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광복회광주광역시지부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역사교실 스크랩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들
문대식 추천 0 조회 304 19.11.11 02:3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951년  4월  18  일 에 쓰신  "너라고  불러  보는  조국아  "  는  선생님의

         日帝  에  대한  저항을  대표한  것이다

 

 

 

1919년   경남  마산에서  3.1  만세  운동을  겪고난  젊은  시절의  노산 선생님

 

 

 

 

1922년   연희전문  시절 마산  (노비산)

 

 

 

 

 

조선 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룬  동지들의  모임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들

최근 국제정세의 급변과 남북한 관계의 개선으로 우리사 회는 일대 변화를 맞고 있다. 특히 남북한 관계는 그동안 고착되었던 적대관계가 상호교류를 통해 서서히 무너져갈 조짐을 보이고 있으며, 정부 차원에서의 남북상호간 인적 교류는 급기야 획일적 냉전이데올로기를 극복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해가고 있다.

이같은 남북한 관계개선의 일환으로 생겨난 결과 중의 하나가 6·25 때 월북한 좌익 항일운동가에 대한 정부의 포상실시이다. 정부는 지난해 3·1절을 기해 6·25때 납북된 독립운동가 22명을 포상한 데 이어 금년 광복절에도 6·25 때 납북됐거나 자녀가 월북하는 바람에 연좌제에 걸려 그동안 포상 대상에서 제외돼왔던 유공자 4명을 포상한 바 있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정부 차원의 포상제도는 지난 62년 군사정부가 6·25 전상자를 위한 ‘군사원호법’을 제정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금년 광복절 서훈자 6백13명을 포함해 지금까지 독립유공자로 포상받은 국가유공자는 4천9백47명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정부는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세우고 독립유공자들의 공로를 후세에까지 전한다는 취지 아래 매년 광복절 등 역사적인 기념일에 이들에 대한 포상을 실시해왔다. 그러나 관련자료의 부족이나 법규의 미비점으로 인해 진정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배려가 충분치 못했다는 여론의 지적도 적지 않았다.

이에 대해 정부는 지난해 국회에서 새 상훈법이 통과됨에 따라 그동안 독립유공자 1·2·3등급에만 훈장을 수여하던 것을 4등급(건국포장), 5등급(대통령표창)으로까지 확대키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 총26명으로 구성된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따라서 4·5등급 포상자들에 대한 재심사가 현재 진행중인데 올해 안에 심사결과에 따른 훈장수여가 있을 계획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동안 정부에서 선정한 유공자 중에 다수의 친일파들이 섞여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자료부족으로 인해 적절한 등급의 포상을 하지 못한 것은 이해가 간다고 하나 독립유공 포상자 명단 속에 친일파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국광복을 위해 일신의 안위와 영화를 뒤로 한 애국지사들에게 수여하는 훈장이 일제 앞잡이 친일파들에게도 주어졌다면 이는 민족적으로 통한스럽고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독립유공자를 심사한 심사위원 명단 속에도 친일파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지난해 타계한 친일파 연구가 고 임종국씨도 생전에 몇 번이나 이같은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친일파들에게 주어진 포상에 대해 정부가 제대로 해명한 적도 없고 아울러 취소시킨 바도 없다. 그러면 우선 그동안 독립유공자 선정작업에 참여했던 역대 친일파의 면면을 살펴보자.

독립유공자에 대한 첫 정부포상이 실시된 1962년의 문교부 독립유공자 공적조사위원회 위원 7명(위원장 포함) 중에는
신석호(申奭鎬), 이병도(李丙燾)라는 이름이 들어있다.

신석호는 1930∼37년의 총독부 수사관보(修史官補)를 거쳐 37년부터 수사관으로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던 인물이며, 이병도는 1925∼27년에 총독부 수사관보, 이후는 촉탁으로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다. 두 사람 모두 일제하에서 조선역사를 왜곡하고 식민사관을 뿌리내린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다음해인 1963년에는 내각사무처 독립운동유공자 상훈심의회가 심사를 맡았다. 그런데 심사위원 22명 중 이때도
고재욱(高在旭), 신석호, 유광렬(柳光烈), 이갑성(李甲成) 등 4명의 친일인사가 끼었다.

