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월남에 파병된 한국 남아는 미국 군인과 같은 기준에서 같은 대우(Same Base, Same Level)를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지혜롭게, 그리고 용맹스럽게 싸웠다. 전투에 임하는 헌신성, 개개인의 자질, 전술 등 모든 면에서 우수했다. 동양인의 작은 키, 잘 먹지 못해서 빈약한 체구를 가지고도 미국 군인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더 훌륭한 전과를 올린 것이다. 우리나라를 도와주고 지배하는 강대국인 미국인, 그래서 기가 죽고 콤플렉스까지 느꼈던 미국인과 같은 기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을 했고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미국이나 베트남 군인들이 한국인을 새롭게 보게 되었음은 물론 한국인 스스로가 스스로의 자질에 새롭게 눈뜨게 되었다.
이러한 놀라운 경험은 한국 남아들의 가슴에 깊은 각인을 남겼다.「한국인이란 과연 어떤 민족인가」,「다른 나라 사람과 비교하여 한국인은 어떤 수준인가」라는 근본적인 자문(自問) 에, 한국인은 우수하며 다른 나라에 비교하여 결코 뒤떨어질 게 없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고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으며 자주성을 얻게 되었다. 즉 「한국인의 새로운 발견」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실로 우리나라 천년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국의 침략과 지배로부터 시작하여 일본의 제국주의적 지배, 미국의 원조와 군정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떨쳐 버릴 수 없었던 오랜 피지배의식, 열등의식, 속국의식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주성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나라의 독립에 이어 정신면이나 민족 의식면에서 진정한 자주독립을 이루는 계기였다. 이런 의미에서 월남파병은 우리나라 역사상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는 대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부터 이러한 관점에서 월남 파병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우리 군인들이 직접 참여한 전투 이야기가 소개될 것이나 그것은 전투 그 자체를 이야기하려고 함이 아니라, 그 속에 나타난 한국인의 자질에 관해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2. 우리는 산업혁명 과정에서 「과연 한국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자주 부딪치게 됐다. 그럴 때마다 이런 의문을 풀어가며 한발 한발씩 전진해 갔다. 이 장에서는 「월남전」,「수출전선」, 「기계공업 육성」의 세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인력자원의 특질이나 노동가치관은 국민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국민성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으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국민의 자주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 그 요점을 정리하면,
(1) 고려 및 조선시대 : 우리나라의 국왕은 즉위를 하고도 중국황제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했으니, 우리나라에는 자치권만 있었지 외교나 군사 면에서의 자주권은 없었다. 더구나 유교를 숭상하여 사상과 문화, 제도 등 모든 면에서 중국을 본받았을 뿐 아니라 스스로 유교 문화의 우등생이 되고자 노력했으니 자주성이 있을 리 없었다. 오히려 우리나라 지식층은 중국 문자를 사용했고, 중국 문장을 잘 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고「훈민정음」을 언문이라고 천대하며, 이를 사용하는 서민층을 멸시까지 했다. 완전히 사대주의 전성시대였으니 자주성을 상실한 시대였다.
(2) 일제시대 : 자주성에 관한 한 암흑시대였다. 일본 정부는 우리 국민에게 일본말을 쓰도록 강요했고, 이름조차도 일본식으로 바꾸게 했다. 이런 식으로 지배당하다 보니 오히려 자주성 회복에 대한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3) 해방후∼1965년 : 우리나라를 해방시켜준 것은 미국이었다. 그래서 해방 후는 미국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美 군정시대가 1948년 8월에 끝나고, 우리나라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미국의 원조로 살아가야 했으니 미국은 고마운 나라로 인식되었다. 더욱이 6¡¤25 한국 전쟁 때는 우리나라를 지켜준 나라이고, 전쟁복구도 미국의 원조로 이루어졌으니 미국을 상전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도 우리나라는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원조를 필요로 했다. 자연히 우리나라 사람은 미국 말, 미국의 문화·문명, 미국의 각종제도를 흡수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는 자주성이 생겨날 리가 없었고, 오히려 전통이나 풍습도 파괴되어 나가고, 가치관마저 미국화되어 나갔다.
