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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詩 ◈ 읽기 스크랩 [시모음] 박라연 시 모음
曉烱- 들꽃 추천 0 조회 127 12.03.15 20: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박라연 시인의 시 모음

 

 

 

[목차]

풍란
물의 얼굴
해거리
공중 속의 내 정원 1~4
마곡사
죽음에 대한 禮儀
토하젓
이 가을엔
사마귀
공중의 집
통유리창
메주
치사량의 毒, 그리고
마음 한 방울과 이 세상의 거리
생밤 까주는 사람
삽교천에서
예전에도 우리는 나무의 나뭇잎이었을까
분꽃
花葬
금낭화
어느 비오는 날의 풍경
겨울 사과나무를 위하여
沈香
연인
편지
편지 2
백담사 칡잎의 기억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다시 꿈꿀 수 있다면
노쇠한 꿈의 노래
상처
폐가
고해성사
내 작은 비애
작은 물방울의 노래1
무화과나무의 꽃
꽃피는 병동
꽃 그리기
아카시아, 반란
슬픈 거머리
레 실피드
가을 화엄사
지금, 그 나무의, 그림자
이름 모를 나무 아래서
난쟁이

<시인 약력>

~~~~~~~~~~~~~~~~~~~~~~~~~~~~~~~~~~~~~~~~~~~~

풍란


살면서
가장 목이 마를 때
긴 물관부를 흔들며 꽃눈을 튼다.
터서는 1백일 지지 못해
향기로운 혀 내밀고 서 있다.
밤이면
하얀 뿌리털 잘게 흔드는 한숨 소리
떠날 날을 미리 알고
한 점 벼랑에서도 대를 잇는 뿌리들아
이 땅의 잡초보다 처절하구나
숨진 네 그리움의 뿌리를
풀이끼로 포근히 감싸준 그날
삐죽이 고개 내민 새끼 촉 하나
아하, 서로의 눈빛만으로
새끼를 치는구나 사랑하므로
헤어져 사는 너희들은

~~~~~~~~~~~~~~~~~~~~~~~~~~~~~~~~~~~~~~~~~~

물의 얼굴


하얀 물에게도 상처는 있지
가만가만 흐르고 싶지
초록의 벼숲으로 흘러가서
8월의 가슴 그 뙤약볕 사이를 하얗게
하얗게 날아오르는 한 마리 두루미
한 줄기 서늘한 빗방울이 되고 싶지

~~~~~~~~~~~~~~~~~~~~~~~~~~~~~~~~~~~~~~~~~

해거리


해걸이를 아시는지요?
감나무, 배나무, 사과나무.......
지난해에 주렁주렁 탐스럽게 열매 열린 나무는
빈 나뭇가지에 바람만 일렁일 뿐
감도, 배도, 사과도 좀처럼 제 친구들을 만날 수
없다는 것,
그 지루한 그 쓸쓸한 한 해를 짐작해보신 적 있으
신지요?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말을 하
지만
콩과 팥이 만나 살다보면
콩도 팥도 아니고
콩의 근심과 팥의 오만만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다는 것
근심과 오만 덩어리인 채로
이리 데굴, 저리 데굴, 굴러 다니는
한평생을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지요?
해거리하는 해에 태어난
감, 사과, 배
그저 이름만 감 사과 배일 뿐
제 이름 다정하게 불러주는 이
쉽게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
.
.

서랍님. 해거리 하시는 중이신지요?

~~~~~~~~~~~~~~~~~~~~~~~~~~~~~~~~~~~~

공중 속의 내 정원 1


공중의 허리에 걸린 夕陽
사각사각
알을 낳는다
달디단 열매의 속살처럼
잘 익은 빛
살이 통통히 오른 빛
뼈가 드러나도록 푸르게 살아내려는,
스물네 시간 중 단 십 분만 행복해도
달디달아지는
통통해지는
참 가벼운 몸무게의 일상 속에서만
노을로 퍼지는
저 죽음의 황홀한 産卵
육백여 분만 죽음의 알로 살아내면
부화될 수 있다고 믿을 생각이다
시누대처럼 야위어가던 한 生의 그림자
그 알을 먹고 사는 나날을 꿈꾼다
없는 우물에
부화 직전의 太陽이 걸렸다!
심봤다!


공중 속의 내 정원 2


그저
새의 친구가 되고 싶었던 그는
제 혈관에 살 몇 알을 매단다
사람의 피에 흐르는 고압선이 두려운지
좀처럼 아무도 날아와 앉지 않는다
인정에 약한 새는 뜻밖에도
그의 정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새,
동박새였다
동박새는 사람의 따뜻한 눈빛에 이끌려
위험한 수혈을
돌이킬 수 없는 수혈을 받고 말았다
쌀의 피가 돌고
사람의 피가 돌기 시작한 새는
제 주소를 그에게 내어주고 만다
胃 주머니 속의 쌀을
공중의 주소에 한 옴큼 매달며
그는 하루를 시작한다


