, 조선에 대규모의 구원병을 파견하고 물자 지원도 해줬으니...
우리 입장에서야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은인' 이지만...(고려 천자시여... 만동묘 들른다면 인사드리겠습니다...ㅠㅠ)
- 명 희종 천계제 주유교 -
생몰 : 1605 - 1627
재위 : 1620 - 1627
태자가 되는 16세까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서 문맹에 가까웠다고 전해집니다.
만력제 사후, 아버지 주상락이 태창제가 되었지만 곧바로 사망하여 그 보위를 이었습니다.
(태창제는 29일 재위로 명 황제 최단 재위기간....)
그러나 그는 황제로서 국정에 대한 의지가 없었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목공예에만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환관인 위충현(魏忠賢)에게 정사를 모두 넘기고 자신은 취미생활인 목공예에 몰두하였는데...
역시나 위충현은 매관매직, 뇌물수수 등 각종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명은 더더욱 혼란을 맞았습니다.
한편으로 천계제는 방사(방술사)의 말만 믿고 옛 금나라의 황릉 일대를 파괴하는 결정을 내렸는데
이는 같은 여진족의 후신국가인 후금을 빡치게 만들어 침략원인을 제공하는 최악의 판단이었습니다.
다만 그렇게 몰두하던 목공예 솜씨는 단순한 취미라 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고 합니다.
목수들을 전문적으로 지휘하는 것은 물론, 별궁의 모형을 정원에 재현할 정도였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는 목공이 아니라 큰 제국을 경영할 황제였다는 게 문제라는 것...
이런 사람들이 거진 연이어 즉위했음에도 불구,
나라가 바로 망하지 않고 그 체제를 유지한 것이
명의 위엄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특히 고려천자의 30년 파업은...
만력제..ㅋㅋ
ㅋㅋㅋㅋㅋㅋㅋ
개인적으로는 이래서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더 불쌍하게 느껴지게 됐습니다. 그 양반이라고 잘못한게 없는건 아닌데 위가 너무 개노답이라...
위충현 날린 것만으로도 국가에 대한 개혁의지는 확실했음 ㅠㅠ... 너무 늦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만력 만력 그 칩거도중 등장해서 한 일이 조선파병이라니 참 아이러니함 매번 볼 때마다
다들 대단하네ㄷㄷ
말그대로 개판인 나라였음
설계를 어떻게 하면 나라가 저꼴인지 ㅋㅋㅋㅋ
진짜 저래도 유지된게 신기하네;;
여자에 미친 황제
종교에 미친 황제
조선에 미친 황제
피규어에 미친 황제
황제가 파업ㄷㄷ
오오 명나라 f4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ㅋㅋ
오 정덕제는 잘 몰랐습니다
배워갑니다
다른 황제들하고 비교하니 정덕제는 양반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