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희 시인>>
<<정선희 시인>>
* 경남 진주 출생.
* 경남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 2012년「문학과 의식」등단.
* 2013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등단.
* 시집 : 『푸른 빛이 걸어왔다』,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정선희 시인>>
눈동자에 살고 있는 구름/정선희
눈동자를 자주 쳐다보는 사람은 언젠가 떠나게 되어있지
눈동자는 또 다른 눈동자를 부추기지 검은 눈동자 흰 눈동자에 살고 있는 구름
하늘에 있는 구름이 눈동자 속으로 흘러들면
그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지
구름이 풀린 사람을 본 적 있니? 흰구름이
검은 구름을 침범한 걸 본 적 있니?
그는 눈동자에 발목을 잡힌 사람,
그의 눈동자는 지금 여기를 보지 않고
언제나 저 멀리 허공을 보고 있지
오래 전 김시습이 그랬고 임제와 김삿갓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세상에 없는 길을 찾고 있지
구름처럼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고 있지
만약 저들 중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당신도 벌써 구름이 선택한 사람,
만약 스튜어디어스나 등반가를 꿈꾼다면
당신은 벌써 구름에 중독된 사람
사람 마음이 열두 번도 더 바뀌는 것도
구름 때문이야
마음을 붙잡고 싶다면
눈동자를 매달아 두는 게 좋을 거야
쉿! 저기 저 구름
조심해!
울음의 안감/정선희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설익어 목소리가 갈라지는 울음이 있고, 색을 덧발라
속이 안 보이는 울음이 있고, 물기가 가득해서 수채화처
럼 번지는 울음이 있다는 것을
어른이 우는 모습을 본 아이는 속으로 자란다
그날 호주머니의 구멍 난 안감처럼
울음은 움켜쥔 손아귀에서 허무하다는 걸 알아버린다
그 후 내가 만난 모든 울음은
그날 밤에 바느질된 듯 흐느끼며 이어져 있다
실밥을 당기면 주르륵 쏟아질 그날의 목록들
외할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다섯 여자가 모여 앉아
울음 같은 모닥불에 사연 하나씩 쬐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모두에게 다른 사람, 몰랐던 사람이었다
관계란 아름답지 않은 한 줄 문장 같은 것을 붙잡고
있는 것
울음은 죽은 이에게 가지 않고 자신을 적시다 얼룩질
텐데
죽음을 당겨 울음의 안감으로 쓰는 거라 이해했다
그날 가장 서럽게 흐느끼던 안감, 어머니를 보며
나의 습습해진 어딘가를 쓸어본다
어른아이/정선희
그녀는 장난을 좋아했다
몰래 옷 속에 얼음을 집어넣기도 하고
벽 뒤에 숨어 강아지나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동화책을 유난히 좋아하는 그녀
아이 머리맡에서 언제나 동화책을 읽어주었고
아이들이 잠든 뒤에도 멈추지 않고 동화책을 읽었다
그녀 속에 사는 아이가 보챈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아이들과 동요를 부르며 아이스크림을 먹고 그네를 탔다
그녀 속에 있는 아이도 함께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늘 어둠을 인 채 돌아오시는 어머니 대신 두 동생을 돌보던 그녀는
빨리 어른이 되어야 했다
이제 아이가 아닌 그녀의 아이들은 곁에 없다
그녀 속의 돌보지 못한 아이들을 떠나보낼 차례다