공중 속의 내 정원 3


뜻밖에도 동박새는
공중 속의 정원에 제 심장을 내어주고
그의 위 주머니 아래 누워 있었다
쌀의 피를, 사람의 피를 돌게 해준 그에게
죽어서도 보여주고 싶은 표정이 있어
그의 위 주머니까지 날아와 죽은 것이다
온기가 사라지기 전
새의 마음을 받아 아나지 못한 그는
죽을 때까지 품고 가야할 질문의 무게가 남고 말았다
새의 육체가 바람의 몸이 될 때까지
단지 따뜻한 사이가 되기 위해
위험한 수혈을 시도한 자책이 잊힐 때까지
어디서 어떻게
제 주소를 지우고 살 수 있을는지,
얼마만큼 그의 피를 흔들어야
동박새의 아픈 피를
채혈해낼 수 있을는지, 라는


공중 속의 내 정원 4


좋은 날들을 아직 열어보지도 못한

입술과 눈매, 심장을 나뭇가지 위에 대롱대롱
매달아둔다 날고 싶은, 새순 돋아나고 싶은 것들도 덩달아

매달려서
나라개 돋는 순간의
새순 돋아나려는 순간의 가려움을
아무의 눈에도 미처 안 보이는 초록을 쪼아먹고 있다

숨구멍마다 부력이 생길 때까지
심장을 초록으로 물들일 때까지

다만 공중의 주소가 없는 방문객은
들어설 수 없다 셔터가 내려지지 않았지만

~~~~~~~~~~~~~~~~~~~~~~~~~~~~~~~~~~~~~~~~~~

마곡사


탑돌이를 한다. 마음의 거처를 마련할 때까지 돌아가지 않으리라.
해탈문을 지나 천왕문을 지나니 오장육부가 약속처럼 빠져버린,
온몸이 물 한 점 없이 텅텅 비어버린, 늙은 살가죽도 반의 반쪽만 남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된다. 그가 올 봄에도 어김없이 피워올린 공중의
새순들은 무엇으로 얻었을까 오늘은 서까래 몇 개라도 올려야 한다.
목탁 소리 독경 소리에서 뿜어져나오는 향기.
계곡 속의 피라미마저 귀가
쫑긋해서 온갖 교태를 부리며 튀어오른다. 지금 행복하다면 오히려 가슴이
덜켱 내려앉고 지금 힘이 들면 빚을 갚거나 저축을 하는 것처럼 편안해진다.
그 마음들 모아서 토담처럼 쌓아올리기 위해 돌고 돌아야 한다. 탑돌이하는
여자 발 밑에 무더기로 피어 있는 새하얀 클로버 꽃장들 누군가 떨어뜨리고 간
행운의 부스러기들이 피운 꽃이라면 기와 몇 장 연등 몇 개조차 바친 적 없지만
이쯤에서 돌아가도 마음의 거처 얻을 수 있으리라.

~~~~~~~~~~~~~~~~~~~~~~~~~~~~~~~~~~~~~~~~~~~~~

죽음에 대한 禮儀


淸凉飼育이 잠실에 불을 때지 않고
자연온도로 누에를 기르는 일이라면,
그렇다면 청량고추는

크기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붉기에 매혹되지 아니하고
오직 매운맛이 제 몸에 가득해지기를
그 순간이 제 삶의 완성이라고 묵묵히,

하물며 너와 나의 죽음이여!
초록빛 청량고추의 매운맛처럼
비바람의 색채로 기다림의 문양으로 물들여져야 하리
청량누에가 뽑아내는 비단실이 그러하듯
꽃잎을 무수히 떨어낸 과즙이 그러하듯
유지매미의 울음이 그러하듯
그대에게 가는 길에도 속도와 禮儀가 있으리

곰삭은 영육들 오늘,
청량고추를 만나 하염없다
도마 위를 구르는 칼날이 빛난다
경배하듯 오랫동안
아무리 참혹할지라도 제 죽음에 대해 禮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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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하젓


내 청구릿빛 알몸이
아유타의 눈물에 젖어
도성 밖 어느 부뚜막에서 뜨겁게
사흘 낮밤 그렇게
눈도 귀도 우리들 쓰라린 사랑도
붉게 붉게 문드러져서는
오직 그대의 혀끝에만 스미는
맛,

~~~~~~~~~~~~~~~~~~~~~~~~~~~~~~~~~~~~~~~~~~~~~~~~~

이 가을엔


이 가을엔 차라리
떨어져내려도 좋을 옷을 입고서
가장 낮은 무릎에 가벼이
기대어 누운 잎새
지친 손가락 마디마디 추억의
실반지를 찾아 끼고서
스르르 잠이 들면
천정에 매달려 꿈꾸는
수수며 옥수수며 빨간 꽈리며
한 움큼씩의 희망이 되어
한동안 대롱대롱 매달려 살다가
봄이 오면 다시
떠난 줄 알았던 이웃이 되어
성큼 다가서고저
이 가을엔 차라리
누렇게 빛바래져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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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귀


세상이 스무번쯤 바뀌어도
내가 나를 건널 수 없는 유충의 生
어른이 되어서 죽기 위해 몇 번씩 죽는다
더듬이와 다리와 날개를 주시면
마지막 죽음을 생각할 수도 있다
단 한 번의 처절한 정사로
나는 수백 마리 알들의 에미가 된다
알들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모습이사 흉측하건 말건 다섯 개의 내 눈은
더욱더 툭 불거져 휘둥그려야 한다
때론 여자의 비위로도 제 몸보다
더 큰 먹이를 단숨에 삼키어야 한다
오오 너는 가고 나는 남아
진짜 성경 같은 나뭇가지 하나 붙들어
대롱대롱 매달려서 나의 알들을 낳는다
아빠 엄마 얼굴도 모른 채 우글우글 봄을 기다리겠지
어른이 되어 죽기 위해 몇 번쯤 죽겠지
더듬이와 다리와 날개를 주시면
마지막 죽음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

