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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 김연아 스크랩 김연아 선수 연대기(年代記)
무한의주인공 추천 13 조회 1,503 14.01.27 18:48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소치올림픽이 끝난 뒤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올릴 글을 써두고 심심풀이로 김연아 선수의 연대기를 써봄. 대회 때마다 늘어나는 새내기 팬들에게 짚어주는 글인데, 큰 사건들은 많은 팬들이 두루 알려주고 있는 만큼 큰 흐름만 간추렸음. 특히 많은 애를 쓰며 공이 컸던 소위 영상 능력자들이 왜 사라졌는지 그 사건들에 얽혀 들어 있음. 당시 박분선 사건만 스크랩해뒀을 뿐이라 입말로 주저리주저리 옮기는 기억임.

 

199095일 부천시 원미구 도당동에서 출생.

1993년 네 살 때 경기도 군포시로 이사.

1996년 일곱 살 때 피겨를 좋아하던 어머니가 과천시 빙상장에서 실시하는 2주짜리 방학 특강 프로그램에 언니와 함께 등록. 선수들이 아니라서 대개 스케이트를 대여했지만, 김연아 선수는 그 노란 끈의 빨강색 낡은 스케이트 부츠가 있었음. 고모가 맞춤하다 싶어 이웃이 버리려던 것을 얻어줌.

특강이 끝난 뒤 마스터반에 등록할 때 새로 흰색 스케이트를 구입. 3회씩 10개월간 강습이 끝날 무렵 워낙 겁 없이 얼음 위에서 노니는 모습에 사로잡혔던 류종현 코치가 타고난 가늘고 긴 몸을 알아보고 전문 레슨을 제의. 링크에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자식의 재능을 묻어두지 않은 어머님의 다짐이 세계피겨의 역사로 이어질 싹을 키웠음.

우리나라 피겨에 그 나름 기념할 만한 해였음. 본래 우리나라는 국가대표 피겨코치를 따로 둔 채 선수들 전담코치가 태릉빙상장에 발을 들이지 못했음. 1996121일에 끝난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남자싱글의 이규현만 8위로, 여자와 아이스댄싱은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음. 123일에 강화회의를 벌여 선수마다 개인코치가 맡도록 규정을 바꿈.

어머니는 그 첫 스케이트 부츠조차 버리지 않고 고이 지니며, 김연아 선수가 단지 피겨만 잘하는 스케이터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뿌듯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길 바랐음.

1998년 여덟 살 나이에 나가노올림픽에서 펼친 미셀 콴의 경기를 텔레비전으로 지켜보고 금메달이 아닌 대중과 교감하는 그 몸짓을 자신의 본보기로 삼았음. 그만큼 눈과 천성을 타고났음을 의미함.

1999년 열 살 봄에 어머니와 떨어져 첫 미국 전지훈련을 떠남. 어머니가 홀로 보내야 하는 안쓰러움에 가슴을 졸인 반면, 정작 초등학교 3학년은 멍연아였음. 미국에 머무는 내내 혼자 머리까지 빚은 채 항상 먼저 일어나 훈련준비를 했고, 여느 선수들이 노는 시간에도 장갑과 양말을 빨아 스스로 챙기는 똑순이였음.

당시 훈련장소가 로스앤젤레스 언저리의 빅 베어 레이크애로헤드 아이스링크였는데, 미셸 콴(Michelle Kwan)화장실 대면을 치렀음.

대개 미국 전지훈련 때 그들 코치에게 점프를 배웠다고 잘못 알려짐. 김연아 선수를 비롯해 우리나라 선수들 점프 지도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피겨국가대표 출신 코치들이 맡았음. 1991년 동계 유니버시아드에서 한국 피겨 사상 첫 국제 대회 메달을 따낸 정성일 코치를 기른 뒤 미국으로 건너가 1992년부터 1998년까지 미국대표팀 코치를 지냈던 김훈(남자)과 윤호진(여자) 코치들임. 즉 배우기 좋은 환경을 찾아갔을 뿐, 김연아 선수의 모든 기술의 뿌리는 토종 대한민국 표임. 지금도 미국 내에서 이 두 코치들은 학부모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유명코치들임. 반면에 그들은 한 목소리로 국내 지도자들의 곧은 가르침임을 추어올림.

공중자세조차 바른 몸가짐 그대로 스케이트를 지치는 이동하중(移動荷重, travelling load)을 곧은 상체 중심으로 이어가는 기본기와 제자리에서 3회전을 채우는 지상훈련은 아예 어머님의 가르침이었음. 그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았음. 코치들에게 맡긴 채 매니저 역할로 훈련과제만 채우게 하는 여느 피겨맘들과 달랐음. 밤샘 공부로 혼자 하는 연습시간을 매의 눈으로 뜯어보며 가르칠 만큼 대한민국 최고의 피겨 이론가임. 자연히 억지로 피겨를 시킨다는 군소리를 듣곤 했음.

200111세에 여름방학 때 콜로라도스프링스 스케이트 클럽으로 전지훈련. 이때 김훈 코치에게 트리플 토룹과 살코를 집중적으로 지도 받았음. 안전한 연습을 위해 몸을 매달아주는 히니스라는 보조기구를 써서 점프를 뛰는 동영상이 그 시절이었음. 점프감각을 기를 때 흔히 사용함.

국내로 돌아와 롯데월드 링크에서 트리플 러츠를 성공했음. 코치들이 말을 아끼고 가리지만, 점프가 잘 안 되면 울면서도 뛰는 독종이었음. 남이 아니라 자신에게 지는 걸 끔찍하게 싫어해서 이거 못 뛰면 집에 안 가하는 다부진 마음가짐이 가장 어려운 트리플 점프인 러츠를 발목이 굽도록 바르게 익힘. 플립도 한 번 해봐라 하는 신혜숙 코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처음엔 싱글로 그쳤지만, 곧장 정석 플립을 날아서 서로 놀람. 구제금융 시절에 아버님 사업이 부도가 난 뒤 갈수록 경제적 부담이 늘어나 피겨를 그만둘 뻔했음.

영화 물랑 루즈(Moulin Rouge)’를 보고 전설의 록산느의 탱고(El Tango de Roxanne)’를 스스로 피겨에 쓰려고 선곡해둠.

20024월 첫 국제대회인 슬로베니아 트리글라브 트로피(Triglav Trophy) 대회 13세 이하 노비스 부문에서 우승. 이때 무언가 색다른 동작을 궁리하던 신혜숙 코치에게 이거 어때요?”하며 유나 스핀을 선보였고, 연습을 지켜본 대회 관계자들이 바로 애국가를 준비함. 여름방학 때 역시 콜로라도스프링스로 전지훈련, 마지막이었던 루프 점프에 마침표를 찍어서 5종 트리플을 갖춤.

2003년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국가대표로 선발. 11월에 크로아티아 골든베어(Golden Bear) 대회 노비스 부문에서 우승. 반면에 엄청난 연습량으로 매달 무너지는 스케이트 부츠는 물론, 무릎부터 허리와 꼬리뼈며 고관절 부상이 자라나 온 몸을 들볶았음.

이 시절 어머니와 말다툼이 단지 사춘기 탓으로 알려져 있지만, 속사정은 달랐음. 가족들이 너무 무뚝뚝하다고 김연아 선수 본인이 웃어댈 만큼 말을 아끼며 믿음이 깊은 내리사랑들이라 김연아 선수 본인이 먼저 그만두겠다고 해서 사춘기 방황으로 불거졌음. 빠듯한 가정형편을 어린 중학생이 헤아렸고, 늘 자신을 돌보느라 치이는 언니에게 미안해서 그만두려고 했음. 꿈을 이뤘던 밴쿠버올림픽 전까지 본인 스스로 말을 가려서 팔자려니 하며 에둘렀음.

당시 김세열 코치가 2월에 있을 동계체전만이라도 나가자고 설득해 국내 최초로 트리플 5종을 뛰는 여자선수로 가뿐하게 우승. 너무 차이가 나다보니, 일부 피겨맘들에게 따돌림을 당했지만, 결코 남의 말에 흔들리지 않음. 심지어 져주라는 구박까지 받았음. 곡의 흐름을 타는 법을 짚어줬을 뿐만 아니라 수줍음 속에 감춰진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우뚝 키워준 김세열 코치의 개발과 표현에 대한 바른 지도가 돋보였던 시기.

아르바이트로 안무를 짜던 2008년 세계선수권 우승자인 캐나다의 제프리 버틀(Jeffrey Buttle)에게 영화 옌틀(Yentl)’의 주제곡인 파파 캔 유 히어 미(Papa, Can you hear me)’를 받아옴. 지금 시니어에서 후배들이 다시 써도 좋을 구성이 빡빡한 프로그램임.

20049월에 주니어 그랑프리 헝가리 대회에서 1, 잇달아 중국 대회에서 2위 이후 12월 파이널에서 준우승.

20053월에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준우승. 한국피겨 111년만에 세계선수권 메달리스트.

당시 쇼트 프로그램인 눈보라(Snowstorm)’‘에서 필수요소인 룹 점프를 뛰다 넘어지며 펜스에 부딪혀 지워지지 않는 멍울을 남겼음.

보통 1,500만원이 넘는 안무비용을 아끼기 위해 프리 프로그램은 지난 시즌 그대로 가고, 톰 딕슨(Tom Dickson)에게 록산느의 탱고안무를 받아옴. 그때까지 어머니가 손수 만들었던 의상도 그의 아내가 제작. 비용이 쪼들려 갈라 의상은 마련 못했음.

20059월에 주니어 그랑프리 슬로바키아와 불가리아 대회를 연달아 우승.

불가리아 소피아컵 경기에서 첫 연속 트리플에서 실수를 한 뒤 사전연습조차 없었던 후반 러츠에 연결 토룹을 즉흥적으로 붙일 만큼 나이를 넘어선 경기운영 능력을 선보였음. 이 동영상은 팬들 사이에 찾을 수 없는 보물임.

