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WHO, 천연두 완전 퇴치 선언
← 천연두에 걸린 전형적인 아기 환자의 모습.
1980년 5월 8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제33차 총회에서 "지구상에서 천연두가 완벽하게 사라졌다"고 선언했다. 1977년 소말리아에서 마지막 환자를 끝으로, 단 한 건의 새 환자도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상 가장 혹독했던 ‘죽음의 사자’에게 인류의 이름으로 사망 선고가 내려진 순간이었다.
천연두는 고대 로마에서 군대 내에 집단으로 창궐, 군인을 따라 수많은 도시를 황폐화시켰다. 1492년 신대륙 발견 후 아메리카 대륙에선 100만 명 이상이 천연두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잉카제국과 아즈텍 문명의 종말을 앞당긴 것도 유럽인이 묻혀온 천연두 바이러스 때문이었다. 18세기 초 영국 사회에서 빼어난 미모와 지성으로 이름을 날리던 메리 몬태규 부인의 얼굴을 곰보로 만든 장본인도 바로 천연두였다. 20세기 들어와서도 지난 1967년 전 세계에서 1000만 명이 발병, 200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엔 1만여 명이 천연두로 목숨을 잃었다. 천연두 치료 및 예방에 전기를 마련한 사람은 영국의 외과의사 에드워드 제너였다. 제너는 소의 질병인 우두에 걸렸던 여자들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소문을 근거로 천연두 백신 실험을 했다. 제너의 실험은 성공이었다. 제너의 성공은 인류 의학이 세균 정복을 위한 첫 걸음을 내디뎠음을 의미했다. 균을 약하게 한 뒤, 사람의 면역성을 높이는 ‘백신’ 예방법의 시발이었다. 이후 백신연구는 프랑스의 파스퇴르에서 정교화-체계화됐고, 과학자들은 장티푸스 콜레라 페스트 결핵 등 각종 전염성 질병에 대한 예방백신들을 잇따라 개발해 냈다.
[1922년] 김수환 추기경 출생
김수환은 한국천주교 신부·추기경이다. 그는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 철학과를 중퇴하고 1947년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안동 천주교회에서 사제생활을 시작했다. 1956년 독일에 유학해 뮌스터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공부했다. 1968년 서울대교구장으로 승품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임되었다. 1969년 교황 파울루스 6세에 의해 최연소 추기경으로 서임되었으며, 1970∼75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과 여러 분과위원장을 맡았다.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면서 "교회는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는 인사말을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의 원칙을 밝혔다. 1984년 교황 파울루스 2세가 집전한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성회를 개최해 한국 순교자 103위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1989년에는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열어 헌혈·장기기증 등 나눔의 실천운동을 전개했다. 대교구장 취임 직후부터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중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민주화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 많은 사목교서를 발표했다. 저서로 <사회정의>·<평화를 위한 기도>·<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등 여러 신앙수상록이 있다.
[1521년] 교회 박사, 예수회 학자 카니시우스 출생
(네)Sint Petrus Canisius(Kanis)
1521. 5. 8 네덜란드 네이메겐~1597. 12. 21 스위스 프리부르.
1925년 성인으로 추증되었으며 축일은 12월 21일.
프로테스탄트를 강하게 반대하여 독일의 제2사도라고 불렸다. 쾰른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1543년 예수회 수사가 되었으며, 쾰른·잉골슈타트·빈 등의 대학교에서 계속 가르쳐 호평을 받았다. 그는 뮌헨(1559)·인스부르크(1562)·딜링겐(1563)·뷔르츠부르크(1567)·아우크스부르크·빈에 대학을 세웠다. 보름스 회의(1557), 트리엔트 공의회, 아우크스부르크 의회(1559)에서 벌어진 종교논쟁에 참여하여 당대 어느 누구보다도 프로테스탄티즘의 확산을 지연시켰다. 그는 독일 로마 가톨릭 교회를 부흥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및 많은 부자들과 친분을 가졌고, 독일의 곳곳을 다니며 열정적으로 설교하여 예수회 조직을 확장했는데, 특히 인품과 학식을 갖춘 사제들을 배출하려는 뜻을 품었다. 그는 독일에서 전도를 하면서 황제를 포함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쉽게 사귀었고, 독일 남부 및 오스트리아·보헤미아·스위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1580년 스위스 프리부르크에 정착하여 예수회 대학(지금의 프리부르크대학교)을 세웠다. 카니시우스가 남긴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은 〈삼단계 교리문답서 Triple Catechism〉(1555~58)이다. 명쾌한 가톨릭 교리 해설집인 이 책은 반종교개혁 입장에서 쓴 가장 유명한 교리문답서로서, 150년 동안 400판이나 발행되었다.
[1937년] 한국의 영화배우·감독·제작자 신성일[申星一] 출생
← 신성일과 엄앵란
1937. 5. 8 경북 영덕~.
