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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제1차 천안문사건 발생
← 혁명영웅을 기리는 청명절(4월 4일)을 맞아 천안문 광장에 놓인 수천개의 주은래 추모 화환들.
중국 혁명영웅을 기리는 청명절(4월 4일)을 맞아 천안문 광장에 故 주은래 수상을 추모하는 수천개의 화환들이 놓이고 군중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날 밤.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강청 등 ‘4인방’의 지시로 천안문 광장에 놓여있던 수천개의 화환들이 모두 철거되고 현장에서 화환을 지키고 있던 57명이 체포되자 1976년 4월 5일 이른 아침 분노한 수만명의 청년과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항의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그동안 주은래를 기리며 ‘4인방’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그들을 비난하는 대자보를 붙였던 사람들이었다. 흥분한 이들은 공안부 건물에 침입해 건물과 인근에 있는 자동차를 방화하는 등 십수시간에 걸쳐 천안문 광장을 점거했다.
이에 대해 당국은 수백명의 비무장병을 동원, 북경의 각 정부기관 경계에 들어갔다. 밤이 되자 대기하고 있던 민병 1만명과 공안 경찰 3천명, 인민해방군 부대가 곤봉과 혁대를 손에 쥐고 일제히 출동했다. 광장에 남아 있던 군중은 포위되었고, 포위망은 점점 압축되었다. 마구 얻어맞은 군중은 차례차례 쓰러져, 15분 후 광장 돌바닥 위에는 엄청난 양의 피가 낭자했다. 이것이 중국 전역과 전 세계에 큰 충격을 던져준 ‘천안문 사태’였다.
이 시위는 주은래 사후에 시작된 주자파(走資派) 비판 캠페인에 대항하는 대중의 반격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조선
[1975년] 대만 총통 장제스 사망
← 장제스 대만 총통
대만 총통 장제스는 1975년 4월 5일 타이베이에서 88세로 사망했다. 장제스는 1887년 10월 31일 중국 절강성에서 태어나 1906년 보정군관학교, 1910년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1911년 신해혁명에 참가했다. 1923년에는 소련을 시찰하고 돌아와 황포군관학교장이 되었다. 1926년 국민혁명군 총사령이 되어 2년후인 1928년 북벌을 완성, 국민정부 주석에 취임했다. 1931년 주석을 사임하고 1932년부터 1946년까지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했으나 1936년 서안사변으로 감금된 일도 있다. 1938년 국민당총재, 1943년 국민정부 주석에 재취임했다.
2차 대전이 끝난후 1948년 초대 총통에 취임했다가 이듬해 사임했으나 1954년 총통에 재선, 임종까지 5선을 기록했다.
장제스는 마오쩌둥과 함께 근대 중국의 창건자 쑨원의 후계자였다. 장제스가 국민당 창건자로서의 쑨원을 이었다면 마오쩌둥 소련과 연대해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을 펼친 만년의 쑨원을 이었다./조선
[1860년] 동학 창도
← 최제우
1860년 4월 5일 몰락 양반의 후예이자 서자였던 최제우는 전통적인 무속에서의 신병체험과 유사한 일종의 강신체험을 하고 동학을 창도했다. 이 날의 강신체험을 통해 최제우는 한울님을 마음에 성심껏 모시는 것이 바로 도를 깨우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를 논리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동경대전 東經大全>과 <용담유사 龍潭遺詞>를 집필했다. 이 과정에서 동학이 체계화되었다. 동학의 교리는 3단계의 발전과정을 겪었다. 교조인 최제우 단계에서는 '시천주'(侍天主) 사상, 2대 교주인 최시형 단계에서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 그리고 3대 교주인 손병희에 의해 개창된 천도교 단계에서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변화했다. 동학은 19세기말의 시대적 변혁기에 창립된 신종교로 당시 대다수 민중들의 종교적 욕구와 사회변혁에 대한 갈망에 상당히 기여했으며, 한국 신종교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브리태니커
[1926년] 항일조직 고려혁명당 결성
← 양기탁
1926년 4월 5일 중국 지린 성[吉林省]에서 항일독립운동조직인 고려혁명당이 결성되었다. 당시 만주지역 한인민족운동은 직접적인 무장투쟁과 민생교육 등의 자치활동에 주력했다. 또한 민족진영 일부에서는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과 그것의 국제적 옹호를 사명으로 하는 제3인터내셔널 정책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운동에 주력했다. 고려혁명당은 이런 추세에서 정당정치의 필요성을 인식한 결과 만들어졌다. 창당 당시 간부진은 위원장 양기탁, 책임비서 이동구, 위원 정이형·현정경·고할신·오동진·이동락·김봉국·현익철·이규풍·최소수·주진수·곽종대 등 13명이었다. 당원수는 모두 1,500여 명이었다. 고려혁명당은 1926년 12월 간부들이 체포되면서 와해되었다./브리태니커
[1901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이상화(李相和) 출생
← 이상화 시비
1901년 4월 5일 태어남 / 1943년 4월 25일 죽음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나의 온몸에 햇살을 받고 /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중에서
본관은 경주. 호는 무량(無量)·상화(尙火 : 또는 想華)·백아(白啞).
