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 - 가야산에는 정견모주 신이 산다
영원한 인간사랑 ・ 2023. 12. 16.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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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 - 가야산에는 정견모주 신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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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5. 02:37조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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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
가야산에는 정견모주 신이 산다
이중환은 『택리지』에 “경상도에는 석화성(石火星)이 없다. 오직 합천 가야산(伽倻山)만이 뾰족한 돌이 줄을 잇달아서 불꽃 같으며, 공중에 솟은 듯 극히 높고 또 빼어나다”라고 기록하였지만, 돌아다니다 보면 경상도 지역에도 그러한 산이 의외로 많다.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의 황매산이나 문경의 봉암사가 있는 희양산, 가야산 건너편의 매화산 등은 꽃송이 모양 바위들이 밤하늘의 운석처럼 펼쳐진 산들이다.
합천 매화산
가야산 건너편으로 보이는 합천 매화산은 가야산의 지맥으로 가야남산ㆍ천불산이라고도 부른다. 천불산은 1000개의 불상이 능선을 뒤덮고 있는 모습과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해인사 들목에 홍류동(紅流洞)과 무릉교(武陵橋)가 있는데 바위에 부딪히는 시냇물과 반석이 수십 리에 걸쳐 뻗어 있다. 전해오는 말에 고운 최치원이 여기에 신을 남겨두고 떠났는데 누구도 그가 간 곳을 모른다 한다. 돌 위에 고운이 큰 글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금방 쓴 것같이 완연하다. 고운은 다음과 같은 시로 이곳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겹친 바위 사이를 미친 듯 흐르는 물이 겹쳐진 산을 울리어
지척 사이인데도 사람의 소리를 분간하기 어려워라
항상 인간들의 시비하는 소리가 들릴까 염려하여
짐짓 흐르는 물소리를 소리로 하여금 산을 다 덮게 하였다
『택리지』에 “임진왜란 때 금강산ㆍ지리산ㆍ속리산ㆍ덕유산은 모두 왜적의 전화(戰火)를 면치 못하였으나, 오직 오대산ㆍ소백산과 이 산에는 닿지 않았다. 그 까닭에 예부터 삼재가 들지 않는 곳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가야산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을 중심으로 거창군과 경상북도 성주군 및 고령군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주봉인 상왕봉(1430미터), 두리봉(1133미터), 남산(1113미터), 단지봉(1028미터), 남산제1봉(1010미터), 매화산(954미터) 등 해발 1000미터 내외의 연봉과 능선이 둘러 있고, 그 복판에 우리나라 3대 사찰 가운데 하나인 해인사가 있으며, 매화산 자락에 청량사 및 그 부속 암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가야산
옛날 가야국이 있던 이 지역에서 가장 높고 훌륭한 산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가야의 산’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라 전한다. 해발 1000미터 내외의 연봉과 능선이 둘러 있다.
가야산 일대에서 해인사에 있는 치인리 골짜기로 모이는 물은 급경사의 홍류동 계곡을 이루고, 동남쪽으로 흘러내려와 가야면 황산리에서 낙동강의 작은 지류인 가야천이 된다. 가야산은 예로부터 ‘조선팔경’ 또는 ‘12대 명산’의 하나로 꼽혀왔다. 1966년 해인사가 자리한 가야산 일대가 사적 및 명승 제5호로 지정되었고 1972년 10월에 다시 가야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가야산의 이름은 가야산 외에도 우두산ㆍ설산ㆍ삼왕산ㆍ중향산ㆍ지달산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한다. 『택리지』에 가야산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에 있지 않으면서도 그 높고 수려함과 삼재가 들지 않는 영험함으로 명산으로 불렸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명산에는 산신(山神)이 있는데, 가야산에 있는 가야산신은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여신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천신 이비가지에 감응되어 뇌질주일과 뇌질청예를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대가야의 시조 아진아시왕, 뇌질청예는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의 별칭이라 하였다. 따라서 가야산의 산신 정견모주는 가야 지역의 여신이었을 것이다.
해인사 (1)
가야산 남서쪽에 우리나라 삼보(三寶) 사찰 가운데 하나인 해인사가 자리하고 있다. 불보(佛寶) 사찰인 통도사, 승보(僧寶) 사찰인 송광사와 더불어 법보(法寶) 사찰로 유명하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가야산 형승은 천하에 뛰어나고 지덕은 해동에 짝이 없으니 참으로 수도할 곳이다”라고 실려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큰절이 그렇지만, 특히 해인사는 창건 뒤 여러 차례 중창이 있었는데 모두 국가의 각별한 지원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신라의 애장왕이 그러했고, 고려 태조 왕건과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발원 그리고 세종ㆍ세조ㆍ성종의 중창 지원은 각별한 것이었는데, 그렇게 국가의 재정을 넉넉히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해인사가 민족의 고귀한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판을 1000여 년 가까이 보전함으로써, 법보종찰의 명성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야산 해인사는 또 국가가 환란에 처했을 때 일어난 불교 호국 전통의 중심지였다.