같은 해 11월에 체코에서 열린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을 우승. 2006년 이태리 토리노올림픽에 나가게 해달라고 징징거리다 안방잔치였던 시니어 그랑프리 대회에서 러시아의 이리나 슬루츠카야(Irina Slutskaya) 선수가 두 번 다시 일본 땅을 밟지 않겠다고 한을 품을 만큼 꽈배기공주에게 온갖 사탕발림을 버무릴 때였음.

20063월에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그 꽈배기를 24점이 넘는 차이인 177.54점으로 우승. 이때 발목인대 부상으로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음. 항상 부상을 달고 지내다보니, 가뜩이나 더 부상에 털털하지 싶도록 온 몸이 성한 구석이 없음.

모녀가 직접 기획사들을 돌며 계약을 의뢰했으나, 번번이 퇴짜를 맞았음. 1999년 전미 피겨선수권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남나리 선수에게 일찌감치 후원을 해주다 엉덩이뼈 부상으로 마셨던 김칫국이 그 대회에서 5위에 오른 목예빈 선수에게도 이어져서 선입관만 강했음. 할 수 없이 4월에 세계적인 스포츠 마케팅 회사인 아이엠지(IMG)2010년 말까지 계약을 맺었음.

5월에 캐나다 토론토 크리켓클럽으로 전지훈련을 떠났음. 표현력을 길러줄 안무가로 김세열 코치가 연아를 행복한 스케이터로 만들어 달라하는 부탁을 메일을 보냈던 데이비드 윌슨(David Wilson)을 찾아감. 이미 미셀 콴을 넘어설 스케이터로 헤아리고 부족한 바를 채워주려던 참 스승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함. 그때까지 김연아 선수는 좋아하지만, 즐길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망신창이 몸으로 이겨오느라 가늘고 긴 몸에 무척 심각한 표정을 지닌 소녀였다하는 윌슨 코치의 기억만큼이나 웃음을 잃고 있었음. 그 모습에서 학창시절 따돌림을 겪었던 자신을 돌아본 윌슨 코치가 미친 사람을 자처할 만큼 온 마음을 기울여 웃음을 안겨줌. 2주 만에 드디어 김연아 선수 얼굴에 웃음꽃이 지폈음.

당시 국내 방송언론과 빙상연맹의 피겨 인사들이 트리플 악셀을 뛰지 않으면 일본의 안방공주를 이기지 못한다고 분위기를 몰아갔음. 선수를 도와줄 생각이라곤 없이 흰소리만 늘어놓는 얼뜨기들이 대선배라며 호들갑만 떨었음. 7월에 김연아 선수가 훈련비용이 때문에 전지훈련을 포기할 처지라는 방송을 본 지에스(GS) 칼텍스 허동수 회장이 아무 조건 없이 7,000만원을 지원해줬음. 그밖에 드러내지 않고 도움을 줬던 몇몇 사람들이 있었음.

8월 말경 국내로 돌아와 어머님이 빙상연맹에 전화를 걸어 은퇴를 고함. 스케이트 날을 김연아 선수의 체감중심에 맞추느라 밤새 꿋꿋하게 씨름을 벌였던 어머니조차 손을 들만큼 부츠가 버티질 못했음. 지기 싫어하는 김연아 선수부터 제대로 훈련을 할 수 없자 꼭 운동을 해야 할까하는 의구심을 곱씹을 만큼 1년 가까이 블레이드가 무너져 전지훈련 내내 고생이 심했음. 그때 빙사연맹 부회장이었던 이치상 사무국장이 달려가 3시간 동안 면담을 나눈 끝에 조기은퇴만은 추슬렀음.

김세열 코치가 몸이 아파 휴식기를 갖으며, 빙상연맹에 서너 달 그랑프리 시리즈만 맡아줄 코치를 요청. 9월에 박분선을 소개하며 빙상연맹이 그야말로 빙신 짓을 했음.

200611월 초에 시니어무대에서 캐나다 그랑프리 대회에서 3. 이때 프리에서 잦은 실수를 해외 중계진들은 주니어에서 갓 올라온 체력 탓으로 말하지만, 그보단 부상이 깊어지던 중이었음.

박분선이 도움은커녕 코치할 역량이 없음을 깨달은 어머니가 교체를 생각하기 시작. 2006116일에 오십원이 수석 코치로 2007년부터 국내 코치와 이원체제임을 발표.

같은 달 16일부터 열린 프랑스 에릭 봉파르 대회에서 우승해 한국피겨 113년 역사상 첫 시니어 국제대회 금메달리스트로 등극. 한 달 뒤 그랑프리 파이널을 앞두고 또 스케이트가 헐거워져서 투명테이프로 둘둘 감아 연습. 팬카페 회원들이 물어물어 알아봐준 일본의 피겨스케이트 전문가라는 사카타 세이지(坂田淸治)를 바쁜 시간을 쪼개 건너가 만났지만, 제작기간이 길어서 만들어질 때까지 가죽이 헐거워진 기존 부츠를 녹인 플라스틱으로 안쪽을 덧대 신었음. 240센티인 사이즈가 발에 작다며 3센티 큰 치수를 신으라고 짓졸랐음. 전문가라고 사기를 친 뒷이야기는 연대기에 맞춰 더 있음.

[애증의 스케이트 부츠]

다달이 무너지다 보니, 들어가는 비용도 여느 선수들보다 더 많았음. 미리 여벌을 마련해 길을 들여놨다가 신지를 못하니, 경기를 앞두고 부츠에 발이 적응하기도 급했음. 발만 상처투성이가 아니라 자주 넘어지고 구르며 부상을 부쩍 키웠음. 그랑프리 4차 프랑스 대회를 마쳤을 때도 은퇴를 떠올릴 만큼 스케이트 부추 때문에 막막한 상황이었음.

첫 광고에 얽힌 IMG의 방해

계약 이후 그들은 김연아 선수에게 지원은커녕 그랑프리 메달로 상품성을 읽은 국민은행이 먼저 접근해도 그때마다 뿌리쳤음. 다행히 1126일에 싸이 홈페이지에 관계자가 직접 글을 남겨 12월에 2억 원짜리 단발 광고를 찍었음. 이때 어머니는 주택담보대출이 버젓이 남아 있는데, 피겨 꿈나무 여섯 명에게 총 1200만원을 나눠줌. 그리고 저마다 어려운 빙상종목 선수들의 사정을 알려서 국민은행이 차후 빙상연맹 자체를 후원하도록 이끌어줌.

20061212일 박분선에게 경희체육동문의 밤 행사에서 지도상 수상. 이때부터 박분선이 묻어갈 꽁수를 부렸다고 나는 생각함. 김연아 선수 어머니도 대회를 거듭할수록 한심한 박분선에게 넌더리를 냈지만, 그랑프리 파이널까지 참기로 했음.

12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연습 중에 점프 동작을 잇질 못할 만큼 허리 통증이 덮침. 도핑검사에 걸리지 않는 약한 진통제를 먹으며 치른 쇼트에서 4.28점이 뒤진 3위였지만, 프리경기 당일 오전에야 그나마 컨디션이 올라와 등을 강하게 테이프로 압박하고 종합우승을 이뤘음.

그때 박분선은 싸이질이나 하며 김연아 선수 덕에 자신에게 쏠린 관심만 즐기고 있었을 만큼 코치는커녕 나잇값도 못하는 동냥아치였음.

2007126일에 방송을 탔던 한국방송공사(KBS)의 신년 다큐멘터리 종달새의 비상20061123일부터 그 눈물겨운 과정으로 전국을 울리며 폭넓은 팬들이 생겨남.

풍선의 난

20061219일 멍청한 대한빙상연맹이 박분선에게 200만원 포상금 지급. 다음날인 1220일 에스비에스(SBS) 스포츠 중계석 김연아 특집에 심한 부상으로 휴식을 위해 거절했던 자리를 아무런 상의조차 없이 박분선이 출연. 그 무렵 어머님이 코치를 계속 맡겨야 할지 생각해봐야겠다고 알림, 이때 박분선도 생각해보시라고 했음.

20061227일 홀림 피겨에 김민해라는 아이디가 나타나 투 코치 체제가 아닌 것 같아요하는 제목으로 글을 올림. 주요 골자는 코치가 다음 시즌부터 박분선이 아니라 오십원이라서 걱정이다, 선수가 코치에게 감사 인사를 안 하는 것 같다, 연아양을 위해서 박코치와 오서 코치가 같이 했으면 좋겠다, 하는 내용이었음. 물론 그 당시엔 팬들도 흔히 이원체제로 그 속사정을 전혀 몰랐음.

20061228일 일요신문 이영미 발기자가 김연아 선수와 어머니가 박분선에게 고마워할 줄 모른다는 기사를 올림. 김연아와의 인연은 내년 3월까지 잡고 있다며 인터뷰에서 박분선은 어느 선수나 다 부상의 위험과 부상에 처해 있어요. 연아 혼자만 발목과 무릎이 아프거나 허리가 아픈 게 아니거든요. 따라서 부상 때문이라든지, 체력 부족 때문이라는 이유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제 아쉬울 게 없잖아요. 최고의 조건과 대우도 받고 있는 데요 뭘. 연아 입에서 최상의 컨디션으로 좋은 결과를 냈다는 얘기가 나왔으면 좋겠어요하고 찢어진 아가리를 놀려댐.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손이 부들부들 떨림.

200712일에 기어이 김연아 선수가 디스크 진단을 받음. 다음날 종합선수권 출전 포기 후 아리랑 티브이(TV)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지만, 치료에 전념하기 위해 정중히 거절하자 14일에 그 풍선이 또 혼자 나섰음. 인맥을 동원한 방송언론으로 자기를 코치로 삼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짓졸라댐.

아리랑 방송 중 박분선이 해댄 말을 하도 군더더기가 많아 내가 덜어서 옮김. “김연아 선수는 주니어 때 굉장히 점프력에 강한 선수로 알려졌는데, 시니어 무대에서는 1,2,3등 하는 선수들 점프가 오십보백보로 다들 잘하기 때문에 저만의 장점을 만들어야 세계적인 선수로 올라설 수 있다는 걸 제가 강하게 인식하고 가르쳤던 선수예요. 김연아 선수 비디오를 전부 보며 제가 알아낸 게 표정연기가 없구나, 하고 느꼈거든요. 2, 4차 그랑프리 파이널까지 보시면 표정이 점점 발전된 느낌을 받으실 거예요. 그만큼 본인도 노력했고, 코치인 저 역시 포인트를 하나하나 잡아주면서 그런 면들이 집중적으로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이 말 토씨 하나까지 송두리째 거짓말임.