본명은 강신영. 건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60년 '신필름'의 신인배우 모집에서 신상옥 감독에게 뽑혀 신 감독의 대표작 〈로맨스 빠빠〉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이어서 역시 신상옥의 작품인 〈백사부인〉 등에서 주역을 맡았다. 이후 국내 최고 미남배우의 한 사람으로서 대중의 인기를 독점하면서 50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는데, 대표작품으로 〈날개〉·〈아낌없이 주련다〉·〈청춘극장〉·〈맨발의 청춘〉·〈안개〉·〈별들의 고향〉·〈장마루 촌의 이발사〉·〈흑맥〉·〈초우〉·〈하숙생〉·〈나는 왕이다〉·〈만추〉·〈방우〉·〈조용한 이별〉·〈역마〉 등이 있다. 1971년부터는 직접 연출을 하기도 했는데, 그가 감독한 작품으로는 〈연애교실〉·〈어느 사랑의 이야기〉·〈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그건 너〉가 있다. 1980년대 이후에도 완숙한 연기자로서의 깊이를 보여주면서 〈달빛 사냥꾼〉 등에 출연했으며, 1989년에 '성일 시네마트'를 설립하고 〈코리아 커넥션〉 등의 작품을 통해 제작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1923년] 영화배우 허장강[許長江] 출생
1923. 5. 8 서울~1975.
본명은 장현(長顯).
서울에서 인문중학교를 졸업하고 악극단에 들어가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다. 반도가극단에서 연기활동을 했으며, 1952년 육군 군예대(KAS)에 들어가서 1953년 이강천 감독의 〈아리랑〉으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그뒤 〈피아골〉에 출현하여 주목받기 시작했고 〈종각〉·〈흙〉·〈두만강아 잘 있거라〉·〈임꺽정〉 등에 출연하여 개성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예춘·최봉 등과 함께 악역전문 조연배우로서 이미지를 굳힌 그는 허스키한 목소리와 은근한 미소, 감은 듯한 눈 등 뛰어난 '이미지 만들기'의 연기력을 보여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상록수〉(1961)로 아시아 영화제 남우조연상,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 한국일보 연극영화상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영화인친선축구대회에서 경기 도중 심장마비로 죽었다.
[1924년] 한국의 소설가 강신재[康信哉] 출생
1924. 5. 8 서울~2001. 5. 12 서울.
1932년 함경남도 천마소학교에 입학했으나 부친의 사망으로 1938년 서울로 이주해 덕수소학교를 졸업했다. 1943년 경기여고를 거쳐 1944년 이화여전을 중퇴했다. 김동리의 추천으로 단편소설 〈얼굴〉(1949)·〈정순이〉(1949)가 〈문예〉에 추천되어 문단에 등장했다. 〈눈이 나린 날〉(1950)·〈안개〉(1950)·〈항야화 港夜話〉(1951)·〈팬터마임〉(1958)·〈젊은 느티나무〉(1960) 등의 단편소설과 단편집 〈희화 戱畵〉(1958)를 발표했다.
작품 초기에는 주로 남녀간의 애정관을 감각적이고 회화적인 수법으로 다루었다. 1959년에는 이혼한 한 여인의 비극적 고뇌를 그린 〈절벽〉으로 한국문인협회상을 받기도 했다. 그후 장편 〈임진강의 민들레〉(1962)와 〈파도〉(1963)를 통해 작가의 사회의식과 현실의식의 세계를 표출하기도 했다. 특히 〈파도〉에서는 일제시대 북국의 한 항구를 배경으로 한 소녀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갖가지의 모습들을 사실적 수법으로 그렸다. 1966년에 〈한국문학〉의 동인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이 찬란한 슬픔을〉로 여류문학상을 받았다. 이외에 〈신설〉(1964)·〈이브 변신〉(1965)·〈명성황후〉(1987) 등의 작품이 있다. 예술원 회원 및 소설가협회 대표위원 등을 역임했다.
[1828년] 국제적십자 창시자 앙리 뒤낭 출생
← 제1회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했던 앙리 뒤낭.
국제적십자의 창시자 앙리 뒤낭이 1828년 5월 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본래 사업가였던 뒤낭은 1859년 이탈리아 북부 솔페리노 지역을 여행하다가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사르디니아 연합군 전투에서 부상병들의 비참한 상황을 보고, ‘전쟁과 재해현장에서 헌신적이고 자격 있는 국제구호단체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1864년 12개국 대표가 제네바에 모여 ‘제네바 협약’을 채택ㆍ조인하면서 적십자운동이 시작됐다.
그는 결국 사업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파산했고, 그 뒤 1867년 제네바를 떠나 가난하게 살았으나 계속해서 전쟁 포로에 대한 대우, 노예제도 폐지, 국제적 중재, 무장해제, 유대인 국가수립을 위해 힘썼다.
뒤낭은 1901년 스웨덴 스톡홀름 개최된 제1회 노벨상 시상식에서 적십자 운동의 공로로 ‘제1호’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노벨상의 수상 시비는 첫 해부터 계속돼, 뒤낭의 노벨평화상 수상 역시 노벨의 유언 취지와 어긋난다는 비난을 받았다. 뒤낭이 한 일은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전쟁의 공포를 어루만지면서 전쟁을 기정사실화하고, 오히려 전쟁을 인간화했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국제적십자운동은 평상시 재난구호와 취약계층 지원을 주 임무로 하는 국제적십자연맹(IFRC)과 무장충돌지역의 희생자 보호지원을 하는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그리고 IFRC의 179개 회원국이 3대 축을 이뤄 사업을 펼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05년 고종황제 칙령 47호로 대한적십자사 규칙을 제정하면서 대한적십자사가 탄생했으며, 1949년 대한적십자사조직법이 공포되면서 오늘의 조직에 이르고 있다.