이상과 같은 역사적 흐름 속에서 우리나라 사람의 마음 한 구석에는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 부자나라, 문명국, 원조를 해주는 나라 등으로 인식되었다. 무의식중에 이들 국민은 우리나라보다 우월한 사람으로 비치게 되었을 것이다. 해방 후의 외국인은 미국 사람이었다. 미국 사람은 키도 크고, 몸집도 크고, 백인종인지라 신체적 면에서도 「콤플렉스」를 더 느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인지 당시 미국말을 못하는 우리나라 사람은 미국 사람 앞에서는 완전히 한풀 꺾이게 되었다.
3. 1) 주월 미 사령관인 웨스트모랜드 장군이 극찬한 「독고」전투.
월남 캄보디아 국경을 수비 중인 맹호부대 기갑연대 3대대 9중대는 1966년 8월 9일 중장비를 갖춘 월맹 정규군 1개 대대와 접전했다. 이 날의 전투는 월맹 정규군이 호지명 「루트」(캄보디아 국경)에서 불과 4km 떨어진 9중대 잠복초소에 먼저 공격을 가해 옴으로써 시작되었다. 박격포, 대전차포, 로켓포 등으로 중무장한 월맹 정규군 1개 대대는 이날 밤 11시 40분에 아군 잠복초소 전방에 침투하여 200여 발의 교란사격을 퍼부었다. 9중대는 즉시 대응하지 않고 유인전술을 씀으로서 적을 진지 전방 500m 지점까지 끌어들인 뒤 일제 반격을 가했다. 불을 뿜는 전투가 4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끈질긴 적의 저항을 물리치며 9중대는 맹렬한 포화를 집중, 새벽 3시까지 공격을 계속하자 적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이 올린 전과는 적 확인사살 150명, 포로 6명, 부상 다수, 박격포 6문, 대전차포 4문, 로켓포 4문, 유탄발사기 16문, 경기관총 52문의 노획이었다. 아군의 피해는 중대장 姜 대위와 사병 6명이 전사했으며, 23명의 부상자를 냈을 뿐이었다.
이 「독고」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장병들이 용감히 싸운 것은 물론이고 「중대전술기지 개념」이라는 특수전법을 썼기 때문이다. 중대전술기지 개념에 대해서 미군과 베트남군은 처음에는 의아심을 가지고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한국군이 이룩한 전투결과를 보고 그들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독고」전투에서 올린 맹호부대의 놀라운 전과, 「짜빈동」전투에서 최소한의 희생으로 수십배의 적을 물리친 청룡부대의 모범적 전투는 외국의 군사지도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2) 미국 하원의 증언록에 실려있는 하원 국방위원장의 증언.
한국군의 전술과 미군 전술과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한국군은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으면 즉각 2개 내지 그 이상의 방향에서 공격을 가하여 베트콩이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미군은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으면 뒤로 물러나 포병지원을 요청하거나 공중폭격을 요청한다. 그 다음에 공격을 하게 되니 적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 후 맹호부대는 480평방 마일(1,200km2)까지 전술책임지역을 확장하였고(한국군에 의해) 퀴논으로부터 안케까지의 19번 도로가 확보되었으며, 베트남 제2군단 사령부가 있는 「플레이쿠」까지 안전한 통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한국군이 도착한 후 베트콩의 테러를 피하여 정부 피난민수용소로 갔던 1만 4천여 명의 베트남인들이 마을로 돌아왔다. 이 지역의 추산 인구는 40만 명으로 그중 30만 명은 안전한 곳에 살고 있고 10만 명은 전투지역에 살고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인은 군인으로서는 모든 면에서 미군인과 동등한 입장이 됐으며, 인간으로서는 전쟁의 고통 속에 있는 월남 사람을 도와주는 입장이 된 것이다
4. 우리나라는 월남전 참전의 대가로 경제적 이익을 도모코자 했다.
