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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802
6월25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연중 제1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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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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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azxQwL77k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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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분단의 벽을 넘어서는 일은 온몸이 으깨어질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담대한 용기로 실천해야 가능합니다!>
또 다시 민족 분단이라는 우리의 가슴 아픈 현실을 돌아보고 기도하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이 돌아왔습니다. 통일로 가는 길목에는 넘어야 할 산봉우리가 한두 개가 아니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으시니, 오늘 모두가 합심해서 더 간절히 기도해봐야겠습니다.
같은 피를 물려받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 동포인 남과 북이 갈라서서, 점점 더 멀어지기 시작한 지 벌써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리적으로는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살아가지만, 심리적으로는 지구상 가장 멀리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서로가 너무 낯선 존재, 이질감이 커져버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오늘 같은 날, 남북한 동포들이 다 함께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고민거리이자 역사적 과제가 한 가지 있으니, 분단고착화를 기정사실화하려는 분위기의 배척이요, 남북통일의 필요성에 대한 무감각을 경계하는 일입니다.
남북 분단 이후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니, 이제 사람들 머릿속에 '통일은 불가능한 것이라기보다, 그냥 이렇게 살아야 되는구나'라는 의식이 점차 일반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분단의 고착화와 남북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는 반민족 세력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통일은 자신들이 오랜 세월 쌓아온 입지와 기반을 흔드는 일이니, 결코 있어나서는 안 될 일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눈만 뜨면 어떻게 해서라도 남북 간의 갈등과 긴장을 조장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같은 날, 안타깝게도 분단고착화 세력에 희생되신 백범 선생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마음 깊이 담고 지내야겠습니다.
“분단된 동포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이 시대 새로운 독립운동입니다. 통일 운동은 곧 제2의 독립운동입니다”(백범 선생)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다른 그 누구의 과제가 아니라, 남북 당사자들 사이에서 해결해야할 문제입니다. 남북을 둘러싼 주변국가들 겉으로는 반기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지속적인 분단을 원합니다. 한반도의 분단이 곧 그들의 국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의 내밀한 가정사에 대해 옆집 이웃들이 끼어들어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얼마나 기분 나쁜 일이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처한 형국이 똑같은 현실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히 남북문제의 주도권을 우리 손으로 가져와야 마땅합니다.
70여년 이상 분단고착화로 인한 남과 북의 증오와 대립, 불신으로 우리는 북한에 대하여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왜곡, 날조된 정보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이른 바 우리는 북맹(北盲) 상태입니다.
북한에 대하여 증오와 불신으로 눈이 멀어 아무것도 아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북녘 동포들을 좀 더 알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단의 벽을 넘어서는 일은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온몸이 으깨어질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담대한 용기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 한민족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이제는 그만 분단의 세월을 끝내고, 조속한 평화 통일을 선물로 주시라고 열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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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K4d_2qHvQ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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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도 100°C가 있다>
오늘은 71년 전 우리나라에 전쟁이라는 무서운 재앙이 시작되었던 때를 기억하며 다시는 그런 비극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일이 없도록 화해와 용서, 그리고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현재 한국 가톨릭교회는 밤 9시에 주모송을 함께 바치며 평화통일을 위해 마음을 모아 다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무언가를 바란다면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이가 무언가를 바랄 때 부모에게 청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고, 당신께 붙어있으면 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니 통일을 바라면서 기도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기도한다고 다 될까요?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고 언제까지, 얼마만큼 기도해야 할까요?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낼 때 비가 오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비가 올 때까지 기도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이런 정신이 필요합니다. 기도의 힘을 믿는다면 죽기까지 한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기도에는 항상 ‘100°C’가 존재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기도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건 주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100°C가 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하는 기도가 어디 다른 데로 낭비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계 타듯 탈 날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고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멀리 있는 길을 갈 때는 목적지를 보지 말고 지금 한 발 내딛는 한 발짝 앞만 보며 걸어야 지치지 않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시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는 에이브러햄 링컨은 실패의 연속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가난한 농부였고 어머니 낸시 행크스 링컨은 미혼모의 딸이었습니다. 부모는 둘 다 문맹이었습니다. 링컨이 9세 되던 해 어머니 낸시 행크스는 “부자나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기보다 성경을 읽는 사람이 돼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20세가 넘도록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했던 링컨은 한때 그가 점원으로 있던 방앗간과 상점을 인수했지만, 곧 1100달러의 빚만 지고 파산했습니다. 이후로도 그의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24세에 주 의회 낙선, 24에 다시 사업 실패, 26세에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 27세에 신경쇠약 증세, 29세에 의회 의장직 낙선, 31세에 대통령 선거위원 낙선, 34세에 국회의원 낙선, 39세에 46세에 또 국회의원 낙선, 47세에 부통령 낙선, 49세에 상원의원 낙선.”
주위 사람들은 그가 절망의 늪에 빠져 큰일을 저지를 것 같아서 그의 주위에서 칼과 같은 것들을 치웠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그도 “나는 살아있는 사람 중에 가장 비참한 사람이다. 앞으로 더 좋아질 것인지도 말할 수 없다. 앞으로 더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는 무서운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의 말대로 하느님의 사람이 되려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실패까지도 하느님의 계획안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낙선했을 때 이렇게 행동했습니다. “난 낙선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음식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배가 부를 정도로 많이 먹었다. 그다음 이발소로 가서 머리를 곱게 다듬고 기름도 듬뿍 발랐다. 이제 아무도 나를 실패한 사람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난 이제 곧바로 또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배가 든든하고 머리가 단정하니 내 걸음걸이가 곧을 것이고 내 목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힘이 찰 것이다. 나 스스로 다짐한다. 다시 힘을 내자. 에이브러햄 링컨!”
그는 일어나 59세에 드디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의 놀라운 성공의 비결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자 링컨은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성경에도 “의인은 일곱 번 쓰러져도 일어나지만, 악인은 불행 속으로 넘어지기 때문이다.”(잠언 24,16)라고 말합니다. [출처: ‘링컨 대통령의 실패’, 다음 블로그, ‘사랑하는 인간’]
믿는 사람에게 실패는 없습니다. 모든 발걸음은 좋은 방향으로 가는 한 걸음이고, 모든 계단은 더 높은 곳으로 향하는 한 계단입니다. 지금은 실패처럼 보이더라도 결국 쌓이는 것입니다. 기도도 버려지는 기도는 절대 없습니다. 도달하지 못했을 뿐이지 결국 쌓이는 것입니다.
