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1 <유홍준과 함께하는 예썰의 전당 3부>
[44회] 예술인의 성지, ‘성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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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심우장(萬海 韓龍雲 尋牛莊,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은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 선생이 1933년에 지은 집이다. 심우장의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으로 옆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 기와집으로, 선생은 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 하여 일부러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 <예썰의 전당> 마흔네 번째 주제는 예술인의 성지, ‘성북동’이다.
그저 ‘부촌 1번지’로 여기기엔 성북동에 쌓인 이야기가 많다. 한양도성 북쪽에 위치한 마을, 성북동은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한국의 근대 예술을 꽃피웠던 곳이다. 어두웠던 일제강점기에도 성북동에선 빛나는 예술이 펼쳐졌는데. 시대와 세대를 넘어 예술이 흐르는 동네, 성북동을 들여다보자.
✵ 예썰 하나, 재재가 추천한 성북동 핫플레이스, ‘수연산방’에서 탄생한 한국 문학사의 보물은?
성북동 중심에 자리한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한옥 ‘수연산방’. 현재 전통찻집으로 운영 중인 이곳은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라 불리는 이태준 소설가의 집이었다. 과거 이태준의 수많은 명작이 만들어진 곳이자 성북동 문학인들의 사랑방 ‘수연산방’에서 한국 문학사의 보물과도 같은 존재가 탄생했다는데. 이는 바로 월간 문예지 '문장'이다. 당대 내로라하는 문인들의 글이 실리는 것은 물론, 시인 조지훈, 이육사 등 걸출한 신인까지 배출한 문예지 '문장'. 이는 발간될 때마다 큰 인기를 끌었으나, 불과 3년 만에 폐간에 이르고 만다. 잘나가던 문예지 '문장'이 갑작스레 폐간을 결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 수연산방(壽硯山房)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전통 찻집이며, 원래 이곳은 황진이, 왕자호동 등을 집필한 작가 상허 이태준(尙虛 李泰俊, 1904-1978)의 고택(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11호)이었으나, 1999년 생외손녀(甥外孫女) 조상명이 1933년 이태준이 지은 당호인 수연산방을 내걸고 찻집을 열었다.
김기림과 정지용과 이상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누마루의 풍경을 그린다. 상허 이태준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홀로 딴청을 피며 정원의 붉은 홍시를 탐했으려나. 70년 전 문인들의 사랑방에서 따스한 다향에 젖는다.
테이크아웃 드로잉’은 이미 소문난 문화공간이다. 2단으로 이루어진 실내는 카페이자 갤러리를 겸한다. 그 이름도 드로잉(drawing)을 세상에 테이크아웃(take out)한다는 의미다. 카페 ‘일상(日常)’도 있다. 일대에 소문난 드립커피 전문점이다. 먼 데서 찾아오는 단골들이 많다. 수연산방에 이르기 전 성북동 길가의 풍경이다.
그는 월북소설가라 이름이 생경하다. 하지만 그가 쓴「가마귀」 「달밤」등은 현대소설의 틀을 확립한 수작이다. 『문장』지의 주간을 지내며 연재한 「문장강화」도 빼놓을 수 없다. 1939년에 단행본으로 엮인 후 70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문장론의 교본 구실을 한다. 그는 순수 문학을 표방한 구인회(九人會) 동인으로도 유명했다. 구인회는 1933년 김기림·이효석·정지용·이태준 등 아홉 명의 작가가 결성했다. 후에 박태원·이상·김유정 등이 가세했다.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우리나라 현대문학의 선구자들이다.
수연산방은 이들이 사랑방 삼아 모인 아지트였을 게다. 때론 진지하게 또 때론 반농 삼아 삶과 문학을 이야기했겠지. 오명근의 소설 「그 이상은 없다」는 그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이태준의 성북동 시대’라는 제목 아래 정지용과 이상이 티격태격 다투는 모습이다. 그 배경이 수연산방이다. 1930년대 문인들의 풍경을 팩션(Faction)으로 꾸민 책이지만 수연산방의 역할만은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
✵ 예썰 둘, 김환기 화백에게 집까지 넘겨준 성북동 예술가는 누구?
