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허돌과 비비추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동산*문학관* 스크랩 도장골 시편 외 / 김신용
동산 추천 0 조회 27 09.07.21 21:14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도장골 시편 -민달팽이 / 김신용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띤, 감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게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納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 위에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나뭇잎 덮개를 빠져

나가버린다


치워라, 그늘!

 

 

 

 

 

 

 

 

 

도장골 시편 -열대야 / 김신용


그 반딧불이가 찾아온 날은, 캄캄한 밤이었다
창문 다 열어 놓고, 간신히 걸친 등거리도 벗고
거실 마루에 누워 잠 청하던 밤이었다
처음 나는 그것이 어디서 반사된, 아니, 내 비문증 때문인 줄 알았다
먼 곳에서 켜진 성냥불처럼 반짝이던 것
어두운 풀숲 속의 작은 달개비 꽃잎 같이 피어 있던 그것
나는 그 비문(飛蚊)을 지우려고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살아 있는 빛이었다
창문 위에서 천정으로, 그곳에서 다시 벽으로 옮겨가며 반짝이는 것
저것이 무엇일까? 잠결에, 어렴풋이 뜬 눈으로
그 빛의 움직임을 한참이나 지켜본 후, 비로소 나는 알아차렸다
반딧불이라는 것을-. 내가 곤충도감이나 형설지공이라는 고사(故事)

에서나 들어 본 그 반딧불이라는 것을-.
세상에, 반딧불이라니! 태어나 처음 본 반딧불이가 집안으로 들아와,

저렇게 맑고 은은한 빛을 켜 놓고 있다니!
살아 있는 , 살아 있는 빛을 머금고 있다니!
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망막에 오로라가 일렁이는 시선으로
이 세상의 빛이 아닌 것 같은, 그 빛을 비켜보았었다
암호 같은, 무슨 상형의 기호 같은, 그 빛을 지켜보았었다
캄캄한 밤, 이 세상과 절연한 듯한 숲 속의 집
불이란 불 다 끄고, 별마저 지워진 이 깊은 밤에
반딧불이가 나타나, 저렇게 어두운 허공에 맑은 형광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니!
한 줄기 맑은 물줄기의 길이, 숲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너무도 시원히 더위를 식혀 주는 소나기였다
그러나 내 몸 속에 켜진 불로 밤새 잠 못 이룬 밤이었다
너무도 무더운 여름날의 밤이었다

 

 

 

 

 

 

 

 

도장골 시편 -폭설 / 김신용


하반신에 고무타이어를 댄 그림자가 느릿느릿 기어온다

그 산에 얼마나 큰 눈이 내렸나?
무릎까지 쌓인 눈, 어제 온종일 퍼부어 내리던 폭설

수의를 덮고 세상은 고요하다

한국의 수의는 마의(麻衣)이다. 바람이 제 집처럼 드나들
어 마치 너와 울타리를 두른 듯

그 성근 결 속으로 속살까지 내비치는 옷이다

봄 여름 계절도 없는, 누구나의 것이나
똑같이 생긴, 세상 끝의 집

무덤에 묻혔을 때, 다시 무의(無)의 삶 깃들어 저 세월
훠어이 훠어이 걸어가라는 옷이다

물기만 닿아도 곰삭은 두엄결처럼 올을 풀어 헤치는 그
옷처럼, 눈 녹으면

세상은, 천지간 너와 울타리를 두른 듯 모습을 나타내겠
지만

그 옷에 담겨, 지상의 마지막 길 걸어가듯 인가(人家)로
내려온 어린 고라니 한 마리

인적기에 문득 뒤돌아본다. 그 크고 둥근 눈망울에 비친
칡넝쿨 잎 같은 세계

등 뒤에서 설해목(雪害木)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이 눈사람처럼 녹아 내린다

 

 

 

 

 

 

 

 

 

