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개(申用漑,1463,세조9∼1519,중종14)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자는 개지(漑之)이고 호는 송계(松溪), 이요정(二樂亭)이며 본관은 고령으로 숙주(叔舟)의 손자이며 김종직의 문인이다. 1488년(성종19)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고, 1490년 저작, 수찬을 거쳐, 1493년 이조좌랑으로 사가독서하고, 이듬해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1496년(연산2) 이조정랑으로 사가독서 했다. 1498년 무오사화에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어 1499년 응교, 이듬해 장령, 직제학을 지내고, 1502년 도승지가 되었다가 충청도수군절도사로 나갔다. 이듬해 형조참판, 예조참판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갑자사화로 영광에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1) 중종반정 후 형조참판, 이듬해 대제학, 동지춘추관사가 되고, 다음해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08년 우참찬, 예조판서, 좌참찬, 이듬해 이조판서, 다음해 예조판서를 거쳐, 1513년 우찬성이 되었다. 1516년에 우의정에 오르고, 1518년 좌의정이 되었다.
배로 양화도를 내려와 저녁에 돌아왔다. 김일손의 시에 차운하다.
(舟下楊花渡夕歸 次季雲韻)
강가 마을에 가을은 깊어 나뭇잎이 날아다니고
모래밭은 찬데 기러기와 백로는 깃털을 깨끗하게 하네.
지는 해에 갈바람은 놀이 배에 불어오고
취한 뒤에 강산을 배에 가득 싣고 온다.
水國秋高木葉飛 沙寒鷗鷺淨毛衣 西風日落吹遊艇 醉後江山滿載歸 (二樂亭集 卷6)
이 시는 1493년(성종24) 이조좌랑으로 사가독서할 때 지었거나, 1496년(연산2) 이조정랑으로 사가독서할 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의 문집 중 ‘독서당록(讀書堂錄)’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의 행장에 1493년에 사가독서 했다고 하였고, 실록에는 또 1496년에 사가독서 했다고 나와 있다. 가을날 함께 사가독서하던 김일손 등 친구들과 한강에서 뱃놀이하며 지은 칠언절구로 미(微)운이다. 기구는 배 위에서 바라본 한강변의 가을 풍경이다. 강가 마을에 가을이 깊어 낙엽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승구는 강가 모래밭에 앉은 새의 모습이다. 기러기와 백로가 깃털을 다듬고 있다고 했다. 전구는 뱃놀이하는 상황을 제시한 것이다. 뉘엿뉘엿 석양이 져가고 갈바람이 놀이 배에 불어와 뱃놀이를 즐기고 돌아가는 길이다. 결구는 뱃놀이의 소득을 정리한 것이다. 독서당에서 글만 읽다가 가을날 하루를 뱃놀이하며 시와 술로 즐겼으니 강산의 풍류를 마음껏 누리고 배에 가득 흥겨움을 싣고 돌아온다고 하였다.
김일손(金馹孫,1464,세조10∼1498,연산4)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자는 계운(季雲)이고 호는 탁영(濯纓)이며 본관은 김해로 김종직의 문인이다. 1486년(성종17)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진주의 교수로 나갔다가 사직하고, 고향 청도에 돌아와 학문에 몰두했다. 1489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91년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박사, 수찬을 거쳐 병조․이조좌랑이 되었다. 1493년에 사가독서 했으며, 1494년 충청․경상도의 경차관이 되고, 평안도사로 나갔다. 이듬해(연산1) 충청도사를 거쳐 헌납이 되어, 문종의 비 현덕왕후의 소릉(昭陵)을 복위하라고 주장하고 훈구파 이극돈의 비행을 상소했다. 1497년 사가독서 하고, 1498년(연산4)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포함시킨 것이 알려져, 무오사화가 일어나 많은 선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권오복의 운을 따라 (次睡軒)
해 떨어지는 먼 길가에서 술잔을 들어 그대에게 권하노니
높은 다락은 하늘에 닿을 듯하고 공무로 바쁜 나루 길은 서로 갈린다.