두 번째 답사지는 근원 김용준과 수화 김환기의 집이다. 성북동에서 화가로서 또 수필가로서 예술혼을 불태웠던 김용준은 자신이 아끼는 후배에게 집을 넘겨주게 되는데, 그가 바로 대한민국 대표 화가, 김환기다. 9살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기반으로 깊은 우정을 쌓아간 두 예술가, 김용준과 김환기. 성북동엔 이렇게 수많은 문인, 화가들이 서로 교류했는데, 그중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성북동 비둘기’를 쓴 시인 김광섭이다. 문인들과 활발히 교류했던 김환기는 특히 시인 김광섭을 존경했다고 하는데. 심지어 오보였던 김광섭의 부고를 듣고 슬픈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해 걸작을 남기기까지 했다. 이날 스튜디오에선 김환기의 사연이 얽힌 걸작이 공개되자 모두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는 후문. 이 작품은 과연 무엇일까?
'근원수필' 삽화, 1948년(45세)/ '근원 김용준(近園 金瑢俊) 자화상'
변월룡이 1953년 그린 '김용준 초상'. 월북 후 김용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 근원 김용준(近園 金瑢俊, 1904-1967)의 성북동 자택 ‘노시산방(老枾山房, 당시 성북동은 경성이 아니라 고양군에 속해 있었다.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65-2)’을 김환기에게 넘겨주고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 가능리 고든골로 이주, 그곳의 집을 ‘반야초당(半野草堂)’이라 이름짓고 살았다.
검려사십오세상(黔驢四十五歲像), 근원수필(近園隨筆) 초판 삽화
* 검려지기(黔驢之技): 보잘것없는 기량을 들켜 화를 자초한다.
근원수필(近園隨筆)
근원 김용준(近園 金瑢俊, 1904-1967)은 동서양화를 두루 그렸던 화가이자 해박한 미술이론가로서 해방 이후에는 서울대 미술학부 교수를 지냈다. 아름답고 고아한 글 솜씨를 지닌 빼어난 문장가로 납·월북 문화예술인들의 해금 이후 그의《근원수필(近園隨筆)》이 40여년만에 다시 발간되기도 했다. 그의 데뷔작은 이 유화 작품 ‘동십자각(東十字閣)’이었다.
1904년 경북 선산(善山)에서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나, 경성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미술뿐만 아니라 다른 과목에서도 우수한 학생이었던 듯하다. 고려미술원(高麗美術院)에서 이마동(李馬銅), 구본웅(具本雄), 길진섭(吉鎭燮), 김주경(金周經) 등과 함께 미술 수업을 시작했다.
김용준, ‘동십자각(東十字閣)’,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이 작품 ‘동십자각’은 1924년 도화교실에서 이종우(李鍾禹)로부터 미술 수업을 받으면서 고보 4학년 학생 신분으로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한 작품이다. 이종우의 회고에 의하면, 이 그림의 원래 제목은 ‘건설이냐? 파괴냐?’였다고 한다. 경복궁에 있는 동십자각 담장을 허무는 공사장면으로, 그는 이후 이 그림을 인촌 김성수에게 가져다주고 김용준의 도쿄 유학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고 말했다.
그 무렵 김용준은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진숙경을 만나 결혼도 하고, 곧 이어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게 된다. 서양화과 졸업 후 서울에 돌아온 그는 일제 총독부 주관의 조선미전을 거부하고 서화협회전을 통해 작품을 발표했고, 길진섭 구본웅 등 동년배의 화가들과 민족적 양화운동을 했던 목일회(牧日會)를 함께 했다. 이어 미술사 연구에 관심을 쏟게 되면서 더 이상 유화 작업을 남기지 않았다.
변월룡(邊月龍, 1916-1690), ‘김용준 초상’, 종이에 연필+콘테, 38x25cm, 1953년 , 변월룡 유족 소장
수연산방(壽硯山房) 앞에 선 이태준. 국립현대미술관/ 근원 김용준(近園 金瑢俊, 1904-1967), 국립현대미술관
근원 김용준(近園 金瑢俊, 1904-1967), ‘다알리아와 백일홍’, 1930년, 국립현대미술관/
김용준, ‘상허 이태준(尙虛 李泰俊, 1904-1978) 초상’, 1928년, 하드보드에 유채, 32.5x24cm, 개인 소장
김용준이 그린 '문장(文章)' 지 표지/ 김용준이 표지화를 그린 이태준의 ‘무서록(無序錄)’, 국립현대미술관
추사의 글씨체로 제호를 만든 당대 최고 문예지 ‘문장(文章)’/ 김용준이 쓴 '근원수필’ 중 '두꺼비 연적을 산 이야기'에 들어있는 삽화. 김용준이 직접 그렸다. 국립현대미술관
김용준, ‘수화 소노인 가부좌상(樹話少老人跏趺坐像)’, 1947년, 종이에 수묵담채, 155.5x45cm, 국립현대미술관
수화소노인가부좌상(樹話少老人跏趺坐像)은 아꼈던 후배 서양화가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 1913-1974)를 그린 소조(小照)식 인물화이다. 김용준은 『근원수필』에서 김환기를 애정 어린 어조로 여러 번 언급했고 '키 장다리', '항아리에 미친 사람'이라고 부르며 인물 스케치를 곁들여 대중매체에 「키다리 수화 김환기론」을 발표한 일도 있다. 김환기는 6척 장신에 마르고 목이 길어 학 같았다고 하는데 큰 키와 어울리는 장축(長軸)으로 화면을 구성했다.