200718일에 빙상연맹이 김연아 선수에게 세계선수권 출전권 확정해줌. 기다렸던 어머니가 그날 오후에 코치 교체를 전화로 통보. 그러자마자 박분선의 싸이 일촌인 뉴시스의 이상철이 ‘16개월 동안 코치, 일방적인 계약해지 통보, 이유를 모르겠다하는 엉텅리 기사를 내보냄. 이어서 뉴시스 남장현도 후속 보도로 다뤘음. 수많은 언론과 네티즌들이 모녀를 무작정 비난해댐. 졸지에 성공하자 가르쳐준 스승을 내친 사람들로 받아들였음. 그 거짓말을 떠나 피겨에서 코치 교체는 국내에서도 사정에 따라 흔히 벌어지니, 우리나라 모든 피겨선수들은 죄다 배은망덕한 제자들이란 같잖은 소리였음. 그때까지만 해도 박분선의 의도대로 돌아가는 흐름이었음.

억지소리에 끓어오른 팬들의 분노로 팬카페와 디씨 겨울 갤러리에서 두루 의논을 나눔. 본인이 팬카페 회원이면서 운영자에게 짧은 메시지만 보냈을 뿐, 박분선은 어떤 해명도 하지 않았음.

200719일에 김연아 선수 어머니가 카페에 첫 글을 올림. 일방적이지도, 갑자기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지적. 원인을 모르겠다, 하는 박분선에게 일일이 밝혀서 서로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 좋다고 체면치레나마 챙겨줌. 팬들이 그 아리랑 티브이 인터뷰를 알려주자 앞으로 기사가 나올 때마다 실체에 대해서 밝히겠다고 다짐하는 글을 다음날 다시 올림.

같은 날 자정이 가까워서 홀림에 이젠 조용히 끝내길하는 그 김민해의 글이 나타남. 본인은 박분선과 김연아 선수 둘 다 아끼는 팬임을 주장. 선수와 어머니에게 해를 끼칠까 조바심치던 홀림 팬들이 이전에 쓴 글을 떠올리며 박분선과의 관계를 물고 늘어짐. 팬들 관점에선 우리나라 피겨선수 계보에도 끼지 못했던 인간을 팬으로 자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한 노릇이었음.

2007111일에 아리랑 티비 인터뷰를 찾아본 어머니가 표현력이라곤 지도한 적이 없었음을 지적. 그날 홀림에서 김민해가 이제야 쪽지를 보내셨어요하며 쪽지를 주고받았다면서 홀림 팬들이 전할 얘기가 있으면 직접 김연아 선수 팬카페에 글을 올리라고 했다는 쇼를 벌임. 오후로 넘어간 뒤 박분선에게 해가 가는 것 같다며 김민해가 삭제했습니다하는 글을 띄움.

같은 날 오후 321분에 박분선이 자신의 아이디로 다음 팬카페에 해명하는 글을 올림. 곧장 팬들이 김민해와의 관계를 추궁하며 아이피(IP) 추적에 나서자마자 글을 바로 삭제하고, 카페 아이디뿐만 아니라 다음 계정 자체를 삭제. 더불어 김민해가 홀림에 올렸던 글들이 몽땅 지워짐.

[박분선이 올렸던 해명 글]

글쓰기부터 김연아 선수 그림자도 밟지 못할 위인임이 훤히 드러난다. 쉼표라도 찍어야 숨을 고르고 문장이 꼬이지 않는데, 그조차 모름.

저도 어머님께서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 보시고 싶다고 하셔서 전화를 기다린 상태였고 어머님께서 결정하시고 연락을 주셔서 저는 연맹에 제일 먼저 연락을 하였습니다. 연아가 국내 선수가 아닌 세계적인 선수인 만큼 큰 대회가 두개 있고 연아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일이 생겨 제일 먼저 연맹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연아의 기사를 집에 와서 확인을 하였고 기사가 넘 부풀려져 조금은 황당했습니다. 기사가 난 후 기자님들께서 전화가 계속 오더군요. 전 기사들이 잘 못나간 만큼 다시 얘기를 드렸습니다. 6개월만 가르쳤고 연아 어머님은 기술적인 면과 전 예술적인 면을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연아 코치라는 이름으로 모든 공을 제가 받은 것 같아 너무 죄송하더군요. 또한 제가 글을 읽어보니 아리랑 티비 건이 문제가 되었는데 전 그분들께 연아양에 대한 프로그램이거나 연아양에 대한 질문이면 안하겠다고 얘기를 드렸습니다. 그 분들께서는 연아양 프로그램도 아니고 연아양에 대한 질문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전 우리나라 빙상을 알리기 위한 프로그램 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부담스러워 처음에는 거부했다가 우리나라 꿈나무들의 수준이 세계적인 선수들과 비교해도 손색없고 또 그동안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연아 같은 선수를 우리나라에서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 알리는 프로그램이라기에 다시 생각하고 수락을 했습니다. 녹화 할 때는 질문이 조금 달라지고 그때는 제가 연아의 코치였기에 우리나라 선수들의 제 느낌과 우리나라에도 연아와 같은 선수가 있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이유도 모른 채 느닷없는 통보였다는 주장만 사실이 아님을 밝혔을 뿐임. 자신은 연맹에만 연락했다는데 뉴시즈에서 그 사기 기사가 나오는 데 걸린 시간은 기껏 1시간 반 남짓이었음. 나머지는 도통 해명이라곤 없음. 도리어 아리랑 방송에 나가 떠벌였던 표현력 지도를 자신의 공으로 거듭 내세우는 꼴이었음. 힘 있는 사람들 안다며 자기를 떠나면 끝장 난 줄 알라고 공갈협박을 일삼았던 이 더러운 인간이 지금도 롯데월드인지, 목동인지 어디선가 아이들을 가르친다니, 기가 막힐 따름임.

다음은 2007111일에 김연아 선수 어머니가 썼던 글임.

며칠 전 분노에 치를 떠는 연아의 눈물을 봤습니다. 저는 그만 가슴이 미어져서 이미 유명인의 엄마 역할을 집어던지고, 이기적이고 막되 먹은 모성으로 돌아갈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는 걸 알고 있지만, 연아의 명예회복이 되는 날까지 단지 엄마 역할로 돌아와 그 어떤 분이 추구하고자 하는 추잡한 명예보다 내 딸의 순수하고 고귀한 명예를 되찾으려 합니다.”

20073월에 치렀던 역사적인 시니어 세계선수권이야 긴 말이 군더더기임. 비록 종합 3위에 그쳤지만, 피겨의 새로운 세계 전문가들이 우러름.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운 쇼트경기 직후 관중들 반응이 좋아서 연기가 더 잘 됐어요하는 인터뷰는 공연예술을 아는 사람들에겐 그 몸짓을 즐기는 신명임을 바로 알 수 있었음. 무대연기에서 일컫는 보이지 않는 장막을 이미 걷어내고 대중과 교감했음을 뜻함. 보이지 않는 장막은 맨눈이 버글거리는 무대공포증을 피하기 위해 그 구름 관중이 없다고 암시하는 자기방어임. 자연히 표현력이 혼자 놀지 관객에게 던지지 못함. 쇼트에서 스텝을 보면 그야말로 춤을 추며 하얀 얼음이 구름인 양 두둥실 떠다니듯 발을 놀림. 연극쟁이들이 흔히 말하는 미친 연기였음.

스케이트 장인이라는 환갑을 꼰대가 보내준 스케이트 부츠는 그냥 버림. 커서 발이 놀아났음. 20074월에 일본 아이스쇼에 초청받아 참가. 이때 호텔로 찾아온 우익 공통들이 어머니에게 다시는 일본에 오지 말라고 으름장을 부림.

IMG와의 분쟁

국민은행 광고를 통해 일본자본으로 굴러가는 그들에게 얻을 바가 없음이 분명해졌음. 어머니가 거듭 연예기획사까지 발품을 팔았지만, 죄다 썩은 동태눈깔들이었음. 정말이지 울며 겨자 먹기로 2007425일 아이비(IB, 이하 과자네’)로 옮길 수밖에 없었음. 당시 상황은 정말이지 어머님의 혜안(慧眼)이 돋보임. 여전히 트리플 악셀 운운하며 루프 점프를 뛰지 않으면 스포츠정신에 어긋난다는 흰소리를 지껄인 이지희 빙상연맹 부회장은 숫제 국적이 일본인지 의심스러웠음. 방송언론도 허튼소리만 짓조를 때 어머니는 예술성이야말로 바른 길임을 곧추세움. 훈련에서 70퍼센트 가량 성공률을 낳긴 했지만, 90퍼센트가 아니면 실전에서 쓰지 않았으며, 김연아 선수가 무릎을 망치로 치는 것 같다고 할 만큼 부상 위험만 컸음. 자연히 꾸준히 캐나다 전지훈련으로 데이비드 윌슨의 지도를 받아야 했음. 국민은행은 아직 정식 후원이 아니었으니, 과자 부스러기가 3년간 해마다 연말에 돌려받는 조건으로 건네는 돈놀이 5억원이 당장 아쉬운 처지였음. 때문에 그들이 내미는 노예계약을 받아들인 어머니의 배포가 오히려 놀라움.

2013년 세계선수권 이후 일그러진 스포츠 영웅들을 들먹이며 김연아 선수의 팬들을 걱정하는 척했던 장달영이란 변호사가 과자네에서 한솥밥을 먹을 때임. 곧 노예계약의 법적자문을 했던 쓰레기임. 이 인간이 계약을 맺은 뒤 에이전트계의 히딩크네, 마이다스의 손이네 하며 언론기사에 자주 오르내렸음. 이중계약으로 계약무효라며 아이엠지가 소송을 건 채 20079월 현대카드 슈퍼매치에 출연을 강요당함. 우리나라에서 김연아 선수가 빠진 아이스쇼는 흥행 자체가 불안하니, 공동 주관인 아이엠지가 소송을 취하하는 조건을 걸었음.

