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족오(三足烏)의 유래는?
삼족오는 고조선 민족의 신앙이 고조선 문명권에 전파되어 공유된 삼신(三神)사상, 삼신교(三神敎), 신교(神敎)의 상징이다.(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고조선족과 고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던 예(濊), 맥(貊), 부여(夫餘), 숙신(肅愼) 등 고조선문명권에 포함된 부족 및 원민족들은 ‘태양숭배’, ‘하느님 숭배’, ‘천제(天帝)숭배’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스스로 ‘태양신의 자손’, ‘하느님의 자손’, ‘천손(天孫)’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태양’. ‘하늘’, ‘하느님’과 자신들을 연결시켜 주는 동물매체를 새(烏:새오)라고 생각하여, ‘솟대문화’, ‘소도문화’를 공통으로 형성하였다.
고조선족과 고조선문명권에 포함된 부족 및 원민족들은 ‘태양’과 ‘새’를 결합하여 태양신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할 때는 ‘삼족오(三足烏)’, ‘세발 까마귀’를 상징의 징표(徵表)로 삼았다. ‘까마귀’를 상징화하는 원시부족은 가끔 있었지만 ‘삼족오’, ‘세발 까마귀’는 오직 고조선문명권만 가졌던 ‘태양신’의 상징이었다.
2. 삼족오가 나오는 문헌은 무엇입니까?
1만년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민족의 고문헌이 부족한 것은 외세의 침략에 의해 우리민족의 역사가 소멸되고 축소,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삼족오에 대한 문헌도 중국 측에 비하여 현저하게 부족하다. 그러나 문헌(文獻)과 유물로서 증명(證明)을 하거나 유추해 볼 때 동북아시아 지역에 퍼져있는 삼족오의 원류는 한민족으로 지칭할 수 있는 배달민족(동이족)의 문화이다. 그 문화가 문명의 이동이나, 국가 흥망, 민족의 영역 확장에 의해 한. 중. 일 공동의 문화코드로서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대만의 임혜상이라는 학자는 중국역사의 앞대를 '동이(東夷)'에서 비롯되었고, 음악과 의술도 '동이문화(東夷文化)'라고 했다.
당랑이라는 중국 학자도 황하문명 이전의 한반도 세 배(倍)에 해당하는 유적에서 소호라는 글자를 발견하였는데 그것이 동이족의 성씨였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당랑은 노자, 맹자, 공자가 동이족 후예들이고, 심지어 황제 헌원, 복희, 신농도 동이족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렇듯이 일부 중국학자들이 나서서 세계 3대 문명으로 알려져 있는 황하문명이 우리 겨레가 각지로 교화시키려 나간 문화에서 나온 문명이라는 것을 증명을 해주고 있다. 우리의 역사는 고조선(단군조선) 2096년, 그 이전 '동이(東夷)' 즉, '배달나라(檀國)' 1565년과 '한나라(韓國)' 3001년을 합하여 1만년의 역사가 된 다는 것이다.
모택동 자전에도 언급된 중국의 대학자인 부사년(傅斯年:1896-1950)은 생전에 우리 한국을 '스승의 나라'라고 불렀고,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에서 중국의 한족은 이족(夷族)과 하족(夏族)의 양족이 섞이어 형성되었으며 그 문화는 이족(夷族)의 문화라고 하였던 것이다.
현존하는 고서로서 삼족오의 전설이 나오는 것은 중국의 경우에는 요임금 시대이고, 우리민족은 고조선 시대이다.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위서(緯書)’는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건국한 BC 2333년의 시기를 중국의 요임금과 동시기라고 하였다.
BC 3898년 거발환 환웅이 신시에 도읍하고 배달국을 세운 이후, 중국의 상황오제(三皇五帝)의 역사도 시작되었다. 삼황은 태호복희, 염제신농, 황제헌원을 말하며, 오제는 그 뒤를 이은 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제요도당(요임금), 제순유우(순임금)을 말하고 그 마지막 순임금 이후 일어난 왕조가 하(夏), 은(殷), 주(周)이다. 주나라는 BC 1122년경에 망하고 이후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한다. 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이었던 진(秦)은 BC 247년 천하를 통일하고 새로운 왕조를 이룬다.
2000년 전, 단군 폐관 이후 춘추전국시대를 천하 통일한 진시황은 동이족의 선도역사를 없애려고 선도(仙道)에 관한 역사서적을 모두 불태우고 신선(神仙)의 도를 닦는 선도(仙道)의 대가 460명을 생매장하는 그 유명한 분서갱유(焚書坑儒)사건을 일으켰다.
