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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내 집은 잠시 머물다 가는 여인숙(旅人宿)
정영기(초당) 추천 0 조회 168 16.09.03 15: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내 집은 잠시 머물다 가는 여인숙(旅人宿)

 

  초당 정영기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무릇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요. 광음은 백대의 과객이다. 뜬 인생이 꿈과 같아서 즐길 수 있음이 얼마이리오.(夫天地者,萬物之逆旅,光陰者,百代之過客,而浮生若夢,爲?幾何)’. 이 백(李白)의 시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 첫 구절이다. 종교에서는 부귀영화(富貴榮華)가 별것 아니라지만 인생으로 태어나서 가치 없는 부평초처럼 살다 가서야 되겠는가? 역사적으로 불가사의한 건축물을 남긴 위인들을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와룡재

 

 나는 와룡재(臥龍齋)에서 하동정가(河東鄭家)의 종손으로 태어났다. 마지막 선비 송담(松潭) 이백순(李栢淳) 선생이 쓴 와룡재기(臥龍齋記) 첫 머리를 보면 ‘보성의 명산에 대룡산이 있으니 형태가 신기한 용이 도사리고 있는 듯 하며 웅장하고 장엄하여 한 지방을 덥고 눌러있다. 그 남쪽 기슭에 마을이 있어 초당리 라고 하니 나의 벗 정사재 영기(靜思齋榮基)가 태어나 자란 곳이요. 처음 태어나 울음을 터뜨린 집이 와룡재다. 비록 산 이름에 기인한 것이지만 또한 그 조부가 벗에게 기대를 걸고 써 붙인 것이다.(山陽之名山,有曰大龍山,形若神龍盤踞,而雄偉莊嚴,壓履一方,其南龍下,有村曰草堂里,吾友鄭靜思齋榮基所生長也,發呱呱聲宅曰臥龍齋,蓋雖本於山名,而亦由其王考所期望於友而題者也)’

 와룡재에는 맑은 물이 솟는 샘물이 있다. 그 물이 모이는 마당 앞에 크지도 작지도 않는 연지(蓮池)가 있었다. 지금은 연못을 메꾸어 넓은 주차장으로 만들고 마을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정자를 지어 놓았다.

 

조부님과 함께 살던 샘골 초가집

 

 1939년 선친(先親)이 별세하시자 큰 숙부를 따라 여수(麗水)로 이사를 하였다. 종고산 기슭 진남관(鎭南館) 뒤 오동도가 바라보이는 곳에서 살다가 1945년 광복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 와 초당리 옆 샘골마을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그 후 조립식 가옥으로 계량하여 현재까지 막내 숙모가 살고 계신다.

 

멋진 대학생

 

 1958년.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하였는데 주와 식(住食)과 학비가 큰 어려움이 되었다. 당시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토목공사인 청계천복개공사를 대림산업이 맡아서 하고 있었다. 주야 2교대로 무교동부터 시공하였다. 먹고 자는 것과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현장사무소를 찾아갔다. 멋진 연세대학교 교복을 입은 나를 보고 “학생이 어떻게 노가다 일을 하겠는가?” 하며 거절을 하였다. 간곡히 사정을 말하였더니 자갈과 모래를 담은 질통을 짊어보라 하고, 시멘트포대와 물통을 운반해 보라 하였다. 힘이 센 것을 보고 ‘합격!’ 그래서 수업을 마치고 저녁 6시부터 아침 6시까지 야간작업을 하게 되었다. 대림산업에서는 특별히 배려하여 일당이 조금 많은 메키샤(시멘트를 배합하는 기계)를 맡아 일을 하도록 하였다. 잠을 잠시도 잘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메키샤 소리만 요란하고 움직이는 일꾼들이 마치 도깨비들 같았다. 이윽고 여명이 밝아오면 청계천 양편에 늘어선 건물들이 괴물처럼 희미하게 보였다. 이 괴물들을 보는 순간 비로소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아침 6시가 되면 낮번에게 인계를 하고 쏜살같이 함바로 돌아가 쓰러지고 만다. 두어 시간 수면을 취하고 시멘트 투성이(학우들은 나를 빨치산이라 부름)인체 학교로 달려간다.

 1개월 쯤 지났다. 함바에서 일꾼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불편하여, 종로 2가 미림장이 있는 도로변에 혼자 누워 잘 수 있는 조그만 판자집을 지었다. 목수와 목재는 얼마든지 공사현장에서 조달이 가능하였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잠시나마 편히 쉴 수 있는 집이 있어서 좋았다.