정부는 초기에는 물품수출로 외화가득을 하려고 했으나 여의치가 않았다. 월남에 대한 수출은 1965년에 1,470만 달러에서 66년에는 1,380만 달러로 오히려 줄어드는 결과까지 나타났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월남은 산업 기반이 미약한 데다 전쟁중이라 외화가 절대 부족했고, 부득이 미국의 원조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의 원조자금이라는 것은 Buy American 정책에 의해 미국 외의 나라로부터는 물품을 구매할 수가 없었다. 둘째, 미군에서는 작전상 긴급을 요하는 물건은 현지에서 공개입찰에 붙였는데 대개 일본에 낙찰되기 일쑤였다. 우리나라는 미군이나 월남 정부와는 긴밀한 협조관계를 맺고 있어 유리한 조건이었으나 실력이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었다.
미군이 월남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자, 일본 상사들은 대거 월남에 진출했다. 이들은 미·월 양측에 많은 실적을 올려 여러 분야에서 상당한 기반을 닦고 있었다. 1965년부터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견되자 일본 상사들은 재빠르게 한국군에게 공급될 각종 군수물자에 눈독을 들이고 주월 미군과 막후교섭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국군이 신체 규격의 차이로 미군 군복을 그대로 입을 수 없다는 점과 한국인의 기호에 맞는 김치 등 한국 고유의 음식물이 필요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것을 미군사령부에 납품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 우리측은 한국군용 군수물자는 한국에서 조달하기를 강력히 요구했으나, 미군측은 한국 산업의 후진성과 국제입찰에 대한 실적 등을 이유로 초창기에는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데 많이 주저하였다. 그러나 장병들이 "일본제 군복을 입고는 전투를 못하겠다"고 강하게 거부하자 미군 사령부의 태도가 바뀌어 결국에는 한국군용 군수물자는 한국산을 택하기로 결정이 났다. 그러나 실제 문제에 있어서는 애로가 많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공업수준은 국제규격에 맞게 생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보자.
초기에 납품된 피복은 땀에 젖으면 색이 바래고 질도 떨어졌다. 그러나 장병들은 국산품을 입는다는 자부심과 애국심으로 아무런 불만도 없이 즐겨 입고 용감하게 싸웠다. 그 후 품질문제는 단시일내 해소되었고, 이 때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다른 나라에도 많은 양을 수출할 수 있게 됐다.
한국군의 전투 식량은 베트남군으로부터 공급되는 쌀과 미군용 야전식량인 C-레이션에 의존했다. 한국군은 초기 몇 달 동안은 C-레이션에 대해서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별식을 먹는 기분으로 적응해 나갔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한국 음식, 특히 김치를 먹고 싶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하였다.
한국군 사령부에서는 본국에 "한국인 기호에 맞는 야전식량 개발이 시급하다"는 건의를 보내는 동시에 주월 미군 사령부에 요청한 결과 1967년부터 한국군에 알맞는 식량인 K-레이션을 한국에서 조달·공급하도록 결정을 보았다. 한국 정부는 K-레이션을 당시 국내 통조림업계에서 손꼽히는 한국종합식품상사에 의뢰, 개발케 하였으나 처음에는 미국의 위생검사에 합격되는 제품을 만들 수가 없었다. 결국은 고생 끝에 품질개선을 해서 파월 국군이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후 파월 기술자도 애용하게 됐다. 또한 정글지대에서 전투할 때에 필요한 정글화도 1969년부터 한국에서 군납하게 되었다. 이들 군수품 구매에 소요되는 자금은 전액 미국의 군사비에서 지원 받게 되어 있었는데, 한국군의 야전식량(K-레이션)과 피복류를 한국에서 조달·공급하게 됨으로써 연간 약 5,500만 달러 정도의 외화를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순전히 파월 장병이 입고 먹는 것이니 월남파병의 대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단한 금액은 되지 못했다
정부는 월남에 대한 물품 수출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그 돌파구로 인력 수출을 추진하기로 했다.
