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마스 영, 광학과 파동의 회절
19세기는 과학 탐구에 앞선 국가들끼리 전쟁에 열중한 시기였다. 영국과 독일의 소왕국
들은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을 향해 행진하는 걸 막아내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의 급속한 권력 장악이 진행되는 동안, 미래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어 생명을 마칠 때까지 과학을 사랑했다. 비록 예술을 그만큼 사
랑하진 않았지만...
나폴레옹은 시간이 날 때마다 프랑스 아카데미 모임에 참석해 정신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
았다. 그는 과학적으로 볼타와 프랭클린의 업적에 필적할 가는성이 있는 과학자들을 선별
해 커다란 상을 주었다. 그리고 럼퍼드 백작이 파리를 방문해 마담 라부아지에를 유혹할
시기에는 럼퍼드 백작에게 손길을 뻗치기도 했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통치 기간에 라플라
스와 뒬롱, 푸아송 같은 프랑스인의 과학계의 선두 주자로 부상하긴 했으나, 광학 탐구를 거
대하게 진일보시킨 사람은 영국의 과학자 토머스 영이었다. 파동설과 입자설이 서로 치열
한 논쟁을 벌였고, 눈의 생리 현상이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관심을 끌기 시작할 즈음
이었다.
토머스 영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천재였다. 1773년 영국 밀버튼 마을의 퀘이커 가정
에서 태어난 그는 두 살의 나이에 글씨를 읽기 시작했으며, 네 살에는 <성서>를 두 번이나
완독했다. 14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몇몇 학문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가췄다.
퀘이커의 직업 윤리는 영이 레저 활동을 무시한 채 열심히 공부하게 만들었다. 영이 성
장하던 시기의 퀘이커는 댄스와 예술, 심지어 문학까지 금지했으며, 퀘이커 교도는 '진실만
탐구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들은 왕립학회의 역할에 나름대로 충분히 기여하기도
했다.
영은 열세 살에 친척을 따라 런던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온갖 서점을 열심히 뒤지고 다년
다. 한번은 그가 아주 값비싼 학술서 한 권을 뒤적거리다, 서점 주인은 어린 소년이 읽기엔
그 책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고 제자리에 갖다놓으라고 했다. 하지만 영은 조금도 당황하
지 않았다. 그러자 주인은 빙그레 웃으며 만일 그 책에 실린 어려운 외국어를 제대로 번역
한다면 책을 그냥 주겠다고 말했다. 결국 어린 소년은 그 책을 상으로 받아들고 집으로 돌
아올 수 있었다.
은행가인 데이비드 바클리는 영의 천재성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손자와 함께 어울리도록
했다. 두 아이는 다양한 언어를 열심히 공부하면서 동시에 뉴턴과 린네 그리고 화학, 천문
학, 수학, 철학과 식물학 등 여러 학문에 몰두했다. 영은 펜글씨도 연습해 글씨를 예쁘게
쓰기도 했다. 바클리의 손자와 함께 행복하게 겨울을 지냈다.
영은 삼촌의 영향을 받아 의학 공부를 선택해, 런던과 에든버러에서 공부했다. 1793년에
는 세인트 바르톨로뮤 병원에 들어가 생리학을 깊이 연구했는데, 눈의 특성에 특히 연구의
초점을 맞추었다. 과학적인 탐구 업적을 충분히 인정받은 그는 21세의 나이에 왕립학회 회
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에든버러에서 시체 해부를 통해 실질적인 해부학을 배웠는데, 이
로 인해 한때 시신 도굴 사건에 휩싸이기도 했다. 학교장이 이 사건에 대해 비난한 기록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최근에 가장 비기독교적인 자들이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의 무덤에 들어가 시신을 훔쳐내
려고 한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학교측을 더욱 놀라게 만든 건 의사들 일부는 종범에 불
과하며 치안 판사들이 자신의 권한에 속한 시신들을 학교측에 제공하려 했다는 사악한 소문
이 마을 전체에 퍼져 있다는 사실이다.
