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묘년 12월 12일 박래여
달력을 보니 12월 12일이다. 1979년 12.12 사태를 생각한다. 『서울의 봄』영화의 영향인가. 그해는 참으로 다사다난 했다. 1979년 10월 26일이었다. 주말을 맞아 고향에 갔었다. 엄마와 함께 도토리를 주우러 갔었다. 동네에서 뚝 떨어진 도로가는 온통 상수리 숲이었다. 엄마랑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도토리를 주웠었다.
한 자루 가득 찬 도토리를 엄마와 나누어 등에 매고 올라오는데 골목에서 누군가 뛰어나왔다. 동네 이장이었다. 우리를 동네 입구 가게로 끌고 들어갔다. 가게 안에는 동네 사람들이 여럿이 모여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는 흑백텔레비전이 나오긴 했지만 시골 동네는 한 대 정도 보급되어 있을 때였다. 전쟁이 났단다. 빨갱이가 쳐들어 왔단다. 비상시태가 선포 됐단다. 길에 다니면 잡혀 간단다.
그때만 해도 빨치산의 근거지였던 지리산 골짝 사람들은 여전히 말을 조심했고, 이웃 간에도 눈치를 봤다. 식구 중에 빨갱이라 불렸던 누군가 있는 집도 많았고, 산사람을 따라가 실종되거나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지리산 골짝은 육이오 동란이 끝난 지 오래였지만 여전히 불신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 공화당의 장기 집권으로 시작된 파벌 싸움은 여전했다. 그 와중에 독재자 대통령이 암살당한 10.26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엄마와 나는 어두워질 때까지 그 가게에 죽쳤다. 전기가 들어오고 라디오에서 비상사태 해지 사이렌이 울렸을 때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새마을 운동으로 가난한 사람을 살려줬다는, 촌사람의 우상이었던 대통령의 서거 사건은 촌로의 눈물을 자아내기도 했다.
나야 장 공화당 아이가. 아버지 세대의 노인들 자랑이었다. 아버지 역시 그랬다. 박 씨 문중은 한 핏줄이라는 것이었다. 박정희, 그는 아버지의 우상이었다. 새마을 운동으로 통일벼를 보급해 꽁보리밥도 제대로 못 먹던 촌사람들에게 하얀 쌀밥을 맛보게 한 대통령이기도 했다. 어쩌면 18년을 장기 집권한 대통령보다 국모가 더 인기를 끌었는지 모른다. 나도 육영수 여사의 우아함을 닮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흑백텔레비전에 나온 영부인, 올림머리에 한복을 입은 자태가 참 우아했다. 다소곳하고 여성스러운 여인, 한 나라의 국모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1974년 8월 15일 여고생일 때다. 여름 방학 때였다. 친구의 자취방이었는지 고향집인지 기억이 희미하지만 어디선가 흑백텔레비전 앞에서 광복절 행사를 지켜봤었다. 연단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앉아 있었다. 대통령이 연단에 올라 경축사를 낭독하는 순간 총소리가 났다. 혼비백산한 경호원과 총에 맞고 쓰러지는 육영수 여사를 봤다. 범인은 23세 조총련의 사주를 받은 문세광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오열했다. 육영수 여사는 국민이 사랑한 영부인이셨다. 향년 48세였다고 한다.
그리고 5년 뒤, 10. 26 사건이 터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달포 뒤에 터진 12.12 사태는 내가 잘 모르는 분야다. 그때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던 전두환 전 대통령과 신군부 세력은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은 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도 잘 먹고 잘 살다가 저승길 갔다. 올 겨울 영화 『서울의 봄』으로 다시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지만 역사는 역사로 남을 수밖에 없다. 누가 어떤 언변을 늘어놓던 그때 일어났던 사건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과거사 진상 규명의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역사왜곡은 있을 수 없다. 잘못 된 것을 바로잡는 것도 남은 후손이 해야 할 일이다.
세월은 흘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씨가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동네 어른들은 대부분 이런 말씀을 하셨다. ‘박대통령의 딸이니 무조건 찍어야제. 어릴 때 부모가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자란 불쌍한 아이가 저리 잘 자라줬으니 장하데이. 박대통령은 밥도 못 묵고 살던 우리 국민을 잘 살게 해 준 은인인기라. 그 은공에 보답하는 뜻에서라도 박근혜를 찍어야제.’하셨었다. 개인사를 정치사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촌로의 인정은 그렇게 소박했다.
2023년 12월 12일, 정치에 무심했던 내가 1979년에 일어났던 12.12 사건을 생각하는 것도 한 사람의 국민이기 때문이리라. 영화 『서울의 봄』을 보면서 분노했던 감정도, 안타까웠던 감정도, 개인사일지 모르나 올곧게 사는 사람들 편이라는 것이다. 현 정치계도 여전하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하는 기회주의자 역시 존재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희생당한 국민들을 떠올린다. 어떤 명분으로 일으킨 전쟁이라도 희생자는 아무 잘못도 없는 국민이라는 것이다. 민초가 있어 국가가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그들은 모르는 것일까. |
첫댓글 서울의 봄 이라는 영화를 통해 역사의 뒤안길을 헤집어 보는 요즘인것 같습니다.
우리 가족도 그 영화를 모두 보았지만 저는 영화보는것과 거리가 멀어 듣기만 합니다.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문화등등의 모든 과정들이 순탄하지 못했지만 그 어려운 가운데 잘사는 나라가 되었으니 국민의 저력이 대단한 나라입니다.
두 번을 봤어요.^^ 처음 볼 때 느꼈던 것도 두번 째 볼 때 느낀 점이 조금 달라지더군요. 관점의 차이가 이런 것이구나 싶었어요.^^
선생님, 계묘년이 다 갔어요. 갑진년에도 건강하시고 기쁜 일 많으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