어이없이 하루 전날 목동 아이스링크가 지붕 보수공사 도중에 인부의 담뱃불로 화재가 일어나 아이스쇼는 취소됨. 외국 선수들과 해외 관광객들이 보상을 요구하며 항의에 나서자 16세 여고생에게 사과를 앞세우곤 관계자들은 모조리 쥐구멍으로 숨어버렸음. 모든 방송언론에서 현대카드 슈퍼매치가 사라지고, 갑자기 김연아 아이스쇼로 둔갑해버렸음. 모조리 김연아 선수가 잘못한 듯 대한민국 개떼들이 달라붙어 그 어린 학생을 너덜너덜 물어뜯었음.

그 책임을 지고 롯데월드 링크에서 저 홀로 사과공연까지 했음. 제 잘못도 아니요, 아직 보호를 받아야 할 미성년자를 떠다민 개아들들이었음. 지루한 법정싸움은 해를 넘겨 2008530일 서울 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 29부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함. 재판에서 이겼다고 끝이 아니었음. 이후 유투브로 싸움터를 옮겨 세계 스케이터들 중 조회 수가 압도적으로 높은 김연아 선수의 동영상만 저작권을 구실로 속속들이 지워짐. 또 심판 판정과 비비기 점프를 낱낱이 분석한 동영상도 마찬가지였음. 공정한 판정에 의문을 제기한 김연아 선수의 영상도 숱하게 지워져서 하루하루 유투브에서 전쟁을 치르는 의병 같은 팬들이 많았음. ‘빵집아들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이른바 영상 능력자의 활동이 두드러졌던 시기. 좋지 않게 끝난 이야기는 그 사건에 맞춰 나중에

2007년 작품은 쇼트가 박쥐(Die Fledermaus)’, 프리는 미스 사이공(Miss Saigon)’이었음. 김연아 선수를 그 나이답게 춤추게 할 밝은 정서가 전자(前者)였고, 운동능력을 한껏 끌어내 숨 가쁜 스피드 속에 점프조차 음표를 찍듯 안무의 하나로 풀어감. 올림픽에 맞춘 윌슨 코치의 꼼꼼한 장기계획이었음. 11월에 컵 오브 차이나와 컵 오브 러시아에서 연이어 1. 러시에서 133.70점으로 프리 프로그램 세계신기록 작성. 12월 이태리 토리노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종합우승해 2연패 달성.

2008213일부터 경기도 고양시 어울림링크에서 열리는 4대륙대회에 참가예정이었지만, 고관절 부상이 부풀어 출전무산.

한 달 뒤 3월에 열렸던 스웨덴 예테보리 세계선수권은 피겨사의 치욕임을 두고두고 후대에 전해야 함. 쇼트와 프리에서 각각 러츠 점프를 실수하긴 했지만, 당시 대회 분위기는 고관절 부상으로 연습조차 벅차하는 김연아 선수를 이미 줄을 세웠던 게 분명함. 본인 스스로 실망하도록 쇼트에서 러츠 점프에서 넘어졌을 뿐 아니라 나머지 요소에서 레벨을 많이 놓쳤음. 기술과 구성이 각각 32.71, 28.14으로 합계 60.85점을 받아 5위에 오름. 카롤리나 코스트너(Carolina Kostner)도 같은 구성(3F-3T, 3Lz, 2A)이었는데, 똑같이 러츠를 실수했음. 기술이 36.34, 구성에서 27.94점을 받아 합계 64.28점이었음. 일본 꽈배기 역시 러츠에서 롱 에지 감점을 받았고, 김연아 선수만큼이나 다른 요소들 레벨이 두루 낮았음. 기술은 35.22, 구성이 28.88점으로 64.1점이라 1위와 5위가 겨우 3.43점 차이였음.

큰 기대 없이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자 하고 자신을 다독일 만큼 김연아 선수는 진통제 없인 버티기도 힘들었음. 입상자 셋 중에 코스트너가 먼저 프리에 나섬. 3연속 점프(3F-3T-2T)만 무난히 시작했지만, 나머지는 전부 왜틀비틀 착지해서 다운그레이드가 붙을 만했던 두셋도 그냥 넘어감. 기술은 61.88점을, 구성에선 58.52점을 받아 120.4점을 기록. 후반 러츠를 싱글 처리한 것만 빼고 김연아 선수는 모든 점프와 레벨을 채우며 혼신의 연기를 펼쳤는데, 기술과 구성에서 64.82, 58.56점으로 123.38점만 줬음. 수준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난 프리에서 고작 2.38점만 더 얹어줌. 점수 발표와 함께 관중석에서 길고긴 야유가 경기장을 덮어버림.

트리플 악셀을 비비려고 발목이 미리 돌리다 밸런스가 뒤틀려 발라당 나뒹굴었던 인간 정빙기 신화를 남기고도 30초 가까이 얼이 빠져 얼음만 지친 꽈배기는 정작 가장 높은 60.57점의 구성점수를 받았음. 사기 점프에 점수를 처발라주는 짓은 늘 해댔으니, 61.89점의 기술은 넘긴다 한들 구성점수는 아예 줄 세우기였음을 생생히 보여줌. 예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기는 했음. 남나리 선수가 무서운 십대로 등장했던 1999년 전미선수권 때 쇼트 프로그램 중에 뒤통수를 얼음에 심하게 부딪혀 경기를 중단했다 다시 이어졌음. 이는 선수보호를 위한 조치였으니, 해석은 전혀 다름. 김연아 선수의 구성점수는 심지어 4자 다리에 점프 질이 워낙 좋지 않았던 나카노 유카리(中野 友加里)보다 낮았음. 우승을 하고도 일본이 경기 동영상을 유투브에서 지워대느라 바빴음. 김연아 선수는 너덜너덜 짓찢긴 마음을 어머니와 함께 명동성당을 찾아 금빛의 아름다운 소녀라는 이름 뜻을 뭉뚱그린 듯 스텔라(, Stellar)라는 세례명을 받았음.

분노가 들끓는 마당에 아이엠지가 인간 정빙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현대카드 슈퍼매치를 들여앉힘. 김연아 선수보다 스타성이 더 크다, 세계챔피언 자격이 있다, 한국의 많은 팬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아이스쇼다, 그 주인공이 2009년 월드와 2010년 밴쿠버올림픽의 우승자일 거라며 개소리를 짖어댐. 우리나라에서 테러를 당할지 모른다고 수선을 떨며 경호원까지 거느린 채 리무진을 타고 다니며 의기양양 기자회견에서 일찌감치 세계선수권 2연패에 입방정을 떨어댐.

해맑은아찌라는 게임학과 교수가 한국피겨의 발전을 위해 슈퍼매치에 팬들이 가야 한다고 떠벌임. 솔직히 처음엔 나도 솔깃한 호감을 품었음. 나야 사회학이지만, 밥벌이가 같으니까 자연스레 반겼는데, 그때까지 일토방엔 아예 들어오질 않았고, ‘디씨에서 그의 글을 종종 봤음. 익히 아는 피겨사나 짜깁기한 해외포럼 번역물이 많아 갈수록 관심이 사라졌음. 더구나 다른 글쓴이의 글을 우려먹기도 했는데, 정보와 자료를 나누는 셈이니, 그 자체를 나쁘게 볼 수만은 없었고, 워낙 많은 팬들이 따르면서 갓 일어난 피겨문화의 하나려니 생각했음. 걸고 넘어져서 자칫 팬들만 다칠까 조심했던 사람들이 나만은 아니었음. 모든 문화는 하나의 역사임. 바르게 들어서지 않으면 나중에 그 피해를 선수와 팬들에게 돌아옴. 슈퍼매치는 매국쇼일 수밖에 없었음.

이왕이면 우리나라 선수들도 참여시키라는 항의에 세마스포츠가 마지못해 초등학생 선수들을 불러들이곤 남녀를 공동탈의실에 몰아넣었음. 나는 슈퍼매치엔 관심도 없었지만, 일본에서 열릴 꽈배기공주의 연습 아이스쇼를 우리나라에서 했던 데 지나지 않았음. 출연진인 우리나라 선수들이 들러리였을 뿐임. 아이스쇼가 나라마다 구성이 달라지진 않지만, 출연진과 장소가 다르고, 자칭 피겨문화를 키운다는 쇼에 맞춰진 우리를 위한 프로그램이라곤 없었음. 문화예술에 아주 흔한 장삿속임. 일본공연에 나서는 미국이나 러시아 발레단이 일부러 높은 몸값을 받곤 우리나라로 들어와 맛보기만 보여주며 연습공연을 해대는 싸구려 무대는 널리고 널렸음. 무작정 그들을 빨아대는 사대주의자들이 그만큼 수두룩함. 싸가지 없는 꽈배기는 자기가 넘어진 탓을 관중들이 소리를 질러서, 조명이 어두워서라고 볼멘소리만 늘어놓았음. 세마스포츠가 아이스쇼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일처리가 느슨하자 선수들이 건들건들 연기를 하고, 누구는 3일 공연 중 하루를 빠지기도 했음. 외화낭비에 나라망신만 시킴. 애초에 우리나라를 위한 아이스쇼가 아닌 한낱 돈벌이인데, 그들을 통해 무슨 피겨문화가 자라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답답했음. 문화에 대한 인식은 사회를 통한 역사인식을 그대로 드러냄. 역사가 정신문화의 뿌리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임.

