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 와우아파트 붕괴현장
3ㆍ1고가도로, 강변도로, 남산 1ㆍ2호 터널 등 불도저식 개발이 서울 전역에서 숨가쁘게 이어지던 1970년 4월8일 오전6시20분,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위치한 와우시민아파트 한 동(棟)이 폭삭 주저앉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아직 새벽잠이 덜 깬 주민 70여명 중 33명이 압사하고 수십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건물을 60도나 경사진 와우산 중턱에 세운데다 기둥에 쓰인 철근도 규격보다 적고 시멘트 배합량도 기준에 미달하는 날림공사가 원인이었다. 준공된 지 4개월 밖에 안된 와우아파트 참사는 우리 사회의 취약한 지반을 만천하에 까발린 계기가 됐고 무리한 고속개발에 대한 첫 대규모 경고음이었다.
결국 서울시의 무사안일과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건설업자의 과욕, 여기에 사회전반에 만연된 고속성장에 대한 조급증과 안전불감증이 총체적으로 빚어낸 인재(人災)였다. /조선
[1950년] 20세기 최고의 발레리노 니진스키(Nijinsky, Vaslav) 사망
← 20세기 최고의 발레리노 바슬라프 니진스키
20세기 최고의 발레리노 바슬라프 니진스키는 두 번 죽었다. 세속적인 생명은 1950년 4월 8일에 끊겼지만 예술가로서의 생명은 1919년부터 사실상 멈춰 있었다. 정신병원이 그의 안식처가 됐기 때문이다.
스물아홉 명성의 정점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린 ‘발레사(史)의 전설’ 니진스키는 어려서는 ‘발레의 신동’이었고 성장해서는 ‘발레의 신’이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 ‘중력의 법칙’을 비웃는 듯한 도약, 그의 등장은 고전발레와 현대발레의 분기점이었다.
니진스키는 디아길레프라는 20세기 최고의 공연기획가를 만나면서 찬란한 발레리노의 꽃을 피웠지만 한편으로는 그 때문에 파국도 맞았다. 둘을 이어준 것은 디아길레프가 창단한 발레단 ‘발레 뤼스’(러시아 발레단)였다. 1909년 니진스키는 ‘발레 뤼스’의 파리 첫 공연에 합류한다. 열광하는 관객들로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공연이 회를 거듭할수록 니진스키는 파리 예술계의 명사(名士)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한다. 그의 무용에 넋이 나간 조각가 로댕은 그가 춤추는 모습을 3점의 조각으로 남겼고, 시인 장 콕토는 공연 포스터와 팸플릿을 직접 디자인했다. 1912년에는 직접 안무까지 맡아 ‘목신(牧神)의 오후’를 무대에 올렸으나 고전무용의 법칙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1913년 5월에는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한 ‘봄의 제전’ 안무를 맡아 폭동에 가까운 객석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생전에 그가 안무한 작품은 모두 4편에 불과하고 무대공연은 단지 20여회에 불과했지만 그의 몸짓은 어느덧 현대발레의 경계를 넘고 있었다.
개인사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스승이자 동성애 연인 디아길레프와 헤어져 여성 무용수와 결혼한 것이다. 질투에 불탄 디아길레프는 니진스키를 발레단에서 쫓아냈고, 이를 견디지 못한 니진스키는 결국 정신질환의 나락으로 떨어져 무용가로서의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조선
[1859년] 후설(Edmund Husserl) 출생
← Edmund Husserl
1859년 4월 8일 태어남 / 1938년 4월 27일 죽음
후설은 현상학의 창시자로서 20세기 철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독일의 철학자이다. 처음에는 수학을 공부했으나, 스승이었던 프란츠 브렌타노의 영향으로 수학의 심리학적 기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심리학·논리학·철학을 연구해 의식의 심리학적 분석과 논리학 및 수학의 철학적 기초를 결합하고자 했다. <논리 연구 Logische Untersuchungen>(1900~01)에서 철학자 본연의 임무는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며, 존재는 의식 행위와 상관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의식 행위의 본질적 구조를 밝히는 것이 철학의 기초라고 주장함으로써 현상학의 터전을 마련했다. 이후 약 15년 동안 괴팅겐대학교에 재직하면서 현상학을 보편적인 철학적 학문으로 발전시켰다. 1916~28년에는 프라이부르크알브레히트루트비히대학교의 정교수로 일하면서 철학 연구에 매진했다. 마르틴 하이데거, 장 폴 사르트르 등 20세기의 주요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35년] 미국 공공사업진흥국 설립
←루스벨트(1937)
1935년 4월 8일 미국 공공사업진흥국이 설립되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30년대의 대공황을 극복하고자 뉴딜 정책을 실시하면서 이를 주관할 기관으로 공공사업진흥국을 신설했다. 1943년까지 공공사업진흥국이 존속하는 동안 연방정부는 약 110억 달러를 지출해 당시 1,100만 명이 넘는 실업자 가운데 850만 명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대대적인 건설계획에 의해 도로와 공공건축물을 만들었으며, 공공사업진흥국 연방미술계획으로 시각예술을 포괄적으로 지원함으로써 미국의 신예술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공공사업진흥국 연방작가계획으로 작가와 연구원을 고용해 모든 주와 자치주에 대한 자료와 여행안내를 담은 수천 권의 아메리칸 가이드 시리즈를 만들어냈다. 1943년 전시경제로 인해 사실상 실업이 근절됨에 따라 폐지되었다.