100°C는 물에서 수증기로 모양새가 변화되는 온도입니다. 저는 성체조배를 하루 ‘3시간’은 꼭 하려 합니다. 이 ‘3시간’이 어떻게 나왔을까요? 저는 신학생 때는 물론이요, 사제가 되어서도 육체의 욕망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시밭에 맨몸으로 굴렀다고는 하지만 전 그러지는 못하고 운동도 해 보고 찬물로 샤워도 해 보고 그런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잠자리에 드는 등 여러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시원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1시간 할 때와 2시간 할 때가 달랐습니다. 마치 햇빛에 얼음이 녹듯 내 안의 욕망이 내가 성체 앞에 앉아있는 시간에 따라 사뭇 달라진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도시간을 3시간까지 늘렸더니 기적처럼 욕구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아! 나에게 기도의 100°C는 3시간이구나!’ 특별히 나 자신을 아주 위험한 상황에 스스로 놓이게 하지 않는 한 3시간의 성체조배는 적어도 대죄는 짓지 않게 만드는 시간이 되어주었습니다. 죄가 곧 고통의 시작이고 하느님과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믿으면 죄를 짓지 않기 위해 기도에 의지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둘이나 셋이 모여 함께 기도하면 다 들어주시겠다고 하시고 그다음은 용서해 주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 말은 기도하면 용서할 힘이 생기기 때문에 하루에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 사람이 용서될 때까지 기도하지 않는다면 용서하기 싫거나 아니면 기도의 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분명 기도로 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반드시 기도가 100°C에 다다라 하늘로 올라갈 온도가 분명 있음을 믿고 포기하지 맙시다.
저도 사실 밤 9시에 기도하는 것을 열심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믿고 꼭 해 보려고 다시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 기도가 쌓이면 언젠가는 남북이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고 하나가 되어 그들도 복음을 받아들일 날이 올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며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 형제가 낭떠러지로 떨어지려 하는데도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그리고 기도의 힘을 믿는다면 북한에도 복음이 전해지도록 기도를 멈추지 맙시다.
석공이 돌을 깰 때 그 돌이 마지막 망치질에 깨지지만, 그 이유는 그 전에 100번의 무의미하게 보이는 망치질로 돌을 약하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면 헛된 발걸음은 없고 낭비되는 기도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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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독서 복음은 한국 가톨릭교회가 남북통일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으로써 통일을 준비하는 자세가 담겨 있다. 회개와 용서를 통한 사랑의 생활과 믿음의 기도로써 민족화합과 통일을 기원하자. 일제의 손에서 우리에게 광복을 주신 하느님께서 자비로이 평화통일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회개하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으며 사랑의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제2독서: 에페 4,29-5,2: 서로 용서하십시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듯이 서로 용서하라고 하며 분노와 욕설과 악의를 내어버리라고 한다. 북한의 위협적인 태도가 용서와 신뢰를 회복하기에는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북한의 어떤 주민이 “남한과 미제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이대로 폭삭 망하는 것이 낫겠다.”고 한 기사는 그들 또한 우리를 두려워하고 못미더워하며 용서 못할 자들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북은 서로를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의 자유, 복지와 평화 그리고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안보 의식을 굳게 가져야 한다. 그러나 상호 용서를 통해 민족이 화해할 때 그 이상의 안보와 평화는 없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먼저 마음으로 용서해야 되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복음: 마태 18,19-22: 기도와 용서
복음에서는 기도와 용서를 가르치신다. 기도는 통일과정에 필요한 교회의 역할 가운데 가장 우선적인 선택이다. 기도하면서 남북의 화해를 이루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에 앞서 우리는 우리들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화해하지 못한 형제가 있으면, 이 미사의 은혜로 서로 화해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하도록 하자.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누군가를 오랫동안 용서하지 못하고 또 화해하지 못한 채 끝내 이 세상을 떠나보낸 적이 있다. 그 때는 그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기도하던 중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와 화해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냥 모른 척 부딪히지 않고 관심 두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와 화해하고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하느님과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사랑하는 아드님을 통해서 나를 용서하셨고, 그런 나를 받아들여 주신 하느님 앞에 나는 그를 더 이상 미워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얼굴을 맞대고 손을 먼저 내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내 마음이 열리기를, 용기가 생기기를 기도하였다. 하루 이틀 미루던 중 갑자기 떠나버린 그를 앞에 두고 뒤늦게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어리석게도 ‘내가 화내는 이유는 너무나 정당한데 왜 내가 먼저 화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자꾸 던졌던 내게 하느님은 아무 말 없이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나를 용서해 주시지 않았는가?” 라고 하였다.기회는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다. 은총의 때를 잘 알고 그 순간에 우리는 용기를 내어서 다가가야 할 것이다.