고재욱은 1939년 7월 12일 결성된 경성배영(排英) 동지회 상무이사 및 같은 해 8월 5일 결성된 전조선배영동지회연맹 상무이사를 지냈던 사람이다. 유광렬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편집국장으로, 1937년 9월 하순부터 화북·상해 전선에 종군하면서 『제1번보정입성기(保定入城記)』(1937. 9. 28 ∼) 같은 종군기를 발표했으며,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과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친일논설 및 시국해설 다수를 발표한 친일언론인이다.

1968년에는 총무처 독립유공자 상훈심의회가 심사를 맡았는데 역시 위원 21명 중
고재욱, 백낙준(白樂濬), 신석호, 유광렬, 이병도, 이선근(李瑄根), 홍종인(洪鐘仁) 등 7명의 친일인사가 들어 있다. 앞에서 언급하지 않은 나머지 3명 중 백낙준은 1942년 4월 29일 창간한 친일 『기독교신문』의 산파 겸 편집위원으로 기독교 황민화에 앞장섰으며, 이선근은 ‘만주제국협화회 전국연합협의회’에서 빈강성(濱江省) 협의원을 수차 역임한 사람이다.

‘만주제국협화회’ 라는 단체는 관동군의 지도로 1932년 7월 25일 발족해 만주국 정부의 정신적 모체역할을 한 만주국의 전인종적 조직체로 그 최고의결기관인 전국연합협의회는 만주국 국회에 해당되며, 동(同) 협의원은 그 의원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끝으로
홍종인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서 조선인들의 민족성을 말살하는 데 주력한 친일신문 『매일신보』의 사회부장과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를 지낸 인물이다.

1977년도에는 원호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가 심사를 맡았는데 심사위원 11명 중 친일파 출신으로는 다시
유광렬, 이은상(李慇相) 등 2명이 들어 있다. 이중 이은상은 친일신문 『만선(滿鮮)일보』에 적을 두었던 사람이다.

1980년에도 심사위원 11명 중 앞서의 친일파 신석호가 ‘끈질기게’ 참여했는데 이를 마지막으로 1982년도부터는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 명단에 친일권력자들의 이름이 자취를 감추었다.

이처럼 독립유공자를 심사하는 자리에 친일파들이 대거 참여한 결과 그동안 선정된 독립유공포상자 중에는 친일파들이 상당수 포함되었다. 이들 중에는 친일행적이 확연히 드러난 인물도 있고 심증은 가나 물증이 확인되지 않은 인물들도 있다.

우선 독립유공포상자 중 친일행적이 확실히 드러난 자들의 명단부터 보면,
윤치영(尹致映), 윤익선(尹益善), 김성수(金性洙), 이은상(李殷相), 전협(全協), 서춘(徐椿)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중 일부는 과거 행적 중에서 ‘공과(功過)’가 상쇄된 사람들도 물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이들의 ‘공’은 나름대로 여러 방면에서 보상된 반면 반민족 행각에 대해서는 응당한 대가가 한번도 치러지지 않았다.

일제 때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하여 1982년 건국포장을 받은
윤치영은 그러나 같은 기간에 친일잡지사인 동양지광사가 주최한 ‘미영타도대좌담회’(1942.12.20)에 연사로 참여하여 팔굉일우와 황민의 사명을 외쳤으며 『매일신보』시사논설에서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설명하기도 한 인물이다. 언론항쟁으로 1962년에 국민장을 받은 윤익선(충남 홍성)도 서울 원서정총대(苑西町總代)와 경성부 북부정회총대회 간사를 지냈던 인물이다.

