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의 고향♣
♣바람으로 살다간 아웃사이더 -매월당 김시습1부- ♣
1453년 10월 10일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른바 '계유정난'이었다
난을 일으킨 이는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
김종서와 황보인 같은 충신을 잃은 단종은 이름뿐인 왕이었다
서슬퍼런 숙부의 위협에 단종은 결국 왕위를 내주었다
그리하여 1455년 수양대군은 조선의 7대임금 세조가 됐다
유학적 가치쳬계를 완전히 뒤엎은 세조의 왕위찬탈
매월당 김시습(1435~1493)
조선의 선비들은 망연자실했다. 매월당 김시습도 그 중 한명
북한산 중흥사에서 과거공부를 하던 그는 통곡 끝에 읽던 책을 모두 불살랐다
그리고 선비이길 포기한 듯 상투를 잘랐다
인의예지가 무너진 세상에서 선비의 뜻을 펼칠 수는 없었다
바른 말과 과격한 의견을 주장했던 매월당 김시습
그는 비뚤어진 세상에 일침을 놓는 바람이었다
바람으로 살다간 아웃사이더-매월당 김시습
험준한 산악지대가 받치고 있는 비옥한 철원평야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는 한탄강을 온몸으로 껴안고 있는 고을, 철원
아름다운 절벽과 협곡이 발달된 이곳은
천해의 자연환경으로 예로부터 축복받은 땅이라 불렸다
그 때문일까?
삼국시대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철원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 되었다
고석정
궁예는 이곳에 '태봉국'을 세워 삼국통일의 야망을 키웠으며,
임꺽정은 철원을 거점으로 운동했다.
또 한국전쟁 때는 24번이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수난을 겪은 땅이다
복계산
세조가 무력으로 왕좌에 오른 1455년, 매월당 김시습도 철원과 인연을 맺었다.
그가 향한 곳은 복계산 자락의 사곡?촌
이곳에서 김시습은 조상치와 박계손 같은 선비를 만났다
그들은 모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어 관직을 버린 신하들이었다.
심경호 교수(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김시습평전>저자)
매월당 김시습은 아직 정치에 입문하지 않았던 인물이거든요
내적인 갈등이 굉장히 심했으리라 생각이 돼요
오히려 자기보다 연륜이 높은 분들을 통해서, 이 사태를 어떻게 내가 파악을 하고,
어떻게 현실에 대처할 것인가, 어떤 하나의 의지처를 구하지 않았을까?
힘에 의해 정치가 좌우되는 패도의 세상
인륜과 정의가 땅에 떨어진 현실에 김시습은 절망했다
시름이 깊어질 때마가 그는 복계산으로 향했다
매월폭포
그리고 순리를 따르는 자연에서 위로를 받았다
그래서 일까 산 곳곳에서 김시습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기암괴석 위에서 장쾌하게 내리 꽂히는 물기둥 '매월폭포'
온갖 근심이 한껏 씻겨 나갈 것 같은 이곳에서도
김시습은 흔들리는 나라를 걱정했다
스스로 세상을 등졌지만 결코 세상을 버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매월대
매월폭포에서 마주 보이는 건너편 바위봉우리
그곳에는 신선이 살던 바위라는 뜻을 지닌 '선암'이 자리하고 있다.
김시습과의 일화로 유명해진 덕분에 지금은 '매월대'라 불린다
높이 40m의 깎아 세운듯한 층암절벽, 매월대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전설에 따르면 김시습을 비롯한 조상치, 박계손 등 사곡?촌의 9선비들에게
매월대는 회합의 장소였다고 한다
아무도 듣는 이 없는 높은 바위 암벽에 바둑판을 세겨놓고
바둑을 두며 단종의 복위를 도모했던 곳이다.
구은사
복계산에서 20분 거리에 위치한 구은사
사곡?촌의 9선비를 기리는 사당이다
김시습, 조상치, 박도, 박제, 박규손, 박효손, 박천손, 박린손, 박계손,
이들은 자신의 입신양명보다 지조와 절개를 선택했던 시대의 양심이었다
역사는 비록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마을사람들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선비정신을 기억하고 있다.