별 뚜렷한 근거 없이 낙관하는 통일관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장벽에 좌절한다는 것은 우리의 희망을 빼앗아 간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통일을 이루어 주시도록 겸손과 인내로 기도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랑의 생활을 할 때 통일은 성큼 우리에게 다가와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사회가 서로 용서하고 화합할 수 있도록 우리 신앙인들이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먼저 화해하지 못하고 일치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북이 통일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먼저 우리 사이의 관계 개선을 위해, 그래서 일치되도록 노력하자. 이것이 남북통일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항상 하느님의 일, 하느님의 뜻,하느님의 말씀을 선택하여 실천하는 삶으로 우리나라의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결심하며, 오늘을 살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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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이 하루빨리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 기도해 봅니다. 민족의 분단이라는 쓰라린 역사의 상흔이 한 세기가 다 되어 가도록 우리의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칠십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우리는 기도해 왔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여전히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듯 보입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까?”라는 의문도 가져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기도에 관련된 말씀과 용서에 관한 말씀이 함께 등장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는 것으로 그분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반면에 용서는 인간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역할과 인간의 역할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움직여 오신 전형적인 방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대로 세상을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언제나 인간과 공동 작업을 하고자 하십니다. 이것은 기도로 청원을 드리는 것만으로 하느님을 움직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노력이 함께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바라봅니다. 우리 민족은 지난 칠십 년 동안 하나 됨을 위해서 긴 시간 기도해 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 되고자 하느님과 함께하는 노력이 부족하였음을 의미합니다. 분단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우리에게 통일의 필요성과 간절함은 점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남북이 평화로이 교류하고 소통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하나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며 노래도 불러 왔습니다. 희망과 노래만이 아닌 진정한 화해와 용서를 위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함을 기억하면서 다시 한번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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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화해>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화해’에 관하여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이 말씀은,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려면 먼저 형제와 화해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진정한 섬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이 어느 쪽에 있는지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다.”는 말씀은, 잘못이 어느 쪽에 있는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형제가 나에게 원한을 품고 있고, 나를 미워하고 있는 상황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내가 어떤 잘못된 일을 그 형제에게 했을 수도 있고, 그런 일이 없는데도 그가 괜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지금 예수님의 가르침은 내가 먼저 가서 해결하고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잘못한 일이 없는데 왜 내가 먼저 가야 하는가?”라고 묻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말입니다. ‘화해’의 손을 내미는 일은 항상 ‘내가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화해하기 전에, 누가 더 잘못했는지, 또는 갈등이 누구 탓인지를 먼저 따져보자고 주장한다면, 아마도 화해는 영영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용서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자주 생각하지만, 형제에게 용서를 청하는 일은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화해의 기본자세는 언제나 ‘내 탓이오.’입니다. ‘내 탓이오.’를 먼저 말하지 않고 ‘네 탓이다.’를 먼저 말한다면 화해할 수가 없습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ㄴ-20)
이 말씀에 있는 ‘마음을 모아’ 라는 말을 생각할 때, 우리는 거의 항상 무의식중에 ‘우리의 마음을 모으는 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그들’, 또는 ‘그’와 마음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은 못합니다. 물론 말씀의 문맥으로는 ‘우리’의 마음을 모으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원수로 생각하는, 또는 적으로 생각하는 ‘그들’과 마음을 모아서 기도할 수는 없는 것일까? (“마음을 모아서 함께 기도할 수 있다면 원수나 적이 아니지 않은가?”라고 반문할 사람이 많을 텐데, 형제를 원수나 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죄를 짓는 일이지만, 시도해 보지도 않고서 ‘마음을 모을 수 없는 자들’, ‘함께 기도할 수 없는 자들’이라고 마음대로 판단하면서 형제를 밀어내는 것도 죄를 짓는 일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원수 같은 사람은 내가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고, 사랑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과 마음을 모아서 함께 기도하는 것은 당연히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갈라져 있는 형제와 마음을 모으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우리의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우리의 마음도 제대로 모으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긴 세월 동안 기도를 했다고 말하지만, 정말로 마음을 하나로 모은 적이 있었는가? 이념과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적대시하고, 미워한 것이 우리의 지난 역사이고,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교회 밖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버지께 청하는 일 자체가 참으로 염치없는 일입니다.
1) 우리가 도와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못하는 부분들을 도와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면서, 즉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안 하면서 기도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동시에 해야 하는 일입니다. (형제와 화해하고 일치를 이루는 일에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고,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일까? 우리가 예상할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외적인 환경 변화 같은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2)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이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기 때문에 ‘선한 일’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내용도 ‘선’이어야 합니다. (모두에게 좋은 일이어야 합니다.) 만일에 상대방의 멸망을 청하거나 상대방을 저주하는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죄를 짓는 일입니다. 겉으로는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를 하면서 속으로는 형제의 멸망을 바라고 있다면, 그것은 위선일 뿐만 아니라, 기도를 모독하는 죄이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선한 일’이기 때문에 기도를 ‘사랑으로’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마음속에 미움이 들어 있는 채로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특히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를 할 때에는 마음속에 있는 미움부터 없애야 합니다. (미움을 없애지 않고서 화해와 일치를 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나는 안 미워하려고 애써도 상대방이 미운 짓을 계속한다. 그러니 내 마음속에 있는 미움은 내 탓이 아니라 그쪽 탓이다.”라고 말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미움을 없앨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부터 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3) 기도할 때에는 반드시 기도가 이루어진다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믿음도 희망도 없이 기도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 그것은 모릅니다. 그래도 끝까지 믿음과 희망을 잃으면 안 되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의 시간과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은 많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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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5월 한미정상회담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미국의 명예훈장 수여식에 함께 하였습니다. 명예훈장을 받은 분은 94세의 한국전 참전용사였던 랠프 퍼켓이었습니다. 조국을 위해서 헌신했던 노병을 기억하였습니다. 한국을 위해서 싸웠던 노병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미국의 명예훈장 수여식에 외국의 대통령이 참석한 것은 한국 대통령이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94세의 노병 옆에서 양국의 대통령이 무릎을 꿇고 기념촬영을 했던 모습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참전용사들의 희생으로 한국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참전용사들의 용기와 희생, 우정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라고 고마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참전용사를 기억하고, 훈장을 주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스라한 기억이 있습니다. 왜 다투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친한 친구와 싸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키가 컸던 친구는 저의 목을 잡았습니다. 상대적으로 키가 작았던 저는 친구의 급소를 잡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상대방의 아픈 곳을 잡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아픈 곳을 놓아 주었고, 눈물을 그치고 함께 하드를 사 먹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잡은 상대방의 아픈 곳을 놓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서로에게 무기가 되었던 손은 서로를 보듬어 주는 화해와 용서의 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본에 의한 36년 식민통치를 지냈고, 남과 북이 분단된 73년을 살고 있습니다. 한반도가 서로 다른 나라로 지낸 것이 처음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통일된 나라를 이루었던 체험이 있었고, 같은 말과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언젠가는 다시금 하나 된 나라를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참으로 화해하고, 민족이 하나 될 수 있는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먼저 자신을 성찰하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힘으로는 힘든 일이지만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찰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조건이 없습니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용서는 용서하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의 제2 독서는 용서의 구체적인 행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산가족이 만나고, 남과 북이 단일팀으로 국제경기에 나가고, 남과 북의 예술인들이 평양과 서울에서 공연하고,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백두산 관광도 계속되고, 서울, 평양을 이어주는 고속도로, 철도가 개통되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정치와 군사적인 통일은 아직은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분야는 우리가 서로 협력을 하기로 마음만 먹으면 못 할 것도 없는 일들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남과 북이 대화와 협력으로 풀어나가던 일들입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이 함께 하시어, 우리 사회의 갈등이 치유되기를 기도하며, 남, 북의 화해와 일치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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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기범 본시아노 신부님]
오늘은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한 영성가가 전한 이야기로 시작하려 합니다.