같은 해에 언론분야의 공적으로 대통령장을 추서받은
김성수는 동생 김연수 와 함께 돌이킬 수 없는 친일행적을 남겨놓은 사람이다(자세한 내용은 『말』지 90년 11월호 「김성수의 친일행각」참조). 또 이은상 은 조선어학회에서의 항일경력으로 1977년 건국포장을 받았는데 그 역시 친일신문 『만선일보』에 적을 두었던 사람이다. 전협 의 경우는 다소 특이하다. 대동단 활동을 했다하여 1982년 건국포장을 받은 전협(일명 전국환)은 포상자 발표 후 친일행각이 드러나 포상 여부를 놓고 시비가 있었다. 당시 원호처가 작성한 전협의 공적조서는 “1919년 대동단 단장으로 의친왕 탈출계획을 모의하고 탈출을 실행하다 그해 11월 만주 안동역에서 체포되어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1927년 7월 11일 병으로 가출옥하여 병사한 상당한 공적이 인정되므로 건국포장에 해당하는 자로 사료됨”으로 돼 있다.

그러나 또 다른 그의 반민족 친일행적이 공적심사 후에 드러난 것이다. 그는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평의장을 지냈으며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추천으로 부평군수를 지냈고 또 공금 1백50만원을 유용한 혐의로 3년형을 받고 출옥후 불만을 품어 만주로 이주한 경력이 있다(국사편찬위원회 간, 『기려수필』268∼269쪽).

독립유공자들 중의 친일행적을 놓고 경중을 가린다는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지만 그래도 굳이 나눈다면 적극적인 친일, 소극적인 친일로 나눌 수 있고 또 그 친일행위의 파급효과를 기준으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2·8독립선언’에 참여한 공로로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받은
서 춘 은 앞서 언급한 전 협과는 반대되는, 선항일 후친일에 해당하는 인사로서 친일행위를 놓고 볼 때도 상당히 적극적인 친일파였다. 그는 경도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후 『동아일보』경제부장과 『조선일보』주필을 거쳐 1940년 9월부터 1944년까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의 주필을 지냈다. 그리고 1940년 1월에 그는 조선문화사를 창립하고 월간지인 『태양』을 발행함으로써 ‘황도언론’의 제1선에 섰다.

또 이보다 앞서 1937년 1월에는 친일방송선전협의회 강사, 1939년 7월 경성배영(排英) 동지회 평의원을 지냈고 1940년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1941년 5월부터는 동 연맹의 출판부문 연락계를 맡기도 했다. 오자와(大川滋種)로 창씨개명한 그는 조선임전보국단에서 평의원을 지내기도 했고, 매일신보사 강연·영화반의 강사로 1940년 11월 18일부터 전국을 돌며 친일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여기서 서춘에게 대통령표창을 주기로 결정한 1963년도 내각사무처 독립유공자 상훈심의위원회의 심의위원 명단을 한번 살펴보자. 전체위원 22명 중에서 4명의 친일파(고재욱, 신석호, 유광렬, 이갑성)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중 특히 고재욱과 유광렬이 서춘의 친일행위를 몰랐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고재욱은 서춘이 평의원으로 참가한 경성배영동지회에서 상무이사를 지냈으며 또 유광렬은 서춘과 함께 조선임전보국단에서 평의원을 지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서춘의 친일행적을 덮어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독립유공자 대열에 친일파들이 낀 것은 근본적으로 친일파들이 독립유공자를 심사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몇 사람은 친일행적이 널리 알려진 경우지만 아직까지 동명이인임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은 석연치 않은 사람도 상당수 있다. 독립유공자 관련단체의 한 관계자에 의하면 포상자 중에는 해방 후 혼란기나 6·25전란을 틈타 관련자료를 위조하여 정부로부터 포상받은 사람도 일부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과거 행적이 분명히 가려지지 않은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사람은 30여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들의 면면과 의혹점은 다음과 같다.

