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자 시인>>
<<정숙자 시인의 양력>>
* 전북 김제 출생.
* 1992년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철학과 이수.
*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 시집 : 『하루에 한 번 밤을 주심은』, 『그리워서』, 『이 화려한 침묵』, 『감성채집기』, 『정읍사의 달밤처럼』
『뿌리 깊은 달』, 『열매보다 강한 잎』,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사랑을 느낄 때 나의 마음은 무너진다』
* 산문집 : 『행복음자리표』『밝은음자리표』.
* 1997년 대산재단창작지원금 수해.
* 수상 : 질마재문학상. 들소리문학상 수상.
<<정숙자 시인의 시>>
뿌리 깊은 달/정숙자
소용돌이 휘말려 대가리 박살났을지라도
산산조각 다시 뭉쳐
강물의 호수의 바다의 심장이 되는
늦가을 어스름이면 쩌렁쩌렁
더욱더 불타오르는
그물로 작살로도 건질 수 없는
눈으로만이 만질 수 있는
오로지, 오직 한 마리
모남 메마름 게으름 서두름 없이
물결 한 결 헤집음 없이
산 넘어 또 산 넘어 서방정토까지 혼자이지만
접었다 폈다 마침내 둥글어지는 독야청청 저 물고기!
실개울에도 흐르고 있어
우리들 가슴에도 뿌려져 있어
내 인생 견문록 참회록에도 새겨져 있어
천천히 찬찬히 구름과 바람 사이를
온밤을 꿋꿋이 돌보고 있어
모래의 각(角)/정숙자
닳아지면 둥글어지고 둥글어지면 다시 깨졌다
늘 새로운 각이 솟았다
웅크리고 깨지고 죽고 죽어 다시 굴렀다
영원히 태어나지 않아도 좋을 소멸에 이르는 길은 온전히 몸 벗는 일
바위를 벗고 돌을 벗고 최후의 각마저 벗고 낙타가 차올리는 발자국마다 송이송이 돌아가는 흙먼지들아
드디어 날아가는 명사산(鳴沙山) 능선들아
버리는 것은 줄이려는 것
줄이는 것은 벼리자는 것
둘레 40,000km 덩어리째 떠도는 이 행성도 어느 먼 하늘에서는 별이라 호칭하리라
모난 꽃들, 떠오른 발들, 물소리 삐걱대는 가슴팍들아
완전 마모의 시간을 찾아 나뒹구는 검은 돌들아
푼크툼, 푼크툼/정숙자
끼익ㅡ 렌즈에 잡힌 빨간 운동화
갑작스런 스크래치에 지느러미가 긁혔다
더 이상 운동화이기를 거부하고
꽉 끼는 발목 벗어버리고
금붕어로 깨어난다
배경도 몽땅 스크래치 스쳤지, 만
샐비어 두 마리만이 살아 숨 쉰다
소녀야…소녀야…
경쾌 발랄 순식간에 계단이 접힌다
지하철을 타고 폰(phone)을 열고 책을 읽고
쓰윽ㅡ 바다 밑 하늘도 점검
오고가고 밀리고 뒤섞이는 거리에서도
즉 각 즉 각 방향을 트는 감각은
산호 숲 총총 따 담은 촉각
소녀야…소녀야…
흐르는 건 계단이 골목이 그늘이
바람이 아니라 우리였구나
한 켤레 샐비어야 금빛 붕어야 열대우림…
절대 무림을…그렇게만 날거라
환상도 앞지르는 소년, 소녀야
무인도/정숙자
서푼짜리 친구로 있어줄게
서푼짜리 한 친구로서 언제라도 찾을 수 있는
거리에 서있어 줄게
동글동글 수너리진 잎새 사이로
가끔은 삐친 꽃도 보여줄게
유리창 밖 후박나무
그 투박한 층층 그늘에
까치 소리도 양떼구름도 가시 돋친 풋별들도
바구니껏 멍석껏 널어놓을게
눈보라 사나운 날도
넉 섬 닷 섬 햇살 긴 웃음
껄껄거리며 서있어 줄게
지금 이 시간이 내 생애에 가장 젊은 날
아껴아껴 살아도 금세 타 내릴
우리는 가녀린 촛불
서푼짜리 한 친구로
멀리 혹은 가까이서 나부껴줄게
산이라도 뿌리 깊은 산
태평양이 밀려와도 끄떡없는 산
맑고 따뜻하고 때로는 외로움 많은
너에게 무인도로 서있어 줄게
공검(空劍)*/정숙자
눈, 그것은 총체, 그것은 부품
알 수 없는 무엇이다
지운 것을 듣고, 느낌도 없는 것을 볼뿐더러
능선과 능선 그 너머의 너머로까지 넘어간다
눈, 그것은 태양과 비의 저장고
네거리를 구획하고 기획하며 잠들지 않는
그 눈, 을 빼앗는 자는 모든 걸 빼앗는 자다, 하지만
그 눈, 은 마지막까지 뺏을 수 없는, 눕힐 수 없는
칼이며 칼집이며 내일을 간직한 자의 새벽이다
양날이지만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수천수만, 아니 그 이상의 팔이라 할까
(나부끼지 않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바람-그냥 보냅니다. 대충 압니다. 나누지 않은 말 괜찮습니다. 여태 잎으로 수용하고 뿌리로 살았거든요. 대지의 삶은 적나라한 게임입니다. 간혹 구름이 움찔하는 건 어느 공검에게 허를 찔렸기 때문, …일까요?)