[1953] 케냐의 케냐타, 유죄선고
←케냐타
1953년 4월 8일 케냐의 민족주의 정치가 조모 케냐타가 마우마우단 테러 혐의로 유죄선고를 받았다. 당시 키쿠유족이 중심이 된 마우마우단은 영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했던 케냐의 민족운동 세력 가운데 하나로 무력저항을 시도했다. 1952년 마우마우단에 의한 테러와 암살이 빈번해지자 정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반란군에 대한 군사작전을 벌였으며 민족주의 지도자인 케냐타를 체포했다. 영국령 케냐 정부는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했으나 키쿠유 저항군은 케냐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다.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케냐타는 재판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다. 톰 음보야, 오깅가 오딩가 같은 케냐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케냐 아프리카 국가연맹(KANU)을 조직해 구금상태였던 케냐타를 의장으로 선출했다. 1963년 5월 KANU는 사전독립선거에서 승리했고, 이듬해 케냐타는 독립국 케냐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929] 법학자·교육자 최재훈(崔載勳) 출생
1929. 4. 8 경남 산청~ .
1953년 서울대학교 법학대학 행정학과를 거쳐 1955년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1971년 부산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 1984년 타이완 정즈대학교[政治大學校]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 1987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6~83년 부산대 법학대학 교수를 지냈고, 1965년 〈국제신보〉 논설위원, 1971~73년 부산대 법학대학 학장, 1980년 동 대학 행정대학원장, 1983~87년 동 대학 총장, 1983년 국제법학회 회장, 1988년 일본 규슈대학[九州大學] 법학부 교수를 지냈으며, 1992년 현재 서울 국제문제연구소 이사장(1990~), 부산대 명예교수(1991~)로 재직중이다. 학계와 교육계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저서로는 〈국제법강의〉·〈국제법학〉·〈법학개론〉 등이 있고, 〈국제법〉·〈국제법의 위기〉 등을 번역했다.
[1916년] 서양화가 장이석(張利錫) 출생
1916. 4. 8 평양~.
1938년 일본 다마가와[多摩川] 미술학교를 마쳤으며, 1958년 〈그늘의 노인〉이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973~81년 중앙대학교 회화과 교수로 있었고 1976년 프랑스에서 첫 개인전과 1980년 제 2회 개인전을 가졌다. 1981년 중앙대 예술대학 명예교수를 역임했고, 1983·1984·1986년 한국미술가협회전에 출품했다. 1992년 구상전(具象展)의 회장이 되었고 서울미술대전과 대전 엑스포 미술전 운영위원으로 있었다. 국전 초대작가상, 국민훈장 석류장, 은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남국의 봄〉·〈소한 小閑〉·〈여담 餘談〉 등이 있다.