'수화소노인가부좌상'을 세로로 큼지막하게 써넣어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전서나 예서로 써넣는 표제 양식을 제목으로 활용한 것이다. 조선회화를 연구한 김용준의 미술사학자로서의 식견과 그 식견을 지인을 그린 인물화에 멋지게 적용시킨 화가로서의 역량을 잘 보여준다. 글씨는 조형성이 풍부한 김정희 고예(古隸)의 영향을 받아 자기화한 서풍이다. '상(像)'자를 전서로 쓴 것 또한 한 작품에 다른 서체를 섞음으로서 파격의 생동감을 준 김정희의 방식을 응용한 것이다. 그려진 인물로 보나 입고출신(入古出新)으로 고전을 체화한 양식으로 보나 김용준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색이 없다.
조선 도자를 애완(愛翫)한 김환기의 모습도 드러난다. 김환기가 오른쪽 팔을 기댄 책상 위에는 책 4권과 붓 3자루가 꽂힌 필통이 있는데, 필통은 순백자로 보인다. 가부좌하고 앉은 김환기의 무릎 앞에 물고기가 그려진 큰 그릇은 이 날 근원과 수화의 담소(談笑)거리였던 철화 분청사기일 것이다. 김환기는 온 집안에 항아리가 가득한 '항아리광(狂)'이었다. 김용준은 그런 김환기를 "삼도화기(三島畵器)에까지 발을 뻗쳐서 항아리 열(熱)로 말미암아 탕진가산을 하다시피"한다고 했는데, 삼도화기는 그림이 그려진 분청사기이다. 김환기의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연기가 꼬불꼬불 올라가고 있어 유머러스한 현장감이 생생하다.
화면의 왼쪽 아래에 두 줄의 작은 글씨로 "시 정해 불탄절 후일(峕丁亥佛誕節後日) 근원 점오선생 목수 사(近園點烏先生沐手寫)"라고 쓰고 '취중락(醉中樂)'으로 보이는 유인(遊印)을 찍었다. 1947년 초파일은 양력 5월 27일이므로 바로 뒷날이라면 28일 그린 것이다. 이 때 김용준은 44세, 아홉 살 아래인 김환기는 35세였다. 제목에서 김환기를 '소노인(少老人)'이라고 한 역설적 조어 또한 그림과 글씨만큼 멋스럽다. 30대 중반인 김환기가 마치 노인네인양 골동을 좋아하므로 노인이라고 하면서 아직 젊은 나이이므로 '어린 노인'이라고 한 것이다.
김용준,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憙, 1888~1968)’, 1948년, 수묵담채, 34x63cm 서울밀알미술관
김용준(金瑢俊, 1904-1967), ‘소나무’, 1958년, 대상을 윤기있게 해석해내는 김용준의 특징을 나타낸 작품
근원 김용준(近園 金瑢俊, 1904-1967), ‘매화’ 1948, 종이에 수묵. 26.5x18cm. 개인소장.
근원 김용준(近園 金瑢俊, 1904-1967), ‘수향산방(樹鄕山房) 전경’. 1947년(환기미술관에 전시됨)
근원 김용준(近園 金瑢俊, 1904-1967)의 동일(冬日)
“앙상한 나무들과 까치 집과 싸리 울타리와 괴석과 흰 눈과 그리고 따스한 햇볕. 이것들이 노시사老枾舍의 겨울을 장식해 주는 내 유일한 벗들이다.”(김용준, <冬日에 題하여>)
김용준, ‘기명절지도 병풍(器皿折枝圖 屛風)’. 1942년 휘문고보 직원들이 교장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김용준에게 제작 의뢰한 작품, 국립현대미술관
노시산방(성북동 274-1) 건너편에는 만해 한용운 심우장(萬海韓龍雲尋牛莊)이 있고 아래쪽으로는 이태준 고택이 있다. 노시산방을 방문했던 김병종은 때마침 그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남겨놓고 있다: “노시산방 옛 서재 앞 가장 오래된 감나무의 한 가지는 그 끝이 길 건너 만해 한용운의 고거인 ‘심우장’ 쪽으로 향해 있고, 다른 한 가지는 생전에 지척에 살다가 함께 북으로 갔던 상허 이태준의 고가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청룡암, 미륵당 등도 그 주변에 있다.
