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후 이라크는 경제제재 조치를 받게 되었고, 조금이라도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면 걸프만에 항시 대기 중이던 미 함대가
토마호크나
F/A-18,
F-14 등을 동원하여 지속적으로 공습을 했고 결국 이라크는 전쟁의 후유증을 치유하지 못해 10여년 후 다시 벌어진
이라크 전쟁 당시 너무나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국의 경우에는 전세계적으로 협조를 받았던지라 전비부담을 조금이나마 덜 수는 있었다.
이라크군은 군사력면에도 열세였으며 전쟁의 정당성이나 명분은 다국적군에게 있었고, 주변의 아랍국들도 이라크에게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참혹한 패배를 피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이집트와, 이라크와 같은 이념을 공유하는 바트당이 일당집권하는 시리아까지 쿠웨이트 구원을 외치며 참전했다. 그나마 이라크에게 동정적이었던 요르단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종전후 걸프만 연안 아랍국가들의 지원이 단절되면서 꽤나 고생해야 했다.
언론 역시 패배자의 반열에 들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언론을 자유롭게 풀어두면 전쟁에 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미군은 철저하게 기자들을 통제했고, 그 덕에 기자들은 취재에 많은 제한을 받았으며 다국적군의
언론플레이도 그만큼 용이해졌다. 다국적군이 상륙작전을 연습하는 것을 기자들이 열심히 보도한 덕에 이라크군 상당수가 쿠웨이트 해안가에 머물렀고, 그 덕에 다국적군의 우회기동이 수월해진 것이 그 예이다.
군사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베트남 전쟁처럼 될 거라고 예상했지만, 결과는 다국적군(이라고 쓰고 미군이라 읽는다)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우린 모두 바보였어
그러나 미군 역시 스스로는 패배자 반열에 들게 된다. 이유는 전쟁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기대치를 너무 높여놓았다는 것. 지나치게 낮은 전투 사상자 비율로 인해 이제 미군은 희생자수가 한 명이라도 늘어나면 큰 비판 여론에 시달리게 되는 처지가 된다. 이것은 이후 이라크/아프간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희생자 수를 줄이기 위해 대규모 병력 투입을 꺼리고, 다시금 적은 수의 병력으로 인해 사상자가 늘어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된다. 걸프전 승리의 가장 큰 핵심 전략인 '압도적 병력/화력'의 장점을 다시 세우기가 힘들어졌다는 의미.
또한 미군의 허술한 전후 처리 방식도 도마 위에 올랐다. 어느 정도 정치적 목적(쿠웨이트 해방)을 달성한 뒤로 백악관은 더 이상 확전을 원치 않았고, 이 참에 확실히 이라크군을 제압하고 무력화(이것은 군사적 목표)하려던 군과 의견을 달리하게 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결국 백악관은 이라크와의 휴전에 대한 어떤 방침도 정하지 않은채 슈워츠코프 장군에게 사실상 전권을 위임해 버린다. 슈워츠코프 장군은 백악관의 지시에 따르는 수 밖에 없었고 가능하면 빠르게 미군을 그곳에서 빼내려는데에만 급급하게 된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라크측 휴전 협상단이 헬기를 띄워도 되냐는 질문에 미군 기지 근처에만 안 오면 된다는 식으로 대응할 지경이었다. 이로 인해 이라크는 맘놓고 헬기를 띄워 자국내 봉기 세력들을 처절하게 처단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사담 후세인 세력을 확실히 제거하지 않고 미래의 화근을 남겨둔 셈이었다.
그 이후 이라크전, 아프간전 등을 통해 볼 수 있듯이 미군은 끊임없이 미숙한 전후 처리 방식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데 아직도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함정이다.
끝으로
조지 부시도 패배자가 되었다. 전쟁은 승전했고, 지지율은 솟구쳤지만, 금방 경제난을 이유로 급락한 뒤
로스 페로가 갑툭튀, 이어
아칸소의 듣보잡 주지사였던
빌 클린턴에게 광탈하면서 12년만에
지미 카터에 이어 재선에 실패하는 대통령이 되었다. 공화당으로 치면
제럴드 포드 이후 16년만.
그래서 아들이 계승한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