이상화는 1920년대 한국문학 가운데 근대시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대구 출신으로 1919년 경성중앙학교를 수료했고, 1922년 프랑스 유학을 목적으로 도쿄[東京]의 아테네 프랑세에서 공부하다가 1923년에 일어난 관동대학살 때문에 귀국했다. 1921년 현진건의 추천으로 <백조> 창간호에 <말세의 희탄>·<나의 침실로> 등을 발표해 등단했다. 1925년경부터는 박영희·김기진과 함께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에 가입하는 등 사회적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6년 <개벽>에 발표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표현한 수작으로 꼽힌다. 1940년 이후로는 <춘향전> 영역, 국문학사 집필 등을 계획했으나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브리태니커
[1899년] 극작가 이서구(李瑞求) 출생
1899. 4. 5 경기 안양~1981 서울.
1923년 토월회창립에 참여한 후 대중극 발전에 이바지했다. 아호는 고범(孤帆)·고성(孤星). 이춘풍(李春風)이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1922년 일본대학 예술과를 중퇴하고, 〈동아일보〉·〈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1925년 언론계를 떠나 방송국 일에 몰두했고, 1930년 동양극장 전무로 있으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연극문화협회에 참여했고, 8·15해방 후에는 대한연극협회 회장을 지냈다. 1·4후퇴 때 부산에서 종군극작가 단장을 맡았으며 이때 세운 공로로 1951년 금성화랑훈장을 받았다. 이후 텔레비전 방송국이 설립되자 방송극을 많이 썼다.
1930년대초 신파극 경향의 희곡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으며, 그해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희곡 〈어머니의 힘〉을 발표했다. 〈어머니의 힘〉은 3막 5장으로 되어 있고 기생출신의 며느리가 명문집안으로 들어오기까지의 고통을 섬세하게 그려내 당시 임선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와 인기면에서 쌍벽을 이루었다. 이어 발표한 〈동백꽃〉(신민, 1931. 6)은 가난 때문에 도시로 팔려가는 소녀의 이별이야기로 멜로드라마적 구성을 띤다. 〈동백꽃〉 이후에 발표한 50여 편의 작품은 어떤 이념이나 사조에 치우치지 않는 대중적인 것이며, 특히 역사물에서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사극으로 〈폐허에 우는 충혼〉·〈배소의 월색〉·〈서광 삼천리〉 등이 있고 그밖에 다수의 방송극이 있다./브리태니커
[1903년] 가야금 명인 한수동(韓壽童) 출생
1903. 4. 5 전남 화순~1934. 3. 3.