[1889년] 고하 송진우[宋鎭禹] 출생
1889. 5. 8 전남 담양~1945. 12. 30 서울.
호는 고하(古下). 어렸을 때의 이름은 옥윤(玉潤)이고, 7세 때부터 15세가 되던 1903년까지 성리학자인 노사(蘆沙) 기정진의 친척인 기삼연(奇參衍)으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고하라는 아호도 그가 지어준 것이다. 러일전쟁이 일어나던 1904년 당시의 조혼풍습에 따라 정읍의 유씨와 결혼하여 딸을 하나 얻었다. 그러나 그 딸이 3세 때 죽고 이후 자식을 얻지 못해 후사가 끊기게 되자 큰형의 아들을 양자로 맞이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자 전라남도 장성군의 백양사에 들어가 다시 한학을 닦다가 부친의 권유로 1년 반 만에 집으로 돌아와 신학문을 배울 것을 결심했다. 그의 부친은 그를 창평(지금의 담양군 창평면)에 있는 신학문학교인 영학숙(英學塾)에 보내 신학문을 배우게 했다. 비록 이곳에서의 수학은 3개월 만에 그치고 말았지만, 이곳에서 평생지기인 김성수를 만나게 되었다. 1908년 가을 당시 도쿄[東京] 다이세이 중학교[大成中學校] 유학생이었던 홍명희의 강력한 권유로 김성수와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올라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와 긴조중학교[錦城中學校]를 거쳐 1910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했으나, 그해에 한일합병이 되자 충격을 받고 귀국했다. 이듬해 다시 도일(渡日)하여 와세다대학을 자퇴하고 메이지대학[明治大學]으로 옮겨 법학을 공부했다. 대학 재학중 '유학생 친목회'를 조직하여 최남선·현준호·신익희·조소앙·김준연·장덕수 등과 깊은 교우관계를 맺었다. 또한 '유학생 친목회'의 산하단체로서 '호남유학생 다화회(茶話會)'를 만들어 회장직을 맡는 한편, 이들 단체가 단순한 사교모임으로 그치는 것을 막기 위해 김병로 등과 함께 유학생회의 기관지인 〈학지광 學之光〉을 펴내기도 했다. 1915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다. 그 이듬해 김성수가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를 인수하자 학감으로 취임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데 주력했다. 3·1운동 때는 이 운동의 뒷일을 맡은 48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검거되어 1년 반의 구금생활을 했다. 1921년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한 이후 김성수와 함께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민립대학 설립운동, 충무공 유적 보존운동, 농촌계몽운동 등을 전개했으며, 1925년 6월 하와이에서 개최된 범(汎)태평양회의에 신흥우와 함께 참석하여 각국 대표들에게 한민족의 실상을 알리기도 했다. 동아일보사에 재직하고 있는 동안 그의 직책은 사장·고문·주필 등 시세와 상황에 따라 달라졌지만, 김성수를 대신하여 그는 언제나 〈동아일보〉 간행의 중추역을 담당했으며 이로 인해 투옥되기도 했다. 1940년 〈동아일보〉가 폐간되자 동본사(東本社)를 설립하여 동아일보사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일본의 패망이 거의 확실시된 1945년 8월 10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권 인수 교섭을 받았으나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해방직후 여운형이 주축이 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맞서기 위해 충칭[重慶]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이후 고려민주당과 조선민족당 및 한국국민당의 결합체인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가 되어 우익세력의 규합에 앞장서는 한편, 미군정에 적극 협력하여 주한미군사령관인 J. R. 하지의 행정고문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또한 환국지사후원회를 조직하여 이승만과 임시정부 요인들의 국내생활의 편의를 도모함과 아울러, 이들과 함께 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했고 복간된 〈동아일보〉의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보국의 활동도 재개했다. 그러나 1945년 12월 27일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한국 신탁통치안에 대한 찬반양론의 첨예한 소용돌이 속에서 12월 30일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에게 암살당했다.
