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다는 걸 알게 될 때 어떻게 대비를 하나? 가급적이면 제작진들한테 조금 더 빨리 연락이 왔으면 바랄 뿐이다. 배우들이 LA에서 편하게 촬영하는 게 아니라 하와이로 다 이사를 했다. 집도 팔아야 하고, 차도 팔아야 하고. 정리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 거다. 대부분 배우들이 극중에서 죽는다는 사실을 한 달 전에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난번 어떤 배우는 2주 전에 알게 됐는데, 눈물을 흘렸고 우리도 너무 충격적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못하니까.
그럼 기회가 될 때마다 영화 오디션을 보겠다. 사실 저예산 여름 호러영화에 여주인공 자리를 제안 받는 경우가 몇 번 있었다. 난 호러를 좋아한다. 하지만 B급 호러에 출연할 마음은 없다. 할리우드 영화의 여주인공을 꼭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조연이라도 좋은 시작이 중요하다. 하지만 3년 동안 영화를 못 하고 있으니까 어느 순간 B급 호러영화라도 영화를 찍는 게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첫 장편 할리우드 영화가 B급 호러영화가 되는 건 싫다. 나도 자존심이 있지. 공리와 장즈이 정도는 아니지만 한국에서도 주연을 했었는데, 할리우드 가서 B급 영화를 해? 이런 자부심 같은 게 있는 거다. 그런데 또 반대로 대형 블록버스터에 세 신 나오는 역할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좋은 작품을 만나고 싶다.
첫 할리우드 영화가 될 줄 알았던 <조지아 히트>는 그럼 엎어진 건가? <조지아 히트>가 아직 못 들어간 건 내 탓이 크다. <로스트> 때문에 여름 기간에만 촬영을 할 수 있으니까. 근데 그 때는 상대역의 빌리 밥 손튼이 안 되는 거다. 그래서 3년째 끌게 됐는데, 이젠 투자를 받으면 영화 제작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다. 사실 이번에도 감독이 기다려달라고 했다. 투자 가능성이 예전에 50%였다면 지금은 80% 라서. 그런데 내가 <세븐 데이즈>를 선택했다. 이번 여름에 <조지아 히트>를 꼭 들어가야 한다면 다른 배우 캐스팅하라고 말하고 한국에 온 상태다.
한국영화 <세븐 데이즈>는 어떤 이유로 선택한 건가?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땐 눈 앞이 깜깜했다. <공공의 적>을 할 때 그 발음 좋고 발성 좋은 설경구 오빠도 법률 대사가 입에 안 붙어서 고생했다는 말을 들었다. 근데 나는 오죽하겠나. 그래서 처음엔 안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다시는 이런 영화를 할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사실 <로스트> 촬영은 그렇게 힘든 작업이 아니다. 일주일에 해야 할 촬영 회수도 적고, 내 역할이 엄청나게 대사가 많거나 분량이 많거나 공부하고 준비해야 하는 역할이 아니니까. 솔직히 하와이에서 휴양하면서 찍는 느낌이다. 그래서 뭔가 내가 가슴이 답답해지도록 도전해야 하는 일이 하고 싶었다.
최근 <로스트>의 에피소드를 보면, 당신이 상대 배역 대니얼 대 킴의 대사에 맞추느라 기다리는 게 눈에 보인다. 확실히 미쳐서 연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 화면에 보일 거다. 사실 나도 한국에 와서 처음 드라마 할 때 한국말을 잘 못했기 때문에 대니얼 오빠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다. 영어를 거의 못하는데, 영어로만 대사를 해야 한다면 얼마나 스트레스가 되겠나. 그래서 안타까워하고 도와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상대역이 “사랑합니다”라는 대사를 “사랑삽니다”라고 할 때 내 감정이 몰입이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다.(웃음) 편집의 문제도 있는데, 가끔 말이 안 되는 대사를 해야 할 때가 있다. 작가가 “밥 먹었어?”라는 말을 잘못 알고 “밥 없어?”로 써놓으면 내가 나중에 후시에서 고쳐야 하는데, 음절이 짧아지니까 “밥 없어?”를 “밥 머으서?”라고 뜻은 맞게 발음을 비스무리하게 뭉개야 한다.(웃음)
그런 답답함 때문에 올해 초 마가렛 조의 HD영화도 찍은 건가? <로스트> 출연진이 크리스마스와 연말 쉴 수 있는 기간이 10일이다. 앞뒤 스케줄 살짝 조정해서 2주만에 찍고 왔다.