[1908년] 작곡가 이면상(李冕相) 출생
1908. 4. 8 함남 함주~1989. 6. 25.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해 15세 때 함흥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학비난으로 퇴학당하고 식산은행 함흥지점에서 급사생활을 했다. 1923~25년 함흥사범학교 특설과에서 음악공부를 했으며, 원산제2보통학교에서 교원으로 재직하던 중 풍금과 바이올린을 배웠다. 이 시기 그는 민요에도 관심을 가지고 채보·연구했으며, 20여 편의 동요를 묶은 작곡집을 발표하기도 했다. 광주학생사건에 연루되어 퇴직당한 후 1930년 4월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음악공부를 계속했다. 1933년 귀국하여 서울의 빅터 레코드사에서 작가로 일하면서 많은 곡들을 작곡했다. 일제강점기에 그는 〈울산타령〉·〈뻐꾹새〉 등 민족의 수난을 반영한 민요조의 서정가요들을 여러 곡 발표했다. 해방 후인 1945년 10월부터 함경남도 음악건설동맹 위원장과 북조선음악건설동맹 위원장(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1948년에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북한의 음악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공훈예술가(1955), 인민상 계관인(1958), 인민예술가(1961) 칭호를 받았으며, 1972년에는 김일성상 계관인이 되었다. 또한 1971년 11월부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해방 이후의 대표적인 가요 작품으로는 〈소년단행진곡〉(1946)·〈빛나는 조국〉(1947)·〈조국보위의 노래〉(1949)·〈압록강 2천리〉(1952)·〈영광의 땅 보천보〉(1955)·〈어머니 당이여〉(1964)·〈끝없는 이 행복 노래부르네〉(1965) 등이 있으며, 민족적 생활감정과 시대정서를 진실하고 감동적으로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그는 '피바다식 가극'을 비롯해 무대예술 작품을 위한 음악을 창작하여 주체적 음악예술 발전에 공헌한 바가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북한의 가극 형성과 음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8년 4월 모란봉 지상극장에서 그의 80회 생일을 기념하는 이면상음악회가 개최되었다.
[1906년] 서양화가 김종태(金鍾泰) 출생
1906. 4. 8 경기 김포~1935. 8. 17 평남 평양.
호는 회산(繪山).
20세인 1926년 5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자화상〉으로 입선한 뒤 1928, 1929, 1930, 1933, 1935년에 특선을 차지하는 등 거의 매년 입상하여 주목을 받았다. 1930년 전후 서양화의 정착기에 선전을 중심으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1935년 선전의 서양화부 첫 추천작가가 되었다. 10여년 동안의 짧은 미술활동 전반기에 해당하는 1927년 〈어린이〉와 1928년 선전 특선작인 〈포즈〉, 1929년 〈낮잠〉·〈노란 저고리〉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들은 활달한 필치와 경쾌한 색조로 대상을 완숙하게 표현했다. 1930년 미술공부를 위해 잠시 일본에 가서 일본 이과전(二科展)에도 2회 출품했다. 몇 편의 평문(評文)을 쓰기도 해 '이종우 귀국전'에 대한 신문촌평(동아일보, 1928)에서 "조선의 고유색을 가져야 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고 〈미술가의 생활의식〉(조선일보, 1935)에서는 미술가에 대한 사회의 몰이해를 반박하고 미술가의 사회의식 결여를 지적하기도 했다. 1931년 개성의 중앙회관에서 유화 40점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1935년 8월 평양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던 중 장티푸스에 걸려 죽었다. 천재적인 기질과 일상생활에서 벗어난 기이한 행동 등으로 일제시대 딜레탕트한 예술가의 삶을 살았고 독학으로 독자적인 화풍을 지니고 있는 1930년대 가장 주목받는 화가였으나 남겨진 작품이 별로 없다는 등의 이유로 이후 일반에게는 잊혀졌다.
[1905년] 독립운동가 조명하(趙明河) 출생
1905. 4. 8 황해 송화~1928. 10. 10.
본관은 함안(咸安). 풍천보통학교를 거쳐 송화보통학교에 편입, 졸업했다. 1926년 3월 군청서기 임용시험에 합격해 신천군청에 근무하던 중 6·10만세운동, 송학선의 금호문의거(金虎門義擧), 나석주의 식산은행 및 동양척식주식회사 투탄의거 등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키가와 도미오[明河豊雄]라는 가명을 쓰면서 오사카[大阪]에서 전기제작소의 직공, 메리야스공장 노동자, 상점원 등으로 일하고 밤에는 상공전문학교(商工專門學校)를 다녔다. 그러나 일본에서 뜻을 펼 마땅한 기회가 오지 않자, 상해임시정부로 출발하여 1927년 11월 기착지인 타이완에 도착했다. 그는 타이중 시[臺中市]에서 일본인 이케다[池田正秀]가 경영하는 차엽농장(茶葉農場)의 고원(雇員)으로 일하면서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히로히토 천황의 장인인 육군대장 쿠니노미야 쿠니요시오(久邇宮邦彦王)가 검열사로 타이완에 온다는 것을 알고, 그를 척살하기로 결심했다. 조명하는 칼 쓰는 법 등을 익혀 준비한 뒤 1928년 5월 14일 독을 바른 칼을 들고 쿠니노미야의 행로에서 인파에 묻혀 대기하다가, 그가 무개차를 타고 지나가는 순간 차에 뛰어들어 독검으로 찔렀다. 쿠니노미야는 상처를 입었고 이듬해 독이 퍼져 사망했다.