[1940년] 민족 3당, 한국독립당으로 통합
←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 마랑도 보강리
1940년 5월 8일 우익 민족 3당인 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이 한국독립당으로 통합되었다. 1930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은 항저우[杭州]에 본부를, 광둥[廣東]·난징[南京]·베이징[北京] 등지에 지부를 두고 활동해왔다. 독립운동계의 전반적인 부진과 당의 분열로 신당이 잇따라 결성되자 중국 관내 민족주의 진영은 한국국민당·재건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의 3당으로 정립되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집약된 대일항전을 위해 3당연합을 모색한 끝에 새로운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었다. 간부는 집행위원장 김구, 집행위원 홍진·조소앙·조시원·지청천·김학규·유동열 등이었다. 삼균주의를 근간으로 한 한국독립당은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할을 하면서 항일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식
1945년 5월 8일 자정을 기해 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1944년말부터 소련군은 발칸 반도 지역에서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을 서서히 압박했다. 1945년 1월 독일군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보병과 군수품을 확보한 소련군은 적군을 보내 바르샤바를 점령했다. 또한 서부전선에서 히틀러가 밀려나자 소련군은 부다페스트를 점령했다. 이어 서방연합군은 드레스덴에 연속 공중 폭격을 가해 독일의 동부전선 방어지를 파괴했다. 1945년 4월 연합군은 베를린을 완전히 포위했다. 독일군의 항복문서가 5월 4일 몽고메리의 연합군 사령부에서 조인되었고, 전체 독일군을 포함하는 항복문서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조인되었다.
[1945년] 트루먼 미국 대통령, 무조건항복을 권고하는 대일성명 발표
1944년 11월 이래, 미군 폭격기 B-29에 의한 일본 본토 공습은 격화되었다. 1945년 2월 미군은 마닐라를 탈환하고 이오섬[硫黃島]에 상륙하였다. 4월에는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 3개월이나 걸린 오키나와전에서는 전 도민이 동원되어 희생됨으로써(9만여 명), 닥쳐올 본토 결전의 비참한 양상을 암시하였다. 7월 26일 미·영·중은 ‘포츠담선언’에서 대일(對日) 처리방침을 명시함과 아울러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 일본이 이를 묵살하자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에, 9일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소련은 이 날 대일 참전하여 만주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1933년] 한국의 대중가요 작곡가 박춘석[朴椿石] 출생
본명은 의병(義秉)이며 춘석은 그의 아명이다. 해방 전 고무공장을 운영하던 유복한 집안의 8남매중 다섯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피아노 전공)에 입학했다가 1학년 중퇴하고, 신흥대학(지금의 경희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연주활동과 함께 그는 중학교 때 이미 〈황혼의 엘레지〉·〈아리랑 목동〉 등의 작곡과 편곡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연주활동의 영향으로 샹송이나 팝송 스타일의 노래와 외국가요의 번안편곡이 주류를 이루었다. 트롯 가요의 작곡을 시작한 것은 6·25전쟁 후 은성경음악단을 조직해 KBS라디오의 생방송연주를 전담하면서부터이다. 특히1960년대 이후 가수 이미자를 만나면서 완전히 트롯 가요의 대가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966년 이후에는 연주활동을 중단한 채 작곡에만 전념하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40여 년이 넘게 작곡생활을 해온 그의 대표곡으로는 〈비내리는 호남선〉·〈38선의 봄〉·〈섬마을 선생님〉·〈가슴 아프게〉 등을 들 수 있으며, 그외 200편이 넘는 영화주제가 등을 포함해 총 2,500여 곡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아울러 패티김·이미자·남진·나훈아·문주란 등 350여 명이 넘는가수들을 길러내 '박춘석 사단'이라는 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태양음향사를 창설, 자신이 음반을 직접 제작하고 있으며 한국음악저작권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1995년] 중국의 국민가수 덩리준[鄧麗君] 사망
덩리준 [鄧麗君(등려군), 1953.1.29~1995.5.8]
그녀의 본명은 등려균(鄧麗筠)이나, 데뷔 후 등려군(鄧麗君)으로 불렸고 영문 이름은 Teresa Teng으로 이 이름은 일본에서 활동할 때도 테레사 텐(テレサ・テン)으로 계속 불리웠다. 이 영문 이름 테레사는 그녀 자신이 존경한다고 이야기했던 수녀 테레사에 연관되어 붙인 것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실제로는 그녀는 카톨릭 신자로 세례명을 사용한 것으로 사후 밝혀졌다.
1953년 중화민국(대만)의 윈린 현(雲林)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대륙(현재 중공)의 하북성(河北省), 모친은 산동성(山東省) 출신으로 둘다 본토 출신이다. 부친은 원래 국민혁명군(국부군)의 직업 군인으로 국공 내전 후에 대만 섬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의 영향인지 그녀 자신 생전에도 군 위문 공연을 열심히 활동했고, 중화 민국에서는 "군인들의 연인"이라는 별명이 있었다는 것도 유명하다.
1970년인 16세때 당시 중화 민국의 인기 드라마인 "정정(晶晶)"의 주제가인 "我一見汝就笑"를 불렀고 그 후 5년정도 중화 민국과 홍콩을 중심으로 싱가폴, 말레이시아 지역에서 활동. 1973년에는 홍콩에서 만난 "도라스(トーラス)"의 사장 후나키(舟木稔)를 만나 일본에서의 활동도 개하였다. 이에 따라 그녀는 중화 민국의 공식어인 북경어를 비롯, 민남어, 광동어, 일본어, 영어로 된 노래들을 불러왔고, 중국어로 된 노래는 1000여곡, 일본어로 된 노래도 260여곡에 달한다.