너무 빨리 커버린 아이
안개의 취향/정선희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안개 때문이야, 당신은 실망한 듯 말했고
먼 곳이 더 잘 보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말했다
나의 체온이 당신의 지면보다 차가운 경우
물방울이 당신의 심층 어딘가에 맺혀 시야가 흐릿해지는 현상
나와 당신 관계 그런 말은 몰라도 좋아
나를 낯선 곳으로 데려가서
조금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영혼의 매개체,뭐 그런 말도 말고
내가 배롱나무에 붉은 전세를 들거나
이런 말이 이해가 되는 편이지
알고 있지만 모르는 이야기
나는 좀 모호한 것들이 좋아
내가 꽃이나 나비가 되기도 하고
안과 밖이 되기도 하는
무엇보다도
안개 때문에 나는 통유리인 당신을 넘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고
드라마틱한 봄/정선희
길에서 우연히 첫사랑을 만난다거나 집 앞에서 옛 애인이 기다린다거나
만우절에 일어나야만 했던 사건은 잊기로 했네
직업군인이 된 그는 여고 시절 나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가 나를 찾았다 꽃도 없는데 온몸에 꽃이 피었다 그가 내 친구를 좋아했다는 고백 내 친구는 모든 남자들의 로망 노처녀에다 백의의 천사 유리성에 갇힌 공주였다 미모도 몸매도 그녀에게 미치지 않는데, 추억까지 나를 배반하는 것 같았다 드라마틱한 일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웃었다 차라리 그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잃은 건 없지만 마지막까지 잃고 싶지 않은 건 있다
흐드러지게 공중에 꽃잎 날리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어쩌다 봄도 오지 않았을 텐데
간결한 자세/정선희
하늘이 맑아 한바탕 잘 울었다
날카로운 햇살에 옆구리를 찔린 난간이 드러났다
비로소 난간의 방치된 만큼 공손해진 그늘을 본다
가계부에서 해석할 수 없는 슬픔의 구석을 지우고
밤과 낮의 궤도를 돌아온 뒷걸음의 목록을 다시 쓴다
사거리에서 몇 십 년째 목격자의 행방을 묻는 바람은
여전히 흩어지는 플래카드의 윤곽을 붙잡는다
수직으로 움직이는 편향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들의 세상은 오른쪽과 왼쪽을 조율한다
오른쪽을 맞추면 왼쪽이 왼쪽을 맞추면 오른쪽이
문득문득, 운다
내가 새를 바라보는 방법/정선희
생의 한 몸짓이
머릿속 단면에 와 부딪히고 있다
유리로 된 사무실 벽면에
날마다 찾아오는 새의 콩트르주르
작은 나뭇가지에 앉아 유리벽을 쪼고 있다
창문에 엉긴 늦은 햇살을 열고 서랍에 비밀을 기록하고 있다
캄차카를 건너 아무르 지나
유리창에 비친 강물을 건넌다
창문에 반사되는
한 마리 새 나를 닮은 차갑도록 낯선 새
바람은 내가 쳐다볼 때 비로소 불고 구름이 뒤따라간다
빤히 보이는, 닿을 수 없는 사무치는 경계
유리창이라는 뜨거워지는 드라마
그는 끝내 유리창을 이해하지 못하고 떠날 것이다
어쩌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추운 곳에서 추운 곳으로
여전히 그들의 이동 경로가 이해할 순 없지만
어느 날 투명한 햇빛이
천천히 서쪽을 향해 돌아설 때
그의 여행이
죽음과 혼동이 되지 않기를,
개는 훌륭하다/정선희
그 개는 사나워 길들이기 쉽지 않았다
갑의 말은 듣지 않았으며 화가 나면 갑의 물건을 이빨로 물어뜯었다
조련사는 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붉은 눈빛이 개의 눈동자를 관통했다 앉아!