본명은 막동(莫童). 가야금의 대가 한숙구의 외아들로 7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가야금을 배우는 과정에서 천재성을 보여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이밖에 대금·피리·해금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였다. 11세부터는 풍류방에서 풍류객들에게 가야금을 가르쳤다. 이후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잠깐 활동했는데, 이무렵에 판소리 명창 송만갑이 한수동의 가야금산조를 듣고 "한수동 나고 가야금 났다"라는 말로 천재성을 평가한 것이 유명한 일화로 전한다. 그러나 아편중독에 걸려 회복하지 못하고 요절했다. 그의 가야금산조는 화순의 박경석에게 전해졌으나 그 뒤를 이은 이가 없어 단절되었다./브리태니커
[2001년] ‘장구 인생’ 45년 김덕수 첫 독주회
장구 하나로 45년간 국악무대를 누벼온 김덕수(金德洙, 1952~ ). ‘사물놀이’를 지구촌 보통명사로 만든 사람. 한해 365일, 분초를 쪼개 국내외 공연장을 누비는 김덕수가 ‘생애 첫’ 독주회를 했다. 2001년 4월 5일부터 7일까지 3일간 서울 문예회관 대극장이 무대였다.
키 1m59, 몸무게 71kg. 작은 거인 김덕수는 다섯 살 때 아버지를 따라 남사당 새미(무동)로 난장 인생을 시작했다. 국악고를 나와 풍물패서 활동하다 ‘김덕수와 그 일행’을 지칭하는 단체의 이름으로 1978년 2월 서울의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처음 선보인 사물놀이는 10년 채 안돼 세계를 휩쓸었다. ‘김덕수표 사물놀이’는 세계 50여국에서 3600회 이상 공연, ‘신을 부르는 소리’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가 이광수(북) 최종실(징) 김용배(꽹과리)와 함께 1983년 미국 순회공연 때 녹음한 ‘사물놀이’(논서치) 음반은 신화로 통한다. 한국의 전통 들놀이를 실내·무대용 앉은반으로 양식화한 사물놀이만을 풍물의 모든 것인양 여기는 세태를 이끈 데 대한 비판도 있다. 하지만 김덕수는 개의치 않는다. 그의 자유분방한 난장정신은 오히려 한걸음 더 나아가 사물에 클래식음악·재즈·발레를 접붙였다. 독주회에서도 일본의 재즈 피아니스트·바이올리니스트와 어울리는 연주를 2부순서에 앉혔다. /조선
[1908년] 오스트리아 태생의 관현악단·오페라 지휘자. 카라얀(Karajan, Herbert von) 출생
← 카라얀(1968)
1908. 4. 5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1989. 7. 16 잘츠부르크 근처 아니프.
20세기 중반을 이끈 세계적인 음악가이다. 어려서 피아노의 신동으로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에서 공부했고, 이후 1927년 독일 울름에서 지휘자로 데뷔했다. 1927~41년 울름과 아헨에서 지휘했고, 1938~45년 베를린 국립 오페라단을 이끌었으며, 1955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나치당원(1933~42)이었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방재판소로부터 면책받았으나, 1955년의 미국 데뷔 공연은 대중의 거부반응을 불러일으켰다. 1950년 후반부터 빈 국립 오페라(1956~64, 감독), 잘츠부르크 페스티벌(1956~60, 예술감독), 런던 필하모닉에서 활동했으며 또한 라 스칼라와 밀라노 극장의 상임지휘자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객원지휘자로도 활동했다. 1976년에는 잘츠부르크 이스터 페스티벌을 창설했고 파리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으며(1969~70), 1977년 빈 국립 오페라로 복귀했다. 그가 활동한 여러 음악 단체들 가운데서도 특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활동의 중심이 되었지만, 1983년 이후의 잦은 음악적 분쟁으로 단원들로부터 멀어졌다. 카라얀의 음악 해석은 정확성과 객관성으로 정평이 나 있으나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보다 개인적인 성향을 나타냈다. 1986년 로저 본이 저술한 전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rebert von Karajan〉이 출판되었다./브리태니커
[2007년] 북악산 서울성곽 전면개방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백제시대(BC18~475)와 조선시대의 옛 수도로 도성(都城)을 지키기 위하여 경복궁의 북쪽으로는 북악산(北岳山, 일명 白岳山)을 후현무(後玄武)로 하여 좌청룡(左靑龍)으로 동쪽의 낙산(駱山), 우백호(右白虎)인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남쪽의 전주작(前朱雀)으로 목멱산(木覓山 일명 남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축조되었다. 북악산은 현재의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 뒤쪽에 있으며, 1968년 1·21 사태 이후 군사보호구역과 보안상의 문제 등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어 왔다. 또한, 남대문(崇禮門), 동대문(興仁之門), 서대문(敦義門)과 함께 서울의 4대 문 중 하나인 북대문 숙정문(肅靖門)이 북악산 내에 있어 그동안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지난 2006년 4월 1일 북악산의 일부인 홍련사~숙정문~촛대바위의 1.1㎞ 구간이 38년 만에 일반인에게 개방되었고 이어서 2007년 4월 5일, 와룡공원에서 숙정문을 지나 북악산 정상을 거쳐 창의문까지 4.3㎞에 이르는 북악산 서울성곽 전 구간이 일반인에게 전면 개방된다.
