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 정읍시 영원면 후지리에서 출생
1956년 : 오천수에게 판소리 사사
1969년 : 정읍국악원 강사
1976년 : 국립창극단 입단
1977년 : 성우향, 오정숙 사사
1985년 : <춘향가> <심청가> <수긍가> <춘향가> 완창
1988년 : 전주대사습 명창부 장원
1996년 : 중요무형문화제 제 5호 준 보유자 지정
1997년 : 전북도립 국악원 예술감독
2000년 : 향년 54세로 사망
중유무형문화재 제 5호 동초제 판소리 후보자로 인정됐지만 지병으로 2000년 사망해 한국 판소리사의 손실까지로 지목을 받았던 은희진 명창. 1948년 정읍시 영원면 후지리에서 태어난 은희진은 판소리 및 창극으로 현대 판소리의 남자 주역으로는 최고봉까지 올라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의 최고의 소리꾼이었다.
9살때 전남 광주광역시에서 오천수에게 9년동안 '명기명창' 등의 단가와 <충향가><홍보가>? <수궁가>등 눈 대목을 배웠고 동편제의 거장 박봉술에게 <적벽가>를 배워 사라져 가는 박봉술제 <적벽가>를 제대로 익힌 몇 안 되는 소리꾼으로 이름을 날리게된다. 그의 첫 소리선생이었던 오천수는 정정렬의 수제자로 당시만 해도 소리꾼들에게는 고제를 지켰던 판소리 명창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인물이다.
오천수가 작고하자 은희진은 그의 나이 10살때 충효 민속예술단의 단원이 되어 공연에 참가했으며, 그의 나이 22살부터 27살까지 약관의 나이에 자신의 고향인 정읍의 정읍국악원에서 판소리 강사로 활약하게 된다. 그 후 29살때 상경하여 국립창극단에 입단해 중앙무대에 서 화려한 연기, 소리 등으로 현대 판소리의 남자 명창의 중심부에 우뚝 서게 된다. 중앙무대 창극에서 그가 보여준 <춘향가>에서 이몽룡 <홍보가>에서 홍보 <적벽가>에서 제갈공명등 주연급 역할은 아직까지도 그를 능가할 명창이 없을 정도로 희자되고있어 그의 창극에서 눈부신 활동은 음악활동에 있어 첫 손가락으로 꼽힌다.
이와 함께 은희진 명창은 소리공부에도 게을리 하지 않은 명창으로도 이름이 높다,
그는 국립창극단에서 창극활동을 하는 한편 판소리 공부를 계속하였으니 29살때 성우향에게 <춘향가> 전판을 , 같은해에 오정숙에게 <홍보가> 전판을 31세 때에는 조상현에게 <심청가>전판을 그리고 31세때에는 2년동안 오정숙에게 <수긍가>전판을 공부해 명실공히 대명창으로 갖추어야할 소리 세계를 탄탄하게 익혀나가게 된다.
그래서 은희진은 성우향 조상현에게 배운 보성 정응민제 <춘향가> 와 <심청가>를 그리고 오정숙에게 배운 동초제 <홍보가> <수궁가>를 박봉술에게 배운 동편제 <적벽가>를 무대에 수 놓은바있다. 이러한 소리내력은 1985년 <춘향가>완창 발표회를 시작으로 1986년 <심청가>완창 발표회를 1989년 <수궁가> 완창발표회, 1999년 <춘향가> 완창 발표회로 이어지면서 한국 현대 판소리계의 남자명창으로도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리판에서는 이력을 인정받게 된다.
은희진이 보유하고있던 보성소리는 무엇보다도 일반 유파와는 달리 신선하고 품격있는 느낌을 주고있다. 특히 강산제 보성소리의 사설은 고상하고 점잖으며 도덕적인 면을 지니고있다. 따라서 다른 판소리 유파에서 흔히 볼수있는 육담과 음담패설 욕설같은 것은 천박한 것으로 여기고 쓰지 못하게 했으며, 부득이한 경우에는 극히 절제해서 사용하였다
또한 인물 묘사도 우아하고 장중함을 기본으로 깔고 있다. 예컨데, 판소리 <적벽가>에 나오는 조조의 경우. 다른 유파에서는 조조를 간사하고 교활하게 묘사한 인물로 그려져 있지만, 강산제 보성소리에서는 위엄있는 장수로 그려져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강산제 보성소리는 다른 판소리 유파와는 달리 품격있는소리를 지향했다는 점이 눈에띈다. 보성소리와 함께 은희진은 동초제의 소리를 갖고있다. 절제된 음악성이나 사설의 뚜렷함, 그리고 전체적으로 판을 이끌어 가는 힘이 탁월한 동초제를 은희진이 보유함으로서 그의 음악은 탄탄한 반석위에 올라설 수 있게된다.