한 사업가가 술집에 들어가 자리에 앉으니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눈에 거슬린다. 왜냐하면 그는 귀에다 바나나를 꽂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업가는 생각했다.
“저 사람에게 사실을 말해 줄까? 아니야.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지.”
그러나 그 생각이 자꾸 그를 괴롭힌다. 그래서 한두 잔 마신 후에 말을 건다.
“실례합니다. 저, 귀에 바나나가 꽂혀 있군요.”
“뭐라고요?”
“당신 귀에 바나나가 꽂혔다고요.”
“뭐라고요?”
사업가는 소리친다.
“당신은 귀에다 바나나를 꽂고 있어요.”
“더 크게 말씀하세요. 난 귀에 바나나를 꽂고 있거든요. 바나나로 귀가 막힌 것압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이 잘 안 들린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걸 안 뽑습니다. 왜일까요? 듣지 않기로 작정했으니까요. 들으면 변하거든요. 그게 싫은 겁니다. 그게 두려운 겁니다. 그 두려움으로 우리 민족은 아직도 분단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한반도에는 크나큰 아픔이 있었습니다. 상당한 기간 동안 서로에게 총을 겨눈 일인데, 과거에 있었던 일이지만 지금도 그 아픔이, 활화산처럼 살아있는 이들이 수다합니다. 전장은 거친 말과 총기로 서로 위협하고, 첨단의 무기들이 건물을 파괴하며, 살림집을 폐허로 만들고, 공들여 쌓아온 터전이 무너지며, 가족과 공동체가 무너지는 참상을 겪습니다.
아픔이, 원수가 늘어납니다. 이렇듯 전쟁은 일상을 심술처럼 흩어놓습니다. 가족들은 헤어지고, 아이들은 배를 곯고, 장정들은 심하게 부상을 당하고, 시도 때도 없이 목숨을 잃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평화를 간절히 원하는 이유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멀게 하면 자신의 눈알도 빼야한다. 다른 사람의 뼈를 부러뜨리면 자신의 뼈도 부러뜨려야 한다. 부모를 구타한 자식은 손목을 자른다.”
예수께서도 이것을 알고 계셨습니다.(마태 5,38)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마태 5,40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신념으로,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의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이 참으로 엄중하고 경건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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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오정섭 이냐시오 데 로욜라 신부님]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남북통일 기원 미사’를 봉헌합니다. 기원 미사를 봉헌하며, 우리는 과연 어떠한 간절함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전쟁으로 인해 갈라진 이 땅에, 타의로 이산가족이 된 분들을 생각하면 통일은 꼭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 남한과 북한은 통일,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가? 왜 화해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누가 속시원하게 말해주기도 어렵고, 또 누군가로부터 ‘답’을 듣는다 해도 일치된 공감대를 얻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특히 세상에서 말하는 통일의 목적에는 논란이 참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남북통일을 위한 기원 미사를 드릴까요? 우리가 하느님께 통일을 청해야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요?
교회는 어떤 경제적인 이유나 정치적인 이유로 통일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하나였던 민족이 정치적인 여러 가지 이유로 갈라져 전쟁까지 하게 되었으며, 아직도 남북이 나뉜 이 현실은 왠지 모를 서글픔을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습니다.
막연하지만 분명히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라는 양심에서 나오는 그 소리에 우리는 집중해야 합니다. 신앙은 세상과 분리되어 따로 활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분명히 우리의 삶 안에서 구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평화와 사랑을 부르짖으면서 내 민족이며 이웃나라인 북한과 화해하지 못하고 총을 겨누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분명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소명을 가집니다. 즉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민족의 역사 안에서 드러나도록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과제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통일을 갈망합니다. 평화통일을 갈망합니다.
오늘 독서의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1).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에페 5,1)라는 말씀은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가 하느님의 뜻임을 알려줍니다.
세상에 보이는 분쟁과 싸움을 ‘내가 한 일이 아니니까’ 하고 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악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은총의 선물로 ‘북한’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북한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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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노희철 베드로 신부님]
<용서하는 것이 쉬우면 좋겠는데...>
신학생들은 신학교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한정된 사람들과 생활하다 보니, 작고 사소한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로 인해 관계 안에서 내적인 불편함을 체험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신학생들은 그런 어려움을 고해성사를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즉, 성사를 통해 받은 은총으로 자신이 먼저 상대에게 다가서는 노력의 과정에서 화해의 맛을 체험하게 된다. 신학생들은 상대에게 먼저 다가서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인식하고 있지만, 용기를 내는 순간 은총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질문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처지에서 보면 가혹한 말씀일 것이다.
‘서너 번’ 용서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것의 수십 배를 해야하다니…. 예수님도 인간이셨으면서 인간의 연약하기만 한 용서의 능력과 한계를 모르셨을까?
결국, 용서라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내용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용서의 은총’을 얻기 위해, 마음을 열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 삶에서 가장 힘든 문제를 하나 꼽으라면 아마도 타인과의 관계일 것이다. 나의 처지에서 생각하면 ‘갈등이나 문제는 언제나 상대방으로부터’ 발생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상대 역시 문제의 원인은 그의 상대인 ‘나’로부터 발생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내가 상대방이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상대역시 나에게 그것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서로가 ‘상대의 탓’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화해의 길은 요원할 것이다.