유성근(구은사 총무)-
이분들이 생육신과 거의 엇비슷한 분들인데 그 뜻을 기리기 위해서
1818년(순조18)에 철원 지역 유림들과 후손들이
유성근(구은사 총무)
사당을 창건하여 제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봄, 가을 3월과 9월 상정일을 맞이하여 연 2회의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충절로 인해서 우리 지역 철원주민들이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교적 명문을 송부리째 흔든 왕위 찬탈, 이는 예견된 일이었다
1452년(문종2) 5월 14일,
병약했던 문종은 즉위 2년여 만에 승하하고 말았다.
단종(1452~1455)
나흘 뒤 외아들 단종이 왕위를 잇는다. 하지만 그는 고작 12살의 어린아이였다
어린 임금이 성인이 될 때 까지는 왕실의 어른이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대신 해줄 할머니도 어머니도 없었다.
김삼현 교수(동국대 사학과)
당황스럽죠, 그렇지 않겠습니까, 겁 나겠죠
12살에 무슨 정치를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선왕의 유지에 따라 황보인과 김종서 같은 고명대신들은
단종의 든든한 지지자가 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야망과 수완이 비범한 왕자, 수양대군이 탄탄한 세력을 구축했던 시기
전국의 주도권을 양분했던 고명대신들과 수양대군,
이들의 갈등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사사건건 이어지는 반목, 이는 마침내 목숨을 건 싸움으로 번진다.
먼저 움직인 것은 수양대군이었다.
숙청의 피바람, 그 첫 번째 대상은 여진족을 토벌하고 6진을 개척한
좌의정 김종서였다.
다음엔 영의정 황보인 등을 역적으로 몰아 처단했다
양쪽 날개가 꺾인 단종은 왕좌를 지킬 힘이 없었다
결국 단종은 즉위 3년, 수양에게 양위한 뒤 상왕으로 물러났다.
동생인 안평대군 마저 사사한 수양대군은
결국 그의 바람대로 왕의 자리를 차지한다
쿠데타로 왕좌에 오른 세조, 명분이 아닌 힘으로 빼앗은 왕위였기에
격렬한 반발이 뒤 따랐다
성삼문(1418~1456)
세조 2년 6월, 성삼문을 중심으로 한 집현전 학자들은
성승, 김질 등의 무인들과 단종을 복위시키기로 모의했다.
하지만 김질의 장인 정창손의 고변으로 이들의 계획은 수포가 됐다
또 다시 분 피바람
심한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던 6명의 신하들은 결국 능치처참을 당하였다
지조와 절개를 지킨 댓가는 죽어서까지 가혹했다.
저작거리에 널부러져 있던 시신,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그들의 시신을 수습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때 김시습이 나섰다
사육신을 도왔다는 이유만으로도 역적으로 몰릴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목숨과 바꾼 충절, 처참했던 의인들의 시신을 수습해
한강변 노량진 언덕에 묻었다
남 몰래 쓰였던 묘였기에 작은 돌로 묘표를 대신햇다.
청령포
원칙을 지켰던 젊은 선비들의 죽음을 뒤로 하고
김시습은 강원도 영월로 향한다
선왕으로 추대되었던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된 체, 이곳으로 유배를 왔기 때문이다
유배지인 청령포는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 쌓여 있고,
한쪽면이 높은 벼랑에 가로막힌 천해의 감옥이었다
김시습은 단종을 배알하고자 했지만, 접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단종이 있는 청령포를 향해 절을 올리고 또 올렸다.
이대형 교수(고려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단종을 세조가 이제 폐위시키고 왕이 되었다는 것,
그 현실 자체를 김시습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고,
그 시대 유생으로 살아가려면, 자결을 하든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거든요
그걸 인정한다는 것은 변절이 되는 것이고,
김시습은 그렇게 변절할 수 없었던 것이고...
단종유배지
비운의 왕 단종을 호위하는 듯, 유배지를 둘러 싸고있는 소나무들은
모두 신하의 예를 갖추는 듯, 단종어소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름 뿐인 왕으로 조용히 살고자 했지만, 세조는 그 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단종이 살아있는 한, 수양대군은 반쪽짜리 임금이 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조는 17살의 어린조카 단종을 죽음으로 내 몰았다.