공검은 피를 묻히지 않는다
다만 구름 속 허구를 솎는
그를 일러 오늘 바람은 시인이라 한다
공검은 육체 같은 건 가격하지 않는다
*공검(空劍): 허(虛)를 찌르는 칼(필자의 신조어).
마주친 눈/정숙자
하늘은 한 알의 눈이다. 밤에조차 감기지 않는다. 낮이나 밤이나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지켜보고 세
며, 무한대로 기억한다. 결코-흘리지 않는다.
문득 저지른, 혹은 미리 짠 소행일지라도 처음부터 덜커덕 세상에
드러내지는 않는다. 기다린다. 기회를 주는 것이다. 염치를 되찾기
를-본래의 순수를 회복하기를.
하늘은
인간보다
훨씬 자비롭다.
∴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말은 속담이 아니라 금언이다. 꼬리를
밟은 이 역시 아무개가 아닌 하늘이건만, 들킨 꼬리는 목격자를 일
러 철천지원수다-창끝을 간다.
우리가 놓아준 민달팽이 한 마리, 물기 마른 지렁이를 애써 풀 섶
에 옮겨준 일, 맥없는 약자에게 함부로 굴린 눈 등 하늘은 차곡차곡
엮어두고 종종 들추어본다.
하늘 우러러 부끄럼 없기란 쉽지 않으나, 두려운 줄만 알아도 그는
이미 지식인이며, 종교인이며, 현철이다. 하늘은 알은체하지 않는다.
다만 상황을 재정립한다.
푸앵카레의 우측/정숙자
행성들이 둥글 수밖에 없는 이유. 과일들이 모서리를 잃어버린 이유. 그게 다
바람과 천둥과 벼락에 스치다 그리된 것이다. 사철 두고 대신 울어주는 폭포며
풀벌레며 새들이… 흰 살 드러내고 찢어지는 설해목의 울음을… 새끼를 빼앗긴
개와 고양이와 염소와 종마의 울음을… 갑자기 당한 실패와 좌절 앞에 끓어오
르는 인간의 울음을… 누군가 어디선가 울어주고 있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들꽃들이
구름과 돌멩이와 모래알이
둥근
이유는
인간보다 앞서 울었기 때문이다
인간보다 앞서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에 벌써
그들은 자신의 울음을 끝낼 만큼
둥글어
졌다
그리고 ‘사물화’ 되었지만
아는 것이다. 둥긂 속에 버려진 것, 버려야 할 것, 그러나 버려지지 않은 최초의~ 최후의
그 눈물의 형태
둥긂이 뭔가를 말이다
액체계단/정숙자
직각이 흐르네
직각을 노래하네
직각
직각
직각 한사코 객관적인
도시의 계단들은 경사와 수평, 깊이까지도
하늘 깊숙이 끌고 흐르네
날개가 푸르네
날개가 솟구치네
다음
다음
다음 기필코 상승하는
건축의 날개들은 수직과 나선, 측면까지도
성운 깊숙이 깃을 들이네
설계와 이상. 노고와 탄력. 눈물의 범주. 계단은 피와 뼈와 근면의 조직을 요구하네. 인간이 만들지만 결국 신의 소유가 되
는, 그리하여 쉽사리 올라설 수도 콧노래 뿌리며 내려설 수도 없는 영역이 되고 만다네.
바로, 똑바로, 직각으로 날아오른 계단은 자신의 DNA를 모두에게 요구하네. 허튼, 무른, 휘청거리는 발목을 수용치 않네. 가
로, 세로, 직각으로 눈뜬 모서리마다 부딪치며 흐르는 물소리 콸콸 콸콸콸 노상 울리네.