2008년 시즌은 크게 세 가지 사건이 있었음. 우선 ‘FOI’라는 타이틀로 김연아 선수 아이스쇼가 들어섬. 현대카드 슈퍼매치가 동일 날짜로 언론에 도배질을 하더니, 몇몇 선수들이 갑자기 출연을 취소를 하는 사태까지 발생. 그 까닭이 소속사의 일처리 탓이라는 루머가 돌면서 김연아 선수를 위해 아이스쇼를 보이콧하자는 엉뚱한 우격다짐이 불거짐. 어머님이 해명하는 글을 직접 올리기도 했음. 출연을 취소했던 선수들이 죄다 슈퍼매치에 등장해 누구는 장학금까지 받았음. 지난 일로 우리나라 선수를 물고 늘어지기 싫어서 이름을 안 밝히지만, 알려고 하면 쉽게 알 수 있음. 아이엠지는 결국 김연아 선수를 받아들였을 때 묻어버리려는 삽질이 틀림없었음, 그 안방공주를 위해서. 매년 5억을 돌려받은 채 연간 60억에 이르는 아이스쇼는 출연료만 떼어주곤 광고는 물론, 모든 저작권에 대해서도 25퍼센트씩 가져갔던 계약조건을 받아들인 부모님의 마음 크기가 가늠키도 어려움. 3년 동안 아낌없이 투자 운운하며 주식시장에서 막대한 공돈을 벌어들인 그들에게 일절 군소리라곤 없이 도리를 지키기도 했음.

그랑프리 시리즈 컵 오브 차이나 때 쇼트에서 플립 점프에 처음으로 롱 에지 판정을, 프리에서도 어중간한 에지 사용을 뜻하는 어텐션을 받아 심판의 편파판정 논란이 일어남. 국제빙상연맹에서 심판들에게 교본으로 가르치는 점프에 테크니컬 심판이 이중 잣대를 들이댐. 그 꼿꼿한 강심장이 기권까지 생각하며 이틀이 2년 같았다고 떠올릴 만큼 고양시에서 맞이한 파이널대회는 부담감에 홍역을 앓았음. 팬들에게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김연아 선수를 살피라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가 나도 일명 소쿠리로 몰렸음. 디씨인사이드에 가입을 안 한 채 드나들었길 망정이지 19세 때 한글자호로 지어서 어딜 가든 이 닉네임만 고집하는 내가 연갤에 글조차 못 올릴 뻔했음. 어떻게 받아들이든 난 손에 꼽는 유동 소쿠리로 찍힌 놈이었음.

경기에서 그 부담감이 고스란히 점프로 나타남. 피겨의 전설로 남을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에서 러츠를 싱글로 처리함. 다음날 프리에서도 역시 러츠를 1회전에 그친 채 가장 실수가 적었던 살코 점프에서 넘어지기까지 하며 종합 2위로 그랑프리 3연패 실패. 진통제로 버틸 때보다 더없이 좋은 몸이었는데, 실수는 더욱 많았음. 점수 발표 후 라커로 들어가던 김연아 선수가 기어이 펑펑 울음을 터트림. 나도 열받아서 인형이나 던지며 드러내기 전에 자신을 다스려 선수를 보듬으라고 짧은 글을 올림. 드디어 악질 찌질이로 영광스럽게 내몰림. 그해부터 김연아 선수 이름이 걸렸던 아이스쇼도 처음엔 팬들의 익룡 소리가 지나치긴 매한가지였음. 선수가 점프로 들어가는 찰나에도 소리를 질러대서 요즘처럼 적절히 가리는 마땅한 존중이 아직 자리매김을 못했음. 존중이란 타인을 통한 자신과의 소통임. 야구나 축구와 사뭇 다른 아이스쇼며 피겨경기의 특성을 받들 때 대중과 선수가 교감할 수 있는 응원문화가 생김.

지금은 참을 때 지를 때를 잘 살피며 해외 선수들에게 스케이터로 살아갈 자긍심을 심어주니, 더없이 좋음. 당시 아이스쇼 현장에 직접 가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수도 있음. 물론 나 역시 잘못은 많았음. 오십원에게 얽힌 좋지 않은 사건들을 익히 알면서 김연아 선수와 어머니가 선택했다는 믿음에, 크리켓 스케이팅 클럽 환경이 좋아서 내쳐 그에게 맡겼을 뿐인데, 침 바른 소리만 해댔음. 즉 나부터 그가 죽인 개만도 못한 놈이라 반성하고자 나름대로 학교며 세상살이로 바빠도 꾸준히 글을 씀. 또 일본 꽈배기도 되도록 씹지 않았음.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며 멀리 봤다지만, 그 공주놀이에 피해를 보는 여느 선수들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음. 김연아 선수만 건들지 말라는 좁은 울에 빠져서 입버릇인 상대성을 잃고 있었음.

경기며 갈라 프로그램에 걸쳐 조회 수가 100만이 넘는 김연아 선수의 유튜브 동영상들이 무수했는데, 일본의 생트집에 하나같이 지워짐. 그즈음 ‘HOKKU FILM’이라는 타이틀로 동영상을 올리며 맞선 혹쿠(HOKKU)’라는 갤러리가 연갤에 있었음. 당시 해외로 자주 나가고 학교와 집을 떠나면 인터넷 자체를 안 해서 나중에 밀린 복습을 하다 보니, 관련 인물의 세세한 시기는 기억이 좀 흐릿함. 많은 팬들의 도움이 있기는 했지만, 혼자서 일본을 물리쳤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공이 컸음. 마침내 방송에서도 때리자 일본연맹이 정식으로 항의하라는 방송보도로 맞받아침. 우리 빙신연맹이 항의했겠음, 일본연맹 한국지부가? 그 공덕에 비해 끝이 좋지 않았음. 팬들이 일으켰던 분쟁은 모두 대상인 선수를 앞서갔던 경우임. 해당 사건 때 이야기를 잇겠음.

20092월에 첫 출전한 캐나다 밴쿠버의 4대륙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

그보다 김연아 선수가 에스비에스와 인터뷰에서 꼭 그렇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하며 밝혔던 연습방해 사건이 뜨겁게 달아오름. 나도 방송을 직접 봤지만, 어느 나라 선수들인지 들추지 않았고, 팬들이 촬영한 동영상도 모자이크 처리를 했는데, 제 발이 저린 일본이 알아서 난리를 처댔음. 김연아 선수가 정말 잘 들췄던 사건임. 음악을 타는 스케이터들이 아니라 추악한 사무라이들이었음. 우리나라 빙상연맹은 명백한 증거를 쥐고도 그들 비위를 맞추느라 꼴값만 떨어댐. 일본에서 배워온 동계종목의 뿌리와 그 친일인사들 탓만은 아님. 국제사회에서 굵직굵직한 대기업들을 등에 업어 스포츠외교와 행정을 흔들어대는 그들에게 기대온 오랜 관행에 빌붙은 자기보신주의임. 밉보여서 제 밥그릇만 놓칠까 몸을 사림. 스포츠를 넘어 역사왜곡에 이르는 외교력 자체가 안에서 새는 바가지들이라 밖에선 더 맥을 못 춤. 피겨는 더더욱 심함. ‘얼음폭풍작전까지 벌이며 국제연맹을 돈으로 버무려대는 짓은 전통강국인 미국과 러시아가 끼얹은 구정물을 답습하는 꼴임.

6.0점 만점에서 실패 요소를 깎는 감점제로 점수를 매겼던 구채점제에선 겉핥기 클린을 하느라 비비고 볶아대기 일쑤였음. 특히 트리플 점프로 넘어와 여자싱글은 김연아 선수의 정직한 기술의 아름다움을 송두리째 잃어버렸음. 26년 전에 올림픽 2연패를 했던 카타리나 비트(Katarina Witt)는 러츠와 플립을 아예 못 뛰었음. 1992년 알베르빌올림픽에서 우승했던 크리스티 야마구치(Kristi Yamaguchi)가 트리플 러츠와 플립을 갖췄기 때문에 위대한이란 수식어까지 붙지만, 얇은 인에지였던 일명 플러츠임. 타라 리핀스키(Tara Lipinski)는 몸짓은 앙증맞은 반면, 플러츠만이 아니라 점프가 허점이 수두룩했음. 대회 선정과정부터 뇌물로 얼룩졌던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올림픽은 소금호수 사건으로 불릴 만큼 썩은 구정물이었음. 쇼트 4위에서 어부지리 금메달을 걸었던 사라 휴즈(Sarah Elizabeth Hughes)도 플러츠에 연속 트리플은 한참이나 회전수가 모자랐음. 클린은 못했지만, 정확히 판정하면 슬루츠카야가 금메달임. 하계와 동떨어져 격년제로 치른 1994년 릴리함메르올림픽의 우승자였던 옥사나 바울 (Oksana Baiul)이 그나마 김연아 선수처럼 러츠와 플립이 정확했는데, 점프구성은 너무 밋밋했음. 연속 트리플은커녕 트리플에 이은 더블도 뛰지 못하는 낮은 난도였음. 이것들이 그대로 옮겨간 비비기 점프가 틀에 갇힌 가부키(歌舞伎)의 무거운 전체주의 문화와 맞물린 일본피겨임. 게다가 음악을 타는 몸짓이라곤 흐릿한 곡예 트리플 악셀을 뛰었던 이토 미도리(伊藤みどり)1989년 세계선수권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우승하자 일본의 헛바람이 숫제 허파에 구멍을 뚫어버림.

20093월 세계선수권에서 합계 207.71점으로 19세의 김연아 선수 첫 우승과 함께 여자선수 중 최초로 200점대의 신기원을 이룸. 역시 플립에 엉뚱한 어텐션이 붙었음.

기자간담회에 관계자가 아닌 전주시 시의원들과 지역신문기자들 납입.

2010125일부터 전주에서 열리는 4대륙대회는 밴쿠버올림픽을 한 달여 앞두고 열렸음. 때문에 그랑프리 파이널 때 인터뷰에서 컨디션 조절을 위해 참가할 수 없음을 김연아 선수가 두 번이나 밝혔는데, 그 닫힌 귀로 무슨 의원에 기자 노릇을 한다는 사기꾼들이 몰려가 유명 해외 방송언론의 카메라 앞에서 대한민국 개망신!’을 우렁차게 외쳐줌. 여고생에게 창피한 줄도 모르는 인간들임. 덕분에 전주시청 홈페이지 게시판은 항의글로 몸살을 앓음.