시즌 중에 <타이타닉>의 제임스 카메론 감독과 파일럿 작업을 했다면서? 지금 카메론 감독이 찍고 있는 3D 블록버스터 <아바타>의 파일럿 작업을 했다. 영화는 대부분 파일럿을 만들지 않는데, 이 작품은 지금껏 보지 못한 CG를 제작자들과 투자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두 장면을 먼저 파일럿으로 촬영한 거다. 그래서 모션 캡쳐 옷 입고 얼굴에 센서 다 붙이고 일주일 동안 촬영했다.
어떻게 카메론과 일하게 된 건가? 내 프로필 자료 중 <단적비연수>에서 활 쏘는 사진을 보고, <아바타>의 주인공 역할에 비슷한 느낌이 든다고 제임스 카메론 감독님이 직접 작업을 하자고 전화를 했다. 나도 <로스트> 쪽에 부탁을 해서 겨우 스케줄을 만들었다. 그런 류의 작업은 처음이었는데 신기했다. 장면 하나를 찍고 카메론 감독이 편집을 했는데, 머리에 카메라를 달아서 표정을 일일이 담을 수 있는 테크닉을 개발했다는 거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테이프로 나무, 바위 이렇게 표시만 해놓고, 그 안에서 내가 연기를 하면 큰 화면에는 동시에 내가 영화 속의 고양이처럼 꼬리 길게 달린 그 캐릭터로 보이는 거다. 이걸 여러 각도로 찍고 나서 감독님이 직접 편집을 했는데, 버츄얼 카메라라고 불리는 막대기처럼 생긴 카메라를 들고 가더니 그 편집한 비주얼에서 다시 각도를 다시 잡더라. 앵글이 막 바뀌는 게 신기했다.
카메론이 <쉬리> 얘기를 했다고? 작업 하면서 내가 <쉬리>에 출연했다고 했더니 깜짝 놀라셨다. <타이타닉>이 전세계에서 흥행했고 <타이타닉>을 이긴 영화가 한 편도 없었는데 당시 한국에서만 유일하게 <쉬리>가 <타이타닉>을 이겨서 기억을 하고 있었다는 거다. 파일럿 촬영할 때 스튜디오가 엄청 더웠다. 카메론 감독님은 성격이 깐깐하고 정말 열정적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직접 촬영을 했다. 나도 모션 캡쳐용 수트를 입고 모자까지 썼는데, 굉장히 힘들었다. 근데 감독님이 “과거 <쉬리>가 <타이타닉>을 이겼는데 내가 지금 <타이타닉>을 이긴 <쉬리>의 여주인공을 데려다 놓고 엄청나게 괴롭힐 수 있다니 이건 참 운명적이야!”라는 농담을 하시더라. (웃음) 촬영 후 직접 그린 <아바타> 캐릭터 스케치에 사인해서 선물로 주셨고 파일럿 촬영 끝나고 <쉬리> DVD를 갖고 와서 사인해달라고 하셨다.(웃음)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film2.co.kr%2Fimages%2Fpeople%2Fpeople_M%2F2007%2Fpeople_2801_1002_M.jpg)
그런데 궁금한 게 있다. <로스트>에서 선은 왜 죽지 않고 살아남는 걸까? 선과 남편이 나오면 어딘가 모르게 신비스럽다고 여기는 분위기였다. 우리한테는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미국인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나 보다. 그리고 한번 극중에서 선이 죽을 뻔 했지만 아니 왜 저렇게 남편을 위하는 착한 여자를 죽여, 임신까지 했는데, 죽이지마! 라는 시청자들 반응이 있었다더라.(웃음) 하지만 선이 임신한 아이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고, 임신을 하게 된 것도 무인도에서 불임이 치료가 된 거다. 그런데 더 극적인 거는 그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선이 두 달 밖에 살 수 없다는 설정으로 시즌 3이 끝난다는 거다. 무인도 안에서 임신을 한 여자들은 다 죽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째서? 무인도에 출생을 막는 무언가가 있는데, 그게 뭔지는 나도 모르지. 시즌 3에서도 밝혀지지 않고 대략 5 시즌에 가면 밝혀지면서 내가 죽던가, 아니면 구출이 되던가 그러지 않을까 싶다.