일반인의 왕래가 금지되어 온 탓에 북악산에는 울창한 소나무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고 자연생태계가 그대로 유지되어 식생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 또한, 우리의 훌륭한 문화유산인 서울성곽이 자리하고 있다.
[199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 예능보유자 조용배(趙鏞培, 1929~1991) 사망
197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남도 고성군 출생으로 동래중학교를 졸업하고 1965년부터 김창준에게 고성 지방에 전승되어 오는 탈춤인 고성오광대를 배웠다. 1970년 고성오광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저서로 시조집 《운수행각》이 있다. /naver
[1964년] 더글라스 맥아더(MacArthur, Douglas) 원수 사망
← 맥아더(1945)
1880. 1. 26 미국 아칸소 리틀록~1964. 4. 5 워싱턴 D. C..
태평양 전쟁의 영웅으로 이름을 떨친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1964년 오늘 숨졌다. 뛰어난 전투 지휘 능력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5년 7월 필리핀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을 몰아내고 필리핀을 탈환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맥아더 장군은 유엔군 최고사령관으로 우리나라와 첫 인연을 맺었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불리했던 전세를 역전시키고 적을 중국 국경까지 몰아냈다. 그러나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하게 되자 만주 폭격 등을 주장하다 이 때문에 트루먼 대통령과 대립하고 1951년 4월 사령관 직위에서 해임됐다.
결국 맥아더 장군은 유엔군 사령부가 있던 일본 도쿄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맥아더 장군은 2차대전의 영웅으로 미국 국민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다. 맥아더는 미국 의회에서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퇴역했다. /YTN
[1951년 로젠버그 사형 선고
1949년 8월에 성공한 소련의 원자폭탄 실험은 미국을 당혹감에 빠뜨렸다. 당분간 원폭을 독점하려 한 미국의 계획이 차질을 빚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미국의 원폭개발계획에 관계했던 영국의 핵물리학자 클라우스 훅스가 소련에 원폭기밀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1950년 2월 영국에서 체포됐다.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훅스는 8년간 소련의 스파이 노릇을 해왔다고 자백했다. 공범자 색출에 나선 미국도 첩보요원 해리 골드와 미국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에서 일하는 육군 중사 그린글래스를 용의자로 체포했다. 그린글래스가 자신의 매형인 줄리어스 로젠버그(Rosenberg)에게 핵기밀을 제공했다고 실토함으로써 로젠버그(7월)와 그의 부인 에셀 로젠버그(8월)도 연행됐다. 핵기밀이 이들 부부로부터 해리 골드를 거쳐 뉴욕주재 소련 부영사에게 전달됐다는 혐의였다. 로젠버그는 한때 공산주의자로 활동한 전력으로 미군 통신대에서 실직한 전기기사였다. 재판은 1951년 3월에 시작됐지만, 냉전 고조와 매카시즘 선풍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이상하리만큼 빠르게 진행됐다. 1951년 4월5일, 연방재판소는 범행을 계속 부인하는 로젠버그 부부에게 그린글래스의 증언만을 거의 유일한 근거로 삼아 사형선고를 내렸다. FBI 국장 에드거 후버는 이 사건을 ‘세기의 범죄’라고 했고, 담당 판사는 “이들의 배반으로 인류의 역사가 바뀌었다”고 주장했지만 세계여론은 들끓었다. 교황을 비롯 아인슈타인, 러셀, 사르트르 등 세계의 지성들도 항의서한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 보내며 구명탄원운동을 벌였지만 아이젠하워는 받아들이질 않았다. 1953년 6월 19일 처형 당일, 줄리어스와 에셀 두 사람에게 최후의 면회가 허용됐고 두 사람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2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 오후 8시6분, 줄리어스가 먼저 뉴욕주 싱싱형무소 전기의자 위에 앉았고 에셀이 뒤를 따랐다. 이 사건은 드레퓌스 사건 이후 서방세계를 가장 들끓게 했던 사건이었지만 아직까지도 그 실체가 밝혀지지 않아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조선