국제빙상연맹(ISU)의 오타비오 친콴타(Ottavio Cinquanta)도 빠지지 않았음. 대한빙상경기연맹 박성인 회장에게 대한빙상경기연맹이 개최를 희망했고, 한국 피겨발전에 도움이 되는 대회다. 한국에 단 한명의 특별한 재능을 지닌 챔피언이 있는데, 이 대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하는 편지를 보내옴. 시카고 트리뷴의 국제스포츠 담당기자인 필립 허시(Philip Hersh)가 자세한 기사를 다뤘음. 친콴타 회장이 올림픽 하루 전이 아니라 25일 전에 열리는 대회다하며 물고 늘어졌던 배경엔 꽈배기와 4자다리가 전주대회에 참가한다는 구실이 붙어 있었음. 일본에서 우리나라에 들러서 캐나다로 가는 그들과 전혀 다른 처지였음. 필립 허시가 국제연맹과 김연아 선수의 갈등, 그리고 팬들이 꺼내든 일본의 음모론까지 다루며 잠잠해짐.

월드챔피언에 오르며 다시 팬들이 불어남. 이때부터 디씨에 가입해 내 한글자호로 글을 올렸는데, 그저 김연아 선수에게 기대어 답답함을 게워냈던 졸문들이었음. 2009년에 100년 공소시효가 끝나는 간도협약 영유권 소송이 흐지부지 사그러들고 있었음. 찾는 것 자체보다 일제강점기의 피해국가인 중국과 우리가 역사인식을 맞춰 농촌진흥청에서도 근 25년째 만주에서 벼 품종 연구를 하고 있듯 간도를 경제자유지구로 개발하면 러시아의 연해주를 낀 나진선봉지구를 에워싸 삼각무역을 통해 북한을 어르고 달랠 거점이었음. 중국과 러시아는 경제대국을 부추길 나라들이라 어차피 교역시장은 앞으로 더더욱 커질 수밖에 없음. 유적지에 우리 학자들의 접근조차 막아선 가파른 동북공정 속에서 고구려를 거슬러 고조선 유적지 발굴과 연구도 조금이나마 추스를 간도였는데, 정부부터 관심이 없었음. 팬들이 저마다 살아가는 생활이 다르듯 새로운 역사라도 지켜주자는 나만의 관점이었음.

아이스 올스타즈 2009’에 미셀 콴이 미국도 아닌 한국 아이스쇼로 복귀! 김연아 선수의 위상을 대번에 보여줬던 뜻 깊은 사례였음.

2009년 시즌은 건강한 김연아 선수는 아무도 이길 수 없다하는 수식어대로 모든 대회에서 정상에 올라 그랜드슬램(grand slam)을 이룸. 덧붙여 15세 때 즉흥적으로 뛰었던 트리플 러츠에 이은 토룹으로 연속 3회전 점프를 더 어렵게 바꿨음. 플립은 단독점프로 옮겨서 무르익은 연기가 여느 선수들과 차원을 더한층 크게 벌림. ‘제임스 본드 메들리(James Bond Medley)’와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피아노 협주곡 바장조(Concerto in F)’는 지금껏 시리즈를 이으며 섹시 여배우의 대명사를 낳아온 본드걸이 원래 동양 여성이 아니었을까 착각하게 한다고, 둔중한 클래식 선율 속에서 세기(世紀)의 연인이었던 오드리 햅번(Audrey Hepburn)을 떠올리게 했음. 일본의 분탕질은 갈수록 널을 뛰었음.

12월에 그랑프리 파이널 때 쇼트에서 싱글 처리한 플립이야 마땅히 떠안을 실수였지만, 연속 3회전 중 연결 토룹에 회전수 부족, 즉 언더로테 판정을 내림. 실수를 빌미로 조금이라도 더 깎자는 속셈이 훤히 보였음. 프로그램구성점수가 돌소금이었는데, 지난 시즌에 플립을 잡아챘던 테크니컬 패널이라 팬들은 미리 혈압이 올라가 있었음. 쇼트를 흔들어 일본 안방이라는 부담감에 주저앉기를 바랐던 짓임. 프리경기를 무난히 치러서 밥상을 걷어찬 일본선수들에게 연지곤지를 시상대에서 찍어줌.

비밀스러웠던 행복한 승냥이들에 대해

20091115일쯤이었음. 이번 게시판 개편 이전에 일토방을 세부종목별로 나눠놨을 때 없어졌는데, ‘지난 올림픽 출전권에 대해라는 제목으로 세계선수권 성적에 따른 우리나라의 나가노올림픽 출전권을 짧게 다룬 글을 올렸음. 이틀 뒤에 롱롱이라는 닉네임이 김연아 선수에 대해 묻고픈 게 많다며 메일주소를 알려달라는 댓글을 남겼음. 뒤늦게 보고 1119일에 내가 메일을 보냈음. 팬들의 책, 즉 팬픽(fanfic)을 묶을 원고청탁이었는데, 바로 거절했음. 소속사에게 알리지도 않았고, 팬들에게 비밀스럽게 접근하는 방법 자체가 어긋나 있었음. 잊고 지내다 생각해보니, 내게만 접근했을 리 없어서 1130일에 연갤승냥이들의 책을 내자는 출판사의 연락, 함께 궁리 좀 해주세요!’하는 제목의 글을 올렸음. 팬들에게 알리고 그 반응에 따라 결정할 사안이었음. 제목을 떠나 어차피 선수 본인과 팬에게 묻어가는 책이라 당연한 도리였음. 역시나 접근했던 팬들이 여럿 있었는데, 대체로 올림픽 뒤로 시기를 잘 맞춰야 한다는 데 뜻을 맞추는 편이었고, 내 역할은 끝난다며 손을 털었음.

해를 넘겨 2010112일에 그 해먹은아찌가 메일을 내게 보내왔음. 자신이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땐 워낙 허술해서 마땅찮았는데, 직접 관계자를 만나보니 바라던 대로 소속사에게 허락을 받았고, 기획의도도 잘 갈무리해서 해볼 만하더라, 책을 내는 데 함께 해달라며, 담당자 메일주소를 알려줬음. 그때까지 대학교에 흘러넘치는 구닥다리로 생각했을 뿐 악감정은 없었음. 팬들 의견도 그리 나쁘진 않아 궁리하다 다음날 메일을 보냈는데, ‘최슬기라는 여직원이 편한 시간에 통화를 하자고 해서 메일을 보낸 뒤 두세 번 전화연락을 받았음. 2월초로 잡은 출판시기를 늦추길 바랐더니, 확정은 아니라고 했음. 그쪽에서 역사인식과 사회정의를 곳곳에 끼워 넣은 내 글이 다소 강해서 덜어내길 바랐음. 워낙 바쁠 때라 원고에 손을 못 댄 채 120일에 출판사 여직원에게, 21일에는 그 게임학과 교수에게 빠지겠노라 메일을 보냈음. 교수들은 논문출판 따위로 조금이나마 출판사 생리를 아는 편임. 김연아 선수 팬 블로거들 중에 절대적인 지지를 받던 그가 나이도 있는 만큼 잘 알아서 출판시기를 늦추며 무게중심을 잡아 주리라 좋게만 생각했음. 내 잘못이 가볍지 않다는 뜻임. 그 책이 올림픽을 겨우 9일 앞둔 23일에 나올 때까지 연갤에도 못 들어갔는데, 나중에 일부러 피버스에도 가입해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며 팬들에게 용서를 구했음. 직접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음. 그 책에 팬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임. 첫째, 나라 전체를 짊어진 일생일대의 경기를 앞두고 냈다는 점이고, 둘째는 팬들에게 아무런 상의조차 없이 마치 전체가 동의한 듯 승냥이라는 상징어를 팔아먹었음. 셋째는 결국 장삿속이었지 내게 떠벌였던 팬들을 통한 김연아 선수의 사회적 문화효과라는 좋은 의도는 전혀 없었음.

미리암 로리올 오버빌러(Myriam Loriol Oberwiler)

스테판 랑비엘(Stephane Lambiel) 외엔 다른 스위스 선수들을 보기가 어려운데, 원래 피겨를 하는 인구가 유럽치고 그리 많지 않음. 전통적으로 남녀 모두 스핀이 아주 강함. 어릴 때 스핀을 집중적으로 가르침. 스위스 여자선수로 유로챔피언은 물론, 월드챔피언을 지냈던 데니스 비엘만(Denise Biellmann)이 그 유명한 비엘만 스핀의 창시자였음. 그만큼 스위스는 발레스쿨이 세계에서 알아줌. 스핀에 중점을 두는 피겨 역시 점프보다 포지션이 딱딱 잡히는 발레처럼 동작의 아름다움을 쫓는 탓이지 싶음. 뿐만 아니라 그녀는 트리플 러츠를 경기에서 최초로 랜딩했음. 다음으로 손에 꼽는 여자 스케이터가 루신다 루(Lucinda Ruh). 수상경력이 없긴 해도 빠르고 아름다운 스핀과 발레스쿨에 입학을 허가받았을 만큼 포지션 자세가 좋았음. 경기안무조차 팔짓과 스텝은 본인이 직접 짰음. 1미터75센티의 장신이라 긴 팔을 쓰는 동작이 단연 돋보였음. 둘 다 초기와 후기인 1990년대에 선수생활을 했고, 그 뒤를 2011유로챔피언 사라 마이어(Sarah Meier)가 이었음. 미리암도 한때 예쁘장한 얼굴로 자국 내에서 기대를 꽤나 받았음. 해외 피겨소식통마다 뒤지고, 국제연맹 자료를 들춰도 변변한 선수생활은커녕 아이스쇼 경력조차 없는데, 관심을 받다가 쇼로도 즐기지 못하게 피겨에서 내쳐졌으니, 권력욕으로 뒤틀리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만함. 즉 일본 돈으로 굴리는 국제빙상연맹의 기술위원인 히라마츠 준코(平松純子)와 손발이 잘 맞음.