인력 진출은 1965년부터 시작되었다. 65년 3월, 정부는 내각조정실의 김좌겸(金佐謙) 차장과 엄익호(嚴翼虎) 상공부 공업제2국장, 강중경(姜中卿) 국방부 과장 등 3명으로 구성된 조사단을 사이공에 파견했다. 이어 4월에는 김차장을 사이공에 상주하는 대월경제협조단 단장으로 임명, 5월에 파견했다. 이 시점에서도 아직까지 우리측의 방침은 일반교역의 확대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65년 6월 수출확대회의에서 상공부는 65년도 대월수출목표를 1,400만달러로 책정하고 무역진흥공사 내에 월남수출진흥센터를 설치, 업계의 편의를 제공토록 결정했다.
그러나 사이공 현지에서 구체적인 진출방안을 연구하던 주월 경제협조단은 7월 들어 대월경제협력의 방향을 교역 위주에서 기술자 파견을 위주로 할 것을 건의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민간기술자 및 기술을 가진 제대병 3∼5만명으로 구성된 용역단을 조직해서 미군 지상장비의 정비 수리, 군수물자의 수송 및 보관 등 미군의 후방지원업무를 담당하는 것이 외화획득을 더 많이 할 수 있다는 제안이었던 것이다. 소위 인력수출이다.
>> 한월 경제각료회담
이처럼 경제협력방향을 암중모색하고 있을 때 1965년 11월 8일, 구 엔 카오 키 월남 수상 일행이 대월군수증강을 요청하기 위하여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당시 장기영부총리는 키 수상을 수행했던 트롱 타이 톤 경제재무 장관과 11월 10일, 제1차 한월 경제협력을 위한 각료회담을 가졌다.
이 회의가 그후 연례적인 한월 경제각료회의의 시작이 된 것이다. 회의가 끝난 다음 대월진출을 밑받침하는 다음과 같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 상호경제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매년 1회 각료급회의를 개최한다. 원조자금에 의해 재정지원을 받는 계획사업에 있어서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언제나 한국기술자를 이용한다.
(2) 월남후방지역 건설공사에 한국측을 적극 참여시킨다.
(3) 주월 한국은행지점을 설치한다.
(4) 월남의 현행법 범위내에서 한국인의 외환송금에 대한 편의를 제공한다.
이상이 그 주된 골자였다. 제2차 회담은 두달 후인 1966년 1월, 사이공에서 열리게 됐다. 이 2차회담에 앞서 현지사정을 파악키 위해 외무부통상국의 전상진(全祥振) 국장을 단장으로 하는 실무교섭단 12명이 예비접촉을 가졌다. 당시 이 예비실무조사단에 참가했던 양윤세(梁潤世)씨는 다음과 같이 그때를 회상했다.
"그때 회의 분위기는 우리가 파병하고 있던 만큼 우리측 주장이 거의 다 받아들여질 정도였다. 월남측은 피동적이었으므로 우리 요구가 먹혀들어가기 쉬웠다. 그러나 우리측에서도 경제협력의 방향이 확고히 설정되지는 못한 상태였다."
사이공주재 경제협조단은 물품수출과 인력수출 양쪽에 중점을 두되 한국동란때의 경험에 비추어 건설, 하역, 수송 등 각종 용역사업을 맡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막상 용역수출이 필요하다는 판단은 섰지만 우선 우리측 업자의 부담능력이 문제였고, 또 용역에 응하기엔 무엇보다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었다.
1966년 1월 11일부터 3일간 사이공에서 열린 제2차 경제각료회의에서 수석대표 장기영 부총리, 교체대표 원용석(元容奭) 무임소장관, 대표 김정렴(金正濂) 상공차관 등이 참석했는데 카운터파트는 1차회담 때의 낯익은 트롱 타이 톤 경제상이었다.
