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복영 시인의 시집 『그늘의 혼잣말을 들었다』
약력 :
박복영
전북 군산 출생. 방송통신대 국문학과 졸업.
1997년 《월간문학》 시 당선으로 작품 활동 시작.
2014년 경남 신문 신춘문예 시조. 201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당선. 한국해양 문학상, 송순문학상,
천강문학상 시조대상, 정읍사 문학상 대상,
오늘의시조시인상, 중봉조헌 문학상. 등대문학상 수상.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시집으로 『구겨진 편지』, 『햇살의 등뼈는 휘
어지지 않는다』, 『거짓말처럼』, 『눈물의 멀미』,
『낙타 와밥그릇 』 , 『아무도 없는 바깥』,
시조집으로 『 바깥의 마중 』 , 『그늘의 혼잣말을
들었다』.
한국시조시인협회와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전북작가회의 회원.
◆bypark0122@daum.net
시인의 말
아직 살아 꿈틀거리는 질문들
아마,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2024년 초여름
박복영
그늘의 혼잣말을 들었다
돌아설 수 없는 자리 바람을 들추면 그늘은
잎사귀의 혼잣말을 닮았다 당신은 산수유 꽃
사이 숨은 흑백사진 이어서
햇빛은 그늘을 껴안는 체온 같다 뿌리 근처
그늘 한 홉 사랑할 수 있을까 바람에 몸 씻는
햇빛에서 혈색이 묻어났다
검은 새 울음이 찢어 나는 아픔에 그늘이란
이름으로 붕대를 감았다 혼자서 슬픔을 뽑아
당신을 수놓았다
낡은 털신
털 빠진 신발에 귓불이 붉어진다
뒤축에 고여 있는 가벼워진 몸무게를
끝끝내 끌어안은 채
걸어갔을 구십 평생
보폭을 줄이며 삭혀 삼킨 속도일까
무게와 보폭은 바닥 딛는 몸부림이니
무릎은 시큰거렸고
발목은 야위었으리
닳은 만큼 생도 닳아 그 문수 잴 수 없어
세상에 버릴 수 없는 단 하나 신발인데
기어이 못 신고 떠나
나, 그길 위에서 우네
소나기의 기억법
하고픈 말처럼 소나기 쏟아졌다
촘촘히 쓴 편지 속하지 못한 그 말처럼
끝끝내 부치지 못한 구겨진 고백이다
속엣말 애틋하여 비바람 견뎌 본다
부서지는 아픔으로 햇살을 꿈꿔볼 때
앙가슴 풀어헤치며 일어서는 몸짓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세운 무릎
바람에 흔들리다 휘어져 뉘어도
알알이 사랑한단말, 끝내 못한 그 말이다
트럭의 잠
낡은 트럭 타이어가 늦잠을 감고 있다
그늘을 잃어버린 야채 장수 박 씨가
달궈진 스피커에 묶여 볼모로 잡혀 있다
그늘을 찾았을 핸들의 굽은 길이
밟아야만 살았던 브레이크에 끼어 있어
엔진은 가래 끓는 듯 앓는 소리 절절하다
달아버린 타이어는 눈시울 깊게 닳아
쉼 없는 노동에도 줄지 않는 생의 무게
덜커덩, 먼지 나는 길에 허기만 남겼을까
굵은 소금 털어 넣고 냉수를 들이켜도
부르튼 마른입에 떨이를 호명해도
늦잠은 타이어에 감긴 채 풀어질 줄 몰랐다
백로 무렵
첫 이슬에 별빛 담아 목축이며 경청할까
추수 마친 들판에 새떼들 날아드니 콩새딱새
두견새 촉새물떼새쑥국새까치까마귀라 눈 씻고
귀청 헹궈 툇마루에 앉아보니 호적 없이 떠도는
기척 없는 바람처럼 지들끼리 목청 높여 소리자랑
한창이라 거나하게 술취한 순돌 아비 거드름이
아무도 못해본 사랑 사랑 사랑 사랑이야 지랄이다
노랫가락 허공을 가뭇없이 찢어대니 불쾌해진
홍시가 발끈하여 한 세상 허물 벗는 이승 셈법
눈물겨워 마룻장 짚고 나와 마당을 서성이며
기러기 마중하고 입튼 제비 배웅하니
육시럴, 지 잘난 멋으로
서리꽃만 피던 것을
시집 해설
그늘이 전하는 '이승의 셈법'
이달균 시인
박복영 시조 67수를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시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한 시인의 작품을 읽으며 오래 잊고 있었던 그 첫 물음을 다시 상기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고맙고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면을 지배하는 최근 감정의 변화, 어떤 사물에 대해 느끼는 나만의 이미지 등등 자신에겐 중요하지만, 남들에겐 덜 중요할 수도 있는 존재들에 대한 절대적 가치를 생산하는 시작의 의미는 쉽게 상실되고 말 우려가 있다. 그런 매너리즘적 상황을 확인하게 하고 치유할 시간을 제공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이번 시집 『그늘의 혼잣말을 들었다』는 신인을 벗어나 중견으로 가는 시인의 징검돌 같은 시집이다. 반환점에서 자신의 시세계를 돌아보고 다시 설정한 지향점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몸짓이라고 생각된다. 그 길목에서 듣는 '이승의 셈법'은 햇살로 빛나는 말이 아니라 그늘과 교감하고자 하는 낮은 자세와 소박함의 결실이다. 감정의 휘둘림을 제어하고 서정으로 결을 잘 갈무리한 노력이 믿음을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