~~~~~~~~~~~~~~~~~~~~~~~~~~~~~~~~~~~~~~~~~~~~

공중의 집


공중의 모퉁이로 이사하던 날 아무도 모르게
슬픔의 문 하나 연다, 제각기의 숲속에서 우리는
캄캄한 삶의 자물쇠를 만지작거리면서 혼자서
나부끼고 단풍든다, 오늘도 공중으로 되돌아올 작은
물방울을 기다리면서

튼튼한 너무나 튼튼한 공중의 벽이며 세상살이의
덧문이며 깨물어도 좀처럼 아프지 않은 쓸쓸한
혓바닥이며 우리는 우리에게 사육되면서 공중의
잎새로 흔들리면서

함께 취할 까닭도 뜨거워질 노을도 없지만
사방이 조금씩 어두워질 때 누군가의 집에
불이 켜지면 내 마음의 불빛처럼 반갑다. 그때
어디선가 울리는 벨소리 발자국 소리는 쓸쓸한
魂들을 흔들어 깨우는 나뭇잎인 양 잠시 뜨거워지는
우리들의 귓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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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유리창


우리가 우리 자신까지 통과할 수 없을 때
세계지도 만큼 크게 확대시킨 제 사진을 유리창에 건다
무수한 빛을 통과시키는
유리창의 둥그런 힘을 닮기 위해
폭포인 양 서서 햇빛벼락을 맞기 위해
대롱대롱 매달려
통유리창의 넓은 가슴을 더듬는다
우리 몸 속이 투명해진다
지나가 버렸다고, 이미 늦었다고 생각되는
인생의 몇가지 길들이 투명하게 열리기도 한다
그 길 끝에 또 하나의 통유리창이 있고
그 너머엔 푸른 초원이 있다
초원 가득 흰 양떼가 담장엔 붉은 넝쿨장미가 있다
이따금 투명한 길 위를 투명한 우리들이 질주한다
회상의 문, 설계의 문이 닫히기 전
우리는 서둘러 돌아와야 한다
세상의 잡다한 삶을 환하게 비춰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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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주


생콩의 시절은 이제 잊은 지 오래
혼자서 가고 싶었던 길도 놓은지 오래
우리는 이름을 잃고 함께
삶아져서는 함께 섞어져서는
함경도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복자네 아랫목에서 다시 태어났다
해탈의 곰팡이 피어날 때까지
몸을 썩히는 일
공중에 매달려서 햇살과 바람
시간의 일부가 될 때까지
몸을 말리는 일을 배운다
즐거운 입맛을 위해
이름을 잃고
어디선가 매달려 살았을 비릿한
내 사랑, 콩
우리들의 안 잊히는 이름,
의 생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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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사량의 毒, 그리고


지독한 꿈의 냄새에 취해버린 몇 년
夢死할 수 없어 깨어난다
누운 채로 밤새워 걷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
그 길에서 만난 세월
이름 모를 분홍색 꽃잎 사이사이
검은 나비가 꽃잎을 빨고 있다
내 몸 가득한 꿈의 냄새가 빠져나간다
한 아비의 마당에
한 어미의 옷섶에 뚝 신문 떨어지는 소리
하염없이 떨어지는 꽃송이들
너희가 우리를 취하게 했구나