도장골 시편 -부빈다는 것 / 김신용



안개가
나뭇잎에 몸을 부빈다
몸을 부빌 때마다 나뭇잎에는 물방울들이 맺힌다
맺힌 물방울들은 후두둑 후둑 제 무게에 겨운 비 듣는 소리를 낸다
안개는, 자신이 지운 모든 것들에게 그렇게 스며들어
물방울을 맺히게 하고, 맺힌 물방울들은
이슬처럼, 나뭇잎들의 얼굴을 맑게 씻어 준다
안개와
나뭇잎이 연주하는, 그 물방울들의 화음(和音).
강아지가
제 어미의 털 속에 얼굴을 부비듯
무게가
무게에게 몸 포개는, 그 불가항력의
표면 장력,
나뭇잎에 물방울이 맺힐 때마다, 제 몸 풀어 자신을 지우는
안개.
그 안개의 입자(粒子)들
부빈다는 것
이렇게 무게가 무게에게 짐 지우지 않는 것
나무의 그늘이 나무에게 등 기대지 않듯이
그 그늘이 그림자들을 쉬게 하듯이

 

 

 

 



 

 

 

도장골 이야기 / 김신용

 

-부레옥잠


아내가 장바닥에서 구해온 부레옥잠 한 그루
마당의 키 낮은 항아리에 담겨 있다가, 어제는 보랏빛 연한 꽃을 피우더니
오늘은 꽃대궁 깊게 숙이고 꽃잎 벌리고 있다
그것을 보며 이웃집 아낙, 꽃이 왜 저래? 하는 낯빛으로 담장에 기대섰을 때
저 부레옥잠은 꽃이 질 때 저렇게 고개 숙여요―, 하고 아내가 대답하자
밭을 매러 가던 그 아낙, 제 꽃 지는 자리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

이구먼―, 한다

제 꽃 지는 자리,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그 꽃
제 꽃 진 자리,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그 꽃

몸에 부레 같은 구근을 달고 있어, 물 위를 떠다니며 뿌리를 내리는

물 위를 떠다니며 뿌리를 내려,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는 것 같은

그 부레옥잠처럼
일생을 밭의 물 위를 떠흐르며 살아온. 그 아낙

오늘은 그녀가 시인이다

몸에 슬픔으로 뭉친 구근을 매달고 있어, 남은 생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고 싶은 그 마음이 더 고통인 것을 아는

저 소리 없는 낙화로, 살아온 날 수의 입힐 줄 아는 …… 

 

 

 

 

 

 

 

 

인간낙엽 / 김신용


나뭇가지에서 인간들은 떨어졌다
곡괭이로 삽으로 시를 쓸 수 있는 세계를 향해 걷고 싶었던 그들,
나무 하나가 이데올로기인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망치와 낫을 들고 걸어갔던 그들,
자신의 몸이 나무 한 그루인, 그 몸의 세계를 향해
땅속의 뿌리처럼 걸어갔던 그들,
바람도 불지 않는데, 햇빛은 저리 맑은데, 自害처럼,
스스로 탄소동화작용을 멈추고
나뭇가지에서 떨어져갔다
뿌리가 흙의 부드러운 살결로 호흡할 때,
그토록 엽록소 푸르렀던 나뭇잎들,
넓은 그늘을 드리워 스스로 안식처가 되고 싶었던 그들,
몸 속에서 어떤 불협화음이 일어난 것인지
영혼과 육체 사이에 어떤 불화가 생긴 것인지
두 개골 속의 영혼을 빈민굴의 빈 밥그릇처럼 덜그덕거리며 나뭇잎들은
떨어져 갔다. 몸이 빈민굴이 되기 전에
이미 마음이 먼저 빈민굴이 되어버린 그들,
카멜레온 같은 落法을 배우면서, 슬픈, 갖가지 얼굴의 변신의 기법을 배우면서
나뭇가지에서, 그 몸의 언어로 노래 하나 짓지 못한 채
햇살을 깨어, 제 손목의 푸른 인대를 끊고
그 몸의 나뭇가지에서 떨어져갔다

흘러버린 땀방울이 몸에서 棺이 되어 떠나갈 때.