유배지에는 영조의 친필로 세겨진 '단묘유지비'가 남아 옛일을 전하고 있다
관음송
550여년이 지났지만, 청령포 곳곳에는 단종의 이야기가 남아있다
동서로 나뉘어 비스듬하게 자라고 있는 나무 '관음송'
한 가지는 한양을 향해, 한 가지는 청령포 쪽으로 갈라진 나무는
마음은 한양에, 몸은 청령포에 둔 단종의 현실을 표현한다고 한다
김은영(문화관광해설사)-
뿌리는 하나인데 가지가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어서,
저기에 어린 단종임금께서 걸터 앉으셔서, 무섭고 외로운 마음을 달랬던 곳
그것을 이 소나무가 다 보고 들었다고 해서 '목격자'라는 의미에서
'관음송'이라고 이름을 부치게 됐구요.
천연기념물 제 349호로 지정이 됐고, 약 600살로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1458년 봄 김시습은 충청남도 공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룡산
동학사
계룡산 동학사에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은각(三隱閣)
동학사를 선택한 것은 어쩌면 이곳에 있는 특별한 전각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의리와 신념, 그리고 목숨을 아끼지 않은 고려충신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삼은각'
삼은은 이곳에 모셔진 3사람의 호에서 유래한다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이들의 지조와 절개는 김시습에게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임재갑(사단법인 숙모회 관리국장)
유랑 생활을 하다가 고려 충신을 모셔 놓은 삼은각을 보고 감개하였다가
삼은각 옆에 단을 쌓고 사육신의 초혼제사를 지낸 것이
오늘날 숙모전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숙모전
매월당은 전 부제학 조상치, 전 참판 이축 등과 함께
동학사에서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냈다.
그리고 단종을 위한 제단을 마련했다.
이 제단에 전각이 세워진 것이 바로 '숙모전'이다
그 누구보다도 명민한 유학자 였음에도 불구하고
김시습은 스님이 되고자 했다.
흔들리는 유학적 가치의 해답을 불교에서 찾고자 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언제 정확히 출가를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김시습이 남긴 글을 통해서, 동학사에서 단종에게 제를 올린 뒤
머리를 깎고 승려의 차림으로 방랑을 떠난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뜨거운 피가 돌았던 젊은이 김시습은 '설잠'이라는 법명을 짖고,
구름따라 물따라 세상을 떠 돌 결심을 한다
강석근 교수(동국대 교양교육원)-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린 거지요.
세조의 왕위 찬탈과 단종의 승하는 김시습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린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학자로써는 몸 담을 수 없는 불가에 몸을 담고,
계속 방랑의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황천우 소설가 <매화와 달>저자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자기 스스로 머리 깎고, 자연과 함께 떠나 가는 거죠
현실의 고통을 잊을 길은 방랑 뿐이었다
그의 첫 목적지는 관서지방이었다.
쉼 없이 걷고 또 걸으면서 관서의 풍광과 역사
삶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유학자로 태어나고 자랐지만, 스님의 길을 선택한 김시습
그에게 방랑은 차라리 도피에 가까웠다.
하지만 현실을 떠난 유랑에서 그가 마주한 것은 세상이었다.
김상현교수-
김시습이 머리를 깎고 전국을 떠돌면서 다녔던 것을 현실도피라든지,
혹은 방랑이라고들 이해하는데, 이러한 이해는 다분히 유가적인 입장에서
이해인 것 같습니다
불교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것은 한 수행의 방법이고
이것을 불교해서는 '두타행'이라든지 혹은 '유력'이라고 말하는 거죠
이건 중요한 한 수행의 방법이었습니다.
김시습의 여정은 10년이나 이어졌다.
24살의 봄 그는 개성을 거처, 평양 순안 안주 영변 묘향산 회천 등을 떠돌았다
두 해 후에는 포천 철원 내금강 원주 오대산을 넘어 강릉 등을 유람했다
관동과 관서를 돌아본 뒤
청주 인간 전주 변산 내장산 남원 화순 거창 금오산 등 호남등지를 유람했다
관서와 관동 호남 금오를 여행하면서 쓴 시를 모아 책을 펼쳐냈다
사유록
자신의 방랑을 호탕한 유람, 즉 '탕유'라 일컬었던 김시습은
'놀유(遊)'자를 부처 4권의 책을 모아 후대에 엮은 것이 바로 '사유록'이다.