조명하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7월 18일 사형 선고를 받은 뒤 24세의 나이로 10월 10일 타이페이 형무소에서 처형 당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896년] 정치가 허정 許政 출생
1896. 4. 8 부산~1988. 9. 18 서울.
호는 우양(友洋).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했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한 후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1920년 임시정부 관계자들과 중국 국민당(國民黨)의 주선으로 프랑스에 유학하며 6개월 정도 체류하는 동안 재불 한인거류민회장이 되어 교민들을 결속하는 데 힘쓰고, 이후 미국 뉴욕 한인유학생회장으로 활약했다. 1922년 북미한인교민총단장이 되어 재미교포의 독립사상을 고취했으며, 1923년 미국 교포신문인 〈삼일신보〉 사장에 취임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회에서 일했다. 이때부터 21세 연상인 이승만와 개인적으로 가깝게 지내면서 그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1933년 귀국해 이기붕과 함께 광산 일을 했다. 1938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 조선어학회사건 등으로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기도 했다.
8·15해방이 되자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의 결성에 참여해 집단지도체제에 해당하는 8인 총무의 일원이 되었으며, 1948년 부산 을구에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됨과 더불어 헌법기초위원에 피선되었다. 같은 해 10월 교통부장관, 1950년 3월 사회부장관을 역임했으며, 1951년 11월부터 국무총리 서리를 겸직했으나 부산정치파동 직전인 1952년 4월 국무총리 서리를 사임했다. 1957년 12월 서울특별시장에 임명되었으나, 1960년 3·15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서울특별시의 행정 비협조에 불만을 품은 자유당측과의 알력으로 1959년 6월 사임했다. 그해 한일회담(韓日會談) 수석대표로 활약했고, 1960년 4월 외무부장관에 취임했으며, 4·19혁명 후에는 과도내각수반을 겸직해 혼란시기에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무난히 수행했다. 1963년 민정이양과정에서 윤보선·이범석·김병로 등과 함께 국민의 당을 창당하고 대표최고위원에 취임했으나, 당내의 파벌 싸움으로 인한 분당과 함께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1969~84년 국토통일원 고문, 1980~84년 국토통일원 고문회의 의장, 1980~88년 국정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인촌문화상을 받았으며, 자서전 〈내일을 위한 증언〉이 있다.
[1973년] 프랑스 화가 피카소(Picasso, Pablo) 사망
← 파이프를 든 소년
1881.10.25~1973.4.8
스페인 태생의 프랑스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1973년 4월 8일에 92세의 나이로 남프랑스 별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화가 중에 한 사람이었던 그는 미술사에 있어서 큐비즘 즉, 입체주의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피카소는 14세 때 스페인의 수도 바르셀로나로 이주,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미술교육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르누아르, 툴루즈로트렉, 뭉크의 화법에 매료됐으며 프랑스와 북유럽의 미술운동에서 많은 자극을 받았다. 1897년 마드리드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바르셀로나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고 1900년 예술도시 파리에 입성, 이듬해에 다시 방문하여 몽마르트를 중심으로 자유분방한 작품활동을 하던 보헤미안무리에 합류하기도 했다.
청색이 주조를 이룬 소위 청색시대(靑色時代)를 거쳐 도색시대(桃色時代)로 색채가 변화되면서 독특한 단순화와 엄격성이 가미되었다. 1907년 명작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세상에 내놓음과 동시에 브라크와 두터운 교우을 나누면서 그와 함께 입체파운동에 힘써 분석적 입체파, 종합적 입체파를 완성했다. 세계2차대전이 발발하던 해에 조국 스페인에 있던 피카소는 독일군의 파리 침입직후 파리로 돌아와 레지스탕스 지하운동에 가담하기도 했고 정전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회화뿐만 아니라 도자기에 심취하여 많은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1963년] 박정희 최고회의의장, 군정 연장 국민투표 보류 성명
박정희(朴正熙, 1917~1979) 군사독재정권은 1963년 4월 8일, 군정 4년 연장을 획책하는 소위 국민투표를 보류하겠다고 성명, 이는 박의장이 3월 16일, 군정 4년 연장을 국민투표에 붙이겠다고 성명을 내자, 국민적 저항에 철회한 것.
[1954년] 세계 최초의 제트여객기 코메트[Comet], 공중폭발 사고로 운항정지
세계 최초의 제트여객기. 영국의 드 해빌랜드사(De Havilland 社)가 설계 ·제작한 세계 최초의 제트여객기이다. 코메트란 ‘혜성’이란 뜻이며 1949년 (7월 27일) 처녀비행을 했다.