김향안 여사가 남편 김환기의 별세 직후 완성한 유화 '김환기 초상', 1974년, 환기미술관/ 화가이자 문필가였던 김향안의 '자화상', 1973년, 환기미술관
김환기, '자화상', 연도미상.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김환기, ‘10-Ⅶ-70 #185’(1970)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년, 미국에서 시인 김광섭을 그리며 캔버스 가득 푸른 점을 채워 만들었다, 환기재단·환기미술관
*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 1913-1974)의 작품, 우주'가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처음으로 100억원이 넘는 작품가 신기록을 쓰고 있는 서양화가다. 그는 1936년 일본 니혼 대학 미술학부를 마치고 도쿄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정도로 식민지 젊은 화가의 기상은 대단했다. 해방 후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니스, 브뤼셀 등 각지를 돌며 작품을 선보였다. K미술 국제화의 원조다. 서구 모더니즘을 한국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색채로 점과 선, 면으로 조형미를 완성했다.
김환기는 시인 김광섭(金珖燮, 1905~1977년)을 존경하고 따랐으며 문학을 좋아하였다. 서정성이 넘쳤기에 시인들과 잘 어울렸다. 1966년 뉴욕에 있던 김환기가 뉴욕에 건너가 정착해 작업 활동을 하던 1970년 어느 날, 김광섭 시인의 부고가 잘못 전해졌고, 김환기는 애통한 마음으로 그의 시 ‘저녁에’에 나오는 마지막 구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냐랴’를 그렸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을 김광섭에게 헌정하듯 화폭에 푸른 점을 찍어 나간 작품이다.
사실 김환기는 김광섭뿐만 아니라 서정주, 조병화, 김광균 등 여러 시인과 매우 가깝게 지냈을 뿐만 아니라, 문학적인 재능도 뛰어난 화가로도 유명하다. 시인 김광섭은 김환기보다 여덟 살 위인 선배로 와세다 대학 영문과 출신의 수재인데, 일제강점기 학생들에게 반일 감정을 주입했다는 이유로 사상범으로 몰려 3년 8개월을 서대문 형무소에서 지냈다. 김광섭은 ‘성북동 비둘기’라는 시로 유명한데, 사실 김환기와는 성북동 이웃사촌이었다.
이 작품은 서울로 보내져 그해 한국일보 주최 한국미술대상을 받았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있었다. 실제로 김광섭이 죽었다는 비보는 잘못된 사실이다. 김환기가 접한 소식은 오보였고, 오히려 이 작품이 제작되고 4년이 지난 1974년에 김환기가 먼저 뉴욕에서 사망한다. 김광섭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77년, 오랜 투병 끝에 서울에서 생을 마감했다.
저녁에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金珖燮), 1969년
김환기, ‘구름과 달’, 193×130cm/ 김환기, ‘새벽별’, 1964년, 캔버스에 유채, 143.3×143.3cm
김환기, '달 두 개', 1961년
김환기, '여인들과 항아리', 1950년. 대형 벽화용으로 주문 제작된 작품
김환기, '항아리와 여인들', 1951년, 유화.