 

간송미술관 석조공터

 

 한 달에 하루 쉬는 날이면 친구 이종구(李鍾九)를 만나러 성북동을 찾아갔다.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이 있는 소나무숲 석조공터(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에서 놀다가 함바로 돌아가 저녁식사를 하였다. 당시 간송미술관 윗편 계곡은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불법으로 판자촌을 이루고 살았다. 지금은 서울에서 부자들의 주거지가 되어 있다. 나도 그곳에 커다란 판자집을 짓고 싶었다. 공사현장에서 목재를 3리어커에 싣고 목수 2명의 도움을 받아 성북동 산언덕에 2칸짜리 판자집을 그럴 듯하게 지어 놓았다. “나도 서울에 집이 있다.” 소리치면서 하루 밤을 자게 되었다. 성북동 산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밤은 참으로 불빛이 아름다웠다. 새벽이 되자 골짜기 마다 종소리와 염불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다음 날 수업을 마치고 성북동 판자집을 찾아갔더니 누가 산산조각으로 박살을 내놓았다. 다시 목수를 불러 판자집을 복원하였다. 그 다음날도 산산조각으로 부셔놓았다. 근처 피난민 집을 찾아가 누가 부셔놓았는가 물었더니 성북동 파출소 순경들이라 하면서 판자집을 지키려면 집을 비우지 말고 싸워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낮에는 학교에 가야하고, 밤에는 일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집을 비울 수밖에 없었다. 불법으로 짓는 판자집인데 기왕이면 산언덕에 짓지 말고 간송미술관 뒷편 철조망 안에 짓고 싶었다.(당시에는 국유지였으나 지금은 간송미술관 소유). 또 목수를 불러 철조망 안에 한 칸짜리 판자집을 지어놓고 학교를 다녀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종로5가 동보극장 기도를 맡고 있는 깡패 같은 건장한 젊은이 2명이 내 멱살을 잡고 무조건 구타를 하였다. 잠시 기절을 하고 일어났더니 인자한 아주머니(간송미술관 사모님)가 왜 학생이 이곳에 판자집을 지었는가 물었다. 내 이야기를 듣던 사모님은 “숙소가 없다면 우리 집에 방이 많으니 와서 살아요. 내 아들도 대학에 다니고 있으니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나는 생각을 접고 종로 2가에 있는 판자집으로 돌아가 한 학기 동안 기를 쓰고 종로 5가까지 복개공사를 하였다. 그러나 2학기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하여 군에 입대하고 말았다.

 

육군부관학교 수료(위에서 세 번째줄 맨 오른쪽)

 

 1961년 군대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귀가 하였다. 서울시에서는 도로변 무허가 판자집 정리사업을 실시하고 있었다. 종로 2가 판자집은 철거되고 신림동 난민촌으로 이주하였다. 방 한 칸짜리 연립주택에서 생활하였으나 보람있는 삶을 살았다. 가난한 철거민촌 아이들을 모아 공부도 가쳐 주고(나에게 공부 배운 학생들이 일류 중·고등학교에 많이 합격하였음), 양계장을 하던 곳에서 개척교회(사람들은 닭장교회라 부름)를 시작하여 예배도 드렸다. 아이들과 어른들을 동원하여 신림천에서 모래와 자갈을 운반케 하여 아담한 스레이트지붕 시멘트벽돌 교회를 신축하였다.

 

신림동 개척교회

 

 1966년. 대학 동급생인 유준웅(劉俊雄)과 함께 강동구 천호동에서 중·고등학교를 신설하였다. 흙벽돌을 찍어 교실을 짓기 시작하였고, 학생들을 모아 사랑으로 교육하였다. 1970년대는 나의 전성기였다. 학생들은 나를 ‘히틀러선생’이라 부르고, 선생님들은 ‘나폴레옹’이라 불렀다. 학교를 크게 발전시키고 많은 봉사활동을 하였다(현재의 성덕 중·고등학교). 그 결과 KBS로부터 ‘고마우신 선생님상’을 수여받고 신문과 TV에 보도가 되었다. 30대 때 교감이 되어 마치 페스탈로찌(Pestalozzi) 선생 같이 된 느낌을 가졌다.