길이 28.35 m, 너비 35 m. 터보제트엔진 4기를 탑재하고 후퇴날개와 여압객실(與壓客室)을 갖추고 있으며, 승객 정원은 36명이다(1형). 정기항공에 취항한 것은 1952년 5월 2일 비이에이(BA;영국항공회사)의 전신인 영국해외항공회사(BOAC)의 런던∼요하네스버그 노선이 시초이다.
처음에는 운항이 순조로웠으나 1953년 5월 공중분해로, 1954년에는 잇달아 2건의 공중폭발사고가 발생하였다. 사고조사 결과 여압에 의한 동체 외판의 피로파단(疲勞破斷)이 추락의 원인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요소가 많았다는 이유로 드 해빌랜드사에게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다.
이 사고는 제트수송기를 개발하는 데 귀중한 교훈이 되었다. 즉, 이후부터는 여압동체를 가진 제트수송기는 미리 수조(水糟) 안에서 동체에 내압(內壓)을 반복 부하(負荷)하여 충분한 피로강도(疲勞强度)를 지닌 것을 확인한 후 취항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코메트 4형까지 설계가 변경된 후로는 순조롭게 운항되었으나 현재는 세계의 항공로에서 사라졌다.
[1931년] 스웨덴의 시인 칼펠트(Karlfeldt, Erik Axel,) 사망 - 1931년 노벨 문학상 수상
1864.7.20~1931.4.8
폴케르나 출생. 향토중심주의(鄕土中心主義:regionalism) 신낭만파 시인으로서 다라나 지방의 사람과 평생 동안 자연을 노래하였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보조교사 등을 하면서 12년간이나 대학에 적을 둔 끝에 웁살라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아 졸업하였다. 그 후 1900년에 왕립도서관 사서(司書)가 되었고, 3년 후에는 농업협회의 사서직을 맡았으며, 한편으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처녀작 《황무지와 사랑의 노래 Vildmarks och Karleks visor》(1895)에 이어 발표한 《프리돌린의 노래 Fridolins visor》(1898) 《프리돌린의 낙원 Fridolins lustg嫦rd》(1901)은 그의 명성을 굳혀 준작품들이었다. 이 시들은 ‘다라나의 벽화시(壁畵詩)’로도 알려졌다. 1904년 스웨덴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1912년에는 상임 이사에 임명되었다. 시집에 《플로라와 포모나 Flora och Pomona》(1906) 《플로라와 벨로나 Flora och Bellona》(1918) 《가을의 뿔피리 Hosthorn》(1927) 등이 있다. 생전에 그가 수상(受賞)을 사양했던 노벨문학상이 죽은 직후에 추증되었다.
그밖에
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장례식
2004년 이라크 무장세력, 이라크 방문한 한국 목사 8명 억류, 5시간 만에 7명 석방-1명 탈출
2004년 국내 유일의 기독교박물관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재개관
2004년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9.11` 조사위 공개증언
2003년 ‘소녀역사’ 임정하 제14회 춘계여자역도경기대회서 총 6개의 한국신기록 달성
2002년 김동성 쇼트트랙 선수, 세계쇼트트랙선수권대회에서 대회사상 첫 전관왕 수립
2001년 서울대 미대 초대 학장을 지낸 서양화가 장발 별세
2001년 미국 화성 탐사선 오디세이 발사
1995년 한국형 원자로 울진3호기 설치
1995년 한국-니카라과, 비자면제협정 체결
1994년 호소카와 모리히로 일본 총리 사임
1993년 F16 전투기 야간비행 중 추락
1989년 연극인 이해랑 사망
1984년 한국. 브루나이 정상회담
1983년 소련 영국외교관 등 2명 추방
1983년 마마로니 솔로몬군도국 수상 내한
1982년 서울 현저동 지하철 공사장 붕괴참사 - 사망10명 부상 42명
1982년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관련 최기식 신부 구속
1980년 첫 국산 구축함 `울산호` 진수식
1979년 단국대, 충북 청원군서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비문인 고구려 장수왕 척경비 발견
1975년 긴급조치 7호 선포. 고려대학교에 휴교령
1974년 미국 야구선수 행크 아론 715홈런 달성, 베이브 루스가 세운 홈런 714개 갱신
1971년 거제대교 준공
1971년 서독경찰, 한국대사관의 노무관, 유성근 일가족 실종 발표
1967년 공군 수송기 서울에 추락
1966년 인도 남부의 최대의 가뭄
1966년 브레즈네프 당 서기장 취임
1965년 중앙정보부 경향신문의 이향백 체육부장을 간첩혐의로 구속 발표
1964년 무인우주선 제미니1호 발사
1964년 미국 우주선 타이탄 2호 무인으로 궤도 진입 성공
1963년 워커힐 개관
1962년 프랑스 국민투표
1961년 1961년 대만, 불기 2505년 맞아 석가탄신 기념식 거행
1958년 참전 16개국 중국에 통한각서 전달
1953년 메이저컴퍼니사 에드먼트 오브리언이 주연으로 출연하는 세계 최초의 3차원 영화인 ‘맨 인 더 다크(Man in the Dark)’를 미국 뉴욕의 글로브 극장에서 상영했다.
