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숨 막히는 비닐하우스서… 목숨 걸고 키우는 ‘코리안 드림’ [밀착취재]
윤준호입력 2023. 8. 28. 06:09
외국인 노동자 74% 주거 ‘열악’
하루 11시간 농장일… 옆에 숙소
사방 천으로 감싼 야외 화장실뿐
통풍 안돼 속옷만 입고 여름 보내
최근 태풍으로 문까지 물 차올라
지자체 위법 알면서도 소극 대처
고용부 “빈집 활용한 숙소 고민중”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 니르말(가명·30)씨는 경기 포천시 한 비닐하우스 농장에서 하루 11시간씩 서울 가락시장과 구리 농산물시장으로 나가는 상추와 얼갈이배추를 키운다. 그는 퇴근 후에도 비닐하우스를 벗어날 수 없다. 농장 옆 또 다른 비닐하우스가 그의 집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엔 태풍으로 방문 앞까지 물이 차올랐지만 피할 곳도 없었다.
지난 22일 찾은 경기 포천시 한 비닐하우소 숙소 모습이다. 길가에 재래식 화장실이 있는데 사방을 천으로 가려놨다. 윤준호 기자
바람이 통하지 않는 집에서 니르말씨는 속옷 한 장만 입고 여름을 보냈다. 지난해 7월 고용허가제로 이 농장에 온 그는 앞으로 3년 8개월가량 남은 고용 기간도 여기서 꼬박 채울 예정이다. 네팔에서 영문학 석사 과정을 준비하고 있는 아내와 부모님을 뒷바라지하려면 악조건이지만 참을 수밖에 없다. 한국에 있는 동안 유일한 낙은 퇴근 후 전화로 아내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다.
27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국내 거주하는 외국인노동자 10명 중 7명 이상이 비닐하우스 내 컨테이너나 조립식 패널 등에서 살고 있다. 2021년 조사에서 전국 농축산업 분야 외국인노동자 1만8822명 중 73.9%가 이러한 가설 건축물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후 실시된 실태조사는 없었다. 정부는 2021년 가설 건축물을 숙소로 제공하는 것을 제한해 주거환경을 개선하겠다고 했지만 말뿐이었다.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위법 행위를 인지하고도 현실적 어려움을 이유로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않고 있다.
지난 22일 포천시 비닐하우스 농장 일대를 방문해 보니 외국인노동자 숙소로 사용되고 있는 가설 건축물을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일반 비닐하우스에 검은색 차광막을 둘러 빛이 들어오지 않는 숙소들은 비가 오자 물이 샜다. 야외에 마련된 재래식 화장실은 비가 많이 오면 분뇨가 넘치는 곳도 있다.
김달성 포천이주노동자센터 대표는 외국인노동자 주거 실태가 2년 전 조사가 이뤄지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김 대표는 “비닐하우스 50∼100개를 거느리고 있는 농장이 포천에 200개가 넘는다”며 “이 중 절반 정도의 숙소가 야외에 재래식 혹은 간이 화장실을 두는 등 상황이 열악하다”고 설명했다.
지난 22일 만난 김달성 포천이주노동자센터 대표는 “외국인노동자의 열악한 주거 환경이 비단 인권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며 “장기적으로 한국 사회도 함께 허약해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업주가 가설 건축물을 숙소로 제공할 경우 고용허가 신청을 받지 않겠다는 고용부 방침은 실효성이 없다. 이 대책은 2020년 포천 한 농장의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캄보디아 출신 외국인노동자 속헹(30)씨가 한파에 사망한 사건 이후 2021년 1월 시행됐다. 그러나 사업주가 ‘가설 건축물축조 신고필증’을 제출하면 비닐하우스 숙소를 제공해도 된다는 예외 조항이 있는 데다 신고필증을 받지 않은 가설 건축물 숙소에 대해서도 제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지난달 미등록 가설 건축물 숙소에 대한 민원을 받은 포천시청의 경우 “민원이 제기된 숙소 10곳 중 9곳이 건축법과 농지법을 위반한 것을 확인했다”면서도 농장주 반발 때문에 원상복구 등 강제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포천시청은 미등록 가설 건축물 숙소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제 단속은 어렵다는 입장도 내비쳤다. 중소규모 농장에서는 당국 시정명령을 이행할 여력이 충분하지 않은데 단속해 봤자 주거지 개선도 되지 않고, 지역 경제에 미치는 타격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지만 외국인노동자가 가설 건축물 숙소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어렵다. 사업장을 바꾸거나 고용을 연장하려면 고용주의 서명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현행 고용허가제는 고용주와 외국인노동자의 관계를 주종관계로 만든다”라며 “사실상 일터의 자유가 없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지난 22일 찾은 경기 포천시 한 비닐하우소 숙소 인근 간이 화장실은 문이 잠기지 않았다.
지난 22일 찾은 경기 포천시 농장 일대에는 곳곳에 비닐하우스 숙소가 있었다. 캄보디아, 네팔, 베트남, 태국에서 온 외국인노동자들은 고단한 노동이 끝나면 비닐하우스로 퇴근했다.
김 대표는 9월 신규 입국자부터 적용되는 변경된 고용허가제에 대한 우려도 제기했다. 바뀐 고용허가제에서는 외국인노동자가 사업장 변경 시 고용주에게 사유와 변경 이력을 공개한다. 김 대표는 “앞으로 외국인노동자의 문제 제기는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외국인 노동자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신고필증 예외 조항을 두는 것이 열악한 주거 환경을 사실상 묵인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데다 공동숙소 관련 예산도 턱없이 부족해서다. 포천시청 관계자는 “전역에 흩어진 농장에 권역별 숙소를 마련하기엔 여의치 않은 점 등을 고려해 정부가 가설 건축물을 제대로 된 숙소로 전환하기 위한 출구를 열어줘야 한다”고 했다. 고용부 관계자는 “농어촌정비법상 빈집 활용 가능 용도에 외국인노동자 숙소를 넣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포천=글·사진 윤준호 기자 sherp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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