'치안 판사들의 권한에 속한 시신들'이란 사형을 당해 학교 당국의 손에 넘겨진 시신을 의
미한다. 어쨌든 신성한 교회 무덤을 파헤친 사건은 마을 전체를 뒤흔들었으며, 결국 해부학
과는 마을 밖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토머스 영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업적에 필적하기 위해 각각의 나이에 이룩할 분야를 다음
과 같이 정해 자신을 엄격히 훈련시켰다. 2세 영어를 읽는다, 6세 라틴어 쓰기, 8세 수학,
10세 그리스어, 12세 프랑스어, 14세 이탈리아어 기하학, 16세 독일어 수학, 17세 자연 철학
그림, 18세 화학 생물학
이처럼 바쁜 공부 계획으로 인해 영은 여러 가지 어려운 언어를 피상적으로 공부한 반
면, 의사 시험을 통과하는 데 필요한 과목에 열중했다.
영은 에든버러에서 공부를 마친 후 말을 타고 스코트랜드를 여행하면서 도시 상류층의 화
려한 생활에 매혹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결국 사라 시든스의 열렬한 팬이 됨으로써 예술을
피하는 퀘이커 전통을 포기한다.
1795년, 그는 괴팅겐으로 여행해 조지 2세가 설립한 새 대학에서 의사 시험에 합격한다.
영은 이탈리아와 빈을 포함한 주변 국가를 여행할 계획도 세웠으나 포기하고 만다. 영국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조시아의 아들인 토머스 웨지
우드와 하르츠 산맥을 여행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영국으로 돌아와서 케임브리지에 입학했는데, 영국 의사에 합당한 조건을 충족시치
기 위해 영국 성공회를 믿는다는 행세를 함으로써 퀘이커 신앙을 완전히 정리한다. 대학의
구성원으로서, 영은 팔레 클럽의 회장이 되는데, 지적인 탐구에 몰두하면서 내기를 걸어 재
미를 더하는 그룹이었다. 이때부터 영의 잠재된 특징이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할 수 있을 정도로 솔직한 성격이었다. 자신이 과학자이자 의사인 만큼, 자
신의 아이디어는 충분히 검증을 받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때도 이즈음 이었다.
삼촌 브록클스비는 사망하면서 런던의 파크레인에 있는 저택과 현금 1만 파운드를 유산으
로 남겨, 영은 비록 부자는 아닐지라도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다음 세기
로 넘어갈 즈음에는 빛과 음향에 대한 왕립학회 제출 논문을 출간하고 왕립협회의 교수직제
안을 받아들이면서 국제적인 비중을 확보하기 시작한다. 영은 18세기 전반에 걸쳐 기다란
칼에 찔려 죽은 사람보다 조그만 수술용 칼에 찔려 죽은 사람이 더 많다고 주장도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는 의사 생활을 계속하지만 환자들이 피를 흘리지 않도록 했다.
해수욕이 유행하는 남부 해안의 워딩턴에 저택을 구입한 다음, 1804년 엘리사 맥스웰과
결혼해 공동체의 존경받는 구성원이 된 그는 의사 활동과 과학적 탐구를 계속했지만 의사로
성공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다른 의사들에 비해 치료율이 훨씬 높았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솔직한 나머지 환자를 다루는 전술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영은 미들섹스 병원에서 강의를
하다가 왕립의과대학의 회원으로 선출되어 세인트죠지 병원의 의료진에 합류한다.
영의 과학적 탐구심은 19세기 말에 에리오미터를 만들어 낸다. 에리오미터는 조그만 구멍
을 통과한 빛의 회절을 만들어내 이것을 소립자와 비교해 그 소립자의 크기를 측정하는 장
비였다. 하지만 영은 당시에 이 장비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이 장비는 1 만 분의 1cm
인 마이크론의 영역이자 적외선 광자와 크기가 비슷한, 적혈구와 정자의 크기 그리고 울섬
유의 두께를 정확하게 산출해낼 정도로 우수했다. 1800년에서 1829년 이 세상을 떠날 때까
지 29년 동안 영은 다양한 문제에 대해 탐구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눈이 다양한 거리에 있
는 물체를 보기 위해 자신을 어떻게 조정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영의 관심을 불러 일으컸다.