 

 

 

 

 

 

 

 

 

내가 돌 속을 헤엄치면 / 김신용


내가 저 돌 속을 헤엄치면
버들치 같은 작은 물고기가 될까?
산의 내면에서 흘러나온 듯한 맑은 물 속에서 살아
바닥의 모래알까지 환희 들여다보여
몸 속의 내장마저 투명할 것 같은,
돌 속을 헤엄치면, 아기 웃음같이 無垢한 그런
지느러미를 갖게 될까?
어두운 핏줄 속을 헤엄쳐 그대 훤히 밝히는.

 

 

 

 

 

 

 

 

 


적신(赤身)의 꿈 / 김신용



마당에 다람쥐 두 마리가 찾아왔을 뿐인데
찾아와, 잠시 놀다 갔을 뿐인데
맨발로 마당에 나가 팔 벌려 서 있고 싶어지네
그 적신(赤身) 위에도 새가 날아올 것 같아
새가 날아와 앉아, 한나절을 놀다 갈 것 같아
아, 두 팔 벌려 맨발로 나무처럼 서 있으면
한낮의 고요 또한 푸르게 푸르게 잎 나부낄 것 같아
너와 나 사이, 끊긴 정관 이어져 맑은 물줄기의 길이 열릴 것 같아
푸른 잎사귀가 마른 뺨에서도 돋아나네
푸른 엽맥의 눈이 발끝에서도 돋아나네
또 그렇게 서서 새가 날아올 때까지 피 말리고 살 말리다 보면
마음 또한, 산뻐꾸기 울음소리로 무거워 제 가지 뚝 부러뜨린다 해도
맨발로 마당에 나가 팔 벌려 서 있고 싶어지네
겨우 다람쥐 두 마리가 마당을 찾아왔을 뿐인데
찾아와, 잠시 놀다 갔을 뿐인데


 

 

 

 

no worries

 

 

두꺼비가 웃다  / 김신용

 

두꺼비가 뭉툭한 돌멩이처럼 마당을 걸어왔다
몸에도 안 맞는 구식 양복을 걸치고 장에라도 가는 것처럼
마당의 풀밭 위를 느긋하게 걸어왔다
멍텅구리배처럼 생긴 두꺼비
그 멍텅구리배에 동력이라도 단 것처럼 뒤뚱뒤뚱
도대체 그 술 취한 황소걸음으로 어디로 가시나?
신기해하며 쳐다보는 내 눈길 따위는 아랑곳없이
마치 자신이 횡단보도이기라도 한 듯, 네거리의 신호등이기라도 한 듯
예인의 밧줄 없이는 꼼짝도 못하는 멍텅구리배 같은, 그 느린 걸음으로
쳐다보는 사람을 종종걸음 치게 하는 저 속 터지는 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울타리를 향해 걸어갔다
그 울타리 밑에 집이라도 지어 놓았는지, 주막에 들어 막걸리 사발을 비우고는
소 몰고 돌아가는 저녁길인 것처럼
마치 저수지에서 피어오른 안개가, 둑길의 미루나무를 삼키고
들판의 송전탑을 삼키고, 이윽고 들판까지 삼키듯이
배 불룩해, 더 많은 풍경을 삼키고도 시장기 못 채울 것 같은
그 느린 걸음으로, 여름 들길이
미루나무 그늘 밑에서 쉬고, 낮잠 한숨 주무시고
하품하며 뒷집 지고 저수지 둑길 너머로 사라지듯이
그런 자신을 무슨 괴상한 외계의 생물체처럼 바라보는 내 눈길 앞에서
이런 걸음 처음 보았지? 하며 하하 웃듯
두꺼비가 걸어간다 저수지에서 피어오른
새벽안개가, 해가 뜨면
삼킨 둑길이 미루나무를 뱉어 내듯이
송전탑과 들판을 되새김질하듯 뱉어 내듯이


