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투쟁 등 몇 가지 소회
이 글의 전반부는 선배 한 분에 대한 위문편지와 나의 근황을 전한 것입니다. 양해 바랍니다.
와룡 거사님,
복날에 거시기를 잡수신 후 코로나까지 걸렸다니 이 무슨 황당한 소식이당가요? 하마터면 골로 가실 뻔하셨네요. 그러기에 와룡강 초막에서 엷은 졸음에 짚베개나 돋아 고우시면서 ‘큰 꿈 뉘 먼저 깨는고, 평생을 내 스스로 아노라, ... 창밖의 해는 길기도 하고녀’나 읊으면서 유유자적 노닐 것이지, 뭐라꼬 밤에 힘 좀 써보시겠다고 요새는 별로 인기도 없는 거시기 잡수려 속세에 내려오셨다 혼나셨구랴. 과욕을 부리면 안 되시지라.
겨우 정신 차리고 하시는 말씀이 또 기가 차네요. 뭐 딩구는 소리가 낙엽인가 했더니 세월이 가는 소리라 고라고라? 무슨 추성부(秋聲賦) 읊는 것도 아닐끼고... 가을밤에 들리는 소리라면 저 멀리서 이쁜 여자가 옷 벗는 소리일 낀데요? 거시기 잡수시고 힘이 나니까 먼 옛날 잊고 있었던 추억의 한 조각이 되살아나는 건가요? 근데 모든 게 싸늘한 추회(追悔)되어 거사님 마음을 가쁘게 설레게 하는 거지라. 뭘 들킨 것 같이 가슴이 뜨끔하시지요?
그러기에 이노성님, 우재형 등 아래 것들과 잘 어울리면서 모범을 보여야지 않겠사옵니까? 겨우 1.48년 형님이라고 뻐기지 마시고 노가다 판에서 하는 ‘야자’놀이를 하잖다고 ‘에헴’ 하고 곰방대 탁탁 털면서 타박 주지 마시고요. 그러면서 혼자 밤에 살짝 거시지 잡수려 마실 나가시는 건 뭔가요? 젊은 친구들도 이제 80이 넘었는데 이들과 동무하고 흔쾌히 어울리면 유익한 의학 정보도 쉽게 얻어 이런 봉변이 없었을 것 낀데요? 우야동동... 불행 중 다행입니다. 황경춘(1924-2023) 삼촌 보내드리고 마음이 울적했는디 이제 기분이 좀 풀리네요
저도 1일 경춘 삼촌 문상갔다 나오다가 보도에서 꽈당 넘어져 쬐끔 고생하고 있습니다. 연대 건널목 건너 인도에서 넘어져 무릎과 팔꿈치를 다쳤어요. 넘어진 뒤 정신은 말똥말똥한데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겠더군요. 주변에 있던 연대 애들이 일으켜주었어요. 옆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쯧쯧 혀를 차면서 다리에 힘이 빠져 넘어진 거라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6시에 문을 닫는 동네의원에 5시 55분 가까스로 와서 응급치료하고, 월요일에는 정형외과에서 x-ray 찍고 물리치료하고... 드레싱은 3번 했어요. 드레싱은 의사와 간호사가 10분 정도 봐야 하는데 비용이 1900원이더군요. 원장이 앞으로는 집에서 하라고 하네요. 나와 연배가 비슷하여 한 동네에서 수십 년 친구같이 지낸 원장인데 좀 야속하더군요. 근데 불행 중 다행으로 뼈에 이상이 없어 다리에 힘 올리려고 그동안 소홀했던 강변 산책하러 나갑니다. 앞으로 노소 나누지 말고 노가다와 동무하지 않겠다고 고집부리지 말고 서로 동락하면서 즐깁시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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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김좌진에 대해 한마디 붙입니다. 나는 일본의 <현대사자료, 조선> (강덕상, 1965-67) 5권과 <명치 100년사 총서> 중 ‘조선독립운동’ 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벌써 47-8년 전이라 권 수 등은 좀 아리송하군요. 이 자료를 중심으로 그리고 간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캐나다 선교사의 보고서를 이용하여 ‘간도사변(1920)과 영국(The Chientao Incident(1920) and Britain)’이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캐나다 선교사들은 원래 원산에 선교본부가 있는데 간도에 파견되어 윤동주가 공부하던 명성학교 등에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당시 캐나다는 외교공관을 설치하지 않아 영국 대사관/공사관/총영사관이 대신했지요. 그래서 캐나다 선교사들의 보고서는 서울의 영국 총영사관에서 받았더군요. 반면 미국은 간도문제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원래 학위논문의 일부로 쓴 것이나 지도교수가 논문이 너무 길다고 떼어서 그 시기 도요타와 산토리가 내가 다니던 학교에 기부한 기금으로 세운 연구소에서 개별 논문으로 발간했지요. 박사학위 끝내고 개별 논문이 하나 더 있으면 취직에 도움이 될 것이라 하더군요. 참 친절한 지도교수였습니다. 서울에 와서 Royal Asiatic Society에서도 발표했는데 이 기관에서 발간하는 <Transactions> 55권, 1980년에 논문 전문이 실렸습니다.