계단의 승/강은 눈 VS 눈이네. 한 계단 한 계단 한 걸음 한 걸음 한눈파는 눈으로는 안녕 불가. 생사의 성패의 지엄한 잣대가
계단 밑 급류에 있네. 너무 익숙히, 너무 가까이, 너무나 친근히 요주의 팻말도 없이.
살아남은 니체들/정숙자
그들, 발자국은 뜨겁다
그들이 그런 발자국을 만든 게 아니라
그들에게 그런 불/길이 맡겨졌을 것이다
오른발이 타 버리기 전
왼발을 내딛고
왼발 내딛는 사이
오른발을 식혀야 했다
그들에게 휴식이라곤 주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도움이 될 수도 없었다
태어나기 이전에 벌써
그런 불/길이 채워졌기에!
삶이란 견딤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 목록은 자신이 택하거나 설정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럴 수밖에 없었으므로 왼발과 오
른발에 (끊임없이) 달빛과 모래를 끼얹을 뿐이었다.
우기(雨期)에조차 불/길은 지지 않았다. 혹자는 스스로, 혹자는 느긋이 죽음에 주검을 납부했다…고, 머나먼… 묘비명을 읽
는 자들이… 뒤늦은 꽃을 바치며… 대신… 울었다.
늘 생각해야 했고
생각에서 벗어나야 했던 그들
피해도, 피하려 해도, 어쩌지 못한 불꽃들
결코 퇴화될 수 없는 독백들
물결치는 산맥들
강물을 거스르는 서고(書庫)에서, 이제 막 광기에 진입한 니체들의 술잔 속에서… 마침내 도달해야 할… 불/길, 속에서… 달
아나도, 달아나도 쫓아오는 세상 밖 숲 속에서.
다시 파란 밤을 꿈꾸어야 할까요/정숙자
낡았습니다
이제
어느 면이나 변에서도
속도는 더 이상 파란색이 아닙니다
길이, 예전의 하늘이 아닙니다
왜 그리 속도에 매달려 온 것일까요
꼭 그래야만 했을까요
대체 왜?
속도에 속도를 더하는 사이 파란색은 희미해졌습니다
새빨갛던 태양 역시 기침 소리도 없이 하얘졌습니다
어디선가 뭔가 자꾸 밖으로 밀려납니다
왜 이리 속도는 어떤 속도를 밀어내는 걸까요? 밀려나는 걸까요? 호수는 왜 돌에 맞아도 둥근 언어로만 말하는 걸까요?
낮은 데 고인 물이라 그런 걸까요. 삼각형; 꼭짓점은 하나뿐인데 모두가 그곳을 향해 동력을 몰아갑니다
광속을 따돌린다 해도 (각도를 돌보지 않는 한) 전혀 새롭지 않은 진화에 지쳐,
요정이 태어나지 않았을까요?
한 시절을 설레게 했던
파란 원피스!
어떻게 다시 그 소녀를 데려올 수 있을까요?
언제 다시 그 소녀를 살려 낼 수 있을까요?
시인이 바라본 어느 시인/정숙자
미개척의 어둠 속에서
금강석을 캐내며 멎지
<4 × 4 = 16>이 아닌
그보다 훨씬 많거나 빠른 답을 찾느라
간신히 치켜든 등불마저 놓치고 말지
하지만 그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암흑이 햇빛이겠지. 그 속에서라야 아직 부화하지 못한(않은) 언어를 깨울 수 있지. 삶이야 가냘프고 고달프고 아프겠지만 그렇게 얻은 문장만큼은 톡톡 여물어 코끼리가 밟아도 안 깨지겠지.
어둠 속에서
칠흑 속에서
고립된 지옥 안에서
뜨겁게 고이고 파랗게 식힌
그 절규가 바로 우주를 가로질러 날아든
한 구절 섬광이겠지
왜 이렇게 ‘프’ 字는 슬프-ㄴ 것일까
아차 ‘배고프다’도 있네
아 앗차 ‘구슬프다’ 도 있었군, 그래
그래그래 시인에게는 그렇게 힘없는 잎이 한결같은 꽃이었구나
한 올 무모한 실 위에서
소나기와 눈보라도 몸소 겪어낸
그는,
그 시인은 먼- 길 돌아온 풍속이었다
북극형 인간/정 숙 자
육체가 죽었을 때 가장 아까운 건 눈동자다
그 영롱함
그 무구함
그 다정함
아, 무참히 썩거나 재가 되어버린다
다음으로 아까운 건 뇌가 아닐까
그 직관력
그 기억력
그 분별력
아, 가차 없이 깎이고 묻히고 만다
(관절들은 또 얼마나 섬세하고 상냥했던가)
티끌만 한 잘못도 없을지라도 육신 한 덩어리 숨지는 찰나, 정지될 수밖에 없는 소기관들, 그런 게 곧 죽음인 거지.