[1949년] 식목일 제정
국민 식수(植樹)에 의한 애림 의식을 높이고, 산지의 자원화를 위해 제정한 기념일로, 해마다 4월 5일이며 법정 공휴일이다. 1949년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건’을 제정하면서 공휴일로 정해진 뒤 1960년 3월 15일을 사방(砂防)의 날로 대체 지정하면서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식목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공휴일로 환원되었다. 1990년 공휴일에서 제외하자는 견해가 있기도 했지만, 청명(淸明)·한식(寒食) 등과 겹치는 날이라 하여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그러다 '행정기관에 주 40시간 근무제'가 도입됨에 따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면서 2006년부터 기념일로 변경되어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식목일을 4월 5일로 정한 것은 24절기의 하나인 청명 무렵이 나무 심기에 적합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날(음력 2월 25일)이자 조선 성종(成宗)이 동대문 밖 선농단(先農壇)에서 직접 밭을 일군 날(1343년)이 바로 이 날이라는 것도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식목 행사가 시작된 것은 1911년 조선총독부가 4월 3일을 식목일로 지정하면서부터이지만, 이보다 앞서 신학기를 맞은 학교에서는 식목 방학이라 하여 1주일 정도 나무를 심는 기간을 학생들에게 주기도 하였다. 그러다 1946년 미 군정청이 4월 5일을 식목일로 제정해 오늘날까지 행사를 계속하고 있다. /naver
[1882년] 중국의 혁명가 쑹자오런[宋敎仁, 1882~1913] 출생
← 쑹자오런
자는 돈초(遯初)이고, 호는 어부(漁父)이다. 후난성[湖南省] 타오위안[桃源] 에서 출생했다. 후베이성[湖北省] 우창[武昌]의 보통학당에 다니던 중 반청(反淸)운동에 관계되어 퇴학당한 뒤, 일본에 유학, 철도학교에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1904년 귀국하여 창사[長沙]에서 황싱[黃興] 등과 화흥회(華興會)를 조직, 청조(淸朝) 타도의 봉기를 꾀하다가 사전에 탄로되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공부하였다.
1905년 중국혁명동맹회 성립과 동시에 동맹회 사법부 검사장에 뽑혔고, 기관지 《민보(民報)》의 편집을 맡았다. 1910년 상하이[上海]에서 《민립보(民立報)》를 발행하였는데, 그 해 우창 봉기가 성공한 후 혁명정부의 고문, 1912년 난징[南京]임시정부가 성립되자 법제원 총재가 되어 임시약법(臨時約法)의 제정에 힘썼다. 그 해 3월 민국 제1차 내각에 입각하였으나 곧 사임하고, 동맹회의 조직확대에 전력을 쏟았는데, 12월 동맹회를 국민당으로 개조, 이사장 대리로서(이사장은 쑨원[孫文]) 사실상의 당수가 되어 선거에서 국민당의 압승을 가져왔다. 한편 정당내각제를 만들어 대통령 위안스카이[袁世凱]를 견제하려고 하였으나, 1913년 상하이역에서 위안스카이가 보낸 자객의 저격을 받고 죽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제2혁명이 일어났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한 공로가 인정되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naver
[1794년] 프랑스의 혁명가, 정치가 당통(Danton, Georges Jacques, 1759.10.26~1794) 처형
← 당통, Constance-Marie Charpentier 부인이 그린 초상화, 파리에 있는 Musee Carnavalet 소장
1794년 4월5일 프랑스 혁명 지도자 조르주 당통이 단두대에서 35년의 생을 마감했다. 당통은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에베르, 데물랭 등과 함께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혁명이 터졌을 때 이들은 20대나 30대 청년들이었고, 혁명 권력의 핵심부에서 프랑스를 이끌다 단두대에 목을 들이밀었을 때도 20~30대 청년들이었다.