또한 국내 최고의 판소리 명창대회인 남원 춘향제 판소리 경연대회와 전주 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최고상을 차지 명창반열에 오르기도 했던 그는 부인이며 현재 도립국악원 교수부에 재직중인 전북도지정 무형문화재 이순단교수와 <뺑파전>으로 판소리의 대중화에도 크게 성공한 명창이기도 하다. 당시 이 <뺑파전>은 <심청전>의 눈 대목을 현대화한 작품으로 대학가를 중심으로 크게 인기몰이를 하면서 은희진에게 새로운 소리인생을 전개하게 된다. 특히 공전의 히트를 한 이작품은 판소리가 대중에게 크게 인기를 얻는데 가교 역할을 햇을뿐아니라. 인기가 사려져가는 판소리에 새로운 불씨를 지피게된다.
이와함께 그는 1997년 화려한 서울무대를 등진채 전라북도립국악운 예술감독으로 작고 때까지 제 2인생을 고향에서 피우게된다. 이시기에 그는 '그리운 논개', '비가비명창권삼득'등 수많은 창작창극에 몰두화면서 고향에서그의 예술세계를 마지막까지 후학들과 도민들에게 선보이게 된다.
은희진 명창이 한국 현대 판소리사에서 끼친 영향은 크게 전통판소리의 올바른 계승과 창극에서 끊임없는 활동, 그리고 제대로된 후학배출등 크게 세 가지 요소로 집약된다. 먼저 전통판소리의 올바른 계승은 박봉술과 성우향 , 오정숙등 당대를 대표하는 명창들의 소리를 제대로 전수를 받음에따라 그가 창극무대에서 어느 소리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 뿐아니라 정통 판소리의 제 모습을 익힐 수 있게 된다.
여기에 29살에 서올로 올라가 수많은 창극공연에서 주연으로 활동해 대형극장에 걸맞은 창극의 성공을 본인이 직접 주인공으로 참여함으로써 이끌게 된다. 이는 남자명창의 빈곤도 있지만 소리 연기 춤 등 창극배우가 갖추어야할 모든것을 은희진 명창 만큼 갖춘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역할은 그 만큼 빛을 발휘하게 된다. 그리고 서울과 전북에서 그는 자신의 열정만큼 동초제와 보성소리 그리고 박봉술제 소리를 전승시키는데 게을리 하지 않아 교육자로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영유하게 된다
특히 여성이 판소리계를 주도할때 남자명창으로는 최고의 가객으로 평가받으며 혜성과 같이 등장했던 명창이 바로 은희진 명창이었다
그러나 2000년 9월 지병으로 타계함으로써 판소리계의 커다란 손실로 슬픔을 안겨준 그는 동초제 판소리의 전수자중 유일한 남자 명창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 5호 판소리 준 문화재로 지정되는 등 한국 남자판소리에 새로운 희망봉이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그만큼 판소리계의 손실로 아쉬움을 더해주고있다
은희진이 작고한뒤 서울음반에서 총 5장으로 나온 <춘향가> 다섯장의 음반은 그의 음악세계를 이해할수있는 작품집으로 눈길을 끈바 있다.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독집 앨범인 이 작품에서 은희진은 본인특유의 유창한 성음과 무대에서의 출중한 연기 그리고 맛깔스러운 소리속에 그가 현대판소리 남자명창중 최고봉에 오를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음악으로 설명해주고있다.
오직 고향이라는 명분 하나만으로 부귀영화의 서울 생활의 길 마저도 버린채 전북도립국악원 국악정으로 자리를 옮겨 후진양성에 남다른 자세를 보이고 있는 은희진 명창이 선택한 길은 지금도 전북이 판소리의 본향 국악의 성지임을 뒷바침 해준다. 화려했던 서울무대와 전북에서 후학을 지도하며 펼쳤던 국악에 대한 집념, 그리고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힘썼던 노력등은 정읍이라는 고향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고 평소에도 강조한 바있다.
은희진은 이제 소리판을 떠났다. 철저리하리만큼 자기수양에 몰두해 명창반열에 올랐지만 짧은생을 마감함에 따라 아쉬움만 남을 정도다 그라나 짧은 생에 있어서도 은희진은 활화산과 같은 예술성으로 진정한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정읍인으로 그의 프로 정신세계는 빛을 발하고있다.
정읍현대 판소리사에 있어 가장 걸출하고 명망이 있었으며 무대에서 살아있는 신화로 통할정도로 예술성을 보여준 명창이 바로 은희진이다.
첫댓글 귀한분이 가셨군요..... 아쉽습니다.......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그 분의 소리를 찾아서 들어봐야 겠습니다. TV 에서 예전에 뵙곤 했는데... 너무 빠리 가셔서 ....
은희진 명창을 처음 뵌것은 84년 남원 춘향제에서 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참으로 30대의 젊으신 모습이셨는데~~ 늦게나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은희진 명창에 대한 좋은 자료 올려 주신 천태산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잘 모르는 분입니다...... 그만큼 국악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