떠나는 나그네는 외로운 새처럼 사라지고 인생은 조각구름 같구나.
강바람은 이별을 모르는 듯 노에 불어와 물결을 일으킨다.
落日長程畔 把杯特勸君 危樓天欲襯 官渡路橫分 去客沒孤鳥 浮生同片雲 江風不解別 吹棹動波文 (濯纓集 卷5)
그는 학자요 문장가로 힘써 시를 짓지는 않았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가 글을 지으면 분방웅박(奔放雄博)해서 중국 사람들이 한유에 비기기도 했다고 한다.(濯纓集 卷6, 附錄, 神道碑銘. 爲文章 下筆千百言 奔放雄博 讀者皆呿舌 華人目之曰 此韓子也.) 이 시는 친구인 수헌 권오복의 시에 차운한 것으로 오언율시 문(文)운이다. 권오복과 그는 낙동루에서 만나 지은 시가 전하므로 1494년(성종25) 4월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차관으로 나갔을 때 지은 것인 듯하다. 권오복도 같은 해 4월 29일에 거제도 왜구의 피해를 조사하러 경상도 경차관으로 나갔으므로 길에서 서로 만나 시를 주고받았을 것이다. 길에서 친구를 만난 반가움과 다시 헤어져 가야하는 서운함이 주된 정조를 이루고 있다. 수련은 저물녘 강가 낙동루에서 서로 만나 술잔을 나누는 장면이다. 둘은 김종직의 문하로 절친한 친구였으므로 길에서 만나 반가운 정을 나누었을 것이다. 함련은 주변 상황이다. 그들이 오른 누각은 높다랗고 다시 헤어져 공무를 수행하러 가야할 길은 방향이 서로 다르다고 했다. 만나자 헤어져야 하는 아쉬운 정이 깔려 있다. 경련은 서로 헤어져 가야할 서운함을 드러낸 것이다. 이제 서로 헤어져 가면 외로운 새처럼 멀어질 것이니 인생이란 마치 조각구름 같이 떠도는 것이라는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슬픔이 어려 있다. 미련은 그들의 이별에 대비된 무심한 자연 현상의 묘사다. 나룻배의 노에 부딪치는 무심한 물결을 묘사해서 이들의 이별에 대한 애틋한 정을 강조하고 있다.
강혼(姜渾,1464,세조10∼1519,중종14)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자는 사호(士浩)이고 호는 목계(木溪)이며 본관은 진주로 김종직의 문인이다. 1486년(성종17)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 주서, 경연 검토관을 거쳐 1493년에 사가독서 했다. 1495년(연산1) 하동현감이 되었다. 1498년(연산4)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잡혔으나 곧 풀려났다. 1500년 홍문관 부교리, 교리가 되어 응제시로 왕의 칭찬을 받았고, 1503년 지평, 이듬해 직제학, 동부승지가 되었다. 1505년 좌승지가 되어 응제 시문을 지었고, 여원(麗媛) 안씨(安氏)의 죽음을 슬퍼한 만사(輓詞)를 지었다. 1506년 도승지가 되었으나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3등 공신이 되고 진천군(晉川君)에 봉해졌다. 연산군에 아첨한 사실로 탄핵을 받았지만 1507년(중종2) 대제학, 공조판서,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판중추부사,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1510년 공조판서, 1512년 한성부판윤이 되고, 1514년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성주 기생 은대선(銀臺仙)에게 줌 (寄成山妓)
부상관 속의 한바탕 즐거움에 자는 손님은 이불도 없고 촛불도 꺼졌지만
무산(巫山) 열두 봉우리 새벽꿈에 빠져 역루의 봄밤이 찬 줄도 몰랐네.