삶은 때로 진부해서 살 만하고
꿈은 때로 지독한 제 몸 냄새로 죽음을 밀어낸다
허약한 일상들은
꿈의 갈비뼈 사이에서 잠이 들고
초 분 시간을 따라 송이송이 꽃이 된다
누군가의 미숙한 사랑이 되고
지상의 하루가 되고 前生이 되고 全생애가 된다
치사량의 毒, 그리고

~~~~~~~~~~~~~~~~~~~~~~~~~~~~~~~~~~~~~~~~~~~

마음 한 방울과 이 세상의 거리


한 나무의 마음 한 방울에
또 한 나무의 전신이 매달려 있습니다
그 힘은 오직 닿을 수 없는 거리 덕분입니다
마음 한 방울은 자라서
제 두 눈만으로도 반지 모양의 오색 무지개를 뿜어 냅니다
한 떼의 무지개가 되었을 때
세상에서 가장 고운 자태의 그림자로 다가갑니다
또 한 나무의 무수한 잎이 됩니다
또 한 나무의 몸통은 그 머리에서 발끝까지
무지개의 무늬로 물들여집니다
살다보면
내 마음 한 방울과 이 세상
이 세상과 아주 작은 마음들의 거리
닿을 수 없는 거리만큼 아름다운 무지개를
무지개의 그림자를 낳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때쯤이면
마음 한 방울의 무지개와 무지개의 그림자는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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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밤 까주는 사람


이 사람아
산 채로 껍질을 벗겨내고
속살을 한번 더 벗겨내고
그리고 새하얀 알몸으로 자네에게 가네
이 사람아
세상이 나를 제아무리 깊게 벗겨놓아도
결코 쪽밤은 아니라네
그곳에서 돌아온 나는
깜깜 어둠 속에서도 알밤인 나는
자네 입술에서 다시 한번
밤꽃 시절에 흐르던 눈물이 될 것이네


생밤 까주는 사람 /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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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교천에서


한 해가 저물던 그날
우리는 삽교천에 갔었네.
소주를 마시고 아나고회를 먹으며
열두 달 내내 목젖을 간지르던
슬픔의 가시들
서로의 잔가시들이 안쓰러워
젖어버린 눈으로 우리는
삽교천 기슭을 안개처럼 떠돌았네.
지친 사람 모두를
모두가 쓰러져도 뉘어줄 그대여
잊을 것은 잊으라 말하지만
그때 거기서 우리는 보았네.
갈매기 한 마리가 못다한
사랑에 깃을 치며 날아오르던 것을.
그때 그날의 삽교천은
진짜 바다보다 더욱 바다 같았네
안 보이는 세상살이의 암초들이
소금기 빠진 그대 살 속에서
어물쩍 녹아
녹아내려도 흐를 수 없을 때
건널 다리 하나씩 끌고서
한 사람 두 사람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부어오르거나 썩어가던 독기를 풀어
저 멀리 떠내려보내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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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도 우리는 나무의 나뭇잎이었을까


예전에도 우리는
나무의 나뭇잎이었을까
가을의 목덜미에 잎잎이 매달려
눈부시게 흔들리는 한세상
멀미하다 쓰러져 누운
누군가의 생애 같은 잎새들
생각마저 꽁꽁 얼어버리면 우리는
또다시 순결한 잎이 될 수 있을까
너와 나 세상살이는 때때로
혼자서만 손을 흔들게 하지만
바퀴도 날개도
보호색도 없는 우리는
우리 닮은 잡목의 몸체를 하염없이
맨살로 타고 오르는 담쟁이나
칡덩굴이 되어 흥건히 젖어서 살지라도
우리가 우리 이름을 우리 몸 속에
쓸쓸히 새기며 살지라도
세상 나무의 나뭇잎으로 남아 우리는

~~~~~~~~~~~~~~~~~~~~~~~~~~~~~~~~~~~~~~~~~~~~

분꽃


나는 분꽃
밤에만 피는 키 작은 꽃

알을 밴 꽃 한송이 피우고 싶어
내 무수한 씨앗들은
밤마다 눈물겨운 교배를 한다

향기로운 혀 큰 나무를 흔들고
나무보다 더 큰 그림자를 흔들지만
우리를 기억하는 것은 어둠 뿐
어둠 속에 숨어 나부끼면서
상처입은 입새끼리 흔들리면서
서로의 꽃들로 자란다

못 자란 키만큼,사랑만큼
연분홍 잎을 매다는 꽃초롱 사이로
이따금 손들어 답례하는 우리는

~~~~~~~~~~~~~~~~~~~~~~~~~~~~~~~~~~~~~~~~~~~~

花葬


아마
아직도 모르고 있을 거예요
어젯밤 누군가
그대, 花葬시킨 순간을요
장미덩굴로 겹겹이 묶고
벚꽃더미에 묻히게 하던 걸요?
얼마나 황홀하게 바라다보았던지........
구경꾼 모두의 눈빛에서 흐르던 고요,
차라리 한 잎의 벚꽃이 되거나
장미덩굴이 되고 싶었을 거예요
사실 그렇잖아요?
우리네 사는 일 제아무리 고달퍼도
그대처럼 누군가 花葬시켜 떠나 보내 준다면
우리 등뒤에 그런 사람 하나 있다면
살아온 날들이 눈부실 테니까요
문득 생각했지요 저렇게 떠난 저 친구는
어느집 따뜻한 아랫목이 아니라
꽃밭 한 귀퉁이에서 다시 태어날 것 같다고
흐믓하게 미소짓는,

~~~~~~~~~~~~~~~~~~~~~~~~~~~~~~~~~~~~~~~

금낭화


꽃이 핀다
낮은 산 위에 아파트에 외로운 숲속에
꽃이 진다 절색의 배꽃이 진다
꽃피고 지는 사이 잠깐이라 해도
초록은 피어나 푸른 천지 이룬다 해도
봄 위에 여름을 누이고 여름 위에 가을을 누인다 해도
나는 단명의 꽃잎으로 살다 가리
내 꽃 숨진 자리 위에
까치 잡새 풀벌레들 모여서 울면
울음이 울림만큼 나는
희고 붉은 꽃잎으로 다시 피어나리
아침 이슬 우르르 몰려와 간질이면
나는 또 수십 년에 수십 번씩 피울 꽃을
단 한 번의 새 위에서만 피우고 말리
~~~~~~~~~~~~~~~~~~~~~~~~~~~~~~~~~~~~~~~~~~~

어느 비오는 날의 풍경


우리의 고된 노동으로 마련한
밥과 잠일지라도
어제는 그래서 오늘은 이러해서
내일은 또 무엇이 넝쿨손 되어
내 목과 내 등을 휘감아 오르겠다며
내 밥 내 잠 빌려갈는지
열여섯 살 아래인 시댁 조카랑 나란히
수업받고 오는 길 비가 내린다
차창 밖의 빗소리가 좁은 차 안에서
커다란 물방울로 부풀어오른다
물방울은 차 안의 모든 것을 적시고
우리들 가장 둔탁한 부위까지 스며들더니
그만 줄줄 빗물이 되어 흐른다
우리가 흘린 눈물
우리가 털어낸 고통의 비늘들 발 밑으로 가서
어느 순간 거름 되어 우리 몸 속에 스며들 거야
다시 한번 화사한 꽃 한 송이 피워올릴 힘이 될 거야
차창 밖의 빗소리가
또 한번 커다란 물방울 되어 부풀어오른다