바짝 목줄을 잡아당겼다
버틸수록 목줄이 목을 더 강하게 압박했다
조련사는 개의 눈을 응시했다
개는 조련사의 눈을 응시했다
나는 네가 나의 을이 될 때까지 목줄을 잡고 있을 거야
나는 너를 나의 갑으로 인정하지 않을 거야
이빨을 드러내자 조련사는 목줄을 잡아챘다
목줄이 숨통을 바짝 조이는 순간
이빨은 웃음이 되었다
아직 비겁한 본능이 피 속에 흐르고 있었나 손을 내밀면 앞발을 내주었다
손짓에 따라 한 바퀴 굴러줬다 던져주는 간식을 맛있게 먹어줬다
하나 둘 관중들이 눈물을 흘리며 손뼉을 쳤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는데 방구석에서 반짝이는 게 있었다
잃어버린 귀걸이 한 짝을 보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슬픔 때문에 빛나는 것들이 있었다
채널을 돌렸다 오늘의 날씨는 대충 그렇고 그런 쪽으로 지구를 돌렸다
바리데기, 여전히 바리데기/정선희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한 마리 새가 날아와 앉았다
그녀가 울먹였다 생각해 보니 손 한번 따뜻하게 잡아준 적이 었었어
그래도 너는 할 만큼 했어 옆에 있어 드렸잖니 엄마한테 듣고 싶은 말을
누군가 대신해주었다
엄마 엄마는 누구의 엄마였나요 왜 오빠와 남동생만 잘해주고 늘 나는
기억하지 않았나요 돈은 아들들한테 다 물어다 주고 병든 몸을 이끌고
찾아든 새 그렇게 새 한 마리
나는 늘 엄마의 주변을 맴돌았다 엄마의 포근한 소용돌이에 한 번이라
도 젖고 싶었다 엄마는 어디를 보고 있었나요
엄마는 나를 괜히 낳았다고 했다 실수도 아니고 어쩌다가도 아니고 그
때부터 나는 괜히라는 말이 싫었다 어느 날 괜히 버려질 것 같은 아이 어
느 날이 언제인지 눈치만 늘었다
엄마가 죽기 전에 꼭 물아봐야 한다 왜 나를 주워온 아이처럼 키우셨
나요 엄마가 나를 주웠다면 누군가, 어느 날, 괜히 나를 버린 엄마가 있
을 것이다
나를 버린 엄마와 나를 주워 온 아이처럼 키운 엄마
내 몸은 하나인데 나의 엄마는 세상천지 두 명이었던가요
한바탕 싸우기라도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엄마 일어나 눈을 떠 장난하지 말고 손이 차가웠다 나를 떠밀던 온기
가 어디 갔을까 새처럼 떨고 있는 손을 가만히 잡았다 괜찮아 괜찮아 새
한 마리가 날아갔다
내 심장은 내게서 너무 멀다/정선희
한동안 곶감은 못 먹을 것 같다
얼었다 녹았다가를 반복했다
물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서서히 즐겼다
피싱 사기로 돈을 잃었다 사람을 잃었다 구석을 찾아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아들은
세상에 자리를 잡지 못했다 떨어지고 난 후 또 떨어졌다 아들은 조용히 울었다 병원에
서는 연일 전화가 왔다 조직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몇 번의 쓰나미가 내 몸을 뒤집고 지나갔다
휘청이다가 하늘을 쳐다보다가 세상을 흘기다가, 아예 누워 있기로 했다
구름은 힘껏 활시위를 구부렸다가 내가 살고 있는 구석을 정확히 조준했다
다급한 문자들이 불협화음을 이루며 날아들었다
잘 모르는 세계에 덜미를 잡혔다
말라가던 곶감에서 하얀 분이 돋아났다
내 몸을 관통한 꼬챙이, 견디고 있다
얼룩자주달개비의 기적/정선희
때 아닌 봄추위에 얼어서 누렇게 뜬 얼굴이 되었다
햇볕 따스한 날 밖에 내놓고 살기를 바랐는데
오늘 난데없이 꽃을 피웠다
다른 집 자식들은 대학을 가고 취직을 하는 동안
고2 때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해 자퇴를 한 아이
그 아이는 우울을 전염병처럼 퍼뜨렸다
몇 년을 번데기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탈피를 시작한 아이
세상 밖으로 발을 내밀었다
아직, 죽기 전에 꼭 할 말 있어요
