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명중 1명 파산상태…‘나 어떡해’ | |
하지만 P 씨의 고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경매가가 대출금을 상환할 수 없는 수준에서 결정될 수도 있어 모텔은 물론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다른 재산마저 잃을 처지에 놓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P 씨의 수중엔 한푼도 남지 않을 수도 있다. P 씨는 “모텔을 인수하기 전으로 돌아갔으면 소원이 없겠다”며 “나이 예순에 빈털터리가 될 생각을 하면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한숨을 쉬었다. K 씨는 카드빚 때문에 좌불안석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군대를 제대한 후 단기간에 큰 돈을 벌어보겠다고 불법 다단계업계에 뛰어든 것이 화를 자초했다. 초기에 자리를 잡겠다는 욕심으로 신용카드로 과다하게 물건을 사들였다. 금방 목돈을 만질 꿈에 걱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K 씨가 소속된 다단계회사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고 그에겐 수천만 원의 빚만 남았다. 연체금을 막겠다고 대출 업체를 통해 ‘카드깡’을 해 근근이 위기를 넘겼지만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 빚이 순식간에 1억 원에 이른 것이다. 대부분 선량한 중산층 출신 P 씨와 K 씨 같은 이들은 결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어렵지 않게 빚에 내몰리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 정부의 추정에 따르면 실제적인 파산 상태에 이른 사람은 무려 400만 명에 달한다. 10명 중 1명은 재산은커녕 빚만 지고 있다는 얘기다. 대규모 파산은 이미 우려가 아니라 현실로 등장한 셈이다. 이는 대법원의 집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파산 신청을 한 사람은 12만 명 수준으로 2002년 1335건에 비해 90배나 늘었다. 하지만 파산 전문가들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신용불량자 등 잠재적인 파산 신청자가 400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지적이다. 물론 모든 신용불량자와 실제적인 파산자가 법적인 파산을 신청하는 것은 아니다. 법적 파산을 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불리한 경우엔 신청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실제로 파산을 신청하는 사람이 80만 명까지 불어날 수 있다고 예상하고 있다. 파산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리는 경우의 수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성실하게 일하지 않고 사치와 도박을 일삼아 빚을 졌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과 현실은 전혀 다르다. 그보다는 오히려 선량한 시민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고 관계자들은 말한다. 대출을 끼고 창업했다가 장사가 되지 않아 재산과 생업을 잃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A 씨의 사정이 그렇다. A 씨는 4년 전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한 골프장 인근에 갈빗집을 창업했다. 퇴직금과 주택 담보 대출 등으로 창업자금을 마련했다. 장사는 그럭저럭 잘 됐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장마가 길어지면서 골프장 손님이 준 데다 광우병 파동까지 벌어졌다. 여기에 경기 불황은 버틸 수 있는 마지막 기력마저 빼앗았다. A 씨는 폐업을 결정했고 빚잔치를 했다. 하지만 다 갚지 못했다. 열심히 일했고 성실하게 살았지만 그에게 남은 길은 ‘파산’뿐이었다. 물론 선량하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다. 도박과 사치 때문에 막다른 곳으로 떠밀린 사람들이 그렇다. C 씨의 사례가 전형적이다. 결혼을 약속한 연인이 떠나자 C 씨는 실연의 아픔을 달랜다는 명목으로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다. 단란주점에서 수천만 원을 물 쓰듯 쓰고 해외여행을 연이어 몇 차례나 다녀왔으며 경마에도 손을 댔다. 그러는 1년 사이 그의 옆엔 떠난 애인 대신 5000만 원이란 빚이 남게 됐다. 애써 모은 돈을 모두 탕진한 것은 물론이다. 직장이 있지만 수입이 변변찮아 빚을 갚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지나친 낭비로 인한 채무는 파산법상 면책의 대상도 아니어서 C 씨는 개인회생제도의 문을 두드릴 결심이다. 전문 변호사 마케팅 경쟁 ‘치열’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경우도 빈번하다. 