비
첫눈
별 의 별 자 리
헤쳐모이는 바람까지도
이런 우리네 무덤 안팎을 위로하려고 철 따라 매스게임 벌이는지도 몰라, 사계절 너머 넘어 펼쳐지는 색깔과 율동 음향까지도
북극에 길든 순록들 모두 햇볕이 위험이 될 수도 있지
우리가 몸담은 어디라 한들 북극 아닌 곳 없을 테지만
그래도 우리는 정녕
햇빛을, 봄을 기다리지. 죽을 때 죽더라도
단 한 번 가슴속 얼음을 녹이고 싶지
얼음은 직선으로 부서진다/정숙자
녹음~ 흐름~~~
이미 나유타 겁의 경험을 내재한 그.
그의 순수는 선천적이라지만, 어느 정도는 경험의 소산일 거야. 그의 전신, 혹은 그의 의식은 어떤 경우에도 (가급적) 대상을 왜곡지 않아.
볕을 만나면 유유히,
혹한이 스미면 서서히 멈추곤 하지
그러나 만일 꽁꽁 언 그를 누군가 가격한다면
물답게. 얼음답게. 즉각적으로. 온몸으로. 대상을-정황을-상황을 흡수하지. 얼핏 부서져 보이지만 그건 수용이야. 온몸으로 받아들인 대상을-정황을-상황을 분석/파악할 수 있게 되지. 깨어진 조각조각 면면마다- 선마다- 비의가 눈떠.
왜 아프지 않겠는가
하지만 물은
사유하는 물이므로
통증을 길쌈하여 맑음을 새기곤 하지. 물은 그렇게 얼었다 녹았다 의문을 풀어 나가지. 그렇게 둥근 지구를 얻고, 별들을 왕래하며 흐르는 봄과 두루미도 데리고 오지. ‘다시 얼면 되니까’, ‘다시 흐르면 되니까’ 늘 한쪽 팔 문질렀지만.
물은 자신과 꼭 닮은 친구도 있지
화탕지옥 견뎌낸 유리-창, 유리-인형,
유리-바이올린까지
그들은 서로 끓었던 얼었던 시공을 기억하지
그래서 그런 것일까
설령 원형감옥에 갇힐지라도
정공법 말고는 거들떠보지도 않지
검은 코로나/정숙자
어딘지 모르는 시간 속으로 가라앉는
보고 듣고 마르다가 하얘져 버리는
이 시대 어머니들
눈 떴지만, 응시하지만 보이지 않는
태양의 가장자리 마구 찢어져
기러기 한 마리 날지 않는
골목― 골목―
가난한 어머니들
하늘이여
하늘이여
목메어 부르면 하느님도 힘드실까
차마 기도조차 올리지 못하는
이 시대 어머니들
아깝고 아까운 아들과 딸들
몽돌/ 정숙자
나는 이미 유골이다. 나는 골백번도 더 유골이다. 골백번도
더 자살했고 골백번도 더 타살됐고 그때마다 조금씩 더 새롭게
어리석게 새롭게 어리석게 눈떴다.
파도야, 보이느냐?
파도야, 보이느냐?
나는 항상 유골이다. 살았어도 죽었어도 떠도는 유골이다. 나는
골백번도 더 죽었고 골백번도 더 눈뜰 수밖에 없었던 유골이다. 나
는 늘 어리석어서 죽었고, 어리석은 줄 몰랐다가 죽었고, 어리석어
서 살아났다. 더 죽을 이유도 없는데 죽었고 더 살 필요도 없는데
살았다.
유골에게 걸칠 거라곤 바람뿐
유골에겐 바람만이 배부를 뿐
그래도 나는 저저저 태양을 사랑하노라. 저저저 태양 말고 무엇을
또 사랑할 수 있단 말이냐. 파도야, 그리고 너를 사랑하노라. 파도야!
파도야! 함께 할밖에 없노라.
극지 行/정숙자
한층 더 고독해
진다,
자라고
자라고
자라, 훌쩍
자라오른 나무는
그 우듬지가
신조차 사뭇 쓸쓸한
허공에 걸린다
산 채로
선 채로, 홀로
그러나 결국 그이는
한층 더 짙 ㅡ 푸른
화석이 된다
꽃 속의 너트/정숙자
꽃 속에 너트가 있다(면 혹자는 못 믿을지도 몰라. 하지만 꽃 속엔 분명 너트가 있지. 그것도 아주아주 섬세하고 뜨겁고 총명한 너트가 말이야.)