부산 피란 당시 그린 그림 속 한국적 양태의 여인들이 흰 달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환기, ‘귀로’, 1950년
김환기, '항아리와 여인'/ 김환기, '달밤의 화실', 1958
김환기, '무제', 종이에 연필과 과슈 , 20x32cm,.1958, 환기미술관
김환기, '매화와 항아리', 1957년, 유화, 55×35㎝, 환기미술관/ 김환기, '새와 달'
김환기, ‘사슴’, 1958년/ 김환기, '영원한 것들'
김환기, ‘성북동 집’, 1956년, MBN/ 김환기, ‘종달새 노래할 때’, 1935년, 캔버스에 유채, 178×127cm(김환기가 직접 원색엽서 도판)/ 김환기, ‘영원의 노래’, 1957년
김환기, ‘부산항’, 1952년, 매일경제
김환기, ‘판자집’, 1951년, 아트조선
김환기, ‘항아리’, 1958년, 현대화랑/ 김환기, ‘항아리와 날으는 새’, 1958년, 동아일보/ 김환기, '운월', 1963년
김환기, '창공을 나르는 새' 1958년,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김환기, '날으는새', 80.3×65.1cm, 1958년
김환기, '산과 달'. 65.1×53cm/ 김환기, '산', 1958년, 캔버스에 유채, 100X73cm, 서울미술관
김환기, '산울림19-II-73#307', 1973년, 캔버스에 유채, 264x213cm, 국립현대미술관/ 김환기, '우주(Universe, 05-Ⅳ-71 #200)'
김환기. '기좌도箕佐島' 194x145cm/ 김환기, '산' 65x81, 1958년
김환기, '항아리와 매화가지', 1958년,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김환기, ‘항아리', 1955년. 오른쪽에 서정주의 시 ‘기도’가 쓰여 있다. 환기재단·환기미술관
김환기. '정물', 96x146cm, 1957년
김환기, '새와 항아리', 52x40cm/ 김환기, '산과 달' 162.2x97cm, 1961년
김환기, '달밤', 1951년, 하드보드에 유채, 개인소장/ 김환기, '여인과 매화와 항아리'
김환기, '풍경' 38x45cm, 1936년
해방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미술사학자 최순우(崔淳雨, 1916 ~ 1984)가 김환기에게 보낸 연화장
✵ 예썰 셋, 남편 김기창의 명성에 가려졌던 박래현, 시대를 앞선 그의 작품을 다시 만나다
성북동 답사의 마지막 코스는 바로 ‘운우미술관’이다. 과거 이곳은 화가 부부, 운보 김기창과 우향 박래현의 집이었다. 청각장애를 지닌 김기창과 엘리트 여성이었던 박래현. 이들의 운명적 만남은 곧 부부의 연으로 이어졌고, 둘은 삶의 동반자이자 예술적 라이벌로 평생을 함께 했다. 하지만 한국화의 거장으로 명성이 대단했던 김기창과 달리, 박래현은 남편의 그늘에 가리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는데. 최근에서야 재평가되고 있는 화가, 박래현의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한국화를 제대로 만나보자.
*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1913~2001)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는 한때 한국 사회에서 ‘인간 승리’의 전형으로 통했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를 극복하고 화가로 성공했으니 말이다. 1913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7살에 장티푸스를 앓고 청각장애인이 된 그는, 보통 사람처럼 읽고 쓰고 의사소통을 했을 뿐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자리매김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분명 김기창의 대단한 의지와 노력이 있었겠지만, 그의 영광 뒤에 가려진 채, 기꺼이 든든한 그늘이 되어 준 두 여인 김기창의 어머니와 그의 화가 아내 박래현이 있다.
우향 박래현(雨鄕 朴崍賢, 1920-1976),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1913~2001) 합작, ‘봄’, 1956년경, 아라리오컬렉션. 사랑의 전설을 지녀 ‘부부애’를 상징하는 등나무와 그 주위에 날아든 참새의 모습을 담았다. 격렬하게 휘감아 올라간 등나무와 등꽃을 박래현이 그렸고, 주변에 어우러진 참새와 벌을 김기창이 그렸다. 박래현의 대담성과 김기창의 재치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김기창, ‘군마도(群馬圖)’, 1955,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1913~2001), <아악의 리듬>, (1967)
김기창과 박래현의 만남은 김기창이 30세 되던 해인 1943년, 그는 자신의 어머니처럼 재능 있고 인격이 훌륭한 박래현(1920~1976)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박래현이 일본여자미술학교 재학 중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고, 잠시 서울에 머물 때였다.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박래현은 학교 선생이었던 아는 언니의 가정방문을 따라가서, 방문 학생의 오빠인 김기창을 만나 처음 필담(筆談)을 나누었다. 이들은 3년간의 필담 연애 끝에 1946년 결혼식을 올렸다. 박래현의 부모님은 결혼을 결사반대하여 식장에 나타나지 않았고, 김기창은 아예 부모님이 안 계셨으니, 친구들만 참석한 조촐한 결혼식이었다. 세간에서는 장애 화가와 엘리트 여성의 만남을 대서특필했다.
박래현, ‘단장’, 1943, 개인소장. 박래현이 일본 유학시절 하숙집 주인 딸을 모델로 한 작품.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박래현의 데뷔작.