서론이 길어진 것은 내가 알고 있던 항일 투쟁사인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와는 너무나도 다른 실상이 한국 사회에 전개되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립운동사에는 홍범도, 최동진 등이 이끈 독립군은 봉오동 전투(1920.6.6.-7)에서 이틀간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중상 200명, 경상 100명이란 피해를 준 데 비해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는 4명 중상 2명으로 기록합니다. 봉오동은 함경북도에 있는 종성군 넘어 중국 길림성 도문시 봉오동에 있습니다. 일본측 기록은 일본군 전사 1명 부상 2명이라 합니다. 청산리는 중국 길림성 화룡현 당시 간도 일대입니다. 김좌진, 이범석 등이 이끈 청산리 전투(1920.10 21-26)는 일본군 2만 9천에서 4만 명 정도(실제 교전 병력 5천 명)를 상대로 독립군 3천에서 4천 7백 명이 (실제 교전 병력 1,200-3,000) 6일간 싸워 독립군은 전사 60명과 90명이 부상하면서 일본군 전사 1,200명, 부상 3,300명이라 피해를 주었다고 합니다. 청산리 전투는 내가 초등학교 5-6학년 때 어머니가 가르치던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피 끓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고성여중에서 수학 외는 다 가르쳤다고 하셨습니다. 집에는 교과서와 참고서 등이 있었지요. 교과서에는 이범석 장군이 전투의 주역으로 등장하더군요. 내가 중학교에 가니 이 글은 교과서에서 없어졌습니다. 아마 1940년생 전후 분들은 알 것 같네요. 일본측 기록에는 일본군 전사 11명, 24명 부상이라 합니다. 당시 일본군 기록 일부를 영국 무관이 입수하여 영어로 번역된 것도 있습니다.
일본군은 매일 전투 상황을 기록하여 보고한 것이지요. 반면 독립군 측은 요새 말로 ‘카드라 통신’으로 한 다리 건너면서 과장되어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된 것이지요. 3.1운동이 끝나고 독립 열기가 한풀 꺾인 상황에서 임정은 다시 항일의 불씨를 끌어올려야 했을 겁니다. 그러니 부풀리고 또 부풀려서 임정이 발행한 <독립신문>에 실리고 이게 과장되는 또 과장되는 과정을 거치지요. 일본군 전사자가 2,500명 혹은 3천명이라고 하더군요. 이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봉오동 전투와 홍범도라는 이름은 일본 기록에서는 스치듯이 몇 번 보았을 뿐입니다. 반면 청산리 전투는 제법 상세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근대사를 전공하는 분들, 특히 몇몇 대가라는 분들은 아직도 이를 진실이라 믿고 있더군요. 내가 다른 이야기를 하면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친구들은 다 이렇다’라느니, 간도에 그 전적비가 남아 있다면서 강변하는 겁니다.(서울대 S, 고대 K 교수) 문재인 정부는 3.1운동 시기 사상자를 부풀리더니 홍범도의 유해를 구국의 영웅으로 대접하여 봉송해 왔습니다.
어느 쪽의 주장이 맞느냐고 다시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겁니다. 사회과학적, 역사적, 군사학적 관점에서 간단히 집어 봅시다.
우선 이곳 지형이 사단, 최소한 여단 규모로 전투를 벌여 수백 명, 천여 명, 수천 명이 죽을 만한 평야 지역이 아닙니다. 일본군은 50명 혹은 백 명 단위로 추격조를 편성하여 독립군을 쫓고 독립군은 숨고 매복하였다가 이들을 맞아 싸운 뒤 도주한 곳입니다. 전투 (battle)이 아니라 티격태격한 작은 충돌 (skirmish)이었습니다. 당연히 사상사는 10명 이내이겠지요.
둘째, 천명이 죽었다는 것이 전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아십니까? 사상자가 천명이면 부상자는 3-5배이니 3천 내지 5천 명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1개 연대가 섬멸당하여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말입니다. 당시 1개 사단이 3개 연대로 구성되었으며 일본군 1개 대대가 1천 명이었으니 사단 규모의 작전 운용은 불가능할 정도로 막대한 차질을 준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황이 생겼으면 일본 군부가 발칵 뒤집히고 국방장관 (당시는 육군상)이 사임하고 수 개 사단이 투입되어 반격 작전을 수행하는 등 후속 조치가 뒤따랐을 겁니다. 홍범도가 이루었다는 봉오동 전투의 성과도 1개 여단 이상의 궤멸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간단한 작전일지 정도 남아 있습니다. 이걸 지금까지 무슨 최고 기밀문서라고 숨기고 있을까요? 2차대전 이전 자료들은 거의 공개되어 있는데.
셋째, 당시 일본은 러시아 혁명의 후유증으로 적-백 러시아 군대 간의 내전에 개입한다는 명목으로 유명한 ‘시베리아 간섭’을 시도하던 때입니다. 일본군 7만 5천 명이 시베리아로 파병되지요. 미국은 시베리아에 대한 일본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 10분의 1 수준인 7천 5백 명을 파견합니다. 1920년 봄 볼셰비키들이 일본인 1백명 이상을 처형한 니콜라옙스크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병력 교체를 위해 태연히 블라디보스토크로 내려왔다가 일부 병력(아미도 6개 대대(6천 명)은 간도를 거쳐 여순에서 귀국합니다. 대규모 살상이 있었다면 이 시기일 것인데, 일본군은 아무런 이상 없이 돌아가지요.