1953년 유엔(UN) 총회 서유럽 군축안 채택
1947년 킨제이 성(性) 연구소 설립
1935년 ‘뉴욕타임스’ 발행인 옥스 사망
1919년 강계 학살사건 발생
1911년 프랑스 산문가 에밀 시오랑 출생
1911년 천주교 한국교구, 서울.대구의 두교구로 승격. (조선대목구, 서울대목구로 개칭, 대구대목구가 분리, 설정)
1904년 영국.프랑스협정 성립. 영국의 대 이집트 권익. 프랑스의 대 모로코 권익을 상호 승인
1899년 서울시내 전화 개통
1895년 노르웨이 탐험가 난센 북극 정복
1895년 덕수궁에 최초로 전등 사용
1888년 북한의 조류학자 원홍구 출생
1861년 안전 엘리베이터를 발명한 오티스 사망
1835년 독일의 언어학자··교육개혁가 훔볼트 사망
[1861년] 손병희 [孫秉熙] 선생 출생
천도교 지도자이며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밀양. 초명은 응구(應九)·규동(圭東). 호는 소소거사(笑笑居士), 도호(道號)는 의암(義菴).
동학입도
아버지는 두흥(斗興)으로, 22세 때인 1882년(고종 19) 큰조카 천민(天民)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했다. 이필제(李弼濟)의 난에 연루되어 정부의 탄압을 받아 산간지방을 전전하면서 포교활동을 전개하던 동학교문은 1880년대 들어 손병희를 비롯하여 손천민·김연국(金演局)·박인호(朴寅浩)·서인주(徐仁周)·황하일(黃河一)·김은경(金殷卿)·윤상오(尹相五) 등 새로운 인물들이 입도하면서 교문(敎門)의 체제를 정비하고 교세를 삼남지방으로 급속히 확대시켜나갈 수 있었다. 1894년 4월 남접(南接) 주도하에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최시형(崔時亨)·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북접세력은 농민항쟁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이고 집강소를 통한 폐정개혁사업을 저지하고자 했으며, 남접계열의 농민군세력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하고 토벌에 나서고자 했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동학교문 전체에 대한 공격에 직면하는 한편, 교도들의 집요한 요구가 계속되자 북접은 손병희의 주도 아래 농민군에 합세했다.
동학의 재건과 도통의 전수
농민전쟁 이후 북접의 지도부는 지하에서 명맥을 유지하며 조직재건작업을 시작했으며, 그는 1896년 1월 손천민·김연국과 함께 최시형으로부터 각각 의암·송암(松菴)·구암(龜菴)이라는 도호를 받고 교단재건작업을 진행했다. 그는 동생 병흠(秉欽)과 함께 이북지역의 개항장 부근이나 국경 근처의 상업지역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를 비롯한 손병흠·이용구(李容九) 등의 포교 결과 황해도·평안도에 새로 형성된 포(包)·접(接)의 두령들이 늘어났으며, 이들은 1897년 4월 최시형에게 신 접주로 정식임명장을 받았다. 손병희가 개척한 지역의 교도들이 증가하여 그들로부터 거둔 미곡(米穀)이 중앙교단의 기본 활동 유지비의 재원을 이루었으므로 최시형은 새로이 교세가 확장되어가고 있는 관서지역에서의 포교활동을 중요시하고 손병희에게 도통을 전수했다. 1897년 북접대도주가 되었으며 1898년 최시형이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되자 동학교문을 통솔하게 되었다. 1900년 풍기에서 거행된 설법식에서 스스로 북접의 법대도주(法大道主)가 되어 김연국을 신도주(信道主), 손천민을 성도주(誠道主), 박인호를 경도주(敬道主)로 삼고 교문의 종주(宗主)의 지위를 확립했다.