광복회에서 활동했다 하여 1977년 대통령표창을 받은 강원도 삼척군 노곡면 출신
김동호 (金東鎬)는 1920년 12월2일 강원도 평의원이 된 삼척군 출신 김동호와 동명이인임이 증명되어야 한다. 또 광복단 활동으로 1977년 대통령표창을 받은 함남 갑산군 회인면 출신 김석태 (金錫泰)도 1918년 2월5일 갑산군 참사를 의원면직한 김석태와 동명이인임이 증명되어야 한다.

1968년 역시 광복회 활동으로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을 받은 경북 청도군 매전면 출신
이정희(李庭禧)는 1917년 11월30일 청도군 참사에 임명되고 다시 1920년 12월20일 경북도 평의원에 당선된 이정희와 동일인물은 아닌지 또한 해명되지 않고 있다. 이들이 거친 직책 중에서 도평의원은 도지사의 자문기관으로 도내에 거주하는 유력자 중에서 선출 또는 임명되며, 군 참사는 역시 군내 거주자 중 유력인사를 상대로 정원 2명이 임명되던 직책이었다.

황해도 안악군 안악면 출신의
김홍량 (金鴻亮)은 독립군 자금을 모집했다 하여 1977년 국민장을 받았는데 1941년 5월11일 관선 황해도의원에 임명되고 조선임전보국단에서 평의원을 지낸 김홍량도 있다. 평남 강서군 강서면 출신 김희선 (金羲善)은 참의부에서의 활동으로 1963년 대통령표창을, 그리고 임정에서의 활동공로로 1980년 국민장을 받았다.

그런데 구한국 보병참령 출신인 같은 이름의 김희선은 1913년 2월4일 개천군수, 1915년 5월12일 안주군수에 임명된 후 1915년 5월22일에 동 직책을 의원면직한다. 이 사람은 안주군수를 의원면직한 1919년 5월22일부터 약 10년간 국내행적이 묘연한데 이 사람이 임정의 김희선이라면 그 10년이 임정에서 활동한 기간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1928년 11월16일 일왕 히로히토의 즉위식을 축하해 반포한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수령한 사람 중에 김희선 이라는 인물이 들어 있다. 일왕의 즉위와 관련해 임정 요인에게 은전이 내려질리는 없다.

이 역시 밝혀져야 할 대목이다. 임정에서의 활동공로로 1983년에 국민장을 받은
최창식 (崔昌植, 서울 계동 출신)은 1941년 11월부터 1942년 9월까지 일본군 점령지역인 상해 남경로 합동대루(哈同大樓) 103호실에 거주한 경성부 계동 본적인 최창식과 같은 이름이며, 또 이 주소에서 같이 거주한 아내 김원경 (金元慶)은 ‘부란미용실’을 경영하면서 친일 상해계림회 이사와 상해계림구락부 회원을 했다. 그런데 애국부인회 활동 공로로 1963년 대통령표창을 받은 서울 무교동 출신의 김원경이 있다. 이들 모두 역시 동명이인임이 밝혀져야 한다.

이미 독립유공자로 포상받은 사람 중에서도 뒤늦게야 일제 때 밀정노릇을 한 사실이 밝혀져 시비가 일었던 사람도 있다. 앞에서 언급한 전협 이외에 1963년 건국공로 훈장 단장(지금의 건국훈장 독립장에 해당됨)을 받은
김성근 (金聲根), 전좌한(全佐漢) 그리고 1962년 대통령장을 받은 이갑성 (李甲成)이 그들이다.