그랑프리 파이널이 끝난 뒤 미리암이 밴쿠버올림픽 테크니컬 패널로 발표난 뒤 스위스 지역신문과 인터뷰를 했음. ‘우리 고장 커리어 우먼(Career woman)’ 운운하는 지방기사였음. 김연아 선수에게 줬던 다운그레이드가 올림픽 패널에 이른 상관관계가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내가 누구보다 공정하고 정확하게 판정함을 연맹이 인정했기 때문이다하는 거짓말을 주워섬겼음. 김연아 선수만 편파 판정한다는 글들은 해외포럼에도 종종 올라옴. 왜 거짓말인지 큰 덩어리만 짚으면

1. 2008년 컵 오브 차이나에서 안도 미키의 플러츠는 건너뛴 채 김연아 선수만 롱에지.

2. 20094대륙 때 꽈배기보다 회전수를 꽉꽉 채운 김연아 선수의 3-2-2만 다운 판정.

3. 2009년 세계선수권에서 플립에 어텐션.

4. 2009년 도쿄 그랑프리 파이널 때 다운그레이드를 줬던 연속 3회전에 심판들은 1점에서 2점의 가산점을 줌.

2010년 밴쿠버올림픽에서 합계 228.56점으로 여자 싱글 금메달. 동영상 보고 느끼면 그만이지, 무슨 말을 하든 군소리일 뿐임.

2010년 세계선수권 출전 강행. 그해 세계선수권은 100주년 기념대회였고, 저희들이 어린 소녀를 그리 못 살게 들볶고도 국제빙상연맹은 흥행카드인 김연아 선수의 참가를 원했음. 덧붙여 팬들은 후배들의 출전권 탓으로 알았음. 올림픽 뒤에 긴장이 풀리자 피로가 몰려와 연습조차 못했듯 올림픽 우승자들은 당해 월드를 거르곤 했는데, 평창올림픽을 받아내느라 눈이 먼 대한체육회가 온 나라를 짊어졌던 짐을 또 짓졸랐음. 세 번째 찾아왔을 때 얼떨결에 그냥 나가자 해놓곤 바로 후회를 했다고 함. 겨우 몸을 추슬러 나갔던 월드에서 큰 실수를 범한 쇼트로 은메달에 머물렀지만, 시상식에서 친콴타 회장을 비롯해 국제연맹 관계자들이 김연아 선수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었고, 가장 좋았던 경기 중 하나로 그 프리경기를 꼽는 마음가짐이 놀라울 따름임.

2010420일 올댓 스포츠 설립.

팬들이 앞서가서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켰던 대표적인 경우임. 밴쿠버올림픽의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채 내가 오십원이 수상하다는 글을 쓰던 4월 둘째 주쯤 연갤을 통해 만났던 팬이 전화를 걸어옴. 구동희 부사장이 잘 지내는 김연아 선수와 어머니를 흔들어 따로 소속사를 차리려고 한다, 그것 때문에 팬들이 갈려서 다툼이 크게 번졌다, 팬이 선수를 앞서가지 말아야 하지 않냐, 하는 하소연이었음. 내가 믿는 대상은 구 부사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들어주며 긴 통화를 끊은 뒤에야 아차 하고 혀를 질끈 깨물었음. 팬이 대상을 앞지르지 말자는 그 팬부터 김연아 선수와 어머니의 입장을 어떻게 안다고 회사 창립을 자기 잣대로 재지, 하는 상대성을 순간 짚어주지 못했음. 선수생활을 더 잇든, 말든 후배들을 뒷바라지를 해주며 어차피 한국피겨 부흥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처지였음. 굳이 과자네에게 수익을 떼일 까닭이 없었음. 물론 회사를 꾸리는 데 적지 않은 운영자금이 나가지만, 전 소속사는 피겨 위주로 매달릴 에이전트가 아니었고, 훗날 김연아 선수가 전용링크를 거느려도 운영과 관리를 맡아줄 재단 내지 회사는 들어설 수밖에 없으니, 차릴 만했음.

연갤에 잠시 들어가 봤더니, 소위 친목질로 다져진 그 팬을 감싸는 편과 반대로 갈려 있었음. 너무 당연한 회사 설립이라 알아서 수그러들겠지 하고 바쁜 내 일상에 쫓겨 지냈음. 소쿠리나 찌질이로 찍혀서 아예 나가버릴 줄은 생각도 못했음. 영상 능력자였던 빵집아들이 그때 모든 영상에 저작권을 걸고 사라졌음. 426일부터 과자네가 지난 3년간 김연아 선수가 끼친 매출이 단 10퍼센트밖에 그쳤다고 언론플레이를 시작함. 430일까지 전속계약이 끝난 뒤 51일부터 올댓 스포츠로 소속을 옮김. 앞서 짤막하게나마 노예계약을 짚어줬지만, 편들었던 일부 팬들만 우스갯거리였음. 대상을 앞서가면 결국 자기애에 가둬두기 마련임. 사랑을 하면 그 대상을 통해 세상을 본다는 말은 상대성이자 배려로 결국 믿음을 뜻함. 사랑하니 마땅히 깃드는 믿음이지, 믿기에 사랑한다면 이미 계산이 들어서는 자기애임. 내가 준만큼, 내가 들인 정성만큼 자신을 알아달라는 투정만 앞서기 쉬움. 김연아 선수와 어머니며 가족들만큼 믿음직한 대상이 어디 있다고 그동안 지켜보고도 내세우는 의심이 나는 신기했음.

오십원의 난

너무 잘 알려져서 넘어갈까 하다가 연대기 구성에 통일성을 살려야 하고, 전에 다른 글에서 밝혔던 내가 아는 이야기만 옮김. 밴쿠버올림픽 뒤에 오십원은 밀려드는 인터뷰 요청으로 입이 찢어졌음. 아마 현역 때 1987년 세계선수권에서 정상에 올라 이듬해 자국의 캘거리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따리라 방송언론이 초점을 맞춰줬던 기분이었을 만큼 줄을 이었음. 그만큼 김연아 선수의 연기가 대단했음.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자크 로게(Jacques Rogge) 위원장이 김연아의 연기는 1984년 사라예보 동계올림픽 아이스 댄싱 제인 토빌과 크리스토퍼 딘 이래 최고였다하는 찬사를 했는데, 피겨에서 당시 영국조의 연기는 하나의 진리임. 더구나 영웅이라서 더 했음. 한국피겨 116년 역사상 첫 메달리스트가 금메달이었고, 역대 올림픽사상 가장 압도적인 우승이었음. 반면에 전용링크조차 없는 조국을 떠나 캐나다에서 일군 금메달이라는 자화자찬 속에서 2009년 세계선수권 때 마지막 스핀이 겹쳐서 0점 처리되도록 서툴었던 초보코치가 일약 메이저급으로 떠버렸음.

우리 팬들은 그 비슷비슷한 동영상조차 일일이 번역해 나누며 즐거워했는데, 4월초에 캐나다 공영방송(CBC) 인터뷰가 그쪽 사이트로 새로 올라왔음. 예전엔 나에게 왔을 때 이미 기술적으로 완성되어 있었다하고 흘러갔던 이야기가 뜬금없이 그녀는 매일 울기만 하는 슬픈 소녀였어요하며 연기를 했음. 묘한 건 내가 알기로 이 인터뷰 동영상도 번역물이 있었는데, 삽시간에 사라졌음. 과장한 손짓에 애처로운 표정으로 하소연하듯 지나치게 호소해댐. 철학과 심리학을 거쳐 사회학을 다루는 연출가 출신이라 꾸며진 몸짓이 보일 수밖에 없기도 했지만, 동서양을 떠나 올곧은 지도자는 그 대상을 앞지르지 않음. 오히려 선수를 띄워야 뒤에서 받쳐주는 지도자도 따라가는데, 자신을 앞에 두는 코치란 장삿속이기 마련임. 다른 팬과 통화하다 슬쩍 이야기를 했더니, 오히려 오십원 편을 들었음. 아니길 바라며 매장을 당할까봐 어디에도 글을 올리지 못했던 나부터 병신이었음. 그가 2010826일에 다음 시즌 프로그램으로 아리랑을 공개하며 일방적인 결별통보를 받았다고 나서기 전인 4월부터 미리 선수를 쳤다는 소리임. 더 무서운 건 선물이며 팬레터를 바리바리 보내주는 우리네 정서를 꼬드겼던 짓임. 재계약을 안 했으니, 계약기간 중에 돌아선 관계도 아닌데, 도리어 자신을 피해자로 둔갑시켰음. 그만큼 자기과시로 눈이 덮여 있었음. 군사부일체를 들씌워 모녀를 괴롭혔던 우리나라 허깨비들이 그 장단에 놀아난 허수아비들임.

이때 다리가 말썽을 부려서 내가 병원에 있느라 나중에 한 달여 복습했던 기억이 헝클어져 시기가 엉켰는데, 또 다른 영상 능력자인 그 훅쿠(HOKKU)’이 오십원 편을 들다가 내쳐졌음.

[피터 오피가드(Peter Oppegard)로 코치 교체]

1년 치 회원권을 끊어둔 크리켓 클럽에서 그야말로 쫓겨났음. 회원제로 굴리는 클럽회원에게 적당한 사유도 없이 나가달라는 짓이야말로 일방적인 통보였음. 분하고 억울해서 울음을 터트린 김연아 선수를 생각하면 이를 빠득빠득 갈다가도 마냥 떠받들었던 죄가 너무 커서 나를 죽이며 분을 삭일 따름임. 오피가드 코치는 알다시피 미셀 콴의 형부고, 훈련장이 그들 가족의 링크라 장소와 기간에 맞춘 선임이었음. 당시엔 선뜻 이야기할 시기가 아니었지만, 졸업을 위한 최소학점이수를 위해 조만간 국내로 들어와야 했음. 겉으론 강해도 늘 가족을 그리는 막내딸이고, 학교생활에 대한 아쉬움도 커서 단기계약을 굳이 다른 코치와 하느니, 콴의 형부이자 어린 시절 전지훈련 때 잠시 지도를 받았던 인연이 편했을 것임. 나중에 또 코치교체 운운하며 국내 방송언론이 생떼를 쓸 빌미가 없었음. 왜냐면 미셀 콴이 막아주기 때문임. 그 형부조차 아무 소리를 안 하는데, 무슨 소설을 쓰겠음?