이 회의에선 1차회의 때의 합의사항을 확인하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토의했는데 합의내용을 요약하면,
(1) 3월 1일까지 한국은행 사이공지점을 개발한다.
(2) 월남은 외국인기술자 채용에 있어 한국인을 우선 채용한다.
(3) 월남의 후방 건설공사에 한월합동회사를 추진한다.
(4) 월남 항공협정의 체결을 협의한다 등이었다.
이 2차회의를 계기로 한국의 대월진출은 붐을 이루게 되었다. 이른바 '월남 붐'이다.
처음에는 미국계 사업체에 종사하면서 군사기지 건설, 기존 시설의 유지, 장비의 정비 및 수리분야 등에 종사했는데 66년부터는 월남에 진출한 우리나라 업체에서도 근무를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업체가 첫 번째로 진출한 곳은 한국군이 관할하는 퀴논항이었다. 1966년 한진상사, 대한통운, 경남기업 등이 하역 및 운송계약을 체결했다. 건설군납에 있어서는 66년에 계약된 현대건설의 준설공사, 대림산업의 항만공사를 선두로 삼환기업, 부흥건설, 공영건업 등 건설업체가 진출했다. 주로 축항, 도로공사, 병원, 주택, 학교 및 군 시설 공사를 시공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첫 번째의 해외진출 건설공사였다. 그러나 이들 파월 인력은 수송, 토목, 건축 등 노동집약적인 단순기능공일 수밖에 없었다.
파월 노무자는 열심히 일했다. 파월 노무자는 젊은 한국 청년들로서 모두 제대군인이었다. 그래서 민간회사에서도 군대식 규율 속에서 생활했고, 상급자의 명령에 따랐으며,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책임완수에 철저했다. 아침 일터로 나갈 때도 지휘관의 호령에 따라 씩씩하게 대열을 지어 진군해 갔다. 월남 땅은 숨이 막힐 듯한 열대지방이었다. 그러나 한국 사람은 이겨낼 수 있었다. 한국 사람은 열대지방에서도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아주 중요한 소질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한국의 남성 인력은 다른 나라 사람보다 총명하고 열심히 일했으며 생산성도 높았다.
그래서 외국 회사들도 한국인 기술자를 높이 평가했고 더 많이 고용하기를 원했다. 이렇게 돼서 베트남의 인력진출은 1965년말에 105명에 불과했던 것이 1966년에는 7,899명에 달할 정도로 급증했다. 한국계 회사에는 1,900명이 종사하고 있는 반면, 미국계 회사에는 75%에 해당하는 6천 명이 근무하고 있다. 75%가 미국계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남성 인력의 우수성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물론 새한현상이라든가 서광사업과 같이 사진현상소나 사진관도 있었고, 세탁업, 군복 수선, 군장품 제조판매 등 여러 분야가 있었다. 연예인의 진출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고도의 공업기술을 요하는 인력은 아니었다. 전쟁터에서의 일감이란 이런 분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들 파월 인력은 최고조에 달할 때에는 15,571명(68년)까지 달했으며, 진출업체의 수도 최고 79개(69년)에 달했다. 외화획득액은 69년 1억 8,730만 달러에 달해 60년대 고도성장을 밑받침하는 데 가장 큰 원동력이 됐다.
>> 월남 진출에 따른 어려움
그러나 월남진출이 그렇게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갖가지 어려움도 많았다.
우선 월남진출을 다룰 관계법령이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해외에 경제협력을 위해 진출한다는 일이 없었으므로, 관계규정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새로이 해외투자법을 제정한다는 방안도 고려됐으나 시간이 촉박해서 만들 여유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찾아낸 것이 겨우 외환관리법 시행령 중 "용역계약에 관한 조항"이었고 이 규정에 의해 행정업무를 처리하게 되었다.