1973년부터 시작한 일본 진출에서 아이돌 계열의 노래인 "오늘밤일까 내일일까(今夜かしら明日かしら)"를 취입했으나 실패, 곧 엔카(戀歌) 계열로 전환하여 "공항(空港)"을 취입 대히트 당시 "레코드 대상 신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1979년 인도네시아 위조 여권을 사용한 것이 발각되어 국외 추방당했다.
이 후 1984년까지 미국, 홍콩, 중화 민국에서 활동하다 일본 시장에 재입성, "속죄(つぐない)", "애인(愛人)"이 각각 150여만매,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맏겨서(時の流れに身をまかせ)"가 200여만매가 팔리는 대히트를 기록, "전일본 유선 방송 대상(全日本有線放送大賞)"의 동서(東西) 유선 대상으로는 최초의 3해 연속 대상 및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1985년 12월에는 생전 마지막이 되는 솔로 콘서트를 NHK홀에서 진행하였다. 또한 같은 1985년에는 조용필의 일본 활동 후 일본에서 유일하게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른 가수로도 유명하다. (이후 계은숙이 취입)
1987년 이후 일본에서 그다지 활동하지 않다가 1994년 11월 NHK "가요 자선 콘서트(歌謡チャリティーコンサート)"에 출연하였다.
1995년 취입할 예정이던 "잊지마(忘れないで) - time to say good-bye -"는 그녀의 사망으로 취입되지 않다가 2001년 일본 가수에 의해 추도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중화 민국 출신으로 대만 및 홍콩, 마카오등 중화 지역에서의 활동도 활발했다.
1979년 위조 여권 사용 이후 중화권에서 활동하였는데, 그녀 자신의 오리지널 노래도 흥행했지만, 주로 일본인으로 태어나 만주국에서 활동한 이향란(李香蘭, 山口淑子)의 노래들을 다시 불러 큰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곡들에는 "夜來香", "蘇州夜曲" 등이 있다. 그러나 이향란은 만주국 찬양, 2차대전 종전 후 일본 귀국 활동등 이러한 이유가 문제가 되었는지, 중공에서는 1983년까지(실제로는 양안관계가 해소된 1987년까지) 등려군의 노래를 금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반대로 "何日君再来"와 같은 항일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1987년 일본에서 홍콩으로 이주하면서 활동적인 모습은 그다지 없었고, 홍콩 및 대만에서 활동만 유지하다 1990년이후 홍콩 반환의 문제로 걱정하다 파리로 다시 이주한다. 이후에는 중공내 민주화 요구, 천안문 사건 반대 집회 등에 참여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매진하기도 한다.
중공의 대륙에서 금지곡이었던 그녀의 노래는 인민간에 높은 인기를 얻고 있었는지 많은 소문과 유언비어, 특히 콘서트에 관한 소문이 많았다. 양안관계 해소 후 실제로 그녀는 그러한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천안문 사태를 야기한 공산당 정부에 실망, 실현되지는 않았다.
그녀가 죽었다는 소문은 1990년, 1991년 한번 씩 흘러나왔으나 유언비어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던 와중 1995년 5월 8일 요양을 목적으로 가끔 방문하던 태국 치앙마이의 메이핀 호텔에서 기관지 천식 발작으로 사망, 향년 42세. 1990년부터 동거 관계에 있던 14세 연하 프랑스인 "스테판 퓨엘"이 최후의 간호를 했다. 동월 28일 중화 민국의 대북(타이페이)에서 국장급의 장례가 치뤄져 전 세계 3만여명의 팬들이 몰렸다. 그녀의 관은 중화 민국 국기와 국민당 당기로 덮여졌다. 현재 묘소는 대북시 북동에 있으며, 묘 앞에서는 동상과 레코드 장치가 있어 그녀의 노래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대만 국민들은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사체는 화장되지 않고 매장되었다. 사후 50년 정도 생전 모습 그대로 계속 둘 예정이다.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는 기관지 천식으로 알려져 있으나, 마약 복용설, 민주화 운동 및 반정부 운동에 관련되어 중공 공산당에 의한 암살설 등 여러가지 의혹이 있다.
중국어 대표곡
모두 1000여곡이 있으며 사랑받는 대표적인 노래는 다음과 같다.
북경어
愛人, 償還, 我只在乎你, 再見!我的愛人, 海韻, 千言萬語, 小城故事, 梅花, 月亮代表我的心, 酒醉的探戈, 何日君再來, 甜蜜蜜, 但願人長久, 水上人, 原郷人, 無奈, 奈何, 一個小心願, 少年愛姑娘, 我怎能開你, 你怎麼説, 幾多愁, 在水一方, 我飛翔前方
광동어
漫歩人生路, 忘記他, 遇見你, 風霜伴我行, 浪子心聲, 雪中情, 東山飄雨西山晴, 遇到舊情人, 向日葵, 從今日起, 檳城豔, 雨中追憶, 相思涙, 誰在改變, 有誰知我此時晴
민남어(대만어)
天黑黑, 思想起, 走馬燈, 快樂的出帆, 望春風, 雨夜花, 碎心戀, 祖母的話, 難忘的愛人, 人生是一條路, 賣肉粽, 三聲無奈, 安平追想曲, 舊情綿綿, 六月茉莉, 心酸酸, 勸世歌, 十一哥, 心酸孤單女, 縁投囝仔, 阿里山的姑娘
일본어 대표곡
총 260여곡의 노래가 있으나 타이틀 곡으로 대표적인 노래는 다음과 같다.