~~~~~~~~~~~~~~~~~~~~~~~~~~~~~~~~~~~~~~~~~

겨울 사과나무를 위하여


제 키를 낮춘 만큼
탐스럽게 열리는 여자의 아이를 위해
앉은뱅이처럼 주저앉으려 하는 당신
온몸을 슬프게 구부리고만 있는 당신을 문득
태초의 어머니라 부르고 싶다
어쩌다가 벗은 몸의 처절한 자태를
나는 보고 말았는지
그때 그 순간은 이미 친숙한 운명이 되는지
내 죽어 한 그루 사과나무로 돌아와야 한다면
더 높이 솟아오르기 위해 숨을 쉬는 나무들
그들이사 짐작도 못 할 따뜻한 수액들을
둥글게 둥글게 공중에 매달아두리
어느 쓸쓸한 가을밤 홀로 눈떠
온몸의 붉은 반점들을 빠짐없이
달디단 사과라 이름붙이어놓으리

~~~~~~~~~~~~~~~~~~~~~~~~~~~~~~~~~~~~~~~~~

沈香


잠시 잊는 것이다
生에 대한 감동을 너무 헐값에 산 죄
너무 헐값에 팔아버린 죄,
황홀한 순간은 언제나 마약이라는 거

잠시 잊은 것이다
저 깊고 깊은 바다 속에도 가을이 있어
가을 조기의 달디단 맛이 유별나듯
오래 견딘다는 것은 얼마나 달디단 맛인가
불면의 香인가

잠시 잊을 뻔했다
白檀香이,
지상의 모든 이별이 그러하다는 것을
깊고 깊은 곳에 숨어 사는
沈香을,

-박라연, 공중 속의 내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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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갑자기, 깜깜한 일상을 뚫고 솟아오른
아름다운 무지개 꿈처럼 고운 무지개가
내 공중에 떠 있다
달콤한 햇덩어리색을 주조로 한 무지개가,
두번째는 짙은 바다색이 한가운데로 몰려 곱게 원을 그리면
연하늘색을 두른 둥근 띠 모양의 무지개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내가 원하면 얼마든지 떠오를 수 있다는 듯
아름다운 무지개는 거짓말처럼 내 공중에 있었다
커다란 행운을 남몰래 선물받은 듯
나는 놀라 망막을 졸이다가 늘이고 졸이다가 늘인다
사라질 수 없는 무지개를 위하여 내 生의 마지막 신비를
내 몸에 끼우기 위하여 두 눈을 잃어도 좋았다
이제는 핏빛 자주색 무지개다
아무리 슬퍼해도 첫번째나 두번째처럼
아름다운 배색의 둥근 고리 모양의 무지개는 나타나주지 않는다
아아 내 망막 속에서 튀어나와 천장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흘러가던 신비로운 형체는 이제 사라진 것이다
이 신새벽에 내 눈 속에서 내 공중으로 떠오르던
세 가지 형태의 무지개는 누가 보낸 것일까