여기서 흥미를 끄는 대목은 ‘박래현의 선택’이다. 그녀는 부유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한 신분으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김기창을 만나 어떻게 결혼까지 하겠다는 담대한 생각을 했던 걸까? 박래현은 스스로 “그저 간단하게 생각했다”고 말한다. 이 예술가와 결혼하면, 계속해서 예술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박래현이 내건 결혼 조건은 단순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예술에 대해 간섭하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릴 여건을 만들 것.” 그리고 “서로 인격과 예술을 존중할 것.” 그것이 가능하다면 신체 장애쯤은 아무렇지 않게 여길 만큼, 박래현은 예술에 대한 열정이 강했다.
박래현과 김기창의 결혼사진, 1946, 개인소장. 박래현이 앞에 서서 당당한 포즈를 취한 것이 인상적이다.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1913~2001), <복덕방(福德房)>, (1953)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보리타작> , (1956)
삶과 예술의 동반자,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박래현의 선택은 옳았다. 김기창과 박래현은 서로의 예술을 진심으로 존중했다. 부부는 집에 화실을 만들어 함께 작업에 열중했고, 수많은 작품을 쏟아냈다. 이들은 1947년부터 거의 2년에 한 번씩 ‘부부전’을 열어 평생 12번의 부부전을 개최했다. 1958년 이후에는 한국을 넘어 세계를 무대로 활약했으며, 뉴욕, 타이베이, 마닐라, 하와이, 앨런타운 등에서 그룹전과 부부전에 출품했다. 해외 전시를 계기로, 부부는 일찍부터 외국에 자주 나갈 수 있었고, 전 세계 문화와 예술에 대한 안목을 넓혀갔다.
그러나, 이러한 활약 이면에는 두 사람 모두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누구보다 박래현에게 남편의 장애는 차츰 현실로 다가왔다. 특히 자녀들이 태어나자, 아이들과 대화하지 못하는 김기창의 모습은 참담했다. 박래현은 김기창에게 ‘구화술(口話術)’을 익히게 해서, 사람의 입 모양만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 김기창은 스스로 듣지 못하는데도 발성을 연습해 어눌하지만 말하는 방법을 터득하기에 이르렀다.
박래현, ‘이른 아침’, 1956, 개인소장. 이른 새벽 자는 아기를 둘러업고 생계를 위해 바쁘게 길을 나서는 여인들의 모습을 담았다.
박래현의 낮과 밤, 장애인이 할 수 없는 온갖 집안 대소사를 처리해 가며, 네 자녀를 양육했다. 밥 짓기, 청소하기, 기저귀 빨기 등 끝도 없는 집안일을 하고 난 후, 박래현은 밤이 되면 비로소 작품 제작에 매달렸다. 그런 와중에도 1956년 한 해 동안 박래현이 해낸 일을 보자. 그녀는 그해 1월 넷째 아이를 출산했고, 5월 제5회 부부전을 열었다. 6월 ‘이른 아침’이라는 작품을 그려 대한협회전에서 대상을 받았으며, 11월 ‘노점’으로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전쟁이 막 끝나고 먹고살기도 힘든 시기, 이런 대작(大作)을 그렸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인데, 박래현은 그 대작에 이전의 한국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신선하고 감각적인 선과 색을 도입했다.
박래현, ‘노점(露店)’, 1956, 개인소장.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작품. 한국전쟁 후 한국화 분야에 새로운 양식을 개척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낮 시간에 온갖 집안일로 헌신을 다하기 때문에, 밤 시간만큼은 박래현에게 온전한 자유가 주어졌다. 그 자유를 박래현은 그리고 싶은 작품을 맘껏 그리는 데 바쳤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경험과 감정에 충실하고 솔직한 그림을 그렸다. 그중에서도 ‘밤과 낮’이야말로 박래현의 심리 상태를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두 여인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 한쪽은 낮의 여인을, 한쪽은 밤의 여인을 표상한다. 가만히 손을 모으고 고양이를 재우는 편안함을 지닌 낮의 여인과는 달리, 검은 실루엣의 밤 여인은 신경질적인 선으로 그려진 축 늘어진 새의 모습을 마주하며 침잠해 있다. 낮에는 일상의 주부로, 밤에는 예민한 감각의 예술가로 ‘이중생활’을 해야 했던 박래현의 모습이 여지없이 투과된 작품이다.
박래현, ‘밤과 낮’, 1959,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밤과 낮의 두 여인을 겹쳐, 이중적인 자아의 내면세계를 표현했다.
박래현, ‘달밤’, 1960년대 초, 개인소장. 밤에 온전한 자유를 누렸던 박래현은 스스로를 ‘부엉이’에 자주 투사했다. 먹물이 아교의 농도에 따라 독특하게 번지는 효과를 활용하는 등 기법적 실험이 돋보이는 작품.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1913~2001), Ⅳ(에이피인터내셔날, 1994), p.89, pl.Mb040-U.