이같은 변칙운용은 가끔 말썽을 빚기도 했다. 또 그때 파월기술자들은 평생 처음 해외에 나가본다는 노무자출신들이 많았으므로 여권 발급에도 애로가 많았다. 그러나 시간을 다투는지라, 빨리 출국이 되어야 계약체결과 이행이 가능했으므로, 당시 보통 2개월씩 걸리는 신원조회를 전통(電話通信)으로 보름만에 처리했다. 여권도 월남용 간이 여권을 발급해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골치거리는, 대월진출을 희망하는 업체의 거의 전부가 영세기업들이라는 점이었다. 재정적으로 튼튼치 못해 은행에서 융자를 해주려 해도 해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담보 없이는 융자를 못한다는 딱딱한 물적 담보 위주의 국내은행제도로는 도저히 월남진출을 도와줄 길이 없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담보물이 없이도, 미군과의 계약고를 담보로 하고 3개월 간의 실적을 감안한 후 융자해 주도록 하는 편법이 실시됐다.
새한통상은 주월 미군 PX와 사진현상 계약을 체결했다. 50만달러의 사진현상용 기자재를 조달해야만 했는데 도저히 은행융자를 얻을 수가 없었다. 고민끝에 기획원에 직소한 결과 편법으로 계약고를 담보로 은행 지불보증을 얻도록 해주었다.
>>월남 붐을 타고 탄생한 재벌
이같은 적극적인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1966년 3월 월남진출 제 1호로 한진(韓進)상사가 '퀴논' 소재 월남미군병참부와 연간 800만달러에 달하는 당시로서는 거액의 항만하역 및 수송 용역계약을 맺게 되었다. 기술자 3백명이 현지로 떠났다.
그 후 대한통운(大韓通運), 경남기업(京南企業), 공영건업(共榮建業), 동진기업(東進企業), 한양건설(漢陽建設), 대림건설(大林建設), 삼환기업(三換企業), 현대건설(現代建設) 등 국내업자들이 속속 진출하게 되었다.
굵직한 건설 혹은 용역 이외에도 세탁, 군복수리 및 자수, 사진현상, 그리고 군위문을 위한 연예단 진출까지 진출업종도 매우 다채로웠다. 이러한 월남붐은 그 후 국내재계의 판도마저 바꾸어 놓아 일찍 월남에 진출한 업체는 제일 먼저 현지에 나갔다는 단하나의 이유만으로 새로운 재벌로 부상했다. 월남전으로 재벌이 탄생하게 되는 대목이다. 월남붐을 타고 이룩된 한진의 신화는 만일 다른 A라는 사람이 먼저 갔다면 월남의 신화는 한진의 신화가 아니고 A라는 사람의 신화가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월남붐은 우리나라 경제사상 최초의 대규모 해외진출 이었다. 60년대의 고도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후 약 3∼4년 뒤에 그보다 더 규모가 큰 중동진출을 위한 사전경험을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아주 크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능력이 모자랐던 시대이다. 좀 특수한 물건을 팔아야 했는데 일반상품은 1966년 4월에 단행된 BA정책(Buy American Policy : 미국상품 우선 구입정책)과 SA정책(Ship American Policy : 미 國籍船 우선 사용정책)에 묶여 우리나라 상품수출은 별 재미를 못본 것이다. 6만이라는 군인을 파견했는데도 팔 물건이 없었던 것이다. 다만 우리나라 기술자가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 그것도 적도 밑, 폭염 속에서 흘린 땀값, 즉 인건비만 챙긴 격이 되었다.