오늘 밤일까 내일일까(今夜かしら明日かしら) - 1974년, 공항(空港) - 1974년 7월 1일,
눈 화장(雪化粧) - 1974년, 밤의 페리포트(夜のフェリーボート) - 1976년, 고향이 어디입니까(ふるさとはどこですか) - 1977년, 속죄(つぐない) - 1984년 1월 21일, 애인(愛人) - 1985년 2월 21일,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겨서(時の流れに身をまかせ) - 1986년 2월 21일, 스캔들(スキャンダル) - 1986년 11월 21일, 이별 예감(別れの予感) - 1987년 6월 21일, 연인들의 신화(恋人たちの神話) - 1988월 1월 25일, 홍콩(香港) ~Hong Kong~ - 1989년 3월 8일
[1884년] 미국 대통령 트루먼(Truman, Harry S., 1884~1972) 출생
미주리주(州) 출생.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06∼1917년 가족과 함께 농장에서 일하였으며, 1917∼1918년 야전포병학교 교육을 받고 제1차 세계대전에 포병 소위로 참전하였다. 전후에는 법률학교를 나와 잭슨군 재판소 판사를 거쳐 1926년 수석판사가 되었다. 1934년 미주리주에서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40년 재선되어 각종 위원회 위원과 국방계획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1944년 대통령 F.D.루스벨트 때 부통령에 선출되었고 1945년 루스벨트의 급서(急逝)로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1947년 반소·반공을 내세운 트루먼독트린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정치의 방향을 결정한 것으로서 중요하다. 1948년 대통령에 재선되어 6·25전쟁으로 인한 한국 파병에 이르기까지 내정 ·외교를 지도하였다. 그의 재임 중 6·25전쟁에 참전한 중국군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던 유엔군 총사령관 D.맥아더를 해임시킨 일은 세계여론을 모은 큰 사건이다. 저서에 《회고록》(2권, 1955∼1956)이 있다.
[1880년] 프랑스의 소설가 플로베르(Flaubert, Gustave, 1821-1880) 사망
루앙 출생.
시립병원 외과부 의사의 아들로 중학시절부터 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 《11월》 등을 습작하였다. 파리대학 법학부에 재학 중 간질(癎疾)과 유사한 신경증이 발작한 것을 계기로 문학에 전념하여, 《감정교육(感情敎育)》의 초고와 《성(聖)앙투안의 유혹》의 초고를 썼다. 그 뒤 낭만파의 영향에 중독된 공상(空想)의 과잉이나 산만한 작풍을 극복하고 확고한 문체와 긴밀한 구성을 가진 《보바리 부인》(1857)을 발표함으로써, 프랑스 당대의 최고 작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는 루앙 근교 센 강변에 있는 크로와세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독신의 연금생활자(年金生活者)로서 어머니와, 일찍 죽은 누이동생의 딸, 그리고 늙은 하녀와 함께 조용히 칩거생활을 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그를 은둔자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가끔 파리로 나가서 E.D.공쿠르, A.도데, E.졸라, I.S.투르게네프 등과 만나서 저녁 식사를 할 때에는 좌담의 명수이기도 하였다. 《보바리 부인》의 극명한 현대 풍속의 묘사에서 일전하여 고대 카르타고의 서사시를 환기시키는 역사소설 《살람보》(1862), 그리고 다시 자전적 요소가 짙은 현대소설 《감정교육》(1869), 또다시 일전하여 고대 이집트 수도사의 환상을 그린 대화형식의 《성(聖)앙투안의 유혹》(1874) 등, 플로베르의 대작은 수없이 많은데 모두가 독자적인 문체를 자랑하는 것들이었고, 주옥 같은 단편집 《세 가지 이야기》(1877)는 그러한 다채로운 문체의 표본처럼 보인다.
그의 마지막 소설 《부바르와 페퀴셰》(1881)는 그가 급서함으로써 미완성으로 남은 것이다. 그가 젊은 날에 사귄 친구의 누이동생의 아들인 모파상은 그가 만년에 가장 사랑한 제자였다. 문학사상으로 플로베르가 본격적 사실주의 소설의 창시자였다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사실 그는 면밀한 자료수집과 현지조사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작자의 주관이나 선입견을 작품 속에 반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작가는 몰개성적 태도로써 객관에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문학관이었다. 그러나 고백이 금지된 작가의 자아(自我)는 오히려 더욱 깊이 침잠된 진실한 모습을 작품 속에 나타내는 결과가 되는 것이므로, “보바리 부인은 나였다”고 전해지는 그 자신의 말에는 거짓이 없을 것이다.