당시 피갤에서 이미 뛰어넘은 한때의 우상에게 그만 묻어갔으면 좋겠다는 한심한 댓글들이 간간이 있었음. 우상은 영원한 관계라야 옳음. 피겨의 역사이자 그 자신의 초심이기 때문임. 이 간단한 이치를 헤아리지도 않고 김연아 선수를 앞세워봐야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이 더 돋보이길 바라는 자기애임. 곧 자기과시임. 더불어 스포츠는 앙금이 있긴 해도 저마다 고고한 전통을 따르는 예의가 있음. 해외경기에 가면 우러를 선수들이 링크에 들어서면 까마득한 대선배들인 중계진과 관계자들이 일어서서 박수로 맞이함. 과거가 오늘을 받들어 그 역사와 문화를 지키듯 피겨여왕의 자리도 서로를 추어올리는 전설끼리 대물려짐. 이리나 슬루츠카야가 2006년 시니어 그랑프리파이널 시상식에서 포옹조차 뿌리쳤던 일본의 사탕발림은 이미 무덤을 팠을 뿐임.

2011년 세계선수권 출전. 알다시피 또 평창 때문에 등이 떠밀렸고, 지진피해에 동정 금메달을 일본에게 안겨줬지만, 또 은메달인 김연아 선수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음. 나는 나가지 않으면 팬들이 돌아선다고 졸라댔다는 그 가까운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함. 잡지 상호가 가물가물한데, 인터뷰에서 밝힐 순 없지만, 가까운 사람이라고 했음. 김연아 선수에게 가족과 자신이 이사인 소속사 외에 가까운 이들이 있음. 섣불리 말을 앞세우지 않지만, 딱 한 번 당하기가 분해서 조심스레 꺼내들었던 이야기가 연습방해였음. 태릉링크에서 훈련하는 모습을 참관하며 깍듯이 선생님 대접을 받고, 트리플 악셀을 뛰어야 한다, 루프 점프를 뛰지 않으면 스포츠맨십에 어긋난다, 하며 자신을 옭아맸던 가깝고도 먼 그들, 일본연맹 한국지부인 빙신연맹이라고 나는 가늠함. 숫제 이 사람이다, 하고 꼽히는 일본 꼭두각시가 있음.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대한민국에서 팬들이 홍익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김연아 선수에게 등을 돌린다고 을러댈 수 없음.

그때 상금을 전액 일본 지진피해 돕기에 건넸지만, 일각에서 기부천사답게 더 돕기를 부추기는 개소리가 나왔음. 제발 상대성 좀 갖추길 바람. 그들이 견줬던 한류 스타들은 돌려줄 만큼 사랑을 넉넉히 받았던 반면, 김연아 선수는 지금도 온갖 음해와 트집에 시달리고 있음. 천주교 신자임을 떠나 기부가 대가를 바라지 않는 나눔이긴 해도 일본의 정치피겨에 맞선 관점에서 마냥 무르게 보일수록 더 기어오르는 법임. 때론 선을 그어야 하는 세상살이를 김연아 선수에게만 이래저래 다르게 들러 붙이곤 하니, 답답함.

2011년 시즌 내내 은퇴를 강요당하는 언론보도가 꾸역꾸역 올라왔음. 우리나라는 스포츠 전문기자가 거의 없음. 시장이 쑥쑥 커진 방송에만 몇몇 있는데, 피겨는 고사하고 동계종목을 뜯어볼 기자라곤 없이 죄다 야구와 축구에 농구며 배구인 프로리그에 쏠려 있음. 그들의 생리를 단번에 드러내는 인물이 있을 만큼 짬밥에 연줄로 돌아감. 1995년 봄맞이 프로그램 개편으로 한국방송공사(KBS)에서 들여앉힌 스포츠 파노라마를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스포츠 전문앵커를 지낸 최동철 아나운서를 나이가 좀 있는 사람들은 다들 알 것임. 이 인간이 1996년에 나한테 찍히면 유명 운동선수도 그냥 보내버린다하는 망발을 늘어놨던 골통인데, 스포츠 기자들에겐 무시무시한 존재임. 방송도 연예부 기자와 뒤섞인 판에 우리나라 거지발싸개 언론은 더함. 하다못해 음료수를 들고 돌아다니며 눈도장을 찍고 고개를 숙여야 하는 그 바닥 생리는 가수 매니저인 내 제자만 봐도 여전함. 돈 봉투가 아니라 한들 식사나 술대접은 일상임. 김연아 선수를 둘러싼 투정어린 언론플레이에 대한 팬들의 의혹은 절대로 지나치지 않음. 한국피겨 발전을 위해 은퇴해야 한다는 어불성설(語不成說) 자체가 돈을 받아먹었던 글짓기일 수밖에 없음.

맥주 광고를 찍었다고 중독학회까지 내세워 돈만 번다며 트집을 잡기도 했음. 배우 이영애는 지난 2003년에 나간 대장금이후 11년 동안 드라마를 찍지 않았음. 2005년에 영화 친절한 금자씨뒤로 장장 9년째 본업인 배우활동은 접고 광고모델로만 지냄. 요즘은 광고가 뜸하지만, 배용준도 비슷했던 경우임. 사업가로 살아가는 지금조차 손님들이 미어터지는 일본의 거대 한식당들이 그 인기에 기댄 배우의 이미지가 돈벌이이긴 매한가지임. 그들을 흉보는 소리가 절대로 아님. 당시 기업인이자 운동선수인 학생이 세계 피겨여왕의 이미지로 누리는 당연한 몫이었고, 자본주의의 생리에 지나지 않았음. 김연아 선수만 이중 잣대로 칼질이었음. 문화선진국이라면 들어서지도 못할 공공연한 언어폭력이나 다름없었음. ‘황구라사건은 내가 다른 글에서 여러 차례 짚었으니, 넘어가겠음. 기성세대가 잘못 키운 나라의 울을 개인에게 짓조르자면 황상민부터 6개월 훈련만 받고 소위계급을 달자마자 제대하는 육개장특혜를 받지 말아야 했고, 김미화도 연예인으로 특기생입학전형을 누리지 말았어야 함. 뒤가 구릴수록 제 잘못을 남에게 떠넘기는 이중성은 친일을 뿌리로 보신주의와 기회주의자들이 바글거리는 우리나라의 고질병임. 일일이 다루자면 책 한 권이 나옴. 팬들이 그 동냥아치 발기자들과 허깨비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함.

201272일 현역 복귀 기자회견. 방송을 지켜보는 내내 고맙고 죄스러워 난 가슴만 쳤음. 살포시 들뜬 목소리가 복잡한 감정을 누른 듯 느껴졌음. 후회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고 2013년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한 뒤 밝혔음. 나만이 아니라 많은 팬들이 복귀 이후를 다룬 글들이 넘치니 이만 줄임.

[우리나라 피겨 올드팬]

마지막으로 올드팬에 대한 내 관점만 다룸. 비록 피겨를 33년 눈요기를 했지만, 난 절대로, 결코 올드팬일 수 없음. 우리나라에서 문화예술에 얽힌 먹물들 중에 사대주의 시대를 살아오며 전성기인 동서냉전 시대의 피겨를 눈요기했던 사람은 부지기수임.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문화선진국의 상징이었음. 과연 그들 중에서 전용링크 하나 없이 언 몸으로 점프를 뛰는 우리나라 선수들 경기나 연습에 몇이나 갔을 것 같음? 나부터 열 번을 못 넘김. 지금은 많이 늘었지만, 선수가족과 관계자를 빼면 적을 땐 기껏 2, 30명이었음. 많을 때 50여 명 남짓이었는데, 대개 경기마다 꾸준히 찾고 연습도 놓치지 않는 분들은 선수 출신 노인들이었음. 올드팬이라고 하면 팬들이 의심부터 할 수밖에 없음. 내가 그렇듯 문화에 대한 관심과 부러움으로 지켜봤다고 올드팬이면 텔레비전으로 케이블채널에서 영화만 봐도 영화광이라는 자기 위주의 잣대임. 팬이란 대상을 쫓아가는 문화로 교감을 나눌 관심을 건네야 함. 동기부여조차 주지 않는 올드팬이란 있을 수 없음. 실천하지 않는 지식이 생활로부터 다듬어지지 않은 채 머리로만 굴리는 겉멋에 그치는 이치임. 즉 찾지도 않고 올드팬 운운은 겉멋임. 마치 자신과 같은 팬이 있었기에 김연아 선수가 나왔노라 으스대는 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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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1.27 21:36

    첫댓글 두 모녀가 그간 얼마나 많은 눈물의 세월을 지새웠을지...
    김연아를 가질 자격이 없는 나라에서 이런 선수가 나오다니 참 역사란 아이러니한거네요..
    서양문화에서 부러운 거라면 이 사람들은 서사를 참 잘만든다라는 겁니다...문화의 뿌리에 일리아드 오디세이가 있으니깐요...
    연아 선수에 대해 오히려 외국에서 풍부한 서사를 만들어 주는데 우린 어린 한 소녀를 물어 뜯지 못해 안달이었죠...
    주변 지인들에게 입버릇 처럼 하는 말이 연아를 지키지 못하는 나라라면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라는 겁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보석을 내다 던지고 모래알 같은 실금을 탐하는 어리석은 짓은 말아야 겠습니다...

  • 14.01.28 00:09

    글 잘 봤습니다.

  • 14.01.28 00:30

    잘 봤습니다. 중간중간 의미가 끊기는 부분도 있었지만 따라갈 수는 있었네요. 김연아 선수를 오랜동안 관심있게 지켜보지 않은 사람들은 읽기 힘든 글인 것 같습니다.

  • 14.01.28 10:17

    간단히 요약하면 모두 거대 매니지먼트사 IMG와 아이비의 농간에 휘둘리고, 모지리 빙상협회가 보호해 주지 못하고해서 벌어진 일들이네요. 나라의 기강이 줫같은 우리나라에서만 가능한 일이고 다른 피겨국가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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