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31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부활주일)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
사25:6~9; 고전15:1~11; 요20:11~18
다시 맞은 부활절 아침입니다. 부활의 빛과,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능력이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시고, 여러분의 일상의 삶 가운데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주일에 상징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상징이란 단순히 어떤 숨겨진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현실의 내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그 무엇이라고 했습니다. 참된 상징은 삶 가운데 지나가는 일련의 사건 중 하나가 아니라, 존재의 바로 그 중심을 가리키는 어떤 것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이 상징에 자신의 존재를 걸고 진지하게 참여하지 않는다면 상징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겐 십자가라는 상징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는 죄와 수치의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이 죄의식과 두려움과 수치로부터, 우리가 스스로 가한 처벌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는 가장 나쁜 것을 취해서 가장 좋은 것을 변화시킬 것이다. 따라서 너희는 결코, 다시는, 희생자가 되거나, 멸망하거나, 무력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모든 죽음을 넘어서는 승리를 주고 있다.”
십자가라는 상징에 이어 또한 우리에겐 “빈무덤”이라는 부활의 상징이 있습니다. 부활의 상징은 빈 무덤입니다. 우리 모든 인류의 역사 속에서 무덤은 공허와 허무와 죽음을 가리키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빈무덤은 영원한 생명과 자유와 더 큰 사랑을 가리키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생명을 이기지 못하고, 구속과 억압이 자유를 이기지 못하고, 사랑이 죽음보다 강함을 선포하셨습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부활 사건 중에 가장 먼저의 것은 마가복음16장 전반부(1~8절, 뒤에 나오는 9~20절은 후에 붙은 마가복음의 긴 끝맺음입니다)의 이야기입니다. 부활사건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거기 보면,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안식 후 첫날 새벽, 해가 막 돋을 무렵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갑니다. 꼭두새벽부터 왜 그들이 거기에 갔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갔나요? 아닙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간 것이 아니라, 죽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발라 드리러 갔습니다. 그리고는 그들 앞에 떨어진 당장의 문제에 대해 서로 말합니다. “누가 무덤에서 돌을 굴려내 주겠는가?”
그런데 무덤에 가서 보자 돌은 치워져 있고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웬 흰옷을 입고 있는 젊은 남자가 오른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 그는 살아나셨소. 그는 여기 계시지 않소.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시오.”(막16:6,7)
이렇게 첫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 부활의 상징은 “빈무덤”이었습니다. 천사는 텅 빈 무덤을 보이며 말씀하십니다. “그는 살아나셨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소.”
무덤에 간 여인들은 예수님의 몸에 방부처리를 하는 것, 이 한 가지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골치 아픈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무덤은 여인들이 옮기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돌로 봉인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돌을 굴려줄 사람을 어떻게 찾을까에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아마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아니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정신적 패턴일 것입니다. 입술로는 예수는 부활하셨다고 말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마음 속 몰래 그가 죽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는 거대한 돌이 우리 길을 막고 있어 그분의 시신에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분에게 갈 수 없게 막고 있는 무거운 돌을 옮기는 문제에 올인 하면서 때로 분노와 절망으로 범벅이 됩니다. 이미 무덤은 비어있고 예수는 부활하셨는데 말입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아니라, 그 시신을 썩지 않게 하는 문제, 무덤의 돌을 옮기는 문제로 골몰하고 골치 썩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시신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부활절 아침은, 이미 돌은 굴려졌다고, 무덤은 이미 텅 비어 있다고, 그분은 살아 나셨고 더 이상 무덤 안에 머물러 계시지 않는다고, 그러니 더 이상 무덤에서 그리스도를 찾지 말라고, 살아나신 그리스도가 먼저 가신 갈릴리로, 너의 삶의 한 복판으로 따라가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부활이 우리에게 전하는 선언입니다.
