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분옥 시인의 시집 『잔인한 절정』
약력
한분옥
진주여자고등학교, 부산교육대학교 부산
교육대학교 대학원 졸업.
울산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박사 수료.
1987년 《예술계》 문화비평상 당선.
2004년 《시조문학》 시조 등단,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조집 『꽃의 약속』, 『화인』, 『바람의 내력』,
『 꽃 다 진 다 잎 진다』, 『山菊 매운향』, 『沈香』,
『 ECONVICTION OF FLOWERS』,
『 잔인한 절정』, 『꽃과 여자 그리고 정염 』 ,
『 부용만향』, 『진홍가슴새』, 『모란이 지던 날』,
『백년의 瞿衣』 .
울산문학상, 한국문협 작가상, 연암문학상 대상,
한국수필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조운시조문학상, 허난설헌 문학상, 외솔상 수상.
◆ hanbo1234@hanmail.net
시인의 말
성난 파도와도 같은 꽃 무더기가 밀려온다.
오직 피기 위해서 밀어닥친다.
오월은 곧 무너지겠다.
내 詩밭은 또 어쩌라고.. 그럽니까.
2024년 5월
한분옥
질 때 그때
그때는 몰랐었지 한달음에 달려가서
서둘러 지우고는 아득한 낭떠러지
슬퍼서 아름다운 날, 질 때 그때 비로소
잔인한 절정
홀연히 먹을 찍어 적모란을 그리다가
먹물이 잦아들어 가슴으로 그리다가
확 번져 천지가 온통 젖을 대로 젖는다
불현듯 저문 밤을 걸어서 즈믄 밤을
버려진 그 시간이 꽃인 줄을 나는 모르고
이제야 천 길 낭떠러지 이 잔인한 절정
5cm의 기적
- 경주 남산 열암곡 마애불*
엎어진 돌을 지고 천년을 바위 지고
차라리 돌 속에서 숨을 참던 청맹과니여
기척에 놀라 깬 순간, 영묘사**를 묻는다
손끝으로 벌려놓은 암반과 콧날 사이
첫눈이 온다든가 봄꽃이 또 핀다든가
엎어져 아찔한 그날이 하 시절의 꿈일 줄
여왕님 납시기 전, 바람 한 올 흩지 마라
그 앞섶 푸른 약속 행여 아니 잊으신다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다시 천년 잠들리
*2007년 경주 남산 열암곡에서 넘어진 상태로
확인된 신라시대 마애불. 넘어져 정수리가 닿은
암반과 콧날 사이는 불과 5cm. 당시 '5cm의 기적',
'세기의 발견' 이라고 했다. 그러나 워낙 크고 주
위에 장비가 들어가기가 어려워 일으켜 세우지
못한 채 15년이 지났다.
* * 선덕여왕이 예불 드리러 자주 다니던 절.
새벽달이 떠 있다
올봄에 각시붓꽃 그 아침 다시 만나
설익어 두근대는 수줍음 밀쳐 두고
온몸에 물 넘는 소리, 새벽달이 떠 있다
화살, 꽃
솔깃한 귀엣말에 쓴 듯이 내리꽂혀
아침에 싹이 나면 한나절 안에 꽃이 피어
화살촉 표적을 바꿔 팽팽하게 당기니
비단 같은 떨기들이 모여들어 앉으면
음모의 날이 서서 잔칫상에 머릴 박아
피 묻은 하이에나들 검은 꽃불 피우지
그 꽃불 누가 끄랴 빨갛게 단 입술로
꼬리에 꼬리 물고 없는 범도 만들어서
제단 위 술잔을 놓고 엉겁결에 피는 꽃
해설
영원을 사는 순간의 미학,
시조의 품위와 깊이
─ 이경철 문학평론가
목숨의 때 씻어주는 팽팽한 울림의 시
올 풀린 치맛단에 젊디젊은 목숨이거나//
하룻밤 눈 맞추다 한 천년을 울었다는//
따뜻한 슬픔이 나려 어떡하니 봄날을
「그날을 쓴다」 전문
한분옥 시인의 이번 여섯 번째 시집 『잔인한 절정』은 시 읽는 맛과 함께 우리네 삶의 멋과 깊이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 민족의 살가운 언어와 정서로 드러내고 있어 이물감 없이 우리 심성에 척척 안겨든다. 그러면서 지금 여기 생명의 펄펄 끓어오르는 열정이 있다. 주체못할 그 열정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영원으로 이어지며 삼라만상 모두 한순간의 생에 어우러지게 하고 있다. 이게 원래 시이고 시의 요체인 서정성이다. 눈물 날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나 상황과 마주칠 때 터져 나오는 “아! 시같다”는 탄성이 바로 서정이다. 동서고금의 좋은 시인이나 시론가들은 서정의 요체로 너와 나는 하나로 같다는 ‘동일성의 시학’과 한순간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같이 한다는 ‘순간성의 시학’을 꼽는다. 이번 시집은 그런 서정성이 격조 있게 빛나고 있으며 우리 민족의 정형시인 시조야말로 서정에 가장 충실한 장르임을 입증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