사유록
'탕유관서록' '탕유관동록' '탕유호남록' '탕유금오록'으로 구성
한 지역에 오래 머물지 못한 김시습은 이 시기에
450여 수에 달하는 시를 지었다
심경호 교수-
김시습은 여행하면서 발 닿는 곳곳에다, 자연스럽게 시를 썼어요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지역성, 지역의 풍토성과 기후, 역사성, 이런 것들을
아주 폐부로 느껴서 그것을 자기의 감성과 어울어진 글을 쓰고
정말로 자유자재하게 시를 썼습니다.
이런면에서 김시습의 천재성은 이미 20대에 남긴 유랑록에도
충분히 나타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명륜동
놀랄만한 시적 상상력으로 자신의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했던 김시습
성균관
성균관 북쪽 반곡?리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시절부터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인재였다
김시습(당시5세)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김시습은 8달만에 글을 알았으며, 또 3살때부터 시를 지었다고 한다
천재라고 부렸던 아이 김시습
허조(1369~1439)
어느 날 김시습의 총명함을 듣고, 정승 허조가 찾아왔다.
70세의 고령이었던 허조는
자신을 위해 "늙을 로(老)'자를 넣어 시를 지어 줄 것을 부탁했다
5살의 김시습은 정승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노목개화심불로(老木開花心不老)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도다
라는 내용의 시를 지었다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써내려간 싯구
이를 본 노학자는 김시습에게 신동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천재아이에 대한 소문은 궁궐 안까지 퍼졌다
세종은 김시습을 불러 시험해 보고자 했다
임금은 직접 마주하고자 했지만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대신 승지를 내세웠다
이번에도 김시습은 막힘없이 시를 지어냈다
5살 짜리의 글이라곤 믿기지 않은 실력, 승지는 어전에 들어가 이 사실을 아뢰었다
세종(1418~1456)
세종은 조숙한 천재성에 감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첩지했다
지극히 정성스레 가르쳐서 키우도록 하라
성장하여 학문을 성취한 뒤에 크게 쓰고자 하노라
세종의 장려를 받은 아이 김시습은 임금이 훗날을 약속했던 기대주였다
이때부터 김시습은 '5세신동'으로 그 이름을 떨쳤다
이는 어머니의 힘이었다
맹자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김시습의 어머니도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성균관 근처로 이사할 만큼 열성적이었다.
무한한 사랑과 배려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던 어머니는
그가 15세 되던 해 세상을 떴다
어머니의 갑작스런 별세는 헤어날 수 없는 외로움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때 그는 불교를 접한다
이기운교수-
어린 김시습한테는 굉장히 큰 충격이었던 것 같아요
그와 더불어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게 되고, 집안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데,
이런과정에서 굉장한 충격을 받았고, 절에 들어가서 나름대로 스님들도 뵙고,
그 다음에 불교서적을 이런계기로 해서 보게되고,
그러면서 자기의 본래 가지고 있던 성격, 천재성 비분강개한 성격,
이런 것들이 불교인의 출가로써 승려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한것이 아닌가?...
남산(금오산)-경주
사대부의 자제들이라면 한참 벼슬길에 올라 한참 뜻을 펼칠 나이인 28
그해 김시습은 경주 금오산에 머문다
방랑생활을 잠시 접고 은거에 들어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칼날같은 절벽이 병풍을 이루고 있으며, 산세가 가파른 금오산 이야말로
은둔하기 안성맞춤이었다
또 이곳은 찬란했던 불교문화가 꽃핀 곳이기도 했다
김시습에게 방랑은 수행이었다
자유롭게 떠도는 삶을 통해 불교의 깨닳음인 '선'을 하고자 했다
돌연 그가 8도유람을 멈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재오 기행작가 <천년고도를 걷는 즐거움> 저자
그 해답을 찾기 위해 특별한 안내자가 함께 했다
용장사지 삼층석탑
이재오 기행작가 <천년고도를 걷는 즐거움> 저자
자기의 끓는 피, 아니면 용솟음치는 어떤 저항심리
이런 걸 가장 알맞게 자기하고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거대한 산은 아니면서도 아기자기 하면서도
깊이 자기 심정을 쏟아 부을 수 있는, 바위에서 아니면 산세에서
자기가 은거하기가 적당하니,자기하고 비유해 볼 때 맞아서
여기서 했지 않나 싶습니다
김시습은 석탑이 올려다 보이는 곳에 은거했다
이재오 기행작가-
여기가 바로 '용장사지'입니다
절터의 흔적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석담과 석축이 있습니다.