근대화론의 수용
그는 동학교문의 체제를 새롭게 정비하여 교세를 확장시켜가면서 근대화론에 입각하여 동학교문의 진로를 전환할 것을 모색하고 있었다.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이종일(李鍾一)과 자주 만나 시국문제와 동학운동의 방향에 대해 의논했으며 여러 차례 동학에 입교할 것을 권유했다. 또 개화파 인사였던 양한묵(梁漢默)·장효근(張孝根) 등을 동학에 가입시켜 교세의 확장을 도모하고 이들로부터 개화사상을 수용했다. 1901년 손천민이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김연국 또한 체포되어 종신형에 처해지자 직제자(直弟子)들과 상의하여 손병흠·이용구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 망명한 뒤에도 국내의 동학교도들을 계속 통솔했으며 충청도 부호 이상헌(李祥憲)이라 자칭하며 일본에 망명해 있던 조희연(趙羲淵)·오세창(吳世昌)·권동진(權東鎭)·조희문(趙羲聞)·박영효(朴泳孝) 등의 개화파 관료들과 사귀면서 이들로부터 근대화론을 받아들였다. 그당시 자신의 개혁론을 정리하여 〈삼전론 三戰論〉(1902)·〈명리전 明理傳〉(1903)을 저술하고 이를 국내 동학교도들의 교양자료로 삼게 했다. 그의 근대화론은 동학교문 북접의 사상적 기반이기도 했던 유교이념에 바탕을 둔 것으로 식산흥업(植産興業), 즉 자본주의 발전을 통한 국부(國富)의 달성을 가장 강조했다. 국부를 달성하기 위한 조건으로 근면과 절약을 제시하는 한편 식산의 방법으로는 식산회사의 설립과 외국 유학을 통한 생산기술의 도입을 제안했다. 아울러 서생(書生)을 유학시켜 서구의 학문과 기술을 익히게 하고 이를 농공상업 발달의 기초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또 식산흥업의 발달과 함께 정치체제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서양의 근대적 정치체제의 도입을 통해 이를 실현하고자 했으며, 군주의 통치권을 전제로 하는 입헌정치를 구상했다.
일본에서의 활동과 갑진개혁운동
1903년 한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 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손병희는 러일전쟁을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이를 계기로 일본군과 협동, 동학교도를 동원하여 러시아 세력을 축출하는 한편 한국 정부를 개혁하고 정권을 장악할 것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일본군 당국과 사전양해가 성립되어야 할 것이라고 보고 권동진을 통해 일본군 참모총장 다무라[田村]를 만나 합의를 보고 손병흠을 국내에 파견하여 교도들로 하여금 거사준비를 서두르게 했다. 그러나 다무라가 1903년 8월 5일 갑자기 죽었으며 또 국내에 파견되었던 손병흠도 일본으로 건너가는 도중 8월 3일 부산에서 원인 모르게 죽음으로써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내의 두령 40명을 불러 정치단체를 결사하여 러일전쟁에 공동출병할 것을 지시했다. 서울로 돌아온 두령들은 대동회(大同會)를 조직하고 비밀리에 도인을 모았으나 조선정부와 동학세력을 배제하고 독자적으로 조선에 대한 패권을 장악하려는 일본 군대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때문에 같은 해 4월 박인호·홍병기(洪秉箕)를 일본에 불러 7월중으로 다시 이름을 중립회(中立會)로 바꾸어 재조직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호남지역과 관서지역에서 중립회가 설립되었으며, 〈대한매일신보〉에 100원의 격려금과 함께 자신의 내정개혁론에 대한 5개 조항을 실어 중립회의 취지를 선전했으나 정부와 일본군의 탄압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해 8월경부터는 그의 지도하에 갑진개혁운동(甲辰改革運動)이 시작되어 9월 하순 전국 각지에서 동학교도들에 의해 진보회(進步會)가 결성되기 시작했다. 진보회의 통고문이 각 지방에 배포되었으며 각 지역의 동학교도들이 모임을 갖고 단발을 시행하고 흑의(黑衣 : 개화복)를 입기 시작했다. 또한 진보회를 통해 군용철도인 경의선·경원선 철도부설에 동학교도들을 동원했다. 정부는 이러한 동학교도들의 발기에 대응해 전국 지방관과 진위대에 이를 토벌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일본의 후원하에 있던 일진회(一進會)가 정부의 동학탄압 지시를 강력하게 비판하자 그해 11월 1일 그동안 갇혀 있던 동학교도들을 석방했다. 김연국을 비롯한 모든 동학교도들이 석방됨으로써, 동학은 40년간에 걸친 지하포교를 청산하고 비로소 국가의 공인을 받게 되었다. 1904년 12월 2일 동학이 일진회에 합동청원서를 각 도별로 제출하는 형식을 거쳐서 동학과 일진회는 공식적으로 합동했다.