(註: 당시 상공부에서는 수출통계를 작성할 때는 "입금베이스"라고 해서 입금한 것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한국은행의 결재기준과는 차이가 난다. 한국은행 통계에 의하면 연도별 월남에 대한 무역 외 특수(特需) 수입은 66년에 6,049만 달러, 67년 1억 3,497만 달러, 68년 1억 6,556만 달러, 69년 1억 5,886만 달러, 70년에는 1억 5,185만 달러에 달해 66년부터 70년까지 5년간 6억 5천만 달러를 상회했다. 68년이 최고 액수인데, 68년의 월남 특수는 우리나라 총수출의 36%에 달했다. 우리나라는 70년에 대망의 10억 달러를 수출했는데 월남특수가 큰 몫을 했다).<자료:ceoi.org>
2. 월남이라는 무대에 등장한 한국 사람들은 모두가 남자였다.
연령층으로는 20대가 주가 된다. 현역 군인이 아니면 군을 갓 제대한 기술자들이었다. 모두 군의 경험을 갖고 있는 젊은 한국 청년이었다는 뜻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농촌 인구가 많을 때이니 자연히 농촌 출신자가 주류가 되었고, 학력은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한 정도였다. 거의 전부가 외국에는 가본 적도 없었고 자기 자신을 외국인과 비교해서 생각해 본 경험도 없었다. 모두 「우물 안 개구리」나 마찬가지였다. 연인원으로 쳐서 30~40만 명의 한국 청년이 한꺼번에 외국에 가게 된 것이다. 이들은 외국에서 몸소 경험을 하고 미국인, 월남인들과 비교하고 각자 나름대로 느끼고 귀국한 후 자기 소감을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이들 청년들은 전국 각처에서 골고루 차출되어 월남 경험을 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 행해진 전국 규모의 대규모 해외연수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사람의 가치관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은 당연했다. 우리나라 사람은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외국과의 교류를 시작한 것이다.「한국인의 국제화」의 출발점이다.
이들 파월 장병 중에는 월남 현지에서 제대하고 월남에 남아서 외국 기업이나 한국 기업에 취직한 사람도 많이 생겨났다. 월남에 갔던 일부 사람은 외국말을 배워가며 장사를 시작했는데, 해외진출의 꿈을 갖게 된 사람도 생겨났다. 소위 인터내셔널 세일즈맨의 탄생이다. 이들은 동남아로 중동으로 아프리카로 뻗어나갔다. 연예인도 진출했는데, 노래나 춤에도 소질이 있어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인의 여러 가지 소질이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회사들도 한국 인력을 활용하면 해외에서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월남에 진출했던 건설회사들은 동남아로 활동무대를 넓혔으며, 수년 후 제1차 석유위기가 발생하자 중동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월남 파병이야말로 「한국인의 재발견」이 이루어진 결정적인 계기였다. 한국인은 비로소 한국인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반만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한국인은 다른 나라 사람보다 우수하다는 자부심과 자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해외에서 다른 나라 사람과 경쟁하는 데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이처럼 우리나라 국민이 오랜 열등의식, 피지배의식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자질에 새롭게 눈뜨고 자부심을 갖게 된 것이 월남파병의 가장 큰 소득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특히 한국 남성에게는 뜻깊은 의미를 가지는 계기였다. 한국 남아가 비록 「단순기능직 노무자」일 망정 처음으로 일자리를 찾게 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즉, 한국 남성이 비로소 인력자원, 근로인력으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뜻이다<자료:ceoi.org>
첫댓글 음...몇가지...독고 전투가 아니고 둑코 전투로 알고 있습니다. 이 전투 이후 베트민 정규군의 명령서에서는 압도적으로 우세를 확보하더라도 명령없이는 한국군과 교전하지 말라고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월남에 진출한 한국인 중에 여자분이 생각나는 군요. 朴美東 여사라고 퀴논으로 기억하는데 냉면집을 하셨지요. 테트 공세때 1개분대가 별도의 보호 작전을 펼쳤지만, 한국군에게는 거의 공짜로 냉면을 제공하셨던 분이지요. 모두가 남자였던 것은 분명 아닙니다.
김세레나가 생각납니다. 하하하! 모두가 남자 였다는 것은 저도 부정합니다. 하지만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았지요...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