김성근은 3·1운동 직후 폭탄제조 테러단체인 ‘구국모험단’을 조직해 항일운동을 했다고 발표됐으나 1925년 9월25일자 『동아일보』기사 「4각관계로 폭로된 상해밀정사건」에 의하면, 그는 1921년 이후로는 구국모험단의 활동을 청산했고 이후 상해 일본 영사관의 밀정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또 전좌한은 1927년 서울의 주요 관공서를 폭파하려다 미수에 그친 ‘창의단사건’(일명 서울폭탄사건)으로 5년 징역을 살고 나왔으나 국사편찬위원회가 간행한 『기려수필』과 당시 재판과정을 보도한 동아일보(1927.8.23) 기사에 의하면 그는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소속 하기(河崎), 전변(田邊) 두 형사의 밀정으로 이 사건을 임의로 꾸민 후 경찰에 밀고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으로서 81년 3월 사망 당시 성대한 국민장을 치르고 국립묘지에 안장된 이갑성. 해방 후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과도입법의원(47년), 2대 국회의원(50년), 자유당 최고위원 정무부장(52년), 공화당 발기위원(63년)을 거쳐 광복회장(65년)을 역임하였고 33인 중 ‘마지막 생존자’로서 62년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그에게 망령처럼 붙어 다니는 친일 주장은 과연 ‘오해’인가. 이미 그가 죽고 없는 이상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당시 그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과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 아나키즘 계열의 독립운동가 김성수(金聖壽)가 결정적인 단서를 내놓았다. 흔히 김지강(金芝江) 또는 선열(先烈)로도 알려진 김성수(1900∼1961)는 경남 밀양 출신으로 중국 광동의 황보군사정치학교를 다녔던 의열단 단원이자 재(在)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남화한인연맹의 전신)에 가입했던 아나키스트였다. 의열단 활동으로 지난 1977년 국민장을 추서받은 그는 61년 임종을 앞두고 (사망일은 61년 4월5일임) “지사의 체면을 더럽힌 사생활의 부끄러움 때문에 입을 열지 않았으나 죽음을 앞둔 마당에 민족 앞에 차마 대의를 밝히지 않은 채 민족을 등지고 세상을 뜰 수 없다”라는 말과 함께 몇 마디 유언을 남겼다. 김성수의 유언내용 중에서 이갑성과 관련된 부분의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1937년 1월, 그가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에 의해 체포될 무렵 그는 아나키스트그룹의 지도자인 정화암(鄭華岩)의 지령에 따라 상해의 어느 도박판을 털 계획이었다. 그런데 탐색차 들어갔던 그는 그곳에서 묘령의 한 여인을 만나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사생활의 부끄러움’이다.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는 계속되었고 김성수는 그녀에게 만날 때마다 자금의 용도를 밝히고 얼마씩의 자금을 얻어 쓰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성수가 그녀에게 거액의 자금을 요구하자 그녀는 김성수를 일본경찰에 밀고하여 붙잡히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성수의 주장(유언)에 따르면 그는 체포된 후에 그녀가 이갑성과 선이 닿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체포되기까지의 음모에는 당시 상해에서 ‘제중(濟衆)’이란 이름의 약국을 경영하던 창씨명 암본정일 (岩本正一, 이갑성)이 관련되어 있다는 게 김성수가 유언으로 남긴 주장의 핵심이다.

이 밖에
임의택(林義鐸, 임정서무국장), 유우석 (柳禹錫, 유관순 열사의 오빠) 등도 이갑성의 친일행적에 대해 언급한 바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키로 한다. 한편 이같은 주위의 지적에 대해 이갑성 자신은 생전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 ‘침묵’이 ‘사실’(친일행적)을 인정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시간이 지나면 모든 시시비비가 자연히 가려질테니까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는지 그의 정확한 속뜻은 알 길이 없다.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로 둔갑한 경우는 비단 정부의 독립유공자 포상 분야뿐만이 아니다. 우선 지난 82년에 발족한 ‘독립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의 위원 55명 중에는 적어도 4명
(이은상, 박순천, 백낙준, 이숙종) 의 친일인사가 끼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여론의 지탄을 받고 10월에 새로 개편된 ‘독립기념관 추진이사회’에서는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당시 위원들의 자격이 꼭 독립운동가 출신이어야 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독립운동가들과 마주앉아 독립기념관 건립을 논의한다는 자체는 있을 수 없는 일로 지탄받았다.