붉은 휘파람을 불 듯이
내 자식이 아프게 웃었다
운전면허증을 따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같이 밥을 먹었다
지금 매화가 목련이 한창인데
나는 오로지 한 송이에 골몰하고 있다
새로 자라난 발톱에 얼룩처럼
눈물이 새겨져 있었다
시들어가던 얼룩자주달개비가 꽃을 피웠다
환한 세상이었다
모르는 사람/정선희
강 건너로 이사를 온 후
모르는 사람들이 이웃이 됐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기장
강 저쪽에 과거를 두고 온
이 낯선 자유가 비로소 낯설어 편했다
누구도 안부를 물어주지 않았고
누구도 오늘의 침울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았고
그래서 아무것도 대답할 일이 없었다
심심하면 강물을 따라 걸었다
소식을 끊으면 기다려 줄 때인 거야
먼 곳에서 돌아올 때까지
아는 사람을 만들지 않으려는 도발을 계속했다
얼굴을 기억하지 않으려 벼랑에 집을 만들었다
표정을 지우면 모르는 사람이 된다
무표정으로 물건을 계산하고 말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강 저쪽에 많은 것을 두고 왔다는 말은
강물에 사람들을 흘려보내는 일과 같았다
캣 맘/정선희
상자 뚜껑을 열고 먹이 대신
자신의 얼굴을 넣어준다
한 때 버려졌던 새끼고양이
엄마 여깄어 엄마 여깄어
고양이가 울 때마다 그녀는 울음을 멈추었다
얼굴을 확인하고 고양이는 빛 속으로 숨었다
얘 때문에 한숨도 못 잤어요
얘를 두고 밖에 나갈 수가 없어요
어떻게 애기를 버려요?
다시는 버림받고 싶지 않아요
엄마 어디 있어 엄마 어디 있어
한 때 버려졌던 아이
버림받은 기억을 버리지 못하는 그녀
버려지지 않는 물건들이 집에 쌓이고 있다
엄마는 어디서 나를 버렸을까
엄마는 어디쯤에서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고양이 울음소리가 낡은 벽지를 죽 잡아당긴다
벽지에서 무늬 하나가 툭 떨어졌다
발톱을 감추고 그녀는
잠시만, 갈라진 틈으로 들어갔다
달항아리/정선희
달항아리 옆에서 나도 부풀어 올랐다
비어 있어야
완성이 되는 그릇
매끈하지 않아서
거칠거칠해서 마음 붙일 데가 있다
보름달 속에 아직 부서지지 않은 내가 있었다
금이 간 부분이 감쪽같이 붙어 있다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들숨으로 공기를 가득 채운
둥근 것은 불안하지 않아
보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상처라고 생각하면 상처가 아니다
상처의 목록을 불러줄 때마다 빙하가 녹는다
구석에 가만히 있는 것으로
구석을 완성하는 둥근
저 하염없음
나의 하루 종일을 하염없이 만들고 있다
하염없이, 란 말이
딱 어울리는 달항아리
그는 충분했다
하고 싶은 게 많은 내 곁에
그렇게 있어주는 것만으로 넉넉했다
마지막 숙제/정선희
나는 숙제를 다 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만 없어지면 괜찮을 거야
아버지는 밑 빠진 독이었다
물 대신 돈이 새어 나갔다
차라리 독을 깨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 구멍을 메꾸느라 어머니는 머리털이 다 빠지고
장남의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6개월 말기암 판정을 받은 비스듬한 항아리
나는 더 빨리 깨지기를 바랐고
그 항아리에는 아무것도 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며
처음으로 아버지께 진심을 전했다
그래도 가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아버지가 가신 후
어머니는 안녕하지 않았다
그날부터 아프기 시작했고 이유도 없이 말라갔다
찰거머리 같은 인연
어둑한 방에 불을 켰다 다시 숙제를 해야 할 것 같다
