荷盡已無擎雨蓋-연잎이 시드니 비를 막을 우산조차 없고
菊殘猶有傲霜枝-국화 떨어졌으나 가지는 여전히 서릿발에 굴하지 않네.
一年好景君須記-일 년 중 가장 멋진 풍경을 그대는 꼭 기억해야 한다.
最是橙黃橘綠時-바로 노랗게 귤이 녹색으로 물드는 계절을.
소식(蘇軾)
북한이 제일 두려워하는 김관진 장군은 어떤 사람인가?
김관진 전 국방장관이 윤석열 정부의 국방혁신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내정되었다.
북한이 제일 두려워하는 대한민국 장군이다.
김관진은 어떤 사람인가?
아래 【】 내용은 김관진 장군을 상관으로 모셨던 장교의 증언이다.
필자도 김관진 장군이 “국방혁신위원회의 부위원장”임명을 두손 들고
환영하는 사람 중의 하나다.
역시 윤석열 대통령은 사람볼 줄 안다.
문재인이 버린 김관진 장군을 윤석열 대통령은 다시 주워 담았다.
“옥석구분”이란 고사(故事)가 있다.
옥석(玉石)은 옥(玉)과 돌(石)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석인 옥(玉)과 돌(石)을 구분(區分)”하는 말로 생각하여
한자(漢字)로 “옥석구분(玉石區分)”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옥석구분(玉石俱焚)”이 바른 한자다.
이 글은 사서삼경(四書三經)중의 하나인 서경(書經)에서 유래한 말이다.
“옥석구분(玉石俱焚)”의 뜻은
△구(俱)-함께, 모두, 전부라는 글자다.
△분(焚)-불사르다(불에 태워 없애다) 의미다.
즉 옥(玉)과 돌(石)을 전부 태워 없앤다는 뜻이다.
“옥석구분(玉石俱焚)”의 어원(語源)은
고대 중국 하(夏)나라 때의 이야기다.
윤후(胤侯)라는 신하가 하(夏) 나라 임금의 명에 따라 이웃 희화국(羲和國)을
치러 나갈 때 이렇게 말했다.
火炎崑岡(화염곤강) 玉石俱焚(옥석구분)이라
“곤강산(崑岡山)에 불이 붙으면 옥(玉)과 돌(石)이 함께 탄다!
임금이 덕(德)을 잃으면 그 피해는 사나운 불길보다 심하여 죄 없는 백성까지
피해를 입는다는 말에서 “옥석구분(玉石俱焚)”이 나온다.
즉 옥석구분(玉石俱焚)의 의미는 옥과 돌이 함께(俱) 불에 태워 없애다(焚)로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 구별 없이 모두 함께 재앙(災殃)을 준다는 것이다.
그동안 옥석구분에서 “구분”을 무엇을 나누는 것을 뜻하는 “구분(區分)”으로
알고 “옥석구분”이라는 사자성어를 써왔지만 이 단어의 유래를 알면
좀 더 신중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에게 “옥석구분(玉石俱焚)”이 해당되는 말이다.
【나는 1990년대 초 맹호부대에서 정훈장교로 군 복무할 때 김관진 장군을
상관으로 모셨다. 여단장(旅團長) 준장 이었다.
김관진 장군은 가끔 정훈·군종·법무장교들을 여단장 관사로 불렀다.
저녁 먹으며 세상 이야기하기를 즐겼다.
1992년 초였던 걸로 기억한다.
노태우 정권 때였다.
4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김관진 여단장은 당시 군 최고 수뇌부가 병사들에게 여당에 투표하도록
정신 교육했으면 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고 걱정했다.
며칠 후 사단장과 주요 간부 20여 명이 여단장실에 모여 군 부재자투표소
운영 방침에 대한 회의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김관진 여단장은 육군 중위에 불과한 나를 회의실로 불렀다.
사단장에게 일선 정훈장교의 입장을 설명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사단장에게
“여당에 투표 하라는 그런 정신교육은 군의 정치 중립 위반이며,
병사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관진 여단장은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봤다.
나의 의견을 들은 사단장은 곧바로 “선거에 절대 개입하지 말라”고
엄중 지시했다.
그 결정이 옳았다는 것은 그해 3월 다른 사단의 한 육군 중위가 군의 선거 중립
위반에 대해 폭로하면서 입증됐다.
김관진 여단장이 1992년 여름 여단을 떠날 때 나는 예하 부대 정훈장교를 대표해
꽤 좋은 선물과 함께 조선 후기 문신(文臣)인 이정보(李鼎輔)의 유명한
아래의 시를 드렸다.
국화(菊花)야 너는 어이 삼월동풍(三月東風) 다 지내고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네 홀로 퓌엿는다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설명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 봄바람을 다 보내고
나뭇잎 떨어진 추운 계절에 너 홀로 피였느냐?
아마도 매서운 서리에도 높은 절개를 지키는 것은 너뿐인가 하노라.
서릿발이 심한 추위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홀로 꼿꼿하게 피는 국화처럼
참군인이 되어 달라는 의미에서였다.
김관진 여단장은 편지만 간직하고 선물을 부대 역사박물관에 보관하라며
돌려보냈다.
3군 사령관이던 김관진 장군이 휴가 나와 만났을 때 일도 생각난다.
김관진 장군
“휴가 중에는 운전병을 쓸 수 없다”며
경호원도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내가 모실 때 김관진 장군은 하루일과 후 운전병 겸 당번병을 본부 중대로
돌려보내는 공사가 분명한 윗분이었다.
김관진 장군은 60만 우리 국군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장군이다.
우리 사회가 의무 복무하는 젊은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해졌다고 우려할 때
김관진 장군은 반박했다.
민주 사회에서 자란 병사들에게 온당한 작전 명령을 내렸을 경우
북한군을 압도하는 놀라운 전투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2010년 연평도 포격 사건 당시 우리 장병이 북한에 대응 사격한 점이나,
1996년 무장 공비 잠수함 침투 사건 당시 완전 토벌한 사건 등을 예로 들었다.
국방장관 시절 북한이 도발하면 일부러 휴전선을 방문해 TV 앞에 나서서
부리부리한 눈으로 북녘 땅을 응시했다.
북한이 제일 무서워했던 인물이 바로 김관진 장군이였다.
김관진 장군은 댓글 대응을 지시해 군의 정치 중립을 위반하고
호남 사람을 쓰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가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났다.
구속돼 재판을 받아야 하는 김관진 장군 보고 북한 지도부는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구속에서 풀려난 뉴스를 보고는 북한은 아쉬워했을 것이다.
2017.11.24. 조선일보 최우석 미래기획부 차장】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