이와 유사한 예 중의 하나가 국립묘지에 일부 친일인사들이 순국지사들과 나란히 누워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애국선열 관련단체의 한 관계자는 “도대체 누구의 가치판단으로 이루어졌는지 몰라도 그 역시 같은 친일파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선영이나 일반묘지에서 호화묘지를 꾸민다 해도 눈총을 받을 것인데 하물며 국립묘지에 묻힌 것은 분명히 재고되어야 한다”며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끝으로 이 범주에 드는 또 하나의 사례로 ‘3·1문화상’과 수상자 선정문제를 들 수 있다. ‘조국광복을 지향하여 거족적으로 발양된 위대한 3·1정신을 영원히 기념한다’는 취지로 국내 문화계 각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룩한 사람에게 준다는 이 상은 금년까지 31회에 걸쳐 시상돼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상의 역대 심사위원과 수상자 중에는 ‘명백한’ 친일인사들이 상당수 끼어 있어 이상의 본래의 취지를 의심케 한다.

우선 역대 수상자들 중에서 눈에 띄는 친일파들을 찾아보면
조연현, 백철, 모윤숙, 최정희, 김은호 등 친일예술인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또 이 상의 역대 심사위원 중에도 백낙준, 이병도, 윤일선, 유진오, 유치진, 고재욱, 백철, 모윤숙 등 생존한 친일파들이 총집결해 있다.

과거 친일전력이 있다고 해서 사회활동을 완전히 제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민족정기가 조금이라도 살아있다면 이들에게 다음 몇 가지는 제한시켜야 한다. 우선 친일파들이 선열의 유업을 기리는 모임에서 축사를 하거나 그 공적을 평가하는 일, 국립묘지에 묻히는 일, 그리고 한·일간 외교무대 전면에 나서는 일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친일파들은 반성과 자숙보다는 오히려 역대정권의 비호 아래 권력의 상층부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려왔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동이전’에서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는데 사마천의 ‘의심’은 비단 그만의 ‘의심’이 아닐 것이다. “세상에는 조행(操行)이 바르지 못한 사람으로 행복을 얻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훌륭한 행동을 하고서도 역경에 처해 고생하는 사람도 있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보면 천도라는 것이 과연 바른지, 그른지(天道是耶非耶)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출처 : 네이브 브로그 경계선에서...

 

 

노산의 자료..

.........................................

 

이슬  내린   모란꽃   숲에

젖빛  안개  헤치고    솟아난

우리    님   밝은    넋이여 !

 

하늘   같이   높은   덕을 

바다   처럼   깊은   정을

온  나라에    나누시며 

홀로  걸으신    고달픈   길 

사람마다   웃음   주며

손  잡아   나라   사랑   알으켰네 

가슴    속    등을  켜고

이   골목    저   골목   어두운   동네를

詩 로써   밝히시고    교훈으로   일깨우니

강과   산을   넘던   달도  멈추고

그와   함께    노래하고   춤   추었네.

 

 

 

80년   쉬임없이   쌓으신   일

그   누가   모르리오만

우리   님   살으신   길

아직도   멀고   먼   길

해가   가고   달이  떠도

그   한   넋  밝으심이

이   민족에   빛일러라

 

그는   하늘의   구름   송이를

이   민족을   위해   노래했고

파도치는 바다에   주름지는   물결을

소리마다    음악으로   읊조리었으니

 

 

찬양하옵니다.

 그  말씀   그  사상

 이  민족    거울삼아

 고매한    그   말씀   따라  가오리다.

 

 

사시옵소서 !  더   오래   사시옵소서 !

 민족의  둘레  안에

 피고   지고   다시  피는

 꽃향기로   에워싼

 이   겨레를  껴   안으시던    당신이시여  !

 

 

사시옵소서 !   더욱   더  사시옵소서 !

 

 

1982년   8월    毛  允  淑

(위의   시는 八旬 을   맞이하신  노산 (이은상) 선생님께  보내오신  시 )

 

............................................