보증이 대표적이다. S 씨는 건실한 기업의 직장인이었다. 풍족하진 않아도 아쉽지 않은 생활을 할 정도는 됐다. 하지만 친구의 빚보증을 서는 바람에 소박한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신세가 됐다. 사업체를 운영하던 친구가 도주해 버린 것이다. 파산 신청자가 불어나면서 법조계에도 새로운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파산을 전문으로 처리하는 변호사와 법무사가 우후죽순 늘고 있는 것이다. 서울 서초동의 법조타운에 가면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법원으로 통하는 3호선 교대역의 출구에는 예외 없이 파산 전문 법률사무소의 광고가 붙어 있다. 경쟁자가 많아지면서 변호사와 법무사들이 ‘마케팅’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용을 몇 회에 걸쳐 분납하게 하거나 성공하지 못한 경우엔 수임료를 100% 돌려준다며 고객을 유혹한다. 최저가 수임료를 내세운 곳도 적지 않다. 실제로 변호사나 법무사들의 수임료는 일정하지 않다. 동일한 케이스라도 수십만 원의 차이가 있다. 가격 파괴 영업을 할 수 있는 이유는 파산이 ‘박리다매’가 가능한 유형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서류심사로 파산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에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것. 이런 점을 악용한 브로커들도 크게 늘었다고 관계자들은 말한다. 변호사의 명의만 빌려 불법 영업을 하는 ‘업자’들도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다. 한 변호사는 “파산 처리 시장은 상업적인 논리가 지배하며 급속도로 혼탁해지고 있다”며 “다행인 것은 법률 서비스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어 소비자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라며 씁쓸해했다. 인터넷에서도 파산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인터넷 포털 다음에만 600여 개의 ‘파산’ 관련 카페가 운영되고 있다. 네이버에도 260여 개의 ‘파산’ 카페가 검색된다. 게시된 글은 수만 개에 이른다. 법률사무소 등 관련 사이트도 100여 곳에 달한다. 법률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소비자들의 선택의 폭이 그만큼 넓어진 셈이다. INTERVIEW 김관기 변호사 ‘파산 신청자 도덕성 시비 무의미’ “한곳에만 채무를 진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카드사, 저축은행, 대출 업체 등 여러 곳에 빚을 지고 있죠. 갈 때까지 가고 나서야 변호사를 찾는 셈입니다.” 대표적인 파산 전문가로 꼽히는 김관기 변호사는 최근 파산신청자가 급증하는 이유를 ‘도덕적 해이’에서 찾는 견해를 한 마디로 일축한다. 극히 일부의 경우로 전체를 호도하고 있다는 것. 대부분 신청자는 그야말로 가진 것이라곤 빚뿐인 사람들이란 얘기다. “실제적인 파산 상태인 사람이 400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그들을 모두 비도덕적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가난한 자의 타락보다는 부자들의 타락을 걱정하는 것이 의미 있지 않겠습니까.” 파산 신청에 비해 개인회생 신청이 적은 것을 도덕 불감증과 연결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김 변호사는 강조한다. 도덕관념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절대적인 절망 상태에 빠진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미국의 경우에도 개인회생 신청자는 파산 신청자의 10%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최근 파산 신청자가 급증하는 것은 외환위기와 카드 대란 당시의 피해자들이 본격적으로 파산 법정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카드사는 살아났지만 신용불량자들은 줄지 않았다는 것. 파산 신청자가 더욱 불어날 것으로 전망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과도한 가계 부채 문제가 부실로 이어진다면 그 여파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란 예상도 덧붙였다. “중산층이 붕괴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파산 신청자의 상당수가 멀쩡한 중산층이었던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가계 부실 문제가 현실화되면 중산층의 몰락은 피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김 변호사가 처리하는 파산 사건은 한달에 30~40건 정도. 그 중 상당수가 다른 법률사무소에서 ‘퇴짜’를 맞은 사람들이다. 결격 사유가 있어서다. 하지만 김 변호사는 그들을 마다하지 않는다. 힘들지만 함께 방법을 찾는 게 자신의 소명이라고 믿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