그러기에 내가 먼저 화해를 위한 ‘힘겨운(?) 노력’을 해야 할지 모른다. 때로는 그러한 나의 아름다운 노력이 상대에게 거부당하고역이용 당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 신앙인들은 인내심을 갖고 상대에게 다가서야 할 것이다. 세상의 논리대로 합리성과 냉철한 이성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신으로 상대에게 다가서야 한다.
남북 관계 안에서도 상대의 회개를 통일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할 때는 통일의 길이 요원하지만, 예수님의 정신으로 우리가 먼저 마음을 열고, 비록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속더라도, 화가 나더라도 인내하며 꾸준히 노력한다면 또 다른 길이 보일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운명을 바꾸어 주시듯이’(신명 30,3), 예수님에게서 얻은 사랑의 마음으로 노력할 때, 진정 은총은 우리의 삶을 새로운 차원으로 인도할 것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서로 용서하려는 마음을 간직하려고 할 때,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며(에페 4,32), 은총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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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근본 모순이라 할 수 있는 민족 분단의 화해와 일치는 화제에 오르기만 하면, 서로 적대 논리로 날을 세워 남북 당국을 비난하고 욕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서 각 공동체나 개인의 극단의 갈등을 드러내기 일수 입니다. 그러니 이는 단순한 남북의 대립과 갈등만의 문제는 아니라, 남과 남, 북과 북의 내부적 대립과 갈등을 포함하여, 국제 역학의 영향을 받는 복잡한 문제라 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무엇보다도 “마음을 모아”(마태 18,19) 기도하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너희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여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구하라.”(마태 18,20)
바로 “이 땅”이 우리가 이루어야 할 친교와 화해의 장소라는 말씀입니다. 먼 훗날이 아니라, 평화로운 새로운 새 땅에서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바로 지금, 서로 마음을 모으라는 호소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곳, 이 땅 한반도에서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적대감과 대립을 몰아내고, 편견과 거짓과 위선을 몰아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와 용서, 일치와 사랑이 필요할 때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특별히 “오늘”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한 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신명 30,2-3)
분단극복과 화해와 일치의 실현에는 그동안의 우리의 불성실을 성찰하는 동시에, 바로 ‘오늘’ 우리의 책무와 투신이 요청된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동안 한국 천주교회는 한반도 평화를 간절히 염원하며, 지난 2015년 이래로 매일 밤 9시에 주모경을 바쳐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17일부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9일 기도”를 해 왔습니다. 첫째 날로부터 시작하여, ‘평화통일을 위한 회심을 위하여’, ‘북한과 미국, 그리고 남한의 정치 지도자들을 위하여’, ‘한반도의 비핵화와 핵무기 없는 세계를 위하여’, ‘경제제재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남과 북의 복음화를 위하여’, ‘이산가족과 탈북민을 위하여’, ‘한반도의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위하여’, ‘평화의 일꾼들을 위하여’ 그리고 마지막 날인 오늘은 ‘한반도에 종전이 선언되고, 평화체제가 실현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지난 3월에 시작된 “한반도 종전 평화 캠페인”에는 21일부로 전 세계에서 7만 명이 서명했습니다. 혹 아직 서명하지 못한 분은 참여하길 바랍니다. 이제 또 다시 화해와 일치를 위한 더 새로운 출발이 모색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리스도처럼, 화해와 일치를 위해 바치는 향기로운 산 제물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새로운 생활 법칙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에페 4,29)
사실, 우리들 사이의 분쟁의 상당한 것들은 잘못된 말이나, 욕, 비난, 중상모략, 거짓말로 시작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남과 북이 서로를 비방하고, 거짓 뉴스와 유언비어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를 멈추고, 오히려 서로를 격려하고 고무, 찬양해야 할 일입니다. 축복을 가져다주는 좋은 말, 기쁨과 칭송의 말을 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는 대립과 반목으로 오랫동안 쌓여온 남북의 적대를 용서로 바꾸어야 할 일입니다. 적이 아니라, 형제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용서와 화해, 사랑과 일치를 이루어 나가야 할 일입니다.
이는 꼭 남북관계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모두 서로에게 그렇게 해야 할 일입니다. 특히 같은 공동체 식구끼리는 더더욱 그러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 ~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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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주님!
용서할 수 있게 하소서.
아니, 용서하기에 앞서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여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일곱 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게 하소서.
무한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고 도와주고 돌보게 하소서.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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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북한을 용서합시다!>
오늘은 '6.25 전쟁이 일어난 지 7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 곧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자랑스럽고 위대한 대한민국은 불행하게도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입니다. 오늘 우리는 갈라져 있는 남과 북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더 이상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이요 선물'입니다.
평화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는 이렇습니다.
"평화는 단순히 힘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만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더욱 완전한 정의를 인간 사이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하루하루 노력함으로써만 얻어지는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219항)
'참 평화'를 위해 꼭 필요한 전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에 대한 말씀'입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23,3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6,15)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4,32)
이것이 '너를 용서해야만 하는 근본 이유'이며, '평화'는 반드시 이 '용서'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거짓 평화에 속지 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참 평화'가 우리 마음 안에 함께하고, 이 분단국가 안에 함께 하도록, 너를 먼저 용서하고, 북한을 먼저 용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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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화해와 일치>
마태오 18,19ㄴ-22 (함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화해와 일치>
그대,
그대를 보되
나도 보세요
나,
나를 보되
그대도 볼게요
그대,
나를 보되
그대도 보세요
나,
그대를 보되
나도 볼게요
그대,
그대를 보듯
나를 보고
나,
나를 보듯
그대를 보면
그대,
나를 보듯
그대를 보고
나,
그대를 보듯
나를 보면
그대와 나,
다르지만 같고
둘이지만 하나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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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학창 시절 때, 지금과 달리 선생님의 체벌은 당연했던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숙제 안 했다고 맞고, 떠들었다고 맞고, 복도에서 뛰었다고 맞고, 성적 떨어졌다고 맞고, 준비물 가져오지 않았다고 맞고…. 참 많이 맞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밤 11시에 끝나는 야간 자율학습인데, 더 공부하기 싫어서 10분 일찍 가방을 싸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정문에 선생님이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일찍 나온 학생들을 정문 옆에 세웁니다.