 

나의 전성시대(교사일동, 앞줄 중앙)

 

 1971년까지 암사동 새능말에서 전셋집 생활을 하였다. 성북구 정릉에 살고 있는 30대 젊은이(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계리사)가 새능말에 최초로 단독주택(붉은 벽돌, 붉은 기와) 10동을 지어놓고 분양을 하고 있었다. 단칸방 전세금뿐 없는 나로서는 대지 50평, 건평 35평인 값 비싼 주택을 구입하기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젊은이가 나에게 특혜를 베풀어 주었다. 매달 월급을 받아 생활을 하고 남는 돈이 있으면 몇 년이 걸리더라도 조금씩 갚으시라 하였다. 세상에 이런 고마운 사람이 어디 또 있을까? 얼굴과 이름도 기억하고 있지 못 하지만 고마운 마음은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

 

賞鶴學術會誌 제2집 출판기념회

 

 나에게는 이 젊은이 말고 또 한 사람 고마운 사람이 있다. 2011년. 상학학술회에서는『賞鶴學術會誌』제2집을 출판하였다. 그런데 회원들의 회비로는 출판비 충당이 불가능 하였다. 회장을 맡고 있는 나는 각처를 찾아다니면서 후원금을 모금하기로 하고, 제일 먼저 강동농협 박성직 회장을 찾아갔다. 뜻밖에도 박성직 회장이 출판비 전액을 후원하겠다 하였다.

 “강동구를 위해 일을 많이 하고 있는 선생님을 도와드리지 않으면 누구를 도와주겠습니까? 좋은 일에 쓰려고 그동안 강동농협에서 모아 놓은 돈을 모두 드리겠습니다.” 감격하여 왈칵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1973년. 암사동 새능말의 단층집을 팔고, 암사동 50번지 제1주택 2층 양옥으로 이사를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강동구의 명동이라 일컬으며 고급 양옥집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아파트붐이 처음으로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단독주택의 인기는 하락하고 있었다.

 

별장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한편 둔촌 성내지역 택지조성사업이 실시되었다. 길동 4거리 원일부페가 있는 자리에 장미울타리를 한 언덕위의 단독주택을 구입하였다. 이곳에서 정한얼이가 태어났다. 그 후 강동아파트를 구입하여 이사를 하였다. 그리고 어머니를 위해 경기도 광주시 역동에 별장식 2층 양옥을 신축하였다. 주말마다 식구들이 별장에 가서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

 2007년. 서민아파트인 강동아파트가 재건축 되었다. 그 당시 강동구에서 최고로 고급인 ‘프라이어 팰리스(Prior Palace)’를 신축하였다. 생애 한 번 넓은 아파트에서 살아 보고 싶어서 45평형을 선택한 것이 큰 잘못이었다. 아파트 경기가 침체하면서 손실을 많이 보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모두 프라이어 팰리스에서 결혼을 하였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게 되어 복을 많이 받은 아파트가 되었다.

 

Prior Palace에서

 

 2013년. 두 식구가 생활하기에는 프라이어 팰리스가 너무 넓었다. 아파트 매매가 없는 시기에 고맙게도 친하게 지내던 공영순(孔英順) 여사가 아들에게 주기 위해 프라이어 팰리스를 구입하여 주었다. 강동구민회관 부근에 있는 태천해오름아파트(33평)로 이사를 하였다. 그런데 층간 소음이 심하여 괴롭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엎친대 겹친 격으로 2014년 7월 5일. 전기적 요인으로 내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 침실과 거실은 전소되고 벽에 액자로 걸려있는 교지(敎旨)와 증조부 작품 가훈(家訓)이 소실(燒失)되어 몹시 슬펐다. 그러나 다행히 서실 2방(房)은 무사하였다. 조상들의 고서(古書)와 내 저서들이 화마를 피하여 감사하였다. 더욱 다행인 것은 국과수(國科搜)의 결과가 ‘원인미상’으로 나와 금전적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아파트 화재보험과 실손보험으로 모두 해결을 보고 아파트 전체를 말끔하게 수리하여 주었다. 그러나 태천해오름아파트에서 계속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2014년 9월. 아파트를 급매하고 전세를 얻어 고덕주공아파트 7단지(상일동)로 이사를 하였다. 2016년 9월에 철거될 낡은 아파트이지만 강동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프라타너스 길이 있고, 나무들이 무성한 숲속의 아파트여서 23년만의 폭서(暴暑)에서도 더위를 모르고 생활할 수 있었다.