 

 

밤이면

 

묽인   양    壁 畵 ( 벽 화 )  같이   진종일   앉았다가

 

참다  못해   염소처럼   머리를   부?다가

 

밤이면   박꽃   핀   내   집으로

 

꿈   길     타고   나간다

 

 

 

 

南 風

 

읽다   둔   책장을랑   덮지   말고

 

펴   두시오

 

남풍이   날   대신   내   방으로    불어   들어

 

뒤지며   펄럭이거든

 

날   본  듯이   여기오

 

 

 

                         1942 , 10.       함흥 옥중에서    노산   이은상

 

(노산  이은상  박사님은  조선어 사전  편찬위원  으로  우리말과  우리  글의   정리운동에

 

관여해   오시던중   조선  어학회  사건으로  흥원 ,  함흥 경찰서에  구금되시었다. )

 

 

 

..............................

 

나는   가난한   사람

 

그러나   나는  가멸한   사람

 

누가  날   가난하다는고

 

내   가슴   속은   보지   못하고

 

 

 

내게는 

 

보배가   있다

 

나의  조국

 

나의  시

 

( 조국을  자신과  일치  시킨  시  )

 

 

 

자정이   넘었읍니다

 

어쩌면  이리도  고요   할까요 ?

 

수정  같은   하늘에

 

달도  졸고  있읍니다

이밤도

 

나는  엎디어

 

당신의  이름을   외움니다

 

 

당신은  내   면류관이요

 

내  기도요

 

내  노래  입니다

 

 

그리워   바라보다

 

다시  보면   내  자신  입니다

 

이  순간

 

당신과   나는 

 

분명   둘   아닌   하나  입니다 .

 

 

------   노산  이은상   선생님은  25세   (1928 )  때  조선어  사전  편찬  위원으로 , 그후에도

 

줄곧   우리말과  글의   정리운동에  관여해  오시다가   1942,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흥원  경찰서와  함흥에  구금되어  갖은  고초를   겪으셨다 .  그후  1945, 1월  일제   말기

 

에도   구금  되시면서   차디찬  감방  에서 도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애착심은    더욱  불타

 

오르셨다 .

 

...............................................................................

 

 

조국 

 

 

평생을    배우고도

 

미쳐  다  못  배워

 

인제사 여기와서

 

ㄹ  자를   배웁니다

 

ㄹ 자  받침  든  세  글자

 

자꾸  외워  봅니다

 

 

제  "  말"  지키려다

 

제   "글"   지키려다

 

제  "얼"  붙안고   차마   놓지   못하다가

 

끌려와

 

ㄹ  자  같이   꼬부리고   앉았소 .

 

 

 

..........................

 

祖 國 아 ( 노산 이은상 선생 )

 

바라보라   저   山 과   바다   저  하늘과   들판

내   歷史 와  전설이  고였고

代代로   누려온   곳

祖國아  !  내  불타는   사랑   오직   너   밖에   또   뉘게  주랴 .

 

 

네게서    내 뼈와   살   받고  그리고  내   生命  길러

내   누구   위해

이  살과   뼈   던져   바치리

祖國아  !  내   불타는   사랑   오직   너  밖에   또  뉘게  주랴

 

 

운명의   발   아래   너는   지금     짓밟히는데

버리고   어이가랴   같이   안고   싸우리라

祖國아 !  내   불타는   사랑  오직   너  밖에   또  뉘게  주랴.

 

 

너  괴로울때

내   영광   내   행복   어디   있나

네가   없다면   구구한   내  일생  무엇하리

祖國아 !  내  불타는   사랑  오직   너밖에   또  뉘게  주랴 .

 

 

남들이야  모두   차   버리고

돌아보지   않을   찌라도

나는   너와  함께

네   품  속에   묻히련다

祖國아 !  내  불타는   사랑   오직   너  밖에  또  뉘게   주랴

 

 

슬프다   너  같이   기구한   운명   둘이  있으랴

그래도   너는   피로써  물려  받은  

내  하나의  보배

祖國아 ! 내  불타는  사랑   오직   너밖에   또  뉘게  주랴 .