10분 일찍 나왔으니 10대씩 때리겠다고 말씀하신 뒤에 한 명씩 나오게 하여 때렸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모두 20명이었습니다. 총 200번의 스윙을 하면 선생님도 마지막에는 힘이 빠질 것이라는 생각에 저는 맨 마지막에 맞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후회가 되었습니다. 남 맞는 것을 계속 보면서 더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뇌는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실제 겪은 것이나 상상하는 것을 똑같이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매 맞는 것을 보면서 상상하게 되니, 진짜 매 맞는 고통을 느끼게 된 것이지요. 10대 맞았지만, 저의 뇌에서는 200대 맞는 고통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은 뒤로 미룰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지금 바로 해결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괜한 걱정과 불안으로 고통의 크기를 키울 필요가 없습니다. 전 세계의 유일한 분단국가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아픔과 상처를 남겼습니까? 이산가족의 아픔도 있고, 경제적으로 성장하는데도 큰 장애가 되었습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끼리 서로 원수가 되어 남과 북으로 대치하는 것 역시 커다란 상처입니다.
문제는 그 시간이 70년이 넘어가면서 점점 통일이라는 가치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나만을 위한 기도, 내가 아는 사람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기도를 함께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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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질을 높이기>
어렸을 때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이는 저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 또래의 대부분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비해 다른 나라는 훨씬 더 잘 사는 것 같았습니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부족해 보였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더 좋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사실 삶의 조건은 그렇게 많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삶의 질이 향상되었습니다. 특히 삶의 질을 높이는 분야가 우리나라에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삶의 조건보다는 삶의 질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운동을 즐기고 건강한 식단을 찾고 영양제도 꼬박꼬박 챙겨 먹습니다. 그런데 삶의 질은 육체적 만족에서만 얻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만족을 얻어야 진정한 삶의 질을 높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 자신의 삶을 가장 높이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르는 것을 너무나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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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다>
오늘 남북통일기원 미사를 봉헌하면서 무엇보다도 아버지 하느님의 큰마음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서로의 허물을 인정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웃, 가까운 사람과도 용서하고 화해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남북의 화해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용서와 화해는 지금 삶의 자리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가까운 이웃과의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과 백 사람이 하나 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울까요? 예,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쉽다고만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다 좋은데 이것만은 안돼!’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 한번 틀어지면 둘이 하나가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정성이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머리수가 아니라 마음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18,19) 마음을 모아 청하면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머리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보이는 사람과 서로 하나가 되기가 힘든 데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예수님과 한 마음 되기는 얼마나 더 힘들겠습니까? 사실 하느님과 하나 되면 이웃과 일치하는 것은 문제될게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입으로는 하나가 되고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일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안 그렇다고 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실제 몸으로 마음으로 손발로 고백하는 분들은 적습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막상 얼굴을 마주 하거나 목소리를 들으면 옛 생각에 울컥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것은 아직 용서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음으로 품어 끌어안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 내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크지 못한 것입니다.
신비한 것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받아들이는 사람의 그릇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말하는 사람이나 행동하는 사람도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나를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용서하지 못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면 상대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에게 상처를 준 저 사람을 용서해 주십시오. 인간적으로는 힘이 들지만 당신이 이미 용서 하셨기에 용서합니다. 당신이 그를 사랑하시기에 저도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그러나 제가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 것이 있다면 먼저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1절에서 11절을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이 이 여자를 끌고 와서는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마음 안에는 ‘나는 의롭다’, ‘나는 잘 살고 있다.’ ‘나는 거룩하다.’ 뽐내고 으스대는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그러는 것입니다. “스승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소리를 듣고 금방 대답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히시어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무엇을 쓰셨을까요?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추측 하건 데 아마도 ‘너 자신을 알라!’하셨을 것입니다. ‘너도 하느님 앞에 죄인 아니냐? 잘 생각해 봐라. 너 잘 난척하지만 너도 별 수 없다.’
예수님께서 뜸을 들이시자 사람들이 재촉합니다. ‘스승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씀 좀 하십시오.’ 사람들이 줄곧 물어대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을 때 나이 많은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다 떠나갔습니다. 마침내 예수님 앞에는 죄 많은 여자만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그러자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과거를 묻지 않고 자비와 용서를 허락하셨습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성경은 나이 많은 자들부터 떠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삶의 경륜이 많은 사람부터 떠나갔습니다. 말하자면 의롭다고 자처한 사람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세상에는 밝게 눈떠 있었지만 하늘에는 눈이 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한 말씀에 눈이 뜨였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하시는 한 말씀에 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죄를 인정하고 자기 죄에다 죄를 더 보태지 않고 떠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눈뜨지 못했다면 돌을 집어 던졌을 것입니다. 죄에 죄를 더했을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을 봅니다. 그것을 보고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굉장히 잘난 줄로 알아요. 의로운 줄로, 거룩한 줄로 알아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순간 순간마다 죄에 죄를 더해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죄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먼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눈을 떠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자기가 잘못한 것은 보이지 않고 남이 잘못한 것은 아주 크게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눈뜬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눈뜬 사람은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눈 뜬 사람은 그 허물을 통해서 자기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내가 저 사람과 똑같은 잘못은 범하지 않았지만 또 다른 잘못과 허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리처럼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이 죄 많은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18,21)하고 물었습니다. 일곱 번, 많죠. 한 번도 힘든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용서는 선행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일생을 살아오면서 잘 산다고 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용서 받고 살았느냐? 너 그거 아느냐? 