 

 

 

 

a day somwhere

 

 

 

와선(蛙禪) / 김신용


날이 어두워져, 거실의 불을 켜니
유리창에 쬐끄만 청개구리 한 마리가 붙어 있다
바깥의 풍경이 날것으로 비치도록 만든 커다란 유리창에 달라붙은
그 앙징맞음에,아내는 형광같은 탄성을 터뜨리고
저것이 떨어지면 어쩌려고? 하는 시선을 ㅈ답아맨, 내 눈길에도 아랑곳없이
청개구리는 자신의 숨기고 싶은 부분까지 온통 내비치며
미끄러운 유리의 면(面)에 달라 붙어,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자신에게는 까마득한 낭떠러지와 같을 직벽의 유리창
그 유리창에 달라붙어 와선(蛙禪)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자신에게도 날것으로 비쳐들 실내의 풍경을, 월곡(月谷)이듯 감상하고

있는 것인지
네 개의 발바닥과 볼록한 배를 투명한 유리에 밀착시키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바람에 불려와 달라붙은 젖은 나뭇잎처럼
차가운 겨울밤이 아무리 기침을 해도 떨어지지 않을, 마지막 잎새 쯤

되는 것처럼
그러나 자세히 보니, 마치 빙벽을 오르는 클라이머처럼
조금씩 조금씩 자리를 옮겨가고 있다
그러니까 유리창 불빛을 찾아 날아드는 날벌레들을 향해,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아직어려,
풀숲에서 먹이를 찾는 법을 채 익히지 못한 것 같은
청개구리
불빛을 향해 작은 날벌레들이 모여드는 투명한 유리의 표면이 식탁이

된, 앙징맞은 식욕의 선(禪), 그 움직임의
삼매경.


수직의 콘크리트 담벽에도 발자국 찍는 담쟁이덩굴의 작은 발들처럼

온통 날것으로 달겨드는, 그 아슬아슬한 생에의 미동(微動)...



 

 

rats' year



눈부처 / 김신용

-佛家에서는 눈동자에 비쳐진 얼굴을 눈부처라고 한다.


그대 눈 속에 들어 있는 얼굴 하나
깊은 동굴 같은 얼굴 하나
슬픔이 석순(石筍)처럼 맺혀 자라나고 있는
그 돌고드름에 매달려 눈물처럼 그렁이고 있는 얼굴 하나
젖은 나뭇잎 같은 그 위조지폐를, 지갑 속의 사진처럼 간직하고

있는 지갑 속의 사진처럼 간직하고 있어
마치 강철로 만든 잎처럼, 아무리 바람 불어도 떨어지지 않는 얼굴 하나
하고 싶은 말들은 그 눈 속에 울타리처럼 두르고
너와집이라도 지어 살게 하고 싶은 것일까?
돌고드름에 맺힌 눈물을 삽처럼 쥐어주며
더 깊은 동굴을 파게 하고 싶은 듯, 눈꺼풀을 깜박이는 눈 속의 얼굴 하나
그 태초의 빛인 듯, 손에 쥔 삽으로
그대 눈 속에 어두운 동혈(洞穴)을 경작하고 있는, 그 위조지폐로 사는 건

슬픔뿐이지만
맺힌 돌고드름의 삽질로, 파헤쳐진 그대 가슴 속을 방으로 꾸며주고 있는
눈이여, 그 동그란 눈동자 속의 영어(囹圄)여.
한 줄기 슬픔에도 속절없이 무너져 내릴 눈사람 같은
땀방울들, 맺히고 맺혀 이제 가시 기둥 같은 돌고드름이 되어 매달려 있어도
그대 눈 속에 담겨 비로소 얼굴이 되는 얼굴 하나
그대 눈 속에 비쳐져 비로소 세계가 되는 얼굴 하나



 

 

Four Friends

 

 