 

 

?는  피   한   가슴  안고   분한   생각  두  주먹에  쥐고

하늘과 땅에   외치며   맹세하는  

한   마디  말

祖國아 !  내   불타는   사랑 오직  너  밖에  뉘게   주랴 .

 

 

오늘도   비  바람   끓임없이  불어치는  속

애타는   생각에

머리  위엔  한   가닥   늘어도

祖國 아 !  내  불타는   사랑  오직  너  밖에   뉘게   주랴 .

 

 

지금   이   깊은   밤  두  손  모으고   끓어앉아

무릎  위에  눈물  지으며

빌고  다시   비노니

祖國아 ! 내  불타는   사랑  오직   너  밖에   뉘게   주랴 .

 

 

쓸개보다  더  쓴 잔  들고

참으라   거듭   참으라

새  닐이   ?아올  때   너랑  같이  맞아야  한다

祖國아 !

내  불타는   사랑

오직  너  밖에  또  뉘게   주랴

 

 

--------------------  1950 년  섣달  그믐밤.   부산   피난민   천막   ------------------------

 

갈림길에서 ( 노산 이은상)

 

 

체온도 지탱하기  어려운

이  음산한  고난의 땅 

역사의  실패한  땅에서

일어서야할   민족이기에

한  가닥

희망의  길을  ?아

우리  갈길을  가야  한다.

 

인류의  역사 위에

수많은  의인들이  걸어간

거룩한  피와  눈물이  밴

진리와  아름다움의  길

그  길이

너무도  또렷이

우리  앞에  놓여  있구나

눈물과  땀과   피는

인간이  가진  세  가지  재산

기원과  봉사와  희생

거기  영생의  길이  있네

험하고

가파로와도

오직  그  길  만이  사는  길  !

 

 

너와  나,  식어져  버린

가슴  속의  사랑의  피

그  피  다시  끊이면

거기  화사한  장미꽃  피고 

눈부신

부활과  영광의  길

우리  앞에  열리리라

 

.............................

 

 

1903년  마산에서  출생하신  노산  선생님은   연희전문  문과와

일본서  대학에서  문학부를  수학  했으며

1943년에는  조선 어학회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셨다.

 

해방전  이화여전  교수,  조선일보  출판국  주간, 호남신문 사장   동아일보기자 을  역임  하셨다

해방후에는  전남대학  이사장, 이  충무공  기념사업회  이사장,  고 안중근  의사

추모회장을  지내는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셨다.

 

또한  한글학회  이사,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  시조작가 협 회장,  세종대왕기념

사업회  이사  등 중책을  맡아  활동  하셨다

 

문학활동은    아버님을  여의고 ,   봄처녀 ,  가고파 ,  옛동산에  올라, 오륙도,

천지송,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 고지가  바로  저긴데 , 등  이천편이넘는  작품을

남기셨으며

 

 수필집으로는  無常 ,  민족의  맥박,  피어린  육백리,  등  수필집을  간행하셨다.

 

그외  노산 시조집, 이충무공  일대기,  亂中日記  ,등  40  여권의  저서를  남기시며

교육과  문화계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예술원  문학공로상.한글  공로상  등 을

수상했고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상을  수여  받으셨다.

 

노산선생님의  부친은  마산  최초의교회인  마산교회  창립의  핵심  인물이셨고

1906년 5,17일  교회내  건물에  讀書塾 (독서숙)  이란  학당을 시작,

지금의  마산  창신  중고등  학교 가  되었다

 

노산  선생님은  서울  강남의  충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셨고   병상생활 중 쓰신

조국  분단의  비극과  통일에의  염원을  그린   " 祈願 - 分界線 을  밟고 "  가  선생님의

마지막  작품 이  되었다 

 

노산  이은상  선생님은  병상생활  2년  후인  1982년  9월  18일  79세로 우리곁을 떠나셨다

1982년,  9,22, (수요일) 오전  11시  사회장으로  국립묘지 제 1  국가  유공자  묘역에

모시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