플로베르는 결코 단순히 겉으로 보는 풍속의 갖가지 양상을 그려내는 작가가 아니었다. 그의 내부에는 꿈 많은 로마네스크한 자기 자신, 또는 무언가를 천착하기를 좋아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관조하는 소설가의 눈이 항상 번득이고 있어서, 그렇게 관찰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보편적인 인간상으로서 보바리 부인이나 부바르나 페퀴셰의 모습으로 그려 내지 않고서는 견디지를 못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작가와 작품 사이의 ‘단절(斷絶)’이 바로 ‘관련’이라는 미묘한 존재양식을 밝히는 귀중한 문헌이 그가 죽은 후에 간행된 《서간집》(9권:1926∼1933) 및 그 보충 4권(1954)이다.
엄격하게 문체를 다듬는 작가로서의 플로베르상(像)은 이미 정착된 지 오래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일어난 신비평파의 비평가들은 높은 관점에서, 문학을 결연히 언어의 문제로 환원시킨 최초의 작가로서 플로베르를 누보 로망(nouveau roman:新小說)의 원류(源流)라는 위치에 두었다.
[1790년] 탈레랑의 제안으로 파리과학아카데미가 미터법을 만듬
미터법(metric system)은 1790년 프랑스의 정치가, 외교관, 성직자 탈레랑(Talleyrand, Charles-Maurice de, 1754~1838)의 제안에 의해 파리과학아카데미가 정부의 위탁(委託)을 받고 만든 것이다. 지구자오선 길이의 1/4000만을 1m, 각 모서리의 길이가 1/10m인 정육면체와 같은 부피의 4℃ 물의 질량을 1kg, 그 부피를 1ℓ로 하고, 배량(倍量:곱하기 양)에는 그리스어, 분량(分量:나누기 양)에는 라틴어에서 따온 접두어 등을 각각 붙였다.
미터법의 보급은 순조롭지 않았고, 프랑스에서는 1840년 강제 집행하기에 이르렀다. 1875년 국제적인 미터조약이 성립되었고, 이어 1889년 국제원기가 제정되었으며, 1960년 제11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 국제적인 단위의 길이표준을 크립톤 86(86Kr)의 원자가 방사하는 오렌지색의 스펙트럼선 파장으로 바꾸는 등, 개정의 노력이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각 국가들도 이 미터법의 전용에 힘쓰게 되어 1967년에는 미터법을 국법으로 채용한 나라가 70개국을 넘어섰고, 학술적인 제반 단위는 거의 전부가 미터법을 토대로 하여 짜여졌다.
파리에서 태어난 탈레랑은 귀족 출신으로 루이왕조 역대의 군인 가계(家系)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에 한쪽 다리를 다쳤기 때문에 성직자가 되었다. 1775년 랭스의 생드니 수도원 원장의 직위를 얻었다. 파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성직자회의 사무관이라는 직함을 겸한 채 사교계에 출입하여 염문을 퍼뜨리면서도 재상 J.F.P.모르파의 비호 속에 정치적 견식을 넓혔다.
A.R.J.튀르고 등과 가까워지면서 국정개혁에 뜻을 두었고 1788년 오툉의 주교로 임명됨과 동시에 명사회(名士會)의 칙선의원(勅選議員)으로 선출되었다. 1789년 삼부회(三部會) 위원에도 당선되었는데, 혁명이 일어나자 교회재산의 국유화를 제안하여 교회로부터 파문당하였다. 1792년 영국에 파견되어 비공식사절로서 W.피트에게 양국 상호영토보전을 제의하였다. 혁명전쟁의 발발로 왕정이 폐지되자 미국으로 망명하여 토지매매 ·투기 등으로 거부가 되었고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 산악파(山岳派)가 몰락한 후, 1796년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총재정부의 외무를 담당하였다.
나폴레옹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하여 나폴레옹을 정계에 등장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1799년 나폴레옹의 정권 획득과 동시에 외무장관에 취임, 능란한 수완을 발휘하여 권력과 재력을 잡았다. 1806년 대륙봉쇄를 계기로 나폴레옹의 정책에 의혹을 느끼고,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및 러시아 황제 등과 내통하였고, 1810년 외무장관직을 사임하였다. 나폴레옹의 몰락에 앞서 연합국의 괴뢰정권을 수립하였으며, 1814년 빈회의에서는 전권대사로서 비상한 수단으로 전승국을 우롱하여 각국 국민을 놀라게 하였다. 백일천하 후에 다시 외무장관이 되었는데, 왕가(王家)와 하원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사임하였다. 1830년 7월혁명 후, 고령의 몸으로 영국 주재 대사가 되어 벨기에의 독립을 도왔다. 화가 F.V.들라크루아(1798∼1863)는 그의 사생아라는 설이 있다
[1864년] 한국 근대불교의 개혁운동가 백용성[白龍城] 스님 출생
← 백용성 번역 저서 <상역과해금강경>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며 대각교(大覺敎)를 창시했다. 본관은 수원. 속명은 상규(相奎), 법명은 진종(震鍾), 법호(法號)는 용성이다. 아버지는 남현(南賢)이며 어머니는 밀양손씨이다. 1879년(고종 16) 16세 되던 해에 해인사로 출가하여 화월화상(華月和尙)을 은사로, 상허혜조율사(相虛慧造律師)를 수계사(授戒師)로 삼아 승려가 되었다. 1884년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선곡율사(禪谷律師)로부터 비구 및 보살계를 받고 칠불암(七佛庵) 대은율사(大隱律師)의 맥을 이었다. 그뒤 지리산 금강대(金剛臺)와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서 수도했다.