 

양면에 대형창문, 전망이 좋은 거실

 

 아파트 화재가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었다. 평생 한 번 특혜를 주는 국가유공자 특별분양을 받게 되었다. 명당(明堂)이라 일컫는 하남미사지구에 서울과 경계선에서 남향으로 흙냄새를 맡을 수 있는 3층을 간절히 원했다. 하늘의 도움인지 내가 원하는 대로 당첨이 되었다.

 

편리한 주방

 

 2016년 8월 19일. 경기도 하남시 미사강변서로 127번지. 1808동 303호로 이사를 하였다. 3일간 힘들게 집 정리를 마치고 생애 가장 기쁘고 즐거움을 맛보았다.

 

침실 내부

 

 첫째, 침실과 거실이 남동향에 대형 창문이 있고(창 밖에는 넓은 공간과 검단산이 보임), 거실의 남서향 창문으로는 강일동 그린벨트 소나무숲(옛날 파평윤씨묘역)이 손에 잡힐 듯 보여서 참으로 흡족하고 시원하였다. 아마 하남미사지구 아파트 중에서 18단지 1808동 3호 라인처럼 전망이 좋은 아파트는 없을 것이다.

 

서재에서 바라보는 소나무숲

 

 둘째, 프라이어 팰리스 보다 시설과 건축 자재가 좋고 집 구조가 마음에 쏙 들었다.

 셋째, 연장 신설 중인 지하철 5호선 강일역 ( )번 출구, 4거리 코너에 1808동이 위치해 있어서 쪽문으로 5분도 걸리지 않고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나의 컴퓨터실

 

 넷째, 평생 소중하게 보관해 오던 골동품과 서예작품들을 서재에 비치하고, 조상들의 고서적과 나의 저서들을 모두 책꽃이에 꽂아 놓을 수 있어서 기뻤다.(소설과 잡지류는 1트럭 이삿짐 사장에게 주고, 문학서적과 학술서적은 1트럭 요수(樂水) 노태민(盧泰民)께 주었음)

 다섯째, 두 식구가 생활하기에 34평이 아주 적당하였다. 공기가 서울보다 신선하고 강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와서 언제나 머리가 상쾌하여 좋았다.

 

나의 서재(書齋)

 

 나이 80을 사는 동안 열다섯 번이나 주거지를 옮겨 다녔다. 사람들은 아파트 화재를 당하여 망할 줄 알았으나 모든 일이 불같이 일어나 지금 나는 가장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앞으로 얼마를 더 살지는 모르지만 이 좋은 아파트를 영원히 소유하지는 못한다. 잠시 머물다 갈 뿐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종가(宗家) 겸 기념관(紀念館)을 전통한옥으로 지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1971년에 암사동 청기와 장인 김용칠(金龍七)선생의 청기와 용마루 용두(龍頭)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1972년에는 실내 모자이크 벽장식을 위해서 조선 초기 ‘선동요’ 가마터에서 깨어진 백자 밑 부분(원형 안에 글자가 새겨져 있음)을 4차례에 걸쳐 4 배낭 가득 수집하여 놓았다 지금은 선동요지가 중부고속도로 개설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청기와 용두(龍頭)

 

 1989년에는 유명한 서각가 김용복(金容福)씨에게 캐나다 향나무 현판 ‘靜思齋’(亦堂 具會升선생 글씨) ‘臥龍齋’(南松 金永?선생 글씨) 2개를 제작하여 놓았다.

 집을 지을 장소는 대룡산(大龍山) 남쪽 두산촌(斗山村) 뒤 명당(明堂)인 성제곡(聖帝谷)의 불무(佛舞)골을 선정하였다. 그러나 1967년 서울 강동구로 본적지를 옮긴 후 아들과 손자들이 모두 서울에서 태어나 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집을 지어 놓는다 하여도 관리가 문제였다. 자손들의 고향이 강동구가 되었으니 암사동(岩寺洞)으로 후보지를 바꾸었다. 그동안 내가 15년간 구암서원(龜巖書院) 복원추진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선사주거지 곁에 지금의 대지를 구입하도록 하였다.

 

靜思齋(130cm ?50cm)

 

 이제 나는 늙어서 힘이 없고 재력이 없다. 오랜 숙원인 청기와로 전통한옥을 지을 생각을 접으려 한다. 그러나 자식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자식이 성공하면 언젠가는 ‘靜思齋’ 와 ‘臥龍齋’ 현판이 처마에 걸릴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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