산지이기 때문에 공간이 많이 안나와서
석축을 쌓아서 평지를 만들고 또 석축을 쌓아서 평지를 만든 것입니다.
지금은 터만 남아있는 용장사
김시습은 용장사의 도서관 격인 경실에서 오랜시간 머물렀다
그리고 자신의 거처 앞에 매화나무를 심었다
매화의 절개를 사랑했던 김시습은
자신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써 매화와 관련된 시를 많이 남겼다
꽃 필 때 품격은 뭇꽃 중에 빼어나고
열매는 간 맞춰 음식 맛 향기롭네
시종 큰 절개를 보존하니
다른 방초가 어이 짝할 수 있으랴
이재호 기행작가
매화가 한송이 꽃을 피울 때 자기 마음을
매화의 가장 강점은 비록 얼어죽을 지언정, 향기 팔아 살지 않겠다는 것
매월당이 그것을 가장 좋아해을 겁니다
그래서 매월당, 달과, 매화...
달과 매화를 벗삼아 절개와 지조를 지키겠다는 뜻을 지닌 김시습의 호 '매월당'
그는 자신의 이상인 충의를 지키기 위해 세상을 버렸지만,
결코 현실에 대한 관심을 거둘 수는 없었다.
한가지 사상에만 빠지지 않았던 김시습은 유교, 불교, 도교를 넘나들면서
유불선의 조화를 모색했다
이는 결국 여행 중에 목격했던 백성들의 고통을 어루만지기 위함이었다
김삼현 교수
현실을 도피해서 산 속에서 파묻혔던 그런게 아니라,
백성들의 아픔이라든지 이런쪽으로 현실,
불교를 하되 현실불교, 현실생활 속에 그런 자비라든지,
실천적인 것을 생각했던 것을 보면, 한쪽으로는 초월하는 듯하며 하면서도
다시금 세상속으로 돌아오는 듯....
분황사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주체할 수 없이 커지면 김시습은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천년의 역사유적을 살폈다
경주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는 원효, 그는 원효를 닮고자 했다
원효(617~686)
원효는 통일신라를 이룩하는데 기여한 대 사상가이자
귀족의 위치를 버리고 대중과 함께 한 자유로운 성자였다
원효는 불법을 전파하여 갈라진 마음을 하나로 만들고
다양한 주장을 조화롭게 화해시켰으며, 걸림없는 무의 자유로움을 보여주었다
김시습은 원효의 대중불교에 공감했다
그 역시도 생명이 있는 한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매사에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삶, 집착을 버리고 얻는 진정한 자유로움을
모범으로 삼고자 했다
김상현 교수
원효가 갖고 있던 대중교화라는 측면을, 아마 상당히 동감하고
김시습이 거기에 감동했던 것 아닌가
'자애' 즉 자비가 곧 불교의 핵심이라고 봤고
그것을 유교에 '인'이라든지 이런 쪽으로 해석하면서
결과적으로 백성들의 아픔을 잘 어루만져서 정치도 해야되고
백성들의 삶을 돌보는 것이야 말로 불교의 본질이라고 파악한 것 같습니다.
율무 염주를 주먹에 두르고
쇠털 모자를 머리에 쓰고서
어이해서 본업을 버리고
고생고생 먼 길을 돌아다녔나 -유객(有客) 中
세상을 등졌지만 혁명을 꿈꿨던 비운의 천재 김시습
그는 비뚤어진 세상에서 미치지 않고선 버텨낼 재간이 없던 절개의 상징이었다
비행으로 세간에 곧장 휘말렸지만, 매월당은 개의치 않았다
오로지 자연에 은둔하면서 세상에 무수히 많은 글을 남겼다
그리고 전대미문의 작품 '금오신화'를 세상에 내 놓는다
다음 시간에는 '매월당 김시습' 2부가 방송됩니다. |
첫댓글 조선초기 어린 조카인 단종을 내치고 수양대군이 왕으로 등극함에 분개하여 천재이면서도 혁명의 꿈을 이루지 못하였고 생육신으로 은둔 생활을 하였으나 그가 남긴 많은 시와 단편소설집 금오신화를 남기게 됨으로 당대의 최고의 지성으로 평가 받고있음에 이의가 없다 하겠습니다.조선조 3명의 천재는 교산 허균, 매월당 김시습, 율곡 이이 라 합니다.좋은글 감사합니다.<설 송>
설송님은 박식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