~~~~~~~~~~~~~~~~~~~~~~~~~~~~~~~~~~~~~~~~~~~

편지 2


15년생 철쭉을 물끄러미 본다
너도 이사왔니?
이별을 아는 꽃, 그 꽃의 색조는 햇살을 만나면 이슬이 맺히는가?
소리없이 우는 여자처럼 아름답다
산 속의 미생물조차 春情을 이기기 어렵다는데
어미솔 부엉이 곤줄박이 날갯짓
내가 두고 온 우면산 내가 두고 온 메타세쿼이아는 잘 있는지?
연한 잎새 사이에 불던 바람도 잘 있는지?
동굴 깊숙한 곳에 거꾸로 매달려 새끼를 낳는다는
세상에서 가장 힘들게 출산을 한다는 박쥐
박쥐처럼 나는 너의 절망에 대롱대롱 매달려
살아있는 흔적들을 낳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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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갑자기
서로를 모른다고 해야 할 때
예전에 무심히 드린 편지
편지 쓸 때의 내 고운 생각들이
손때 묻은 서랍에서 책갈피에서
샛노란 유채꽃으로 피어나
그대를 흔들어 깨울
튼튼한 아이 하나 낳아주고 떠나온 양
마음 든든하다고 그렇다고
쓸쓸한 퇴근길 육교 위에서
새하얀 눈송이로 펄럭이는
편지

~~~~~~~~~~~~~~~~~~~~~~~~~~~~~~~~~~~~~~~~~~~~~~~~~

백담사 칡잎의 기억


그 말머리 따라 여기까지 왔다. 백담사 칡잎을 만나면 전생의 기억 몇
잎을 얻을 수 있다기에 깊은 산속에 묻혀 살다보면 전생의 기억 몇 잎에
서 파릇파릇 돋아나는 열쇠 꾸러미, 이 세상 삶의 족쇄 풀어줄 초록빛 열
쇠 만날 수 있다기에, 해일처럼 밀려드는 해방감에 파르르 칡잎의 기억을
울리며 딸랑거리는 초록빛 열쇠,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으로 돌아오던 날
대롱대롱 매달린 초록빛 열쇠, 매달려 살 수 있는 날들일지라도 찾으러 갔
다가 오히려 잃어버렸을지라도 굽이굽이 돌고돌아 돌아갈 곳이 있다면 山
소나무 몸통에 따닥따닥 붙어서 일생을 살아내는 칡잎의 기억도, 기력도
여전할텐데…… 잎을 스치는 것은 구경나온 바람뿐이다. 저 사람은 누구더
라? 아직도 求道 따위에 목숨을 거는, 아직도 사랑 따위에 목숨을 거는 저
열쇠, 초록빛 열쇠꾸러미들은 어디서 보았더라?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휙 날아가 버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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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
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
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
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가끔……전기가……나가도……좋았다……우리는……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
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땀 땀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
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저울은 꿈쩍도 않
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
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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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나,
이런 길을 만날 수 있다면
이 길을 손 잡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네
먼지 한 톨 소음 한 점 없어 보이는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도 그도 정갈한 영혼을 지닐 것 같아
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처럼
이 길을 오고 가는 자동차의 탄력처럼
나 아직도 갈 곳이 있고 가서 씨뿌릴 여유가 있어
튀어오르거나 스며들 힘과 여운이 있어
나 이 길을 따라 쭈욱 가서
이 길의 첫무늬가 보일락말락한
그렇게 아득한 끄트머리쯤의 집을 세내어 살고 싶네
아직은 낯이 설어
수십 번 손바닥을 오므리고 펴는 사이
수십 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사이
그 집의 뒤켠엔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꽃이 있네
절망이 사철 내내 내 몸을 적셔도
햇살을 아끼어 잎을 틔우고
뼈만 남은 내 마음에 다시 살이 오르면
그 마음 둥글게 말아 둥그런 얼굴 하나 빚겠네
그 건너편에 물론 강물이 흐르네.
그 강물 속 깊고 깊은 곳에 내 말 한마디
이 집에 세들어 사는 동안만이라도
나… 처음… 사랑할… 때… 처럼 그렇게……
내 말은 말이 되지 못하고 흘러가버리면
내가 내 몸을 폭풍처럼 흔들면서
내가 나를 가루처럼 흩어지게 하면서
나,
그 한마디 말이 되어보겠네


詩集,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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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꿈꿀 수 있다면


다시 꿈꿀 수 있다면
개미 한 마리의 손톱으로 사천오백 날쯤
살아낸 백송, 뚫고 들어가 살아보는 일
나무 속에 살면서
제 몸의 일부를 썩이는 일
제 혼의 일부를 베어내는 순간을 닮아보는 일
나무 속에 살면서
향기가 악취되는 순간을 껴안는 일
다시 꿈꿀 수 있다면
제 것인 양 슬픔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누군가의 슬픔을 소리낼 줄 아는 새가 되는 일
새가 되어 살면서
미처 못 간 길, 허공에 길을 내어주는 일
그 길을 또다시 잃어버리고도
개미 한 마리로 살아내게 하는 일
나무 속에 살면서 새가 되어 살면서
축복은 神이 내리고
불운은 인간이 만든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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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쇠한 꿈의 노래


보름달이 이우는 틈새 사이에서
빠져나오던 K야
위험한 풍선처럼 꽉찬 어느 축복에서
빠져나오던 S야
오랫동안 너희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던 내 노쇠한 꿈을
저 수평선 너머 아득한 곳으로 실어가다오
이편에서 저편으로 쓸리는 파도처럼
쓸릴때의 한순간만으로도