엔젤트럼펫/정선희
그 일이 있고 나서 땅바닥만 보고 걸었다
들리지 않는 곳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보이지 않는 유령을 클릭 클릭
단 한 번의 손짓으로
꿈의 잔액이 사라졌다
이삿짐을 부릴 집이 사라졌다
빛이 드는 곳에 놓아 둘 식탁이 사라졌다
고개를 떨구고 핀 엔젤트럼펫
지렁이들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밖으로 나오면 죽는데 왜 자꾸 나오는 걸까
고무줄처럼 늘어진 무덤
내 앞에 죽어 간 내 몸에서 나온 지렁이들
언제까지 피해 다닐 수 있을까
그 일이 있고 나서 모든 것을 아날로그로 바꾸었다
신용카드를 없애고 휴대폰 앱을 지우고
은행의 문턱을 꾹꾹 밟는 방향으로 역행했다
보이지 않는 것들
들리지 않는 것들이 무서웠다
나는 조금 느리게 사는 방향으로 기울어 갔다
개망초 안부/정선희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철쭉 화단에 삐죽 고개 내밀고 있다
풀밭에 있어도 뽑혀 나가기 십상인데
철쭉도 웃자란 것들은 잘려 나가는 판국에
겁도 없이 피어 있다
무식하면 용감하단 말도 있고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고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꽃이 질 때까지만이라도 제발,
나도 한때 저리 목을 치켜세우다가
싹둑 잘리고 말았다
붉어지고 싶어 붉은 옷을 입고
큰 소리로 웃고 싶어 웃다가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피박만 면하는 것도 괜찮은 삶이란 것을
날갯죽지는 함부로 구겨서 갈비뼈 속에 묻기로 했다
한 번 꺾여본 사람은 안다
바람이 불면 들썩이는 것을 자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얼마나 여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루아침이 다르게
꽃대가 키를 키우고 있다
너는 이미 풀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공터 정원사/정선희
아파트로 이사 온 이후
환한 곳에 숨어 있는 공터 하나를 만났다
벌거벗은 지렁이에게 나뭇잎 한 장 덮어주는 기분으로
자주 공터를 찾았다
공터가 있어 아파트에 정을 붙일 수 있었다
환한 황무지 같은 곳
돌멩이들이 아무렇게나 뒹굴어도 좋은 곳
지난 홍수에 떠밀려온 나무가 제멋대로 서 있는 곳
화려한 곳에 원시적인 풍경이 숨어 있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공터의 주민이 되었다
날마다 공터에 앉아 있을 때가 많았다
마음 속 풍경이 밖으로 삐져나온 곳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나를 위로한다
공터는 아파트 가격이 오를 때마다
단풍나무 한 그루를 프리미엄으로 받았다
스스로 보잘 것 없음으로 채워가는 환한
민들레 개망초 달맞이꽃 아카시아 자귀나무 오동나무
쳐다보는 일만으로도 나는 공터를 가꾸는 정원사가 되었다
부재/정선희
캐시미어 목티를 입었다
부드러움이 서서히 목을
내 목을 쥐고 있는 손아귀가 따뜻했다는 거
비밀스런 손가락이 가슴을
확
움켜잡았을 때
절대로 비명을 지르지 말아야 했다는 거
어깨까지 위험신호가 왔을 때
그때 숨을 쉴 수 없을 때
담배 가게 불빛이 보이는 데까지
달렸다는 거
캐시미어 목티를 입을 때마다
가시에 찔린 상처를 간직했다는 거
겨울만 되면 목이 따끔거렸다
부드러워지거나 혹은 추워질수록
나는 털갈이를 했다 몸살을 앓았다
자작나무 환월/정선희
청각적 이미지의 숲이 있다
타닥타닥 불타오르는 소리들
발바닥이 뜨거워
꿈으로 뛰어드는 몸이 있다
사소한 입술마다 어긋난 잎이 돋아났다
오늘은 컵을 깨뜨리고
어제는 가방을 엎듯 그만두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림자의 반경을 빠져나가는 새