재봉틀 / 김신용



풀밭 위에 재봉틀 한 대가 놓여 있다
365일 수의를 짓느라 낡아지고 칠 벗겨진 재봉틀
순한 눈망울의 맹인 안내견처럼 풀밭에 앉아 있다
그 푸른 지팡이에 이끌려온 내 만혼(晩婚)의 날들
된장독 이불 보따리 같은 가재 도구들의 곁에 부려놓고
신호등 앞에서 앞발을 모으고 있는 것처럼 앉아 있다
저 신호등의 색깔이 푸른 제비꽃으로 바뀌면
또 어디로 가나? 눈 깜박이는 나비 한 마리
재봉틀 위에 날아와 앉아, 낮선 길을 눈새김 하듯 날개를 접는다

풀로 만들어진 수의 풀의 실을 뽑아 지어진 옷을
매일 하루 하루에게 입히며, 그대 위해 옷 한 벌 지어본 적 없는
품삯, 풀에서 뽑아낸 실로 지어
풀처럼 깨끗이 삭아 갈, 또 하루를 꿈꾸는지
나비가 팔랑 나래를 펴고 울타리를 넘어 날아간다
풀의
옷은, 풀잎이듯
태우면 고운 재의 입자(粒子)만 남는, 눈길 거두고
몸 일으킨 맹인안내견, 목줄 내밀어 새로 이삿짐을 푼 집의 방으로
다시, 나를 데려갈 것이다
풀밭 위에
놓여있는 재봉틀 한 대,
황혼을 이끌고 온 해거름의 일꾼처럼, 순한 눈망울을 껌벅이며
마당 가에
앉아 있는, 내 만혼晩婚의
텃밭,

 

 

 

 

 

 

 

in the temple

 

 

 

지렁이의 詩 / 김신용

 

그저 온몸으로 꿈틀거릴 뿐, 나의 노동은
머리가 없어 그대 위한 기교는 아지 못한다
구더기도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를 만들지만
내 땀 다 짜내어도 그대 입힐 눈물
한 방울일 수 없어
햇살 한 잎의 고뇌에도 내 몸은 하얗게 마르고
天刑이듯, 그대 뱉는 침 벗삼아 내 울음
알몸 한 벌 지어 오직 꿈틀거림의 영혼에게 입히겠다
그리하여 고난과 설움에 지친 그대 문득 어둠을 볼 때
징그러운 몸짓으로나마 꿈틀거림의 노래를 들려주겠다

이 세상의 모든 빛,
그대 사랑에게 겸허히 잡혀 먹히어 주겠다
나를 지킬 무기는 없어
비록 어둡고 음울한 습지에 숨어 징그러운
몸뚱이끼리 얽혀 산다 해도 어둠은 결코
謫所가 아니다 몸뚱이가 흙을 품고 있는 한
간음처럼, 대지를 품고 있는 한
우리 암수의 성기가
사흘 밤 사흘 낮을 몸 섞는 풍요로운 꿈으로
모든 버려진 것을 사랑하는 몸짓으로
그대의 땅을 은밀히 잉태하고 있는 한

 

 


 

 Lady Carrying Basket on Head, Quetzaltenango, Guatemala

 

 

 

검은 새 / 김신용  

 

 

방파제를 걷다가, 낚시꾼이 버린 낚싯바늘에
부리를 꿰뚫린 새를 본다

미끼가 달린 낚싯줄은 방파제의 돌 틈에 덫처럼 엉켜 있었다

그 미끼를 쪼아먹다가 부리를 꿰뚫린 새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날개만 파닥이고 있었다

낚싯바늘은, 그 무엇도 깨뜨릴 수 없는 오만처럼
새의 부리를 꿰뚫고 있었다

새의 평화로운 식탁인 이 바닷가,

그 일용할 양식 속에, 그토록 날카로운 낚싯바늘이 숨겨져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을 새는,
바위 틈에 둥지 짓고 새끼들을 키웠을 뿐인 새는