그는 시력이 정상인 사람의 눈은 원점에서 25cm 주변의 근점까지 조정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거리에서 벗어나면, 눈은 물체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힘껏 노력해야 한다. 근
점과 원점을 확정하기 위해 영은 시력계를 발명했다. 카드에 구멍 두 개를 뚫어 그 사이로
검은 점 하나가 보이게 만든 간단한 도구였다. 만일 검은 점이 하나로 보이는 거리에 있으
면, 눈이 적적하게 조정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가깝거나 먼 거리에 있으면, 막막에 떠오
른 이미지는 두 개로 나타나 조정 가능 범위를 벗어났음을 보여준다.
근점과 원점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영은 카드의 구멍이 수평이냐 수직이냐에 따라 다양하
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난시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이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
영은 다양한 색상의 굴절률이 서로 다른 데서 기인하는 난시를 색소차로 그리고 눈 주변의
다양한 형태에 기인하는 난시를 구면 수차로 규정했다.
자신이 직접 다양한 렌즈를 착용하는 실험과 물 속에서 관찰하는 일련의 실험을 거친후,
영은 각막의 굴곡이 변하거나 눈동자의 크기에 따라 눈이 조정되는 건 아니라는 결론을 내
렸다. 주된 이유는 수정체, 곧 눈동자 뒤에 있는 젤리같은 탄력성 있는 기관에 있었다.
그는 색상 인식에 관한 계속 연구를 했다. 그 내용을 영의 그를 통해 알아보자. 망막의 감
각점 하나하나가 무한한 숫자의 입자를 가지고 있어 모든 파동의 움직임 하나하나와 완벽히
게 일치한다는 생각은 현실성이 거의 없다. 따라서 그 숫자가 가령 세 개의 주요한 색상, 굳
빨강, 노랑, 파랑에 제한되며 이 세 가지 색상의 파동은 8, 7, 6 숫자와 거의 비슷한 등급에
해당한다. 그리고 각각의 입자는 완벽한 일치에서 다소 다른 파동에 의해 강제적으로 움직
일 수 있다고 가정할 필요성이 생겨난다.
예를 들어, 거의 6과 2분의1 비율에 해당하는 녹색 빛의 파동은 노랑의 파동과 파랑의 파
동이 동등하게 입자에게 영향을 주는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결국 이 두 가지 색상을 합친
빛과 똑같은 효과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신경 섬유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각
부분이 주요한 색상을 하나씩 담담할 가능성이 많다.
곧이어 영은 왕립학회에서 세 개의 주요한 색상을 녹색, 보라색, 빨간색으로 바꾸어 논문
을 발표한다. 그는 인간이 색상을 인식할 수 있는 건 빛의 성질 때문이 아니라 눈의 생리
현상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곧, 눈의 수용체에 형과성 유기 물질이 있어서 다양한 색상에
반응한다는걸, 색맹인 경우에는 이 수용체 가운데 한 개 또는 두 개가 작동하지 않는 다는
걸 안 것이다.
영의 왕립협회 경력은, 설립자인 럼퍼드 백작이 전임자보다 봉급이 25% 적고 작업량은
더 많은 조건으로 교수직을 그에게 제안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 제안에 대한 영의 반
응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저는 고인이 된 전임자의 봉급이 많진 않지만 그런대로 적
절한 액수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에서 4분의 1을 줄인다는 건, 게다가 노동량과 책임량은 그
이상으로 많아진다는 건, 저 자신이나 협회 측 쌍방에게 상당한 불명예가 될 것으로 생각한
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 다음날, 왕립협회측 사람은 더 많은 봉급을 제안했으며 영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
다. 왕립협회의 금요일 밤 강좌에 참석ㅎ는 계층은 극히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영의 강의는
전임자인 데이비 교수와 달리 인텔리 성향이 너무 강했다. 사실, 데이비 교수의 강의는 인
기가 너무 높아 시내 교통이 막힐 지경이었으며, 그 때문에 앨버말 도로가 런던 최초의 일
방 통행 도로로 지정될 정도였다.
영은 열역학 이론을 빛의 파동설과 비교하는 작업에 관심을 돌렸다. 19세기 초반, 플로지
스톤은 산소를 발견하기 전까지 열을 내는 독자적인 물질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영과
럼퍼드는 열의 원천이 물질의 내적인 역학에 있다고 생각했다. 영의 장황한 설명을 들어보
자.
