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봤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예정에는 없던 일이었다.
코로나로 얼굴 못 보고 지낸 먼 동네 친구가 우리 동네 두 사람을 초대한 것이 한 달 전이고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어떻게 갈 건지 물어온 친구에게 카카오 지하철로 확인한 정보를 알려주며 몇 시에 몇째 칸에서 만나자고 해둔 것은 어제였다.
그런데 시간을 잘 지키는 이 친구가 전동차 문이 세 번이나 열렸다 닫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해도 발신음만 갔다. 일곱 번째 전동차가 들어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아침 운동하고 들어오는 길이라는 친구는 명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일 약속 아니에요? 대화방에 들어가 찾아보니 내일이다. 허탈했다.
지하철 벤치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어떻게 몇십 분을 기다리는 동안 단 한 순간도 내가 약속 날짜를 잘못 안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지 않았을까? 확신범이 생기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집으로 곧장 가자니 열없고, 남편 점심까지 잘 차려놓고 온 것을 생각하니 그냥 가기 아까웠다.
시간이 난 김에 영화를 보자!
‘인어공주’를 보기로 했다. 애니메이션을 실사 영화로 새롭게 만든 것인데,
개봉 전부터 캐스팅 논란이 일어 관심이 가던 차였다.
주인공 할리 베일리가 백인이 아니라 흑인이라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안데르센의 동화로 시작한 인어공주는 디즈니의 공주 애니메이션 중
가장 아름답다고 했는데, 그 사랑스러운 공주를 엉뚱한 사람에게 도둑맞은 듯해 그러는 듯하다.
사실, 흑인이 주인공이라는 말을 듣기 전에는 인어공주가 특별히 백인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일도 없다. 열린 마음이어서가 아니라 그게 너무 당연해서였는지 모른다.
영화를 보는 동안 알았다. 백지상태로 편견 없이 보겠다고 했지만,
나한테는 이미 많은 정보가 들어와 있었다.
게다가 ‘공주’라고 할 때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견고하게 정형화되어 있었다.
흑인 인어공주는 바다 밖 인간 세상을 동경하는 호기심 많고 진취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주인공으로는 손색이 없고 노래도 잘 부르는데,
공주의 이미지에 대입하려는 마음이 집중하는 일을 자주 방해했다.
사실 나를 불편하게 한 것은 얼굴색이 아니었다.
애니메이션이 아니어서 상상의 폭이 줄어든 것 그리고 생뚱맞지만,
미간이 넓고 두 눈 사이가 너무 뜬 것이었다.
그러기에 ‘별점 테러’를 주면서 흑인 인어공주는 절대 안 된다고 할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또 다른 편견을 가진 나를 보았다.
작은아이가 어렸을 때 일이 생각났다. 색이름을 익히던 때였는데,
크레파스 한 개를 집어 들고는 무슨 색이냐고 물었다. 살색이네, 그러자 또 물었다.
“그럼, 흑인은 어떻게 해? 백인은 또 어떻게 해? 다 다른데요.”
그 생각이 재미있어 손뼉을 치다가 뜨끔해졌다.
그렇다면 어떤 색을 살색이라고 부르는 일은 다른 살색을 틀렸다고 밀어내는 일이 아닌가!
우리가 살색이라고 부르던 색을 살구색이라고 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로부터 훨씬 후의 일이다. 색이름 바꾸는 일이 편견의 싹을 싹둑 자르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생각의 고착을 막는 일은 한 것 같다.
독일에서 살다가 온 어느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도 생각났다.
일곱 살 딸이 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때의 일이라고 했다.
어느 날부터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졌다.
궁금도 하고 걱정도 된 엄마가 아이 몰래 뒤를 밟았다.
아이가 귀가 도중에 들른 곳은 뜻밖에도 교회였다.
한참 후 나오는 아이를 우연히 만난 듯 반갑게 맞으며 이유를 물었다.
“하나님한테 다 이르려고요!”
알고 보니 동양 아이를 처음 본 반 아이들이 집게손가락으로 양쪽 눈을 잡아당기며
찢어졌다고 놀리고 얼굴색이 다르다고 놀린 것이었다.
다음 날, 엄마는 반 아이들 수만큼 아이스크림콘을 사 들고 선생님을 찾아가
아이들에게 직접 나눠주고 싶다고 했다.
하양, 노랑, 분홍, 빨강, 연두, 초콜릿색…,
색색의 아이스크림을 받아 든 아이들에게 그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는 잊었지만,
반 아이들이 “똑같지 않다고 틀리거나 잘못된 일은 아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놀리는 일은 사라지고 친구를 많이 얻었다고 했으니….
오늘도 나는 깨지면서 배운다.
알고 있다고 했지만 모르던 나를 발견하고 또 배운다.
오래전 이야기도 다시 꺼내 복기하는 마음으로 돌아보며 또다시 배운다.
(주부편지 7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