넷째, 중국에서 국공합작 이후 항일전에서 최대의 성과로 꼽는 것이 1937년 북부 산서성에서 팔로군(공산군) 임표가 거둔 평형관 전투입니다. 중국에서는 일본군 불패의 신화를 깨트렸다고 평형관 대첩(平型關 大捷)이라 부르지요. 이때 일본군 전사자는 8백 명이라 하는 데 실제로는 사상자 합쳐 4백 명 정도라고 합니다. 내가 공부할 때는 중국 기록으로 3천 명이라 알고 있었지요. 이것이 당시 국민당군과 공산군을 통틀어 사단 수준의 주력부대가 이룬 최대의 성과였습니다.
다섯째, 독립군 무장에 관한 기록인데 재미있습니다. 일본문서에는 독립군이 무장이 잘 되어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언급합니다. 당시로서는 최신형 1918년 형 레이밍턴 기관총까지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볼셰비키로부터 나왔다고 합니다. 독립군과 볼셰비키와의 관련을 지적하는 말이지요. 독립군 측에서는 이 무기들이 1차 대전 중 독일-오스트리아 군이 러시아와 싸운 동부전선에서 이탈한 체코군에서 나온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압제에서 독립을 원하던 체코군 5만이 왜 적국을 위해 싸울 것인가 하면서 러시아 쪽으로 탈출했으나 러시아가 혁명의 와중에 휩싸이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동진하여 캐나다를 거쳐 유럽 전선에서 추축국과 싸운 군대입니다. 오늘날에도 체코에서는 영웅적 거사로 칭송받습니다.
당시 독립군은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면 서방이나 볼셰비키를 불문하고 누구와도 손을 잡으려 했으니까 누구로부터 무기를 받았건 문제 될 게 없습니다. 1차 대전을 종결한 베르사유 조약과 1922년 태평양 문제를 다룬 워싱턴 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거론되지 않고, 반대로 레닌이 1919년 7월 2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식민지 해방을 선동하자, 많은 독립투사들이 볼셰비키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임정과 레닌 정권이 접근하던 것도 이 시기입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고려해야 할 사항 중 하나일 것입니다. 김좌진 군대와 볼셰비키와의 관계는 규명해야겠지요. 그런데 강도질을 해서라도 독립자금을 모우려던 시기에 이건 중요한 게 아닐 겁니다. 김좌진이 독립운동에서 은퇴하여 부르주아의 상징인 정미소를 차린 것이 사회주의자가 그를 암살한 것과 어떤 연관은 없을까요? 40여 년 전 내가 제기한 의문점이었습니다.
여섯째, 영국 무관의 기록에 의하면 한국인의 신체조건이 좋다는 겁니다. 아마도 왜소한 일본인과 비교해서 한 말이겠지요. 한국인들을 잘 훈련 시킨다면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하더군요. 이것은 식민지 통치에서 원주민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관찰해 온 영국 무관의 논평이 아닌가 합니다. 또 독립군들의 전투 능력에 대한 평가일 수도 있을 겁니다. 나라 잃은 조선 조정에 대한 분노가 동시에 치밀어 오르더군요. 영국은 간도사변 후 영사급 외교관을 보내 일본의 영토야욕 등 간도의 정치적, 경제적 사정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남깁니다. 외상까지 보고 훌륭한 보고서라고 칭찬한 코멘트까지 있더군요.
마지막으로 한 마디 붙입니다. 우리는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나라 잃은 민족의 항일정신을 북돋우기 위한 노력을 폄하해서는 안되겠지요. 이것이 당시의 시대정신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역사적 진실을 찾는 것도 등한시해서는 안 될 겁니다. 이것이 후손의 책무일 터니까요. 역사와 신화를 구분하는 작업은 신중해야 합니다.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힘들지만 이것을 해체하는 작업도 쉽지 않습니다. 홍범도나 김좌진은 불가능에 도전하다가 좌절하여 신화와 전설이 된 인물들입니다.
런던에서 같이 공부한 홍콩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외할머니가 손문을 big liar로 불렀다고 합니다. 한자로 어떻게 쓰느냐고 물었더니 대포(大泡), 물거품 포를 써더군요. 홍콩에서 거부로 살던 외갓집에 손문이 찾아와 곧 혁명에 성공할 것이라면서 돈은 얻어 가곤 했답니다. 그가 나타나면 ‘대포 왔다’했다더군요. 혁명가들은 불가능을 위해 허풍치고 거짓말하며 때로는 강도질하여, 그러나 별로 이룬 것은 없지만 백마 타고 오는 위인으로 민중에게는 각인된 인물입니다. 홍범도와 김좌진도 그런 인물이 아닐까요? 그들의 실질적인 업적에 집착하기보다는 그 시대의 상징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2023.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