扶桑館裡一場驩 宿客無衾燭燼殘 十二巫山迷曉夢 驛樓春夜不知寒 (國朝詩刪 卷2)
그가 1508년(중종3) 11월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는데 다음해에 경상도 열읍(列邑)을 순시하였다. 이 시는 그 때 지은 것으로 <견한잡록(遣閑雜錄)>과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이 시와 관련된 이야기가 적혀 있다. 강혼이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을 때 성주 기생 은대선을 사랑했는데 여러 고을을 순시하기 위해 떠날 때 은대선을 개녕 부상역까지 데리고 가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수졸들이 침구를 가지고 먼저 개녕으로 갔기 때문에 이불도 없이 잤다는 것이다. 이 시는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세편의 시 중 하나로 칠언절구 한(寒)운이다. 허균은 “세 편의 절구가 모두 사랑노래의 본 모습을 갖추었다.(許筠, 國朝詩刪 卷2, 三絶俱香奩本色語.)”라고 했다. 기구는 은대선과 부상관에서 하룻밤을 자게 된 즐거움을 직서한 것이고, 승구는 수졸들이 침구를 가지고 미리 다음 행선지로 떠나버려서 이불도 없이 봄밤을 자게 된 상황을 말한 것이다. 전구에서 이런 차가운 봄밤에 이불도 없이 잤지마는 남녀는 마치 초(楚)나라 양왕(襄王)이 고당(高唐)에서 무산(巫山)의 신녀(神女)와 운우지락(雲雨之樂)을 즐긴 것처럼 사랑의 즐거움을 꿈결같이 누렸다고 했다. 그래서 결구에서 역루에서 이불도 없이 지낸 봄밤이 추운 줄도 몰랐다는 것이다. 사랑의 즐거움을 만끽한 감흥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이미 연산군이 사랑하는 궁녀 여원 안씨의 만사를 지어 그 화섬(華贍)한 시풍을 칭찬받은 바 있었다.
삼가현의 쌍명헌에서 (三嘉雙明軒)
옛 고을에 까마귀 울고 해가 지는데 눈 갠 강둑길은 구불구불 가늘구나.
인가는 여기저기 숲 그늘에 의지했고 흰 판자 사립문은 대울타리에 가렸다.
古縣鴉鳴日落時 雪晴江路細逶迤 人家處處依林樾 白板雙扉映竹籬 (木溪逸稿 卷1)
이 시의 제목이 <국조시산>에는 “삼가 현감을 지냈던 정자숙(鄭自淑)이 쌍명헌 시를 구하기에 옛날에 놀던 것을 기억하여 써 주다.(三嘉鄭使君 求雙明軒詩 記舊遊以寄)”라고 하였다. 이 제목으로 보아 이 시는 그가 합천 삼가현에 놀던 기억을 더듬어 훗날에 지은 칠언절구로 지(支)운이다. 삼가현의 동헌인 쌍명헌에서 바라본 주변 풍경을 담담한 어조로 그려낸 작품이다. 기구는 삼가현의 저녁 풍경이다. 오래된 고을 풍경이 까마귀 울음소리와 지는 해를 배경으로 공감각 이미지로 융합되어 있다. 승구는 동헌에서 바라본 강둑길이다. 가늘게 구불구불 뻗어있다고 하여 유장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전구는 동헌에서 본 고을 인가의 원경이다. 숲을 뒤로하여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고을의 인가를 보여준다. 결구에서 인가를 근접해서 그렸는데, 대나무 울타리에 가려진 판자 사립문을 집중해서 조명하고 있다. 옛날에 보았던 풍경을 한 편의 그림으로 그려내었다.
사인사 연정을 제목으로 하여 (題舍人司蓮亭)
죽엽청 술동이 백옥 술잔으로 옛날 놀던 자취를 부질없이 돌아보네.
뜰 가득한 달빛이 비친 배나무에 지금은 꽃이 핀지 아닌지 묻는 듯.