불가사의하게도 민족의 보물인 고려팔만대장경판과 이를 봉안한 장경각만은 한 번도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가야산 안쪽에 해인사가 있다. 신라 애장왕이 죽어서 염까지 마쳤는데, 다시 깨어나서 명부의 관원에게 발원하기로 약속하였다 하며, 사신을 당나라에 들여보내서 팔만대장경을 구입하여 배에 싣고 왔다. 그리고 그 내용을 목판에다 새겨 옻칠을 하고 구리와 주석으로 장식한 다음, 장경각 120칸을 지어서 보관하게 하였다. 그 뒤 1000여 년이 지났으나 판은 새로 새긴 것 같으며, 날아가는 새도 이 집을 피해서 기와지붕에 앉지도 않는다고 하니, 이것은 실로 이상한 일이다. 유가(儒家)의 경전은 보관하는 집이 비록 대궐 내에 있다 하여도 나는 새가 집 위를 지나가지 않을 리가 만무한데 불교 경전은 이와 같이 신기하니, 이것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절 서북쪽에 있는 가야산 상봉은 돌의 형세가 사면으로 깎아지른 듯하여 사람이 올라갈 수 없다. 그 위의 평탄한 곳이 있는 듯하나 사람은 알 수 없다. 그 꼭대기에는 항상 구름기가 자욱하게 덮여 있다. 나무꾼과 목동이 산봉우리 위에서 들려오는 풍악 소리를 가끔 듣는다 한다. 해인사의 스님이 말하기를 “짙은 안개가 끼면 산 위에서 말 발자국 소리가 날 때가 있다”라고 한다.
이는 『택리지』의 기록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였던 한강 정구는 『가야산 기행』에서 “산꼭대기에 올라가 눈을 식히고 가슴을 펴보는 것”을 강조하였고, 산골짜기에서 푸른 물이 맑은 소리를 내면서 흘러가는 소슬한 경치를 보고 “가슴을 시원하게 씻겨준다”라고 느낌을 표현하였다.
해인사 (2)
절 이름인 해인(海印)은 ‘세계 일체가 바다에 그림자로 찍히는 삼매’를 말하는 불교의 화엄 정신을 나타낸다.
팔만대장경을 간직한 해인사는 통도사, 송광사와 함께 삼보사찰 중의 하나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대로 통도사에는 석가모니 사리가 모셔져 있고, 해인사에는 석가모니 가르침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팔만대장경이 봉인되어 있으며, 송광사에서는 고려 이래로 국사를 지낸 열여섯 명의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그런 연유로 세 절을 각각 불보(佛寶)ㆍ법보(法寶)ㆍ승보(僧寶) 사찰로 꼽는데, 법보 사찰인 해인사가 창건된 것은 신라 애장왕 3년(802)이었다. 고운 최치원은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에서 해인사의 창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조사인 순응대덕은 신림대사에게서 공부하였고, 대력(766~779) 초년에 중국에 건너갔다. 마른 나무 쪽에 의지하여 몸을 잊고 고승이 거처하는 산을 찾아가서 도를 얻었으며, 교학을 탐구하고 선의 세계에 깊이 들어갔다. 본국으로 돌아오자 영광스럽게도 나라에서 선발함을 받았다. (······) 정원 18년(802) 10월 16일에 동지들을 데리고 이곳에 절을 세웠다. (······)
이때 성목왕 태후께서 천하에 국모로 계시면서 불교도들을 아들처럼 양육하시다가 이 소문을 듣고 공경하며 기뻐하시어 날짜를 정하여 귀의하시고 좋은 음식과 예물을 내리셨다. 이것은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지만 사실은 땅에 의하여 인연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안개처럼 문으로 모여들 때 스님은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하여 이정선백(利貞禪伯)이 뒤를 이어 공적을 세웠다. 중용의 도리를 행하여 집을 잘 다스렸고, 주역 대장의 방침을 취하여 건물을 새롭게 하니 구름이 솟아오르듯, 노을이 퍼지듯 날마다 새롭고 달마다 좋아졌다. 이에 가야산의 빼어난 경치는 도를 성취하는 터전에 알맞게 되었으며, 해인사의 귀한 보배는 더욱 큰 값어치를 지니게 되었다.
순응스님은 이 절을 세운 뒤 그의 증조 스님인 의상의 화엄종지(華嚴宗旨)에 따라서 해인사라고 이름 지었는데, 해인(海印)은 ‘세계 일체가 바다에 그림자로 찍히는 삼매’를 말하는 불교의 화엄 정신을 나타낸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 곧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말로, 화엄경의 세계관은 일심법계(一心法界)라고 할 수 있다.
온갖 것에 물들지 않은 진실과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가 일심법계인데, 일심법계에는 물질적 유기 세계, 중생들의 세계, 바른 깨달음에 의한 지혜의 세계가 있는 그대로 다 나타난다. 세차게 불던 바람에 드높던 파도가 어느새 그치고 바다가 고요해지면 거기에 우주의 수만 가지 모습이 남김없이 드러나는 것, 이러한 경지를 해인삼매라고 한다. 해인삼매는 부처가 이룩한 깨달음의 내용이며, 일체의 것들이 돌아가야 하는 근원이며, 본래의 모습이다. ‘해인사’라는 절 이름은 바로 이러한 뜻을 지니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야산에는 정견모주 신이 산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9 : 우리 산하,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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