열매가 빨갛게 익은 가을밤 나무둥치에 부엉이 두 마리가 있다. 뭉툭한 필선으로 날개를 그리고 세필로는 얼굴의 털을 묘사했으며, 부엉이 특유의 크고 노란 눈은 또렷하고 매섭게 그렸다. 부엉이는 먹의 중첩과 농담으로 깃털의 느낌과 무늬까지 구체적으로 묘사한 반면, 일필휘지로 슥슥 그려낸 나무기둥과 저 멀리 달빛이 보일 듯한 배경처리는 깊은 가을 밤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운보는 화제畵題에 관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려 노력했다. 독수리, 매, 학과 같은 전통적 소재뿐만 아니라 부엉이, 참새와 같은 다양한 조류(鳥類)를 화제로 삼았는데, 그 중에서도 부엉이는 운보가 특히 즐겨 그렸던 소재였다.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1913~2001), <청산도(靑山島)>, 1967년
김기창이 1970년대 중반부터는 깊이 매료되어 있었던 민화의 표현방식에서 영향을 받은 화풍의 이른바 '바보산수'라고 불리는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실적인 작품들만을 그리던 초기의 그림들과 비교해보면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 김기창 본인은 이런 스타일을 만들어낸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1913~2001), <닭>, 1977년
김기창은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작품 스타일이 완전히 추상 쪽으로 옮겨졌지만 얼마 되지 않아 추상이 아닌 작품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는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소리를 못 듣는 사람이 어떻게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했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김기창은 중도실청자(中途失聽者)였기 때문에 음악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엔 부인 박래현이 1976년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57세의 나이에 사망하면서 큰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다.
박래현은 살아있는 동안 김기창의 그늘에 가려져 있기를 즐긴 것 같다. 비유하자면 김기창이 낮과 같은 존재라면, 박래현은 밤이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해설을 요구받을 때도 박래현은 거의 말을 아꼈다. 항상 김기창이 드러나고 조명받았다. 대신 박래현은 밤의 시간에 숨어서 자신의 영역을 개척했다. 돌이켜보면, 박래현의 전략은 현명했다. 그녀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계속해서 발전했고, 20세기 한국미술사를 통틀어 독보적인 예술적 성취를 이루었다. 늘 변화했고 매번 젊었다.
특히 박래현은 1960년대 외국 여행에서 얻은 영감을 통해 추상화의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다. 그녀는 마야, 아즈텍 문명, 이집트와 중국 고대 문명에서 발굴된 다양한 유물에 매료되어, 수많은 드로잉을 남겼다. 그러한 고대 유물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토대로, 박래현은 인류의 원형, 태고의 신비, 역사의 상흔, 생명의 환희 같은 주제를 자신만의 추상 언어에 녹여냈다. 커다란 화면에 아교를 많이 섞어 반짝이는 하얀 바탕재를 만들고, 그 위에 황(黃), 적(赤), 흑(黑)의 3색 안료가 번지고 스미는 효과를 자유자재로 발휘하여 제작한 작품이다. 폐허에서 빛나는 보석 같은 신비를 담은 작품들이다.
박래현, ‘작품’, 1963년경, 개인소장. 한국화 기법으로 추상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작품이다. 먹물의 번지는 효과와 신비로운 색채의 조화가 환상적이다.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1913~2001), <청자의 이미지 2>, 1965년.
김기창과 박래현은 해방과 6.25전쟁을 거친 이후에는 추상미술에 경도되어 한동안 비구상 미술에 심혈을 기울인다. 당시 전후 화단은 세계적으로 앵포르멜(Informel), 곧 비정형(非定形) 회화가 대유행하였다. 두 사람도 세계적 흐름에 따라 자신들의 미술 세계를 새롭게 하였다.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1913~2001), <탈춤>, 1961, 종이에 수묵채색, 48.5×35cm.