수천년의 세월이 흘려오는 동안 삼족오에 관한 문헌은 많이 소실되었지만 중국(지나족支那族)에는 복희씨와 여와씨에 대한 전설이 성행하던 전한(前漢 BC 206〜AD 8)시대에 소호족(小昊族)의 신화(神話)로 구전(口傳)되어 오던 ‘삼족오’에 대한 전설을 채록(採錄)한 것이 남아있다.
이 신화의 줄거리는 ‘별지 1호’와 같다
3. 삼족오는 어떤 새입니까?
삼족오의 형상을 보면 몸 통 하나에 다리가 세 개인 검은 까마귀이다. 이 삼족오는 우리나라에서만 유일하게 발굴된 것은 아니지만 고구려 고분 벽화에 그려져 있는 삼족오는 중국이나 일본에 없는 벼슬이 한 개 더 있다.
동이민족의 문화이동에 의해 현존하는 삼족오의 형상도 판이하게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서한(西漢) 호남 장사현 마왕퇴(馬王堆) 1호 묘에서 출토된 백화(비단에 그려진 그림)에 보이는 일중삼족오(日中三足烏)는 이름만 삼족오로 불릴 뿐 다리는 두개이다. 이는 음양(陰陽)이원론(二元論)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일본의 삼족오는 태양을 상징하는 동심원(同心圓)이 빠진 조류토템만으로 변형되기도 한 것이다.
까마귀를 토템으로 하거나 태양신으로 하는 원민족들은 더러 있으나 모두 다리가 두개이다. 예컨대, 북유럽 민족의 태양신 오딘의 천사조, 이란의 전설에 나오는 천사조, 기독교 성경에 나오는 까마귀가 그렇다.
삼족오(三足烏)는 발이 세 개 달린 까마귀로, 고구려 고분벽화에 자주 보인다. 삼족오는 대개 태양(太陽)을 상징하는 원형 안에 일상(日象- 陽, 東)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항상 둥근 달 안에 두꺼비[섬여(蟾蜍)]를 그린 월상(月象- 陰, 西)과 함께 천상에 좌우 혹은 동서 대칭으로 보인다.(이병도:『한국고대사연구』,박영사, 1976, pp.411- 412.)
동이족의 삼족오는 음양오행론으로 풀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홍익철학과 천지인(天地人)을 모르고선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4. 삼족오가 발견된 곳은 어디입니까?
1) 한국 : 다수
- 고구려 고분벽화 3점
- 평안남도 진파리 7호 무덤의
‘해뚫음 무늬 금동장식품 유물’
일명 ‘일광투조금동장식(日光透彫金銅冠飾)’ 등
2) 중국 : 다수
중국 하남성 안양 은허(殷墟) 후가장(侯家莊)
1004호 大墓에서 발굴된 청동(靑銅) 방정(方鼎)의 전후
양면에 각각 좌우로 삼족오가 새겨져 있다.
(梁思永ㆍ高去尋:『侯家莊-1004號大墓』,
中央硏究院 歷史語言硏究所.)
5. 삼족오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습니까?
태양 안에 삼족오가 있는 것을 ‘일중삼족오(日中三足烏)’라 하고, ‘금오(金烏)’라고도 하는데, 이는 동이민족(東夷民族)의 삼신일체(三神一體)사상과, 태양숭배사상, 조류숭배사상이 합치된 우주사상(宇宙思想)으로서 한민족 고유의 상징이다.
고조선 문명권에서는 태양신 또는 태양신의 천사(天使)를 ‘삼족오’로 표현하였다. 왜 세발일까? 세발은 한인, 한웅, 단군 삼신(三神)을 의미한다. 그 이유로 고조선 문명권에서는 ‘삼족오’가 실재하지 않는 까마귀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신(神)’ 자체였으며, 고조선에서의 삼신은 널리 아는 바와 같이 한인, 한웅, 단군이며, 삼족오는 삼신을 상징화한 것이었다고 본다.(신용하 서울대 교수)
고구려벽화 등에서 발견된 우리나라의 삼족오의 머리에는 벼슬이 있다.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에서 발견된 삼족오에는 벼슬이 없다. 벼슬은 국가통치조직에서 국사(國事)를 담당하는 직위나 직무의 통칭이다. 머리에 벼슬이 달린 삼족오는 1만년 한민족의 법통을 이어받은 천손민족. 천자국(天子國)임을 알리는 것일 게다.
사단법인 국학원에서는 삼족오를 로고(Logo)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의미를 ‘한민족은 천지인(天地人) 사상을 가진 문화민족으로서 태양의 아들, 하늘의 아들을 상징하는 삼족오를 민족의 상징물로 사용해 왔다. 고구려 벽화나 유물에 삼족오가 태양 속에 그려져 있는 것은 바로 한민족이 천손(天孫)민족임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6. 삼족오가 일본에 언제 전래되었나요?