제몸이 사르르 분해되어 버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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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그때 그 잎새
슬픔이 지나간 자리마다
숭숭 뚫리는 비릿한 구멍들
망각의 못 박을 일이다

그때 그 잎새에
꽁꽁 묶여 알몸으로 살 것 같은
내 영혼의 팔랑개비여 돌아라
바람 없는 날이라도 부디
가벼웁게 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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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가


한 사람을 보낸다
또 한 사람을 보낸다
마지막 눈빛까지 모른 척한다
잡초뿐인 내 生의 앞마당
무엇을 더 잃어야 내 눈은 투명해질까
낮은 어깨 위에 시린 눈썹 위에
함께 피던 어제의 꽃잎들아
너는 친숙한 그늘
그 고운 비늘 아래서
길 떠난 추억이 쉬어가고
떠난 이름을 불러모으는
더없이 가벼운 몸집으로도
쓰러뜨려다오 옛날
그 옛날의 쓰라린 냄새들을
통통거리며 튀어오르던 마지막 물방울
물방울들아 너의
흰 물거품으로 세상의 허망한
앞마당의 내 잡초들을 감추어다고
아직은 헤어질 수 없는 죽어가는 눈물들과 섞이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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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


기도했다 날마다
겨울 산벼랑에 걸린 목숨
어쩌다 한번 지은 죄
저문 또랑에서 성당 구석에서
너와 나의 기억에서 희게 빨려지기를
의무인 양 거듭되는 죄 끌고 다니는
어떤 한 사람을 본다 무척
닮았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치면서
그러면서 내일은 깨끗해질 거라며
어쩐지 안쓰러운 오,
누구에게 돌 던지라 나는
또 누구의 하루에 뾰쪽이 서 있는
바늘 끝이 되었으랴
아무래도 잔인한 핏줄이었나보다고
투덜투덜 조상 탓을 하면서
악몽을 염려했다 오늘 밤의
어수선할 일기장의 내용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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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은 비애


소나무는 굵은 몸통으로
오래 살면 살수록 빛나는 목재가 되고
오이나 호박은 새콤달콤
제 몸이 완성될 때까지만 살며
백합은 제 입김과 제 눈매가
누군가의 어둠을 밀어낼 때까지만 산다는 것
그것을 알고부터 나는
하필 사람으로 태어나
생각이 몸을 지배할 때까지만 살지 못하고
몸이 생각을 버릴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
단명한 친구는
아침 이슬이라도 되는데
나는 참! 스물 서른이 마냥 그리운
사람으로 살다 간다는 것 그것이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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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물방울의 노래1


봄 언덕 달빛 나무 숲 흔드는 초록의 소리
예전엔 누군가 떨군 그리움인 줄 알았다
시방은 바위같은 꿈
하늘에서 잠시 만나 서로의 눈물 속에
머물다가
해가 뜨면 헤어지는 찬란한 이별
우리 무엇이 되어 흐르면
뼈도 없는 그대 살 속에 스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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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의 꽃


나는 피고 싶다.
피어서 누군가의 잎새를 흔들고 싶다.
서산에 해지면
떨며 우는 잔가지 그 아픈 자리에서
푸른 열매를 맺고 싶다 하느님도 모르게

열매 떨어진 꽃대궁에 고인 눈물이
하늘 아래 저 민들레의 뿌리까지
뜨겁게 적신다 적시어서
새순이 툭툭 터져오르고
슬픔만큼 부풀어오르던 실안개가
추운 가로수마다 옷을 입히는 밤
우리는 또 얼마나 걸어가야
서로의 흰 뿌리에 닿을 수가 있을까
만나면서 흔들리고
흔들린 만큼 잎이 피는 무화과나무야

내가 기도로써 그대 꽃피울 수 없고
그대 또한 기도로써 나를 꽃피울 수 없나니
꽃이면서 꽃이 되지 못한 죄가
아무렴 너희만의 슬픔이겠느냐
피어도 피어도 하느님께 목이 잘리는
꽃,오늘 내가 나를 꺽어서
그대에게 보이네 안 보이는
안 보이는 무화과나무의 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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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병동


나, 잊고 싶지 않은 일이 있네
한 사람이
몇 가지 운명을 만나
너무 높은 곳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을 때
곡예사의 신비며 두려움이
病 하나를 물어다주었을 때
위험한 세포를 떼어낸 자리에
부리가 아름다운 혹 하나를 달았다는 일
그 일을 잊고 싶지 않다네
그 일 사이사이에 피어나던 풀꽃송이들
病깊은 사람 눈망울에 가슴에 피어나던
처절한 꽃송이들
그런 꽃송이를 피워내는 일도
그런 꽃송이를 바라보는 일도 쉽지는 않을 것이네
아무나 쉽게 앉아볼 수 없는
순결한 의자에서
아 꽃들은 힘드는 줄도 모르고
빈틈없이 피어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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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그리기


꽃을 그린다
예전엔 별을 그렸는데
얼마나 진짜 별에 가까웁게 그렸느냐에 따라
하루의 운세를
한 해이 운세를 점쳤는데
나도 모르게 가냘픈 자태의 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너무 먼 곳의 별이 되느니
땅 위에 발을 딛고 서 있다가 스러지는
한 송이 꽃을 더 닮고 싶었을까
종이와 볼펜만 있으면
허공뿐일지라도
손으로 눈으로 꽃을 그린다
무더기 무더기 어우러져 있는 꽃을 그리다보면
꽃들은 내게 안겨오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전해지기도 한다
꽃들이 아프면 내 병 또한 깊어져서
하혈하는 꽃 한 송이 따라 수술실에 들어간다
마취하는 순간까지 꽃을 그린다
회복실에서 맨 먼저 내가 한 일은
꽃 그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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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 반란


꿈꾸는 밤에 더욱 향기로운 나는
절망의 꼭대기에서만 꽃을 피우리니
스물 몇이나 서른 초입에
이 세상 문을 온통 열어버린 듯
저승의 문까지 열어본 듯
찰랑대는 무한의 물결 소리로 흔들리리라
일찍 단물들어 따뜻한 꽃잎들은