1910년 한일합병을 계기로 이제까지의 수행과 참선을 중심으로 한 삶에서 사바세계의 현실로 눈을 돌렸다. 이해에 〈귀원정종 歸源正宗〉을 저술하여 그리스도교의 불교비방을 비판했다. 1911년에는 참선만일결사회(參禪萬日結社會)를 하동 칠불사(七佛寺)에서 발족하여 도봉산 망월사(望月寺), 천성산(千聖山) 내원사(內院寺) 등에서 중생을 교화했다. 또한 1919년 한용운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에 불교 대표로 참가, 앞장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을 복역했다. 1921년 출옥과 더불어 우리 민족이 불법에 귀의하여 민족의 위기상황을 극복해야 한다고 제창하면서 대각사(大覺寺)를 창건하고 대각교(大覺敎)를 창설했다.
대각사상은 심(心) 이외의 것은 모두 부인하고 불(佛)과 진심(眞心)과 아(我)를 일체로 보며, 이 진심에 의하여 천지만법이 창조된다는 사상이다. 대각의 근원은 여래장(如來藏)으로, 대각이란 모든 중생이 갖고 있는 근본심성인 불성을 자기 스스로 깨치고 또 다른 사람을 깨우치게 하는 것(自覺覺他)을 말한다. 이러한 사상에 입각하여 대사회적 실천운동인 대각운동을 전개했다. 우선 그는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심조만유론 心造萬有論〉·〈각해일륜 覺海日輪〉 등 30여 종을 저술하고, 대각사에서 〈화엄경〉·〈원각금강경 圓覺金剛經〉 등 30여 종의 경전을 번역했다. 우리말, 우리글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던 시기의 이러한 번역작업은 항일운동의 일환이었다. 선종 포교당을 건립하여 포교에 힘썼는데, 이때부터 '참선'이라는 말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또 불교의식을 한글화하여 포교의 대중화와 현대화를 꾀했다. 한편 교단의 청정을 주장했으며 1926년 사이토[齋藤實] 총독에게 2차에 걸친 건백서(建白書)를 127명의 승려 연서로 제출하여 일제의 불교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 사원경제의 자립화를 위해 선농병행설(禪農竝行說)을 주창하여 함양 백운산과 북간도에 농장을 만들기도 했다.
1925년 대각사에서 글을 보다가 왼쪽 이 사이에서 자흑색의 사리(舍利) 일립(一粒)이 나왔는데 그 사리탑이 현재 해인사 용탑전(龍塔殿)에 있다. 1940년 2월에 대각사에서 77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그밖에
2005 노무현대통령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순방
2003 한국 농구의 ‘별’ 전규삼씨 별세
1996 팔라우공화국 쿠니오 나카무라 대통령 방한
1994 가키누마 센신 스님, 안중근 의사 유품 기증
1993 1987~1991년까지 부정 입학생 명단 공개
1993 남북한 첫 직교역 실시 - 설탕, 소주 교환
1991 김기설 전민련 사회부장 분신자살
1985 카프(KAPF)의 실질적 지도자인 팔봉 김기진 사망
1984 소련 LA올림픽 불참 선언
1981 한국-일본 의원연맹 재구성
1980 자원개발연구소, 충북 옥천서 우라늄광 발견 발표
1979 미국 사회학자 탈코트 파슨스 사망
1973 어버이 날 제정
1973 레바논 군사정부 수립
1972 닉슨 미국 대통령, 북베트남 모든 항만에 대해 기뢰봉쇄 선언
1972 해방후 처음으로 일본인 학교, 유치원 서울에 개설
1954 인도지나 문제를 토의하는 제네바회담 개막
1951 국회 정-부의장 개선 (의장 신익희)
1948 국제적십자의 날 제정
1945 알제리아에서 반프랑스 폭동
1945 자렛 출생 - 20세기 후반의 가장 독창적이고 활동적인 재즈 음악가
1939 스페인 국제연맹 탈퇴
1936 독일 역사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 사망
1931 세계최초의 TV 야외방송, 런던에서 시작
1926 영국의 방송인, 작가 애튼버러 출생 - 혁신적인 텔레비전 교육 프로그램으로 유명
1919 한국의 지리학자 홍경희 출생
1911 영국 청국 아편 협정 체결
1903 프랑스 화가 고갱, 남태평양의 섬에서 심장병 발작으로 사망
1902 경의선(서울-개성) 기공
1871 미국 영국 워싱턴조약 체결
1800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가 러벳 출생 - 선거개혁을 요구하는 ‘인민헌장’(1838)의 초안 작성
1788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흥망사’ 전6권 완간
1660 영국 왕정복고
1442 측우제도 실시
첫댓글 허장강의 명대사 ~우리심심한데 뽀뽀나 한번 해볼까 허 허 생각이 나네요 ~~~
공교롭게도 . 장여사 생일도 5 월 8 일 이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