너 그거 안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 못할 것이 없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를 결코 ‘용서 못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용서 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네가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내가 너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는데 이렇게 앙갚음을 하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 하느님께 눈뜨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 고백할지언정 몸으로 마음으로 손발로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 눈뜰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눈뜨면 내 힘으로 안 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힘으로, 능력으로 먼저 용서를 청할 수 있고 베풀 수 있습니다.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억울해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진실을 알고 뱃속까지 환희 들여 다 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못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단순히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지 말고 마음으로 온 몸으로 손발로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으뜸제자 베드로를 보면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를 하실 때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떠날 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장담하였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막상 위험에 직면하자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야 말로 본이 아니게 얼떨결에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우리가 나는 의롭다, 떳떳하다.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하느님 앞에서 별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자비와 용서를 입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주님의 으뜸제자로 활동을 할 수 있었겠어요? 바오로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어떻게 이방인의 사도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가 과거의 살인죄에 매여 있었다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이끄는 도구로 활동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다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로 하느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자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님으로부터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의 대상은 우리 가족 안에 있을 수 있고 이웃 안에 공동체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용서를 행하는 사람이야 말로 믿음의 사람이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남북통일 기원미사를 봉헌 하면서 남북의 화해와 친교에 앞서 먼저 가까운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베푸는 것부터 시작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하신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고 ‘내가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신 말씀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이웃에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짐하시길 희망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결코 화해를 재촉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섣부른 화해는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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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민족의 화해와 일치의 길>
-기도, 회개, 용서-
"네 근심 걱정을 주님꼐 맡겨 드려라, 당신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의인이 흔들리게 버려둘리 없으리라."(시편55,23)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시편51,12)
새벽성무일도시 마음에 와닿은 주옥같은 시편성구입니다. 오늘은 6.25사변 발발 7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세계에서 참 힘든 일이 유일한 분단국인 한반도의 남북통일일 것입니다. 정말 남북통일이 된다면 세기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세계적으로, 세기적으로 남북통일이라는 위대한 과제를 부여받고 있는 우리 한민족입니다. 지금은 많이 희미해졌지만 오랫동안 널리 불려졌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가 생각납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나라 살리는 통일, 이 겨레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오늘은 오랜만에 산책중 한 번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를 불러 봐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남북이 살길은 남북통일뿐이 없습니다. 남북통일 없이는 기형적 발전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분단상황에서 남북이 이룬, 특히 남한이 이룬 현실은 참으로 경이로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단해요 대한민국, 훌륭해요 대한민국, 감사해요 대한민국, 칭찬해요 대한민국, 지하철 역에서 본 글귀도 참 고무적이었습니다. 역경중에도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참 대단한 대한민국입니다. 이런 저력으로 언젠가는 평화로운 남북통일을 이루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통일에 우선적이 것이 평화공존입니다. 통일이 우선이 아니라 남북의 평화공존이 우선입니다. 평화가 지상의 최고의 가치입니다. 좋은 전쟁 보다는 나쁜 평화가 낫습니다. 마침 문대통령 ‘타임’인터뷰 내용중 일부 기사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과 화상으로 진행된 인터뷰에서 “한반도 평화 증진을 위한 시간이 나에게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지금은 평화가 유지되고 있지만,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는 취약한 평화“라고 말했다. 코로나 19백신 지원등 다방면으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향해 손짓하고 있지만, 1년도 남지 않은 임기가 끝나면 과거와 같은 전쟁 위험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내비친 것으로 보인다. <타임>은 ”문대통령 스스로 지금의 상황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아마 아무도 이를 할 수 없다는 암울한 사실을 알려준게 문대통령이 남기는 유산일 것“이라고 짚었다.’-
대통령의 우선적 책무가 평화의 유지입니다. 전쟁이 없도록 하는 평화의 유지와 증진보다 더 중요한 책무는 없습니다. 참으로 문대통령 남은 임기중 한반도의 획기적 평화가 마련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남북의 전쟁은 서로 자멸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기회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북도 꼭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한치 앞도 못보는 우리들이지만 하느님 하시는 일은 놀랍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 평화공존을 지혜와 노력을 다 기울여야겠지만 참으로 겸손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는 물론 우리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화해와 일치를, 평화공존을 위해 해야 우리 믿는 이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첫째, 기도가 답입니다.
개인은 물론 모두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호흡하듯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겸손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전쟁 또한 무지의 두려움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을 밝히는 하느님의 빛, 기도의 빛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 기도입니다. 문득 엊그제 조선일보 1면 톱기사와 어제 경향신문 큰 제목도 사진에 담았습니다.
“지구 재앙 막을 시간, 겨우 30년 남았다!”
”리프킨 ‘지구에겐 면도날만큼의 시간만 남았다!”
남북통일보다도, 남북의 화해와 일치보다도 발앞에 떨어진 불이 지구상 인류 존속의 위기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서도 기도와 더불어 혁명적 결단의 실천이 당장 실시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겸허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탐욕을 제어할 수 있는 것도 기도의 힘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개인기도는 물론 공동기도 역시 더불어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필수입니다. 무엇보다 가정공동체의 평화와 일치를 위해 부부만이라도 가정 공동 기도가 절실한 때입니다. 세상 끝날 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은 분명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참 소원 성취에 한결같은 끊임없는 기도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둘째, 회개가 답입니다.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회개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숨쉬듯이 기도하듯 숨쉬듯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회개는 함께 갑니다. 기도는 곧장 회개로 이어지고 회개는 이어 겸손으로 꽃피어 납니다. 회개의 진정성은 겸손으로 입증됩니다. 부단한 회개를 통해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 신비의 삶도 실현됩니다. 역시 인간의 고질병인 무지와 허무에 대한 근원적 처방의 치유도 회개뿐입니다.
궁즉통(窮則通), 절박한 쪽이 이깁니다. 참으로 절박한 마음으로 한두번이 아니라 평생 죽을 때 까지 기도의 전사, 회개의 전사, 주님의 전사답게 목숨을 걸고 기도해야 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저 또한 날마다 목숨을 걸고 쓰는 강론입니다. 회개는 구체적이어야 하고 즉각적이어야 합니다. 바오로의 권고가 마음 깊이 와닿습니다. 참 좋은 회개의 열매를 위해 꼭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 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참 통쾌한 회개의 구체적 방법입니다. 말로의 상처와 간접적 살인도 치명적입니다. 무지의 병에서 기인한 온갖 부정적 감정의 치유에 회개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신명기의 모세 역시 회개를 촉구합니다. 저주가 아닌 축복을 택하는 지름길이 회개입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습관이 성격이 되고 성격은 운명이 됩니다. 바로 이 습관-성격-운명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버리는 것, 바로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흩어진 마음을 모아 갈림없는 순수한 마음, 순수한 사랑으로 살게 해 주는 회개의 은총입니다.
셋째, 용서가 답입니다.