그럼 <로스트>의 이상한 인간들 ‘디 아더스’가 무인도에 와서 연구하며 살고 있는 이유는 뭔가? 그것도 모른다.(웃음)
아, 답답해. 나도 답답하다.(웃음) 우린 정말 대본을 받아야 다음 이야기 순서를 알게 되니까, 대본을 받자마자 깜짝 놀란다. 대본이 집으로 배달이 오는데, 봉해진 봉투가 조금이라도 뜯겨져 있으면 바로 신고를 해야 한다. 내가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유출한 거 아니야, 라고 말을 해야 하는 거다.(웃음) <로스트>는 비밀이 너무나 중요한 드라마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통제를 한다. 그리고 대본 한 페이지마다 받은 사람 이름이 바탕에 인쇄가 돼 있다. 내 경우엔 ‘윤진 킴’이라고. 혹시라도 미쳐서 E-BAY에 팔면 바로 잡힌다.(웃음)
재계약을 해서 <로스트> 시즌 3에서는 회당 10만 달러를 받는다고 들었다. 게다가 현지에서의 온갖 인터뷰나 화보 촬영, 파티 초대 등 이젠 할리우드 셀러브리티가 돼 가고 있다. 실제 일상도 그런가? 아니.(웃음) 한국이나 할리우드의 톱스타들 중에 화려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안 그런 사람도 있다. 한국의 톱배우인 (설)경구오빠나 송강호 오빠가 그렇게 화려한가. 이렇게 살아도 배우고, 저렇게 살아도 배우인데 선택하는 거지. 할리우드에서 활동하고 출연료도 적지 않지만 지금도 그렇고 한국에서 활동할 때도 집에 청소 도우미 아주머니조차 부른 적이 없다. 청소, 빨래도 혼자 다 한다. 돈 문제도 그렇다. 돈이 생기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겠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생기고 나면 그렇게 안 된다. 돈을 보는 시선도 달라지고, 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시선도 달라진다. 있으니까 하는 얘기 아니냐, 하시겠지만 정말 그렇다. 어렸을 때부터 부유한 가정이 아니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벌면 이렇게 하고 싶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자랐는데 막상 돈을 벌고 넉넉한 생활을 누릴 수도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는데도 딱히 뭘 하고 싶진 않다. 중요한 건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다. 내가 돈을 사용하며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렇게 삶을 바꿀 수도 있다는 그 자유를 얻었다는 게 너무 감사하다. 하지만 내가 한 시간만 일찍 일어나면 깨끗이 집 청소하고 화보촬영 하러 갈 수 있다.(웃음) 지금도 난 세일 안 하면 옷 안 산다.(웃음) 학교 때 전철 타는 돈 75전이 아까워서 10블록을 걸어다녔으니까 .근데 이런 생각이 그렇게 또 대단한 것도 아니다. 이렇게 사는 건 그저 내 선택일 뿐이다.
<로스트>의 출연과 성공은 노력해서 얻은 성공이라는 면에서 긍정적이다. <밀애>로 그나마 조명을 받고 좀 더 대본을 많이 받고 선택권이 생겼을 때 버리고 미국에 갔다는 것, 그리고 <로스트>도 주인공은 아니지만 몇 번 나왔다가 확 죽어버리지 않고 여태 살아있다는 것 즉, 꾸준히 했다는 것에 점수를 많이 주시는 것 같다.(웃음) ‘꾸준히’라는 단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한다. 솔직히 난 할리우드 영화에 아직 출연도 못했다. <로스트>라는 드라마가 성공했을 뿐이다. 다른 한국 배우들에 비해서는 알려졌지만 솔직히 피플 매거진이 뽑은 섹시한 100명 중 88위에 뽑힌다는 건 내가 봐도 너무 말이 안 된다.(웃음) 루시 리우는 좀 식상하기도 하고, 장즈이는 미국 배우 같은 느낌은 안 들고, 차라리 매주 TV에 나오는 동양 여자를 뽑을까, 이랬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할리우드 내에서 김윤진의 위치는 지금 어디인가? 어디까지 당도한 게 아니라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아, <로스트>에 나오는 여자? 괜찮네, 뭐 이 정도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내 위치는 아직 없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