삼족오가 언제 어느 경로로 전래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에서 전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2001년 12월, 아키히토 일본 국왕은 “내 몸 속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간무 천황 어머니는 백제 무령왕 후손” 이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하였다.
- 백제가 AD 660년에 신라와 당나라 군사에게 멸망 시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일본에 있던 그의 누님인 제37대 '제명(齊明, 사이메이)일왕'에게 구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도중에 제명일왕이 죽자, 제명일왕의 조카이면서 일찍이 왜로 와 있던 의자왕의 아들인 중대형(中大兄, 나카노오에)이 이끄는 구원군은 나ㆍ당연합군에 대항하지만 서기 663년 금강(錦江)하구로 추정되는 곳(일본 문헌에는 백촌강(白村江)전투)에서 대패했다.
AD 663년 최후의 거점인 주유성(州柔城 또는 周留城)이 함락되자, 일본열도에서는 "이제 주유성을 잃었구나.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겼으니 선조들의 묘소에도 이제 다시 못 가게 되었구나"라는 비통한가락의 노래가 유행했다고《일본서기》(663년 천지(天智)2년 조(條))는 기록하고 있다.
-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는 일본왕립도서관에는 일제강점기에 이병도를 비롯한 친일 사학자를 동원 전국를 뒤져 약탈해간 우리나라의 고대사자료가 많다고 한다. 이것이 공개되면 일본 황실이 백제인의 혈통이며 그 후손들이라는 것이 밝혀질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일본의 역사가 한국의 역사보다 훨씬 뒤 떨어졌음이 밝혀 질 것이다.
- 이처럼 백제의 후손들이 일본으로 건너 가 건국의 주역 또는 역대 일왕을 역임하면서 삼족오에 대한 문화교류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또 다른 설로서는 고구려가 멸망했을 때 많은 유민이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이들과 함께 삼족오를 비롯한 고구려 문화가 전해졌다는 것이다.
7. 현재 다른 국가에서는 삼족오를 어떻게 활용 하나요?
한국, 중국, 일본에서의 삼족오에 대한 활용정도는 다음과 같다.
1) 한국
고구려사극인 국민드라마 “주몽”, “연개소문” 등을 통하여 삼족오가 나오면서 새삼 국민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삼족오가 고구려의 대표상징물이 아니라는 오해도 있었다. 그로 인하여 급기야 동아일보에서는 ‘고구려의 삼족오, 일본축구협회 엠블럼 둔갑’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2) 중국
요녕대학 안에는 5m나 되는 삼족오(태양조, 太陽鳥) 조각이 상징물로 세워져있고, 심양시의 상징물도 태양조다. 시청광장에는 30m는 족히 되는 태양조가 한 가운데 세워져 있다. 심양 북역(北驛) 광장에도 50m도 넘어 보이는 현대적으로 디자인된 태양조가 비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시내 곳곳에 현대적으로 디자인된 삼족오 벽화가 그려져 있다.(우실하 항공대학교 교수)
3) 일본
삼족오는 1930년부터 일본 축구협회의 상징으로 대표팀의 엠블럼이 되었다.
일본에 근대 축구를 보급한 나카무라 가쿠노스케의 고향인 와카야마 구마노 신사(神祀)에 그려져 있는 까마귀를 본 뜬 심벌이다.
일본 천황 호위군을 자처하는 일본 우익단체의 상징 깃발에도 삼족오가 그려져 있다.
8. 우리나라는 삼족오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지피지기(知彼知己)이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고 한다. 삼족오는 수천년 동안 동북아시아의 천손족에 대한 상징물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 이로 인한 역사전쟁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중국과 일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상용화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역사와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우리나라는 삼족오에 대하여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뿐 아니라, 알고 있다고 해도 과거의 박제된 박물관의 유물 수준에 머물러 있다.
우리의 전통 문화유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뼈아픈 현실을 바르게 알고, 다시는 이런 슬픈 기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공중파 방송국에서 삼족오를 방영함으로서 민족혼이 되 살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국학원에서는 우리민족의 전통문화를 현대화시키고 슬픈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삼신(三神)사상과 천지인(天地人) 정신 등에 대하여 민족혼 교육을 하고 있다.
삼족오의 진정한 의미가 알아야 한다. 그것은 한민족의 전통문화의 부활이다. 한민족의 전통문화의 핵심은 심신수련을 통하여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잇는 신성(神性)을 깨우는 것이다. 현대의 인간성 상실, 자아상실의 시대를 인간성 회복의 시대로 만드는 것이다. 지금은 마고복본의 시대이며, 원반복의 시대이며, 부활의 시대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것이 한민족의 역사 속에 숨겨져 있다. 이것을 어떻게 전하여 좋은 세상을 만들 것인가? 그러나 걱정할 일은 아니다. 한민족의 국운이 상승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누군인가?’를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