날아오르지도 못하고, 무거운 돌의 표면에
고통스럽게 제 그림자만 떨구고 있었다

그 낚싯바늘을 보고 아무도 <나>라고 느끼지 않는데도
그 새의 생에서 아무도 <나>를 빼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도

지상의 모든 길이 끝난 것 같은, 그 방파제 끝에서

물고기도 아니면서, 물 속을 숨쉴 아가미도 지느러미도 없으면서

 

 

 

 

 

 

 

Boy with Pig for Sale, Chichicastenango, Guatemala

 

 

냉동공장 / 김신용 

 

 

이 얼음 나라에는 얼음의 물고기가 산다
얼음이 되어야 살아남는 얼음의 물고기가 산다
한여름에도 눈을 얼어붙게 하는 혹한의 나라
땡볕 속에서도 귀를 먹게 하는 빙하가 흐른다
살아 있는 것은 얼음이 되어야 살아남는다
얼지 않으려고 살아 펄떡펄떡 뛰는 것은 죽는다
핏줄도 심장도 오장육부까지도 얼음이 되어야 살아남는
여기는 불 속의 얼음 나라
질근 근육과 끓는 뼈는 잠재우고
동태가 되어, 동태눈깔로 숨을 쉬며
미라가 되어야 살아남는다.
얼음을 만드는 법에 대한 분노도
얼음에 대한 증오의 유전공학도 알면 죽는다
투명한 얼음의 관
그 망각의 미학 속에 투신해야 꽃으로 핀다
세 끼 밥, 등 따뜻한 아랫목을 차지하기 위해
색맹이 되어야 씨 영근다
바깥에는 지금 불볕이 내리퍼부어지고 있어도
여기는 태풍의 핵 속, 고요한 안식의 나라
이 얼음 나라에는 얼음의 물고기가 산다
얼음이 되어야 살아남는 얼음의 물고기가 산다

일상의 적당한 배부름의 아가리 속에 눕기 위해
개기름 흐르는 쾌락과 탐욕의 이빨 속에 눕기 위해

 

 

 

 

 

 

 

흉터, 어느 작부로부터의 편지./ 김신용


...엉망으로 취해, 뱃놈 인생은 말짱 개털이라고 내 남루한
치마폭에 오물을 게워놓고, 폐선 속의 쥐새끼처럼 하룻밤 내
썩은 몸뚱이를 다녀가신 선생님께-

바다 위에 노을이 타오르면 온몸 석유 끼얹고 분신하던 그
이의 모습이 보여요. 와락 그 불덩이를 껴안았다가 얻은 왼쪽
얼굴과 귀밑 목덜미에 번져 있는 그 火傷(화상), 제 섬이에요.
낡은 통발배가 버려진 고무신짝처럼 떠 있는 남해의 작은 落
島(낙도), 밤이면 선창의 붉은 불빛 객혈처럼 흐르는 좁은 술
집 골목, 술자리에서 번번이 쫓겨나던 작부...,그래요. 그 흉
터의 섬,견고한 바다의 물결로 첩첩이 벽을 쌓은 제 감옥이에요.
철조망 번뜩이는 탐조등은 없지만 스스로 벽을 쌓아 유폐된 감
옥, 절해 고도...

그이가 살아 있었다면... 온몸 멍처럼 시퍼렇게 물들이는 바다의

저 푸른 쪽빛, 마치 농익은 오얏을 깨물 때의 그 상큼한 맛으로

내 오관을 저리게 했을지도... 철마다 흐드러지게 피는 저 핏빛

동백, 내 목에 화환으로 타올라 세상의 가슴에 내 꽃무늬 화사한

문신으로 새겨졌을지도...

그러나 저는 알아요. 스스로 갇힌 이 감옥,세상을 향한 집념,

인간을 위한 모든 욕망을 버렸을 때 다가오는 포근한 고절감,

또 이것이 얼마나 끔찍스런 감옥인가를.그 안온함이 얼마나

가혹한 형벌이며 또 얼마나 뼈저린 자기 방기인가를. 저는
알아요. 자기 위안의 내 견고한 섬, 허망 위에 허망을 쌓아 물거품

만 허벅지게 피웠다가 덧없이 스러지는 포말의 집이란 것을.