竹葉淸尊白玉杯 舊遊蹤跡首空回 滿庭明月梨花樹 爲問如今開未開 (木溪逸稿 卷1)
사인사(舍人司)는 의정부의 사인들이 근무하던 곳이다. 경복궁 광화문 남쪽 왼편에 있던 의정부의 북쪽에 있었는데, 청풍각(淸風閣)이라는 현판을 달았고 연못이 있었다. 연정은 이곳 연못가에 지은 정자일 것이다. 이 시는 그가 젊어서 근무했던 사인사를 찾아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지은 칠언절구로 회(灰)운이다. 기구는 술자리의 묘사다. 댓잎을 삶은 물에 담근 맑은 술인 죽엽청 술동이를 놓고 동료들이 둘러앉아 백옥 술잔으로 술을 마셨던 일을 사물을 늘어놓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승구는 옛날의 자취를 그리워하면서 회상하는 대목이다. 지나간 날에 대한 그리움을 함축하고 있다. 전구에서 사인사 뜰에 있는 달빛 비친 배나무를 등장시켰다. 이 배나무는 옛날에 함께 술 마시고 놀던 일을 증언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구에서 자신이 놀던 자취를 돌아보며 배나무가 지금도 꽃을 피우고 있는지 묻는 심정이라고 하여, 달빛 어린 배꽃 아래에서 함께 놀던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었다. 그래서 허균은 이 시가 ‘유정(有情)’하다고 평했는데, 담담한 어조 속에 유정한 감회가 녹아있다고 본 것이다.
성주의 임풍루에서 (星州臨風樓)
좋은 시를 읊어 하늘이 아끼는 경치를 드러내려 했더니
마침 누각에서 공문서가 드문 때를 만났네.
붉은 제비가 번갈아 날더니 바람이 버들에 스치고
푸른 개구리가 어지럽게 우니 빗발에 산이 어둡네.
일생에 칭찬과 비방을 받아 몸에는 병이 많고
반년을 동분서주하니 귀밑머리가 희끗희끗 해지네.
정승으로 있는 벗의 편지마저 끊어지고
나그네 행색으로 쓸쓸하게 시골에 머물러 있네.
試吟佳句發天慳 正値樓中吏牒閒 紫燕交飛風拂柳 靑蛙亂叫雨昏山 一生毀譽身多病 半載驅馳鬢欲斑 黃閣故人書斷絶 客行寥落滯鄕關 (木溪逸稿 卷1)
이 시는 1509년 경상도 관찰사로 열읍을 순행할 때 성주 임풍루에서 지은 같은 제목의 네 수 중 둘째 수다. 칠언율시로 산(刪)운이다. 경상도에서 밀양의 영남루와 진주의 촉석루에 버금가는 성주의 임풍루에 올라 그곳에서 본 풍경과 심사를 표현한 것이다. 수련에서 공무가 뜸한 때에 임풍루에서 빼어난 경치를 읊어보려 한 시작 의도를 밝혔다. 지난해 11월에 부임하여 대강 업무를 파악한 다음에 봄날을 맞아 경상도의 여러 고을을 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주에 들른 김에 임풍루에 올라 이름난 경치를 시로 표현해서 재주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는 말이다. 함련은 풍경과 계절에 대한 느낌을 드러낸 대구다. 사물을 관찰하여 자연의 질서를 파악하고 있다. 바람이 불기 전에 제비가 나는 것과 비가 오기 전에 개구리가 우는 것을 관찰하여 자연 변화의 기미를 붙잡아낸 것이다. 경련은 자신의 생애에 대한 반추다. 시재로 이름을 날렸으나 연산군에게 아부했다는 비난을 받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46살의 장년에 이르러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는 말이다. 미련은 지방관으로 지내는 쓸쓸한 심정이다. 함께 벼슬했던 이들은 정승에 올랐는데 지방에서 고적하게 지내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본 것이다. 그의 시는 만당의 시를 배워 고아(古雅)한 품격이 있다고 지적되었지만(周世鵬, 武陵雜稿 卷5, 書, 與魚密陽得江. 東皐姜相公 文藻雅古 其菁華陶冶 雖置之麗季諸公間 可也.. <明宗實錄> 14年 10月 19日. 知經筵事洪暹曰 (中略) 姜渾學晩唐 其詩最好.) 자신의 시재를 믿고 현실에 집착했다고 하겠다.
[출처] 신용개, 김일손, 강혼의 한시|작성자 jaseod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