만일 열이 물질이 아니라며, 열은 그 성질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성질은 운동의 형태
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뉴턴은 열을 물질의 입자가 떨리는 운동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이 운동은 탄력적인 매개체의 파동에 의해 창출된 진동을 통해서 표현된다고, 이 매개체는
빛의 현상에도 관여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빛의 파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주 제시하
는 뉴턴의 이와 같은 주장이 타당하다면, 열 분야에서도 동일한 유형의 주장이 충분히 타당
하다. 그러면 열의 진동과 파동이 기본적으로 빛의 그것에 비해 더 크고 더 강력한 형태로
존재한다고 그리고 빛의 진동은 훨씬 적다고, 심지어 훨씬 작은 진동에서 나온 희미한 빛줄
기를 충분히 압축시켜 열의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희미한
빛줄기에서 시작된 이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다. 희미한
빛을 여전히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녹색은 가장 많은 빛을 제공하며, 빨간색은
빛을 거의 제공하지 않는 대신 많은 열을 제공한다. 반면에 훨씬 크지만 진동하는 횟수ㅜ
가 적어 사물을 보는 데 아무 기여도 못하는 것은 최소한의 굴절 광선을 일으켜 눈에 안 보
이는 열을 만들어낸다고 가정할 수 있다.
토마스 영이 광학계에 기여한 가장 커다란 공적은 두 개의 인접한 바늘 구멍 사이로 통과
된 빛을 화면에 비추면 빛살들은 퍼져나가서 서로 겹친다는 실험을 통해 빛의 회절을 설명
했다는 것이다. 영은 이 같은 방해물에서 회절되어 나온 빛 줄무늬 사이의 간격을 계산해
냈다. 하지만 이 연구 논문을 발간한 후, 그는 <에든버러 리뷰>의 사설을 읽고 서운함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이 근거가 박약한 논문을 무시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논문을 자세히 읽었지
만 배울 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이나 날카로움, 천재성의 흔적은 고사하고 탄탄한 사고력과
냉정함 그리고 인내심 있는 탐사의 흔적은 물론 자연 현상을 겸허하고 지속적으로 관찰해
그 법칙을 파악해내는 추진력의 흔적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우리는 지나 150년 동안 과
학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된 원칙, 곧 모호한 가설에 반대한다는 극히
정당한 원칙 이외의 어떤 편견도 없이 이 논문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만한 시간과 환경이라면 토머스 영 박가보다 재능이 떨어지는 사람도 그 이상의
성과를 올렸을 거라는 씁씁한 느낌만 일어났다. 토마스 영 박사가 연구 진행 방식을 바꾸
거나 논문 주제를 바꾸지 않는 한, 우리는 그를 조금도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나다가, 그
에 대한 불만을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할 것이다. 과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단체가 영의
연구 작업을 우수하다고 평가하는 경솔함을 보였기 때문이다. 겸손한 비판보다는 적극적인
항의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
나중에 <에든버러 리뷰>의 논설 위원이 물리학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드러
났다. 그렇다고 해서 토머스 영의 평판에 끼친 악영향이 보상되는 건 아니었다. 어쨌든 이
와 같은 비판이 계속 나오자, 토머스 영은 반박하는 글을 장황하게 썼다. 하지만 이 글을
실어준 신문사는 단 한군데밖에 없었다. 논설 내용에 반박하는 글을 실어주지 않는 게 당
시 언론계의 관행이었다.
인격의 존엄성에 적절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비록 악의가 가득 찬 비열한 공격을 받
고 감정이 고조될 때가 가끔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침묵하는 게 그래서 금방 사라질 상처
를 감내하는 게, 악담에 대응해 문외한에게 벌을 주려고 노력하느라 자신의 목표 추구를 방
해받는 것보다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예술과 악의를 교활하게 뒤섞어
서 정의로움과 솔직함의 가면을 쓰고 가장 추잡한 허위 진술을 늘어놓은 건 충분히 가능하
다.