흉터..., 그이가 아니었다면 태어나지 않았을 섬.이제 정분난

남정네가 주고 간 정표 같아요.죽어서 비로소 잉태된 그이의

흔적이에요. 온통 그믐밤처럼 꺼멓던 탄광촌,제 몸 곡괭이가

되어야 살아남던 삶들,그들의 구멍 숭숭 뚫린 가슴의 空洞같던

갱 앞에서, 스스로 온몸 불꽃 피워 어두운 삶을 밝히려 했던

그이, 몸 안주 삼아 들고 다니던 내 들병이 같던 세월, 썩은

몸둥이 무엇이 좋다고 밤마다 파고들어, 몸 던져 껴안아야 할

날들을 몸으로 말해 주던 그이.

그 흉터,술맛 떨어진다고 흘러 흘러온 갯촌의 시린 술주정을 피해,

얼굴이 밑천인 이 화류의 세계에서 내치는 손길 손톱 세워들고

돼지 얼굴 보고 잡아먹냐고, 악머구리 몸부림 대신 홀로 어둠 속의

방파제로 나와 일렁이는 밤물결 앞에 서면, 마치 최면이듯 부드럽게

속삭이는 그 영원한 잠에의 유혹..., 그 허망이 지어놓은 집으로

돌아가서 그이와 함께 잠들 이불만 펴면 되는 것을.

그러나 선생님, 병도 오래 앓으면 수족 같은 정이 든다 했던가요?
얼굴에 술을 끼얹으며 썩은 내 품을 파고드는 비린 생선 내음,

절이고 절여진 퇴락한 어촌의 그 한서린 세월, 그것 또한 내가

껴안아야 할 흉터가 아니던가요? 이 땅, 암호처럼 그 이가 내게

주고 간 흉터, 그 살아 있는 날들의 의미가 아니던 가요?
잡풀도 새들의 둥지를 짓는데.....

 

 

  

 

 

  

 

언제 그곳에 잎이 있었나? / 김신용


맨땅이었다
언제 그곳에 잎이 있었나?
여름이 되면서 난처럼 피었던 잎들 하나 둘 짓무르면서
언제 그곳에 잎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지워지더니
어느 날 불쑥, 잎그늘 하나 없는 그 맨땅에서
꽃대 한 줄기가 솟아올랐다
돌 섞인 흙과 딱딱하게 굳은 흙바닥일 뿐인 그곳에서
그 흙바닥 밑에 뿌리가 묻혀 있었는지조차 잊었는데도
마치 무의식 속에 묻혀 있는 기억을 일깨우는 송곳처럼
닫힌 망각의 문을 두드리는 손가락처럼
솟아올라, 맑은 수선화를 닮은 꽃 한 송이를 피워 물었다
세상에! 잎이 다 진 후에야 꽃대를 밀어 올려 꽃을 피우는 뿌리가 있다니!
이 어리둥절함을 뭐라고 해야 하나?
이 돌연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
무슨 기형의 식물 같은, 잎 하나 없는 꽃대
깡마른 척추뼈가 웃음을 물고 있는 것 같은, 그 꽃을
굳어 버린 흙이 흘리는 눈물방울이라고 해야 하나?
지워져 버린 잎들이 피워 올리는 비명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빈 밭에서 우뚝 몸 일으킨 아낙처럼
가느다란, 새끼손가락 굵기 만한 꽃대가 꽃을 물고 있는 모습
가슴에 찍히는 지문이듯, 화인(火印)이듯 바라보아야 하나?
언제 그곳에 잎이 있었나?
싶은, 그 맨 땅에서, 잎도 없이 솟구쳐 올라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
이미 멸종된 공룡이
돌처럼 굳어 버린 내 의식의 시멘트 광장에 불쑥 나타나,

