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네
XX도 XX시 XX로. 그 동네는 서울에 가까운 경기도 마을인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옴직한 빈촌이다. 쪽방촌은 아니어서 잠옷을 차림으로 볕을 쬐려 나앉거나 하는 주민은 드물다. 우중충한 골목들이 미로처럼 얽혔는데 걷다 보면 돌연 벽이 나타나 앞을 막는다. 참으로 우스운, 그러니까 우습지도 않은 일은 내가 누구나 짐작할 법한 이런저런 이유로 그 동네에 살게 되었다는 것인데….
사회적 거리두기니 자가 격리니 하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집에 갇혀 지낸 지 반년이 되간다. 별 흥미는 없지만 어쩔 수 없이 TV를 켜고 신문을 펼친다. 그렇고 그런 기사와 뉴스가 눈을 비껴가고 귀를 스친다. 폭우로 인한 피해,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확산 위험과 확진자 발생, 사망자 추이….
성격이 내성적인 편이어서 본디 나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런 반 강제 모양새는 내가 원한 것이 아니어서 마뜩치 않다. 그날은 조금은 특별한 날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필수품이 된 마스크가 바닥이 난 것이다. 마스크를 걸치면 후텁지근한 열기와 함께 밤과 낮의 경계에 선 것 같은 불안함이 끼쳐온다.
집을 나와 현관문을 닫으려는데 습기가 찼는지 번호 키가 작동하지 않는다. 다시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그러고 보니 들어오길 잘했다. TV를 끄지 않은 것이다. 내가 왜 이러는 것일까? 나이 때문, 아니면 수상한 시절 탓이람? 부쩍 건망증이 심해졌다. 며칠 전에는 안경을 쓴 채 안경을 찾기도 했다. 주인 잃은 TV 화면 밖으로 리포터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최장 기록을 갈아치운 역대급 장마가 끝나면서 한 숨 돌리는 가 했더니 코로나19 감염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수도권에서 시작된 2차 대유행이 전국으로 확산됨에 따라 정부는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 시행을 검토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며….”
녹슨 보조 열쇠로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온다. 약국을 바로 찾을까 망설이다 동네 근처를 둘러보기로 한다. ‘으이잉~’ 그 동네에는 아기가 많이 산다. 그것도 갓난아이가. 알고 보니 고양이었다. 밤이면 길고양이 울음소리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가출한 청소년 고양이들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버려진 포크 레인 운전석 내부를 오르내리며 장비를 점검하는 길고양이를 보았다. 온 세상이 눈으로 덮인 암울한 미래를 달리는 열차 엔진 칸에서 알바 일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하천이 있다. 평소에는 말랐다가(乾川) 비만 오면 물이 넘치는(氾濫川) 이상한 하천이다. 그래서인지 심심치 않게 집 주위로 새들이 날아든다. ‘구구구구’ ‘끼욱끼욱’ 여느 새의 울음에 섞여 이상한 소리기 들린다. ‘켈켈켈’ 엿장수 가위질 흉내를 내거나, ‘워우 워우’ 짐승 울음을 운다. 무엇에 억눌린 듯 ‘커억’ 비명을 지르는 새도 있다.
집 주변 환경은 청결과는 거리가 멀다. 쓰레기 더미가 작은 동산을 이루었다. 악취가 불안한 음표처럼 떠돌고, 주변에 비닐하우스도 없는데 가끔 타는 냄새가 난다. 일수 광고지를 비롯한 전단도 삐라처럼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다. ‘일수 달돈(한달 무이자)’ ‘금이빨 고가 구매’ ‘브라더 아이거 싱거 미싱’ ‘등산용품 왕창 세일’ ‘미래자원 철거전문’ ‘고철 비철 중고 자재’ ‘레미콘 싸게 사실 분 찾습니다’
고개를 들면 정확한 용도를 알 수 없는 고가(高架) 크레인 너머로 술래놀이라도 하는지 산이 어렴풋한 자태를 드러낸다. 그렇다 해도 가까이 정겹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시답지 않은 듯 등을 보이고 누운 채다. 학교도 있지만 여느 학교와 다르다. 특수학교인데 항상 문이 잠겨 있고 학생들은 보이지 않는다. 드나드는 이 없는 학교. 언젠가 찾은 폐교(閉校)가 그러했다. 책에서인가 아님 영화에서, 그것도 아니면 꿈속의 일이었는지 분명치 않지만.
거리를 걷다보면 안면 있는 사람과도 마주친다. 분위기라고 할까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닮았다. 쓰레기를 뒤적여 파지를 챙기는 노인, 보행기에 의지해 시적시적 걸음을 옮기는 할머니, 마스크를 턱에 걸치고 가로수에 기대 앉아 허공에 삿대질을 하는 사내. 동남아 어느 나라에서 온 검은 피부의 청년과는 가벼운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이들은 이 힘든 코로나 상황을 어떻게 견디는 것일까? 혹 서로가 서로에게 모르는 새 힘이 되어주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그런데 가만, 나는 이들과 어떤 관계인 것일까? 그들 틈에 끼어 있는 낯선 나를 본다.
집으로 향하는 길 가까운 건물 창에 반짝 불이 들어온다. 동네에 교회가 있는 것을 깜빡 놓쳤다. 평소 드나드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지 않았고, 찬송가 소리도 귀기울여듣지 않았는데, 마냥 빈 건물은 아닌가 보다.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나타나 십자가 주위를 맴돌다 허공으로 솟구친다. 누군가는 누군가에 의지해 살고, 그것은 죽은 사람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새는 외로운 영혼을 높은 곳으로 인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