나무는 잃어버린 립스틱을 사고 또 잃어버린 틈마다
타다 남은 불씨들, 잎이 일제히 날아오른다
나뭇가지가 가늘게 흐느끼기 시작한다
유성처럼 빠르게 빠져나가는 숲
눈동자에서 새가 불타고 있다
사선으로 하강하는 달이 발바닥에 닿는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에 어제와 오늘이
타나 남은 검은 얼굴이 흰 밤으로 기울었다
인당/정선희
대나무 꽂힌 집으로 가면 인당의 밝기를 보고
그 사람의 운명을
혹은 꽃이 떨어지는 방향을
알아맞힌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나서부터
그곳을
유심히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곳의
천(川)은 근심도 걱정도 의무감처럼 지니고 있었다
걱정을 습관처럼 입에 달고 살았던 어머니
걱정이 없으면 남의 걱정을 사서 하던 어머니
걱정을 안주 삼아 장단을 치고
술 섞인 이야기에 울던 어머니
그 물길은 어머니의 걱정을 지나 내게 왔다
아침마다 자고 일어난 자리가 축축하다
인당수는 서쪽 바다를 지나
양미간 사이로 흘러들었다
낮잠에 잠깐 걱정을 내려놓은 어머니
이마에 천(川) 자 무늬 아름답게도 새기셨다
증명사진/정선희
그녀는 처음부터 초췌한 모습이 아니었다
요일마다 낮과 밤을 바꾸어 살면서
흰머리가 꽃처럼 자라고
눈 밑으로 달이 지나가고
오차 없이 턱이 뾰족해졌다
어쩌자고 저리 맨얼굴로 나왔는가?
불편한 마음으로 빠르게 채널을 돌렸다
텔레비전에는 잘 정돈된 사람만 나와야 했다
선입관에 맞게
역병이 번질수록
시간은 멈추었고
우리는 헤어졌고
그녀는 수학적이었으나 어떤 비율로도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진실이 낯선 곳에서
그녀의 모습은 진실의 증명사진이 되었다
슬픈 노래와 밥통/정선희
어떤 음악을 들으면 소화가 안 된다고 하면
너는 뭐라고 할까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슬픈 노래를 들으면
심장 박동이 느려지고
위가 딱딱해지지
노래가 횡경막에 걸려
음식물이 내려가는 것을 막고 있어
그렇게 말하면 너는 웃겠지
너는 모르지
슬픔에만 반응하는 내장기관이 있다는 것을,
웃음은 내가 살기 위한 방편
얼굴 근육이 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한의학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었지
위 경락은 눈 밑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나면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은 것,
슬픔이 가는 길과
음식물이 통과하는 길은
다르지 않지
장례식장에 가서
밥을 못 먹는 것도
슬픈 영화를 보고 나서
밥맛이 뚝 떨어지는 것도,
괜히 그러는 게 아냐
음악은 물수제비처럼
슬픔을 건드리고 지나가지
도 레 미 파 솔
물수제비가 지나간 자리는
금방 사라지겠지만
물속에 가라앉은 돌멩이는 횡경막 어디에서
또 다른 슬픔을 불러들이곤 하지
풍선을 부는 남자/정선희
풍선을 불면
좀 가벼워질까
만화 속 말주머니처럼
풍선을 달고 싶어
머릿속 안테나처럼
이곳이 아닌
저곳으로 데려가는,
풍선 하나 달면
자동차는 신혼여행을 떠나고
케잌은 생일 파티를 열고
동화 속 공주가 글자 밖으로 나오기도 해
우울해서 풍선을 부는 여자도 있고
호스피스 병동 환자들에게
풍선을 불어주는 요양보호사도 있어
트럼펫을 불 듯 날마다
풍선을 부는 남자
풍선을 불면 둥실 떠오를 수도 있고
한방에 훅 갈 수도 있어
풍선 속에서 웃음을 참고
풍선을 불다가 눈물을 흘리는 남자
아슬아슬함이 있는 풍선
뻥!이 있는 풍선
풍선을 부는 남자
동그랗게 묻고 있어
어떤 뻥!을 원해?
풍선을 불면
이스트처럼 부풀어오르는
뱃속에 풍선을 집어넣는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