마가복음이 전했던 “빈무덤” 이야기는 그 후에 수많은 부활 경험과 부활 증언으로 이어지고 확장됩니다. 그것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베드로에게, 두려워 문을 걸어 잠고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의심하던 도마에게,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에게, 그리고 “달이 차지 못해 난 자 같은” 바울에게도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부활 경험과 부활 증언은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확장됩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20장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장면을 읽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 후 첫 새벽에 무덤을 달려갔다가,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이 굴려 있는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에게 달려가 소식을 전했고, 시몬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와서 빈 무덤을 확인하고 돌아갔지만, 마리아는 돌아가지 않고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마리아의 이야기는 빈무덤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그때 흰옷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나 “왜 울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마리아는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가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마라이가 뒤를 돌아보니 어떤 남자가 서 있었는데 누군지 알아보지 못합니다.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생각하고, 예수를 어디로 옮겼는지 물어봅니다. 그 남자가 “마리아야!”하고 그녀의 이름을 부릅니다. 복음서들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들 중 하나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돌아서서”(<스트레포> “돌아서다, 내면으로(안쪽으로, 중심으로) 돌아서다, 전환하다”) <라부니>(“선생님”)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면서 곧 바로 마리아는 자신 앞에 선 사람을 다른 방식으로 봅니다. 즉 예수님의 모습을 단지 육체를 가진 개체의 모습이 아닌, 어디에나 계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본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약간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나를 만지지 말아라”(“손을 댄다”<하프토>는 “건드리다, 접촉하다, 집착하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차가운 반응을 보였을까요?
막달라 마리아가 누구입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그녀에게서 일곱 귀신을 쫓아낸 후 늘 예수님 곁에 머물러 있던 여인이었습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열 두 번이나 언급된 사람으로 베드로와 몇몇 제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도들보다 더 많이 언급된 여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도 끝까지 함께 했고, 예수님의 시신이 묻히는 곳까지 따라왔다가 안식일이 끝나자 꼭두새벽부터 무덤에 달려온 여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과 가장 친밀한 관계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곧바로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저는 여기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냉담했거나 마리아의 사랑을 거절했거나 친밀감을 밀어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는 모든 형태들 속에 편재하기 때문에 하나의 가시적 형태 속에서 “만져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를 막달라 마리아는 “정원지기”(요한20)로,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는 여행자로(누가24장), 호숫가에서는 식사를 위해 숯불을 피우는 남자(요한21장)로 보게 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그 각각의 여정에서, 그 자신이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분께로 돌아가는 과정 중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모든 곳에 계시고 모두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역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어떤 장소, 어떤 시간에 제한될 수 없는 분이 되셨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로 변화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직후에 그의 어떤 현존을 느꼈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라는 개인(person)에서 그리스도라는 집합적 인격으로 옮겨가신(transpersonal)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아는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외적인 모습[외적인 관찰]을 통해 아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전환(<스트레포> “내면으로(안쪽으로, 중심으로) 돌아서다, 전환하다”)를 통해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도”라, 특히 “관상기도”라고 부릅니다.
마리아는 “마리아야”라고 자신을 부르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여자여, 왜 우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라는 말과는 다른 음성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예수님의 새로운 현존 방식을 알아차렸습니다. 우리들도 마리아처럼,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이름을 들어야 합니다. 사랑이 우리에게 말하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앎은 내면의 만남이며 고요한 내적인 앎입니다. 우리에게 이처럼 친밀한 내적인 앎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시각적인 차원(외적 차원)에만 머물러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각적인 차원에만 머물게 되면,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사적인 소유물로 파악하거나 타인들에게 “증명”할 수 있거나 증명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시각적인 차원(외적 차원)에만 머물게 되면, 우리는 우리 삶의 성패를 소유물의 유무로 파악하거나 증명할 수 있거나 증명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20장 17절에서,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나의”와 “너희”를 두 번씩 반복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이 너희 하나님이고, 나의 부활 경험이 너희의 부활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남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고, 남의 경험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테오리아에 올린 토머스 머튼의 글을 한번 보십시오.
“우리는 그저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셨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이 하느님이셨음을 증명한 것을 믿도록, 단지 이것만을 위해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부활을 경험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이 역동적인 움직임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우리 자신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부활을 경험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이런 삶은, 이런 활력은, 사랑과 접촉의 힘으로 표출됩니다.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역사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의 신비가 지니고 있는 활력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생명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증명하려고 애써야 할 교리가 아닙니다. 또한 논쟁해야 할 문제도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며 행동입니다...”
여러분, 오늘 바울이 전하는 부활 이야기는 드리지 못했지만, 고린도전서15장은 이번 부활시기 동안 곰곰이 묵상할 말씀입니다. 부활경험의 진정한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공동기도에서 함께 기도드린 것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참된 만남은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를 해방시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 힘을 해방시킵니다. 그것은 희망이고, 삶을 살아가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회복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패배했다고 생각할 때 다시 일어서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성장하고 변화하는 능력이며, 창조적 변형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 하나님, 예수 부활의 사건이 우리의 경험이 되고 우리의 예수 부활이 우리의 능력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