난 평생토록 꽃 속의 너트를 봐 왔어(라고 말하면 혹자는 내 뇌를 의심하겠지. 하지만 나는 정신이상자가 아니고 꽃 속엔 분명 너트가 있어. 혹자는 혹 반박할까? '증거를 대봐, 어서 대 보라고!' 거참 딱하구나. 그 묘한 걸 어떻게 대 볼 수 있담.)
꽃 속에 너트가 없다면 아예 꽃 자체가 없었을 것(이야! 힘껏 되받을 수밖에. 암튼 꽃 속엔 꽉꽉 조일 수 있는 너트가 파인 게 사실이야. 더더구나 너트는 알맞게 느긋이 또는 팍팍 풀 수도 있다니까.)
꽃봉오릴 봐 봐(요. 한 잎 한 잎 얼마나 단단히 조였는지. 햇살 한 올, 빗방울 하나, 바람 한 줄기, 먼 천둥소리와 구름의 이동, 별들의 애환까지도 다 모은 거야. 그리고 어느 날 은밀히 풀지.)
꽃 속의 너트를 본 이후(부터 '꽃이 피다'는 '꽃이 피-였다'예요. 어둠과 추위, 폭염과 물것 속에서도 정점을 빚어낸 탄력. 붉고 희고 노랗고 파란… 피의 승화를 꽃이라 해요. '꽃이 피다!' 그렇죠.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늘을 지우는 꽃(을 신들이 켜 놓은 등불이라 부를까요? 꽃이 없다면 대낮일지라도 사뭇 침침할 겁니다. 바로 지금 한 송이 너트 안에 한 줄기 바람이 끼어드는군요. 아~ 얏~ 파도치는 황홀이 어제 없던 태양을 예인합니다.)
누빔점s/정숙자
시간은 시간을 버리고 잘도 떠난다. 시간이 시간을 버리고 어디로 가는지, 어디서 오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여기 머무는 동안 하는 일들을 나는 오랫동안 봐왔다.
태어나게 하고
늙게 하고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 것을···
시간은 가장 신뢰하는 신의 사절/충복인지도 모른다. 존재하면서도 눈에 띄지 않는 기이(奇異)만 보더라도 그가 신의 권한대행임은 자명하다. 시간은 달력을 바꾸어 걸게 하고, 숫자를 새롭게 인식시키며 무리하게 달리거나 늦추지 않는다.
우리가 시간으로부터 배워야 할 게 있다면 자연스레 떠나는 일과 보내는 일, 맞이하는 일, 끊임없이 활동하는 일일 것이다. 시간은 어떤 제스처(gesture)를 취하거나 잠언을 들려준 적 없지만, 모든 걸 알려 주고 해결하는 만능술사다. 시간은 평등한 박애이고 냉정한 압수자이여 위로인 동시에 매듭이다.
시간이 주는 것, 가져가는 것, 놓고 가는 것들 모두를 의미롭게 바라보고 사랑하리라. 삶이 고통스러울지라도 그에 대한 색색의 감각 자체가 축복이므로···. 시간은 급히 떠나면서도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보여주고 심어준다.
우리를 여기에 데려왔고, 또한 데려갈 시간이여, 너무 빨리 지나가는 그대에게 긴 인사를 할 수 없기에 매 순간 이렇게 맑게
안녕?
안녕히ㅡ
산은 넘는 자의 것이다/정숙자
가다가 길이 막히면 거기서부터가 산이다
산을 넘지 못하면 그 너머 길을 잇지 못한다
평지에 허리를 감춘 산은 압구정동 네거리 거실 의자 중환자실 침대 위에도 있다
산을 허무는 일이야 산을 일으킨 바람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혼자다
갈수록 비탈일 수밖에 없다
많은 이가 한 길을 함께 걸어도 그 길은 제가끔 다른 길이다
관점이 길을 바꾼다
지상에 난 모든 길은 관점으로 가는 길이다
산을 오래 타다보면 사람도 산에 이르러 얼굴 어딘가 폭포가 숨고 이끼가 끼고 나비가 되지 않는 벌레도 안고 키운다
전생을 건너온 발이 여기 발아된 그 순간부터 산이 매복하고 있었던 게다
많기도 하지
어디든 눈을 던지면 산이 산을 업고 또 기대고 있다
어둠이 다락같은 저 붉은 산들을 누가 다 넘어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