천도교 창건과 일진회와의 분립
그동안 동학을 탄압해오던 광무정권(光武政權)이 무력해지자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했다. 1906년 1월 28일 일본에서 귀국하여, 2월 16일에는 천도교 대헌(大憲)을 반포하고 스스로 천도교 대도주가 되어 조직을 정비하여 서울에는 중앙총부를, 각 지방에는 교구를 설치했다. 교단 내에 권동진·오세창·양한묵 등 망명 개화관료 출신들과 일진회를 이끌었던 송병준(宋秉畯)·이용구 일파 및 김연국 일파가 서로 반목하게 되자 정교분리(政敎分離)를 표방하고 일진회의 지방지회 해체를 지시했다. 이에 대해 송병준·이용구는 천도교 결의서를 각 지방에 배포하여 자신들을 중심으로 교도들을 결속시키고자 했다. 이를 직접적인 계기로 1906년 8월 23일 손병희가 일진회의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던 이용구 이하 62명을 출교처분(黜敎處分)함으로써 천도교와 일진회는 분립하게 되었다. 1907년 8월 대도주직을 김연국에게 이양하고 중앙총부의 간부를 개선했으나 김연국이 시천교(侍天敎)에 가담하자 이듬해 1월 차도주(次道主) 박인호로 하여금 대도주의 직을 승임(承任)하게 하고 자신은 성사(聖師)로 불리면서 활동했다.
근대교육사업과 출판사업
손병희는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천도교의 활동을 종교 중심으로 전개하면서도 개화정책을 추진하여 근대교육을 실시하려 했다. 일본 망명중에도 동학교도의 자제 64명을 일본에 유학시켜 근대적 교육을 받게 했으며 귀국 직후부터 더욱 활발하게 교육사업을 추진하여 203개의 사립학교를 원조했다. 그러나 교회의 재정이 어려워져 교육사업을 전개하기 힘들어지자 한동안은 교회의 유지에 주력했다. 1910년 한일합병 직후부터 다시 교육사업을 추진하여 1910년 재정난에 빠진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을 원조하고 같은 해 12월 보성학원(普成學院)을 인수했으며, 1912년 12월에는 동덕여학교를 인수했다. 그밖에 지방의 7, 8개교를 직접 관할했다.
한편 일본에서 귀국할 때 인쇄기와 활자들을 구입해 가지고 들어와 한영호(韓榮浩)·최석창(崔錫彰)·민건식(閔建植) 등과 협력하여 주식회사 보문관(普文館)을 설립하고 출판사업을 했다. 그러나 한영호와의 분규로 1910년초 새로 창신사(彰新社)를 설립하고 당국과 교섭하여 종교적 논설과 교도 상호간의 소식 등을 게재한다는 조건하에서 천도교 기관신문인 〈천도교월보〉를 발행했다. 1910년말에는 보성학원 소속 인쇄소 보성사를 창신사와 병합하여 보성사로 확대하고 〈천도교월보〉 및 학교 교과서 등을 인쇄·간행했다.
3·1운동
1918년 1차대전이 종결되고 강화회의의 한 원칙으로 제기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국내외 인사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해외망명인사들과 일본에 유학중인 한국 학생들의 움직임은 국내인사들에게 자극을 주어 국내에서도 독립운동 방안을 강구하게 되었다. 손병희는 오세창·권동진 등과 독립운동 방안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 최린(崔麟)과 협의를 계속하게 했다. 이들은 협의를 통해 운동의 방침으로 독립운동을 대중화시킬 것과 일원화시킬 것, 비폭력으로 할 것 등 3개 원칙에 합의했다. 독립운동의 첫번째 연대대상으로서 박영효·한규설(韓圭卨)·윤치호(尹致昊) 등 구한국 관료와 친일파를 포섭하고자 하여 손병희가 직접 박영효·이완용(李完用)과 교섭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기독교·불교·천도교가 합작을 추진하여 3·1운동을 준비했다. 천도교 내부에서는 1910년대초부터 이종일이 천도교구국단을 조직하고 민중봉기를 통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을 건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병희는 폭력적 민중시위의 경우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있을 것이며 또 서구 문명국의 동정을 얻기 어렵다는 것을 이유로 비폭력을 절대적인 전제로 하면서 평화적인 만세시위 방침을 받아들이고 3·1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일본 경찰에 자진출두하여 검거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징역 3년형에 형집행정지를 언도받고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받던 중에 1922년 5월 19일 병세가 악화되어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