개인은 물론 공동체적 용서도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내가 우선 살기 위해 용서가 필수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먼저 다칩니다. 용서가 되지 않으면 용서의 지향을 분명히 하면 주님께서 은총으로 도와 주시어 용서로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우리 모두에게 끊임없는, 무한한 용서를 명령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은 바오로 사도 역시 용서를 강조합니다. 회개해서 용서지만 반대로 용서의 사랑이 회개를 촉발시키는 경우도 많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해야 한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용서의 영원한 롤모델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끊임없는 용서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닮게 합니다.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어 살게 합니다.
남북의 화해와 일치도 가까이 구체적 현실, 내 삶의 자리에서 실현됩니다.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끊한(끊임없는, 한결같은)3’의 수행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바로 끊임없이, 한결같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기도의 여정, 회개의 여정, 용서의 여정에 항구함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무지의 병에 대한 유일한 처방입니다.
어제 마침 동방 가톨릭 교회의 마이클 요한네스 킴 부제님으로부터 성 프란치스코 이콘과 메시지를 선물받았습니다.
“방문할 때마다 늘 반가이 환대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제 작은 선물이 신부님의 수도생활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기도의 사람, 회개의 사람, 용서의 사람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서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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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6.25 전쟁이 일어난 지 71년째인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용서와 회복을 이야기하십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축복을 회복하는 길을 제시하는 대목입니다.
"마음 속으로 뉘우치고, ... 하느님께 돌아와서, ...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신명 30,1-3)
하느님은 당신을 떠난 백성이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든, 언제라도 당신께 되돌아오길 목놓아 기다리는 아버지십니다. 그분은 언제라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 죄의 짐을 가득 안고 당신께 다가오는 백성을 향해 방향을 돌리시는 하느님이시지요.
그분께서 바라시는 것은 잘잘못을 따지고 징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 백성이 자신의 자리, 곧 아버지 품을 되찾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에는 명민하고 관대하시면서, 심판에는 더디시고, 용서에는 절도 없이 헤프신 분이 우리의 아버지시지요.
제2독서는 용서와 사랑에 대해, 그런 아버지와의 관계성에서 출발하여 이야기합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에페 4,32-5,1)
용서 이전에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용서도 가능하지요. 아직 사랑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억지로 용서를 강요한다면, 그렇게 강요된 용서는 아직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에 앞서 우리가 사랑이신 아버지의 자녀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녀라면 아버지를 닮기 마련이니, 아버지의 사랑의 DNA, 용서의 DNA가 자연스레 발현되고 흘러나오겠지요. 사랑하는 이에게 용서는 더 이상 손해나 패배, 바보짓이 아니라 사랑에서 분출된 용기입니다. 사랑이 클수록 용서도 크고, 사랑이 온전할수록 용서도 온전합니다.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5,2)
사도 바오로의 사랑하라는 권고 안에는 용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사랑의 모범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이의 죄를 용서받게 하시려고 당신을 제물로 내놓으셨으니까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이는 사랑함으로써 용서하고, 용서함으로써 사랑합니다.
복음은 기도와 용서의 가르침입니다.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
마음을 모아 청한다는 것은 같은 지향, 같은 뜻을 공유하여 한 분이신 아버지를 함께 향하는 것입니다. 둘이건 셋이건 공동체건 하나로 마음을 모으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음을 우리는 체험상 모르지 않지요. 마음을 모으기까지 얼마나 많은 포기와 양보, 용서와 사랑, 눈물과 한숨이 스미는지요. 그래서 마음을 모아 드리는 기도가 주님께 값지고 소중한 겁니다. 그분이 안 들어주실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을 행사하는 기도지요.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용서에 대해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베드로 입장에서 최대치라 여긴 "일곱"이란 수를 반복해 "일흔일곱"이라 제시하시는 이유는, '무한히, 지치지 않고, 계속, 상대가 용서받았음을 깨달을 때까지, 그래서 상대가 그 용서로 변화될 때까지'의 의미를 각인시키시려는 의도 같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당신을 죽이는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크건 작건 모든 용서에는 죽음이 수반되지요. 자기애의 죽음, 미움의 죽음, 심판 본능과 징벌 욕구의 죽음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따르는 예수님은 죽기까지 사랑하시고 죽기까지 용서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과 용서는 당연히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휴전의 기간이 늘어지고 세대가 바뀌어가면서 전쟁의 아픔은 무관심으로 변하고 통일에 대한 열망조차 희박해져 가는 요즘입니다.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정치논리에 이용하는 것은 우리 관심사가 아니니 차치하고, 우리는 그저 '당신이 하셨듯 사랑하라'는 주님의 지상 명령에 마음을 쓰면 좋을 듯합니다.
사랑에서 시작하면 용서도 가능하고, 그렇게 다시 한 걸음씩 오가고 문도 조금씩 열다 보면 그들과 우리가 함께 마음을 모아 아버지께 청하는 일도 가능해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우리 모두를 지배하게 되기를 오늘도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버지께서 더 간절히 이 기도를 기다리고 계시니, 이 간절한 청원을 못들은 체 하실 수 없으시지요. 화해와 일치를 향한 더 깊은 염원과, 호국연령들을 위한 진심어린 기도로 오늘 하루를 봉헌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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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fbK7WqWMP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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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 19)
화해와 일치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용서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건너뛸 수 없는
용서의 길이다.
앞으로 나가는
관계가 바로
용서의 관계이다.
용서 없는
믿음은
있을 수 없다.
용서의 삶이
믿음의 삶이다.
분단의 벽을
허무는 것은
용서를 통한
서로 간의
신뢰이다.
용서의 길은
함께 살아가는
공생의 길이며
영광의 길이다.
그래서
화합과 합일은
용서의 마음을
회복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사람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며
기도이다.
서로를 향한
불신과 증오를
치유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사랑의
사람이 되셨다.
어울려
살아야 할
우리들 삶이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실
하느님 나라는
용서의 나라이다.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실천하는
거기에서
닫힌 문은
복음처럼
활짝
열릴 것이다.
분단의 아픔이
일치의
기쁨으로
열매맺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상처를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용서가
사람이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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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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