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 김 춘 수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현대문학>(1955)-
1. 해설
❀ 개관 정리
❍ 성격 : 인식론적(철학적), 관념적, 상징적, 주지적
❍ 표현 : 의미의 점층적 확대(나 → 너 → 우리)
❍ 중요 시어 및 시구 풀이
❋ 이름을 불러줌.( 명명(命名)행위 ) → 대상의 인식, 대상에 대한 의미부여, 관계 형성
❋ 이름 → 누군가가 사물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것을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하고자 해서 붙
이는 것.
❋ 하나의 몸짓 → 단순히 움직이기만 할 뿐, 그 어떤 인격도 의미도 없는 존재. 사물이 본
질적으로 존재하기 이전의, 즉 사물에 이름을 붙이기 전에 즉자적으로 놓여 있는 상태.
❋ 꽃 → 의미있는 존재
❋ 빛깔과 향기 → 그에게 인식되기 전에 내가 지닌 나의 본질
❋ 무엇이 되고 싶다 → 존재론적 소망. 사물은 홀로 존재하므로 고독하다. 이 고독함이 존
재의 허무를 부르고 연대의식을 낳고 초월이나 초인적 상황을 갈망하게 되는데, 시인
은 인간의 고독이 이 같은 연대의식을 낳는다고 말한다. '무엇이 되고 싶다'는 것은 이러한 연
대의식의 확산이며, 존재의 보편적 삶의 질서에 대한 시적 자아의 의지다. 김춘수 시인은 이
후 이 시를 개작하는 과정에서 '의미'를 '눈짓'으로 바꾸게 되는데, 시는 무의미의 순수성을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의미'라는 용어 자체도 배제한 셈이다.
❍ 주제 → 존재의 본질 구현에 대한 소망
❍ 김춘수 시인의 "꽃"에 대해서
❋ 조남현 - '생명의 극치와 절정(존재론적 고뇌와 불안에 떨 게 만드는 지순지미한 세
계)'
❋ 이형기 - '단순한 사물이 아닌 필경 관념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의 본질
❋ 이승훈 - 시·공간적으로 한정되지 않는 개념
⇒ 한국 시사에서 꽃을 제재로 한 시는 적지 않지만, 대부분이 이별의 한을 노래하거나 유미
주의적인 관점에서 심미적인 대상으로 노래한 것이다. 이에 반해 김춘수의 꽃은 '형이상학적
존재론의 시각에서 보다 관념적인 실재의 표상'으로 처리되는 주지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
다.
❀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이름을 불러주기 전(무의미한 존재)
❍ 2연 : 이름을 불러준 후 (의미있는 존재)
❍ 3연 : 의미화(인식)되기를 갈망하는 화자
❍ 4연 :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우리의 소망.
2.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시인이 교사로 재직할 무렵, 밤늦게 교실에 남아 있다가 갑자기 화병에 꽃힌 꽃을 보
고 시의 화두가 생각나서 쓴 것이라고 한다. 꽃의 색깔은 선명하지만, 그 색깔은 금세 지워질
지 모른다는 사실이 그의 존재론적 위기를 충동질했는지 모른다. 이 시는 '꽃'을 소재로 '사
물'과 '이름' 및 '의미' 사이의 관계를 노래한 작품으로, 다분히 철학적인 내용을 깔고 있어서
정서적 공감과 더불어 지적인 이해가 또한 필요한 작품이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사물들이 늘려 있다. 이것들이 이름으로 불리워지기 전에는 정체불명
의 대상에 지나지 않다가, 이름이 불리워짐으로써 이름을 불러준 대상과의 관계를 형성하면
서 구체적인 대상으로 인식이 되어진다. 이름이라는 것은 그 대상을 구체적으로 인식한 결과
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리워진다는 것은 최소한 그에게만큼은 내가 의미있는
대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기에, 시적 화자 역시 자신의 참모습에 어울리는 이름을 불러
줄 그 누군가를 갈망하고 있다. 단순히 작위적이고 관습적인 이름이 아니라, 나의 빛깔과 향
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주기를 원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존재론적 소망이 되는 것이다.
이 시의 의미의 전개 과정은 아주 논리적이다. 이러한 의미 전개의 논리성은 우리 인식의 과
정과 관련되는 것이라 하겠다. 1연에 제시된 그의 '몸짓'은 '명명'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2연에
서 '꽃'으로 발전되고, 여기서 확인된 논리적 흐름을 근거로 하여 3연에서 '나'의 경우로 의미
가 전이된다.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고 말한 후, 4연에서 우리 전부가 잊혀지지 않는 하나
의 의미가 되고 싶다는 보편적 맥락으로 시를 종결짓고 있는 것이다.
3. 작가 소개
1922. 11. 25 경남 충무~ 2004. 11. 29 경기 분당.
시인.
서구 상징주의 시 이론을 받아들여 초기에는 그리움의 서정을 감각적으로 읊다가, 점차 사물
의 본질을 의미보다는 이미지로 나타냈다.
경기중학교를 거쳐 1940년 일본대학 예술과에 입학했다. 1942년 퇴학당했으며 사상이 불순하
다는 혐의로 경찰서에 6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서울로 송치되었다. 1945년 충무에서 유치환·
윤이상·김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만들고, 노동자를 위한 야간중학과 유치원을 운영하면
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1946~48년 통영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조향·김수돈 등과 동인지 〈노만파 魯漫派〉를 펴냈
다. 1952년 대구에서 펴낸 〈시와 시론〉에 참여해 〈시 스타일 시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하
기도 했다.
1956년 유치환·김현승·송욱 등과 시동인지 〈시연구〉를 펴냈다. 해인대학교·부산대학교에
서 강의하다가 1964년 경북대학교 교수로 취임, 1978년까지 재직한 뒤 이듬해 영남대학교로
옮겨 1981년 4월까지 재직했다. 1981년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제11대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
었다. 당시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신군부 정권에 참여하여 정계에 진출한 것에 대해 많은 구설
수에 오르내렸다. 1986년 한국시인협회장, 1991년 한국방송공사 이사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