숲속 고요 속에 비단실처럼 모여서
제 아픔보다 더 아프게 친구를
역사를 노래하는 사람들
그대들의 고단한 발길을 적셔주는
첫사랑이 되리라

한몸에서 피워낸 또 하나의 슬픈 꽃잎들
아직 철 안 들어 떫은 꽃잎들의
저 아찔한 화냥기!
누군가 머리 위에서 함부로 삿대질해도
족보도 잊은 채 그저 향기롭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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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거머리


목련꽃 피어 천지는 눈부시고 내 징그러운 몸은 이동한다
저렇게 희고 따뜻한 살에 비유되기 위해 나는 태어나
비유의 몸부림으로 한 생을 탕진한 피 피의 거머리
단지 사랑할 때처럼 아름답게 헤어지리라
아무리 세상 살 속에 진한 피를 바치어도
스며들지 않는 거머리의 진실 거머리의
슬픈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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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실피드


춤추는 男子 아래서 詩 쓰는 한 女子 그녀는 지금
위독하다 아름다운 심장이 해마다 졸아 졸아드는 숨
소리 그래도 그리운 전설의 집 문을 열면 쏟아져내
리는 푸른 이끼 그 속에서 만난 푸른 눈은 자라 한
女子에게 공중의 무대를 원한다 방울방울 물방울 소
리 서러운 물방울 소리 행주치마 속주머니 흔들어도
그녀는 이끼 소년의 따뜻한 식탁을 위해 공중의 무
대를 위해 오랫동안 물방울 소리와 친했다 그녀에게
그는 니진스키나 바리시니코프였으므로 사랑의 아다
지오며 투르 앙네르를 위한 안전한 무대는 초록 잔
디밭 그러니까 그녀의 숱이 많은 심장의 보드라움이
다 레 실피드에서 시인으로 열연할 때 그녀의 초록
잔디밭은 어김없이 공중에 있었다 지금 우리는 헤어
져 산다 춤추는 男子 아래서 詩 쓰는 한 女子 그녀
를 위해 춤추는 男子는 매주 수천Km를 왕복한다
공중의 무대에서 무수히 쓰러진 그녀 그녀의 초록
잔디를 하나하나 다시 심어준다 죽어가는 심장의 돌
기를 하나하나 이식하듯 안쓰러운 눈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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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화엄사


그리움에도 시절이 있어
나 홀로 여기 지나간다 누군가
떨어뜨린 부스럼 딱지들
밟히고 밟히어서 더욱 더디게 지나가는데
슬픈 풍경의 옛 스승을 만났다
스승도 나도 떨어뜨리고 싶은 것 있어 왔을 텐데
너무 무거워서 여기까지 찾아왔을 텐데
이렇게 저렇게 살아온 발바닥의 무늬
안 보이는 발그림자 무게를
내 다 알지 하면서 내려다보는 화엄사의
눈매 아래서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무엇인가
탁탁, 탁탁, 탁탁
모질게 신발을 털며 가벼웁게 지나가려 해도
안 떨어지는 낙엽
화엄사의 낙엽은 무엇의 무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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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 나무의, 그림자


지금 여기는 어디쯤일까

까닭 없이 저 많은 씨앗들이
기차로 트럭으로 먼 길 떠나도
또다시 비어 있는
스스로 비워두는 아득함으로 서 있다
헐렁해진 품안에
딱딱하게 감겨오는 피로
너조차 살아 있는 날의 행복한 이파리
밤이면 어린 일을 다독거린다
등걸에서 묵은 가지에서
주름진 속살로도 연초록 그늘을 드리워
긴 여름을 서늘하게 하는 나무
새순 트던 자리가 가려워지면
스스로 이슬을 빚어 씻어내리는
무등산 등나무야 너의
긴 그림자로 사라진 것들을
덮어다오


詩: 박라연 [생밤 까주는 사람]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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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모를 나무 아래서


햇빛을
줍기 위해서 찾아간 언덕
저 혼자 서 있는 나무
나는 그대 이름을 아직 모른다
온몸에 버짐처럼 번져 있는
살아온 날의 생채기
나를 닮아 가늘고 어설프구나
바구니의 햇살
그대에게 다시 주면
근심 많은 뿌리까지 후끈 달아올라
부스스한 살갗을 뚫고 나오는
새 새끼 가지들
이제
따뜻한 땅은 너무 좁아
제 품안에 제 무덤을 파야 하는 저
이름 모를 나무 아래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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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쟁이


우리는 언제나 맨 앞줄에 섰다
궂은 비 내리는 곡마단에서 또 다른 일터에서
시든 잎새들을 반짝이게 하면서
낮게 삭아내린다
우리가 이처럼 낮아질 때
비로소 꽃이 피는 이웃의 잎새들
우리를 난쟁이라 부르는
저 키 큰 미류나무
밤마다 오히려 낮아져서는
우리 키를 올려다보며 흔들리고
 
무릎까지 흘러내린 차디찬 슬픔
문득 흰 그림자로 서 있는
어둡게 잊었던 내 키를 껴안으며
나직이 그리운 이름을 부를 때
막다른 골목에서 말갛게 떠오르는 얼굴
빨랫줄의 새하얀 속옷처럼 반갑다
우리가 또다시 떠돌이별이 되어
어두운 어두운 곳으로 흐르지만
흐르면서 잊어가는 우리 슬픔 부름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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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라연 시인 소개


시인 박라연씨는 1951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시단에 등장했으며,
현재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다.
시집으로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생밤 까주는 사람>과
산문집 <춤추는 남자, 시쓰는 여자>가 있다.
오이나 호박처럼,
한 그루의 나무나 한송이 꽃처럼
식물들의 생애는 그것 자체로 환전하고 아름답다.
시집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은
식물들의 삶에 편입해 한 생을 살고 싶다는
여리고 애틋한 욕망의 개화이다.
그래서 시인은 식물의 주위를 서성거리며,
식물의 따뜻한 햇빛을 나누면서 한없이 자기를 낮추고 다스린다.
시인은 사람과 식물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거리에서 삐걱거리며
생명들에게 밝은 꿈의 시선을 비추고,
그 꿈에 의해 세상을 환히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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