그러나 이 청년들의 짧은 정치 활동은 프랑스 역사만이 아니라 세계사를 뒤바꾸어 놓았다. 이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도 프랑스는 다시 옛 체제로 돌아갈 수 없었고, 세계는 그 사실을 모른 체할 수 없었다.
당통의 죽음은 그가 이끌던 관용파와 로베스피에르가 이끌던 관료파 사이의 대립에서 비롯되었다. 관용파는 자유주의적 지롱드당에 대항해 인민주의를 내걸었던 자코뱅당의 우파다. 이들은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자코뱅 관료파나 에베르가 이끄는 자코뱅 좌파에 맞서서 공포 정치 완화와 통제경제 해제를 주장했다. 국민공회 안의 급진파인 산악파(회의장의 가장 높은 자리에 의석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자코뱅당에서 관용파가 절대적 열세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지도자 당통은 낭비벽이 심해 독직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것은 청렴한 생활로 혁명의 순수성을 상징했던 로베스피에르에 견주어 작지 않은 약점이었다. 게다가 당통은 공포 정치에 반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혁명 자체의 청산을 꾀하기도 했다.
로베스피에르와 손잡고 에베르를 단두대로 보낸 당통은 고작 열흘 남짓 뒤에 이번에는 자신이 단두대로 끌려가게 되었다.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 앞에 선 것은 그로부터 넉 달도 안 돼서였다. 당통의 삶과 죽음은 독일 극작가 게오르크 뷔히너의 4막 비극 ‘당통의 죽음’에서 다소 미화된 채 재구성되었다.
그 밖에
2000년 모리 요시로 자민당 간사장, 일본 총리에 선임
1999년 한얼교 창시 신정일씨 별세
1991년 한국-마샬군도 국교 수립
1986년 전두환 대통령 유럽4개국 순방 등정
1983년 북한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
1982년 캐링턴 영국 외무장관 사임
1982년 영국 기동함대, 포클랜드 탈환위해 출동
1981년 국내외 과학기술자종합학술대회 참석차 북한 출신 재독일 과학자 5명 내한
1975년 한국-캄보디아, 단교
1974년 나이로비 해양회담, 나이로비 선언 채택
1972년 북한, 일본기자 17명에게 입북 허가
1968년 전국 고교-대학생에 군사훈련 실시 결정
1968년 체코 자유화 행동강령 채택
1967년 미국의 유전학자 조셉 멀러 사망
1963년 라오스 내전 재발
1963년 네덜란드 건축가 오우트 사망
1961년 한국-그리스, 국교 수립
1955년 처칠 영국 수상 노령을 이유로 사임, 후임에 이든
1951년 경남 계엄사령부 김종완, 공비가장 거창사건 국회조사단 기습
1945년 소련, 일본-소련 중립조약 파기
1941년 조선만화가협회 발족
1939년 민족운동가 남궁억 사망
1937년 만포선철도 가설에 관한 각서 조인
1929년 ‘물방울 화가’로 유명한 한국의 서양화가 김창렬 출생
1926년 양기탁 길림서 고려혁명당 조직
1923년 남베트남의 대통령 구엔 반 티우 출생
1918년 영국-일본-미군 블라디보스톡에 상륙개시
1916년 미국의 영화배우 그레고리 펙 출생
1908년 오스트리아 태생의 관혁악단.오페라 지휘자 카라얀 출생
1903년 가야금 명인 한수동 출생
1902년 알렉신이라는 살균제를 발견한 독일의 세균학자 한스 부흐너 사망
1871년 신미양요 발발
1864년 대원군 집정
1860년 수운 최제우 천도교 창설
1827년 근대 외과의학의 아버지 조지프 리스터 출생
1795년 프랑스-프러시아 바셀조약 조인
1588년 영국의 철학자, 정치 이론가 토마스 홉스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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