사라진 쥬라기의 노을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해야 하나?
일생을 잎을 만날 수 없다는 꽃
상사화, 저 꽃이 피는 모습을

 

  



 

 

************************************************************ 

 

김신용 시인


1945년 부산에서 태어나 14세의 나이에 부랑을 시작했다.
지하도나 대합실

에서 노숙하며 매혈로 끼니를 해결했다. 더 팔 피가 없으면 걸식, 꼬지꾼,

하꼬치기, 저녁털이, 뒷밀이, 아리랑치기, 급기야 펠라티오 아리랑치기까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도 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소년원을 시작으로

해서, 감방을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곳쯤으로 여기며 드나들었으며 재생원,

갱생원 등을 두루 섭렵하는 동안 별을 5개 달았다. 그러나 그가 감옥에서

읽어치운 독서량은 우리 교도소 문화를 비추어볼 때 가히 기적에 가까우리

만큼 방대하고 놀라운 것이다. 

그는 1988년 당시 무크지였던 『현대시사상』 1집에 「陽洞詩篇」외 6편

시를 발표하면서 나이 사십이 넘어 시단에 등단. 첫 시집 『버려진 사람들』

을 내며 시단에 일대 충격을 주었으나, 출판사와의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출간 두 달 만에 절판되는 곡절을 겪고, 재출간 되어(천년의시작) 호평을

받았다. 1988년 마흔이 넘어 ‘현대시사상’으로 등단한 김신용 시인은 4권의

시집과 2권의 소설집을 냈으며 천상병문학상과 노작문학상을 받았다.

이번에 출간된 ‘도장골시편’은 이미 지난해 작가들이 선정한 ‘올해의 가장

좋은 작품’으로 꼽혔다.

 

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

 

"폐가 앞에 서면, 문득 풀들이 묵언 수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떠올릴 말 있으면 풀꽃 한 송이 피워 내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사람 떠나 버려진 것들 데리고, 마치 부처의 苦行像처럼/뼈만 앙상해질 때

까지 견디고 있는 것 같은 풀들/…" 

('폐가 앞에서' 가운데)

지난 2월 시인, 평론가, 문예지 편집인 등은 시인 김신용(62)씨의 연작시

'도장골 시편'을 '2006년 가장 좋은 시'로 꼽았다. 이전까지 김씨의 시는

생활고에서 비롯된 치열한 실존적 고통을 그려냈지만 '도장골 시편'에서

는 부드럽게 연마된 장인의 이미지가 느껴진다. 2005년 도시생활을 청산

하고 충북 충주의 산골인 도장골로 내려가 1년여간 자연을 벗삼으며

지냈던 시인은 자연에서 자연스럽게 자연적인 시적 언어들을 터득한 듯

하다. 시인은 그때 쓴 시 50여편을 묶어 '도장골 시편'을 냈다.


"산비탈 가시덤불 속에 찔레 열매가 빨갛게 익어 있다/잡풀 우거진 가시

덤불 속에 맺혀 있어서일까?/빛깔은 더 붉고 핏방울 돋듯 선명해 보인다/…"

('營實' 가운데).

 

1988년 무크지 '현대시사상'으로 등단한 시인은 첫 시집 '버려진 사람들'

에서 네번째 시집 '환상통'에 이르기까지 시장 바닥에 버려진 뼈다귀 같은

소외계층의 실존적 고통을 '사신(捨身)공양'하듯 그려내왔다.

빈약한 학력과 가난 등 자신의 밑바닥 체험과 처절한 생활고는 그의 시의

바탕이 됐다.


 
다음검색
댓글
  • 09.07.21 23:35

    첫댓글 밤하늘이 어두우면 별이 보이고 마음이 어두우면 신이 보이는 법.....빛을 아는 시인입니다....좋은 작품을 엮어서 만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 09.07.22 13:53

    걸식으로 감방 생활을 하면서 읽어낸 독서량...정말 놀랄만한 시인입니다 감사합니다 동산님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