토론 주제가 돋자 일반이 이해하기 힘든 영역일 때 이와 같은 가능성은 특히 많다. 그래
서 공격 대상이 된 사람의 작품 내용을 멋대로 조작하고 부분적 진실을 본질적인 오류와 그
럴듯하게 혼합해 그 사람의 친구들조차 잘못 생각하도록 만들 수 있다. 이 같은 작태는 우
리 과학자들이 다른 사람의 비판에 대해 정당하게 대응하지 못하도록 만들 뿐 아니라, 설사
본질적으로 나약하고 오류 투성이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너무 경솔하고 성급했다는 의심을
받게 만든다.
토머스 영은 바늘 구멍을 사용해서 빛의 회절을 성공적으로 제시했다. 빛의 빨간색과 보
라색의 파장을 정확히 측정했으며, 동시에 비판자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이 그를 여전히 괴롭혔는데, 빛이 방해석 결정체를 통과할 때 이중 굴절되었던 것
이다. 당시에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방해석은 비입방형 결정 구조로 빛을 두 개의 광선으로
나누는 성질이 있다. 이 같은 현상을 푸는 실마리는 빛이 편광할 수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
는 데 있었다. 이것은 횡파 이론, 곧 빛이 진행 방향과 수직으로 진동하는 파이며, 굴절률
은 결정체 방향에 따른 편광 방향의 각도에 달려 있다는 이론을 파생시킨다.
영은 1829년 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일련의 화젯거리에 관심을 기울였다. 1799년 프랑
스 군대가 나일강 삼각주 지대를 파헤쳐서 로제타석을 발견하자, 영은 언어학자로서 그 돌
에 적힌 문장을 최초로 해독하기도 했다. 이 돌에는 그리스어와 이집트 그림 문자 그리고
상형 문자가 실려 있었다. 여기저기가 훼손되기도 했지만 도저히 그 뜻을 해독할 수 없었
는데, 영은 프톨레마이오스라는 단어를 해독해 다른 과학자들에게 암호 해독의 길을 열어주
었다.
또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만드는 일에 참여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해수욕부터 이중
굴절과 조수에 달하는 많은 내용을 정리했다. 필요한 경우에는 독창적인 계산법으로 그 결
과를 기록해주기도 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토마스 영의 기념비에는 다음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토마
스 영 박사를 추모하며 바친다. 그는 왕립학회 회원이자 해외 담당 비서였으며, 프랑스 국
립협회 회원이었고, 빛의 파동설을 최초로 확립했으며, 수천 년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이
집트 사형 문자를 최초로 해독했다. 토마스 영의 이름은 일정한 압력을 가할 때 물질이 팽
창되는 정도를 나타내는 영률이라는 단어와 함께 영원히 남을 것이다.
파동을 추가해 회절을 설명한 토머스 영의 능력은 뉴턴의 입자설을 외면하도록 만들었지
만, 빛은 종파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곧 파동 같은 진동은 빛이 진행하는 방향과 동일한
방향성을 가진다는, 토머스 영의 생각은 방해석을 통과한 빛의 이중 굴절을 설명하지 못하
도록 방해했다. 토머스 영과 라플라스는 이 현상에 대해 논쟁을 벌였는데, 라플라스는 입자
설의 기본 논리에 근거해 빛은 속도가 다른 두 개의 요소로 불리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의 루이 말뤼스는 방해석을 통해 두 개의 광선이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걸 발견
한 후, 이 현상에 편광이라는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했다 말뤼스는 군인으로 복무한 또 다른
과학자였는데, 그는 나폴레옹 밑에서 이집트 원정에 참여하기도 했다. 프랑스군이 자파에서
적군에게 포위되어 모든 장교의 목이 잘리는 참패를 당했을 때도 말뤼스는 무사히 목숨을
구한 적이 있었다. 참호에서 깊은 잠에 빠져 적군의 눈에 띄지 않았던 덕분이었다.
말뤼스는 뤽상부르 대저택의 창문에서 반사되는 햇살을 방해석으로 검사하다 아주 중요한
내용을 발견했다. 편광의 두 상태가 서로 강도가 다르다는 걸 발견한 후, 그날 저녁 양초를
거울 36도 각도로 반사시켜 빛을 완벽하게 편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빛의 역사 [지은이: 리차드바이스/ 옮긴이: 김옥수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