박래현, ‘영광’, 1966-67, 종이에 채색, 134x168㎝,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등황, 적, 흑의 3가지 색과 추상적인 형태를 통해, 오래된 폐허에서 빛나는 영광의 순간을 발견하는 것 같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박래현은 살아 있는 동안 예술적 성취는 그다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김기창만은 그녀의 역량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박래현을 위해 예술을 계속할 여건을 만들겠다는 처음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평생 노력했다. 김기창이 박래현에게 했던 가장 놀라운 지원은, 1969년부터 약 7년간 박래현이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운 일이다. 김기창의 아버지가 그의 어머니에게 해드리지 못한 것, 그것을 김기창은 아내 박래현을 위해 해낸 것이다. 아직은 어린 자녀를 데리고 한국에 홀로 남은 김기창은, 박래현이 “실컷 공부하고 지혜의 보물을 가지고 오면, 나도 그걸 골라 갖기로 하지”라며 ‘쿨하게’ 부인을 미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너무 무리했던 탓이다. “죽으면 다 자는 잠, 살아서 왜 자냐”며, 밤에도 자지 않고 작업에 몰두했던 탓이다. 박래현은 1976년 1월, 56세의 나이로 갑자기 영면(永眠)에 들었다. 사인(死因)은 간암이지만 과로사라고 봐야 할 것이다. 미국에서 판화를 연구하면서, 판화에 한국화의 재료와 기법을 융합한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하던 때였다.
박래현, ‘고완(古翫)’, 1975년, 개인소장. 박래현이 죽기 직전에 제작한 작품으로, 판화와 한국화 기법을 융합한 시도가 매우 독창적인 이 기법을 통해 화가는 어두운 배경 속에서 보석처럼 반짝이는 형상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늘 새로움을 탐구하는 박래현의 전도(前途)를 누구보다 기대했던 김기창에게 박래현의 죽음은 청천벽력이었다. “그때 내 심정은 내 목숨과 당신 목숨을 바꾸고 싶었소. 당신이 남아서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소. 만일 하늘이 허락해 준다면 기꺼이 내 목숨을 당신께 넘겨주고 싶었소.”(김기창, ‘나의 아내 박래현’ 중에서)
김기창은 박래현의 사후(死後), 그녀의 유작전, 10주기전, 판화전 등 여러 전시를 열어주었다. 박래현이 죽고 난 후에도 김기창은 ‘약속’을 지킨 것이다. 김기창의 이력에는 화가 박래현을 외조했다는 항목을 넣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그만큼, 박래현이 작업에 몰두하는 여건을 만들고, 그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데 김기창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사회적 통념을 고려하면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박래현은 그런 대접을 받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닌 예술가였다. 언제나 신선하고 도전적인 화가였다. 검은색을 좋아했고, 까만 밤을 사랑했던 화가, 밤을 비추는 반짝이는 불빛 같은 작품을 남긴 채, 불꽃처럼 사라진 화가였다.
박래현, 〈어항(魚缸)〉, 1975년, 개인소장.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1913~2001), <전복도(戰服圖)>, 일제강점기(1934년)
김기창, 〈가을〉, 1934~1935년, 비단에 채색, 170.5×110㎝, 국립현대미술관.
들밥을 이고 가는 풍속화 속 여인의 모티프를 근대적 인물화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청명한 가을 하늘과 훌쩍 큰 수수밭을 배경으로 함지박을 머리에 인 누이와 맨발의 소년, 누이 등에서 잠이 든 막내동생의 모습에 향토색이 짙게 배어 있다.
일제 강점기 때의 작품인 <전복도(戰服圖)> (1934)와 <가을> (1934)은 김은호의 화풍과 일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중일전쟁부터 각종 미술대회에서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내용의 그림 여러작품들을 남겼다. 전시 체제 때 이러한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1913~2001), 〈최후의 만찬〉, 1952년
김기창은 모태신앙의 기독교인이었다. 그럼에도 주역이나 관습적 금기에 의지하는 반 기독교적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사주나 운명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어떤 일을 할 때 늘 때와 시를 보았다. 급기야는 아내 '박래현(朴來賢)'의 이름이 좋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한자 이름을 '박래현(朴崍賢)'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종교적으로는 늘 기독교에 기대어 살았다.
김기창 '흥락도(興樂圖)'(1957,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부산시립미술관/
박래현 '건어(乾魚)'(195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부산시립미술관
김기창 '유산의 이미지', 1960년대 초반, 가나문화재단 소장.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박래현 '작품 Ⅰ', 1965년, 가나문화재단 소장. 부산시립미술관
KBS1<유홍준과 함께하는 예썰의 전당 4부>[45회] 기역을 걷는 시간-망우역사문화공원 편이 다음 주 방송예정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KBS1 <예썰의 전당>, [42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저자 유홍준 교수, 예술인의 성지, ‘성북동’ 편, (2023년 03월 18일 22:30 방송)/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 문화유산 정보/ 조선일보 2023년 01월 07일(토) 사회〉아무튼, 주말(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 Daum·Naver 지식백과/ 글과 사진: 이영일∙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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