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행(李荇,1478,성종9~1534,중종29)은 조선전기의 문신이다. 자는 택지(擇之)이고 호는 용재(容齋)이며 본관은 덕수(德水)다. 1495년(연산1)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 검열을 지내고 <성종실록>편찬에 참여했다. 1500년 성절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수찬, 교리 등을 역임했다. 1504년 갑자사화에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 함안에 유배되고, 1506년 거제도에 위리안치 되었다. 중종반정 후 풀려나, 교리, 응교가 되었으나 부모의 상을 연이어 당했다. 1513년(중종8) 성균관 사예, 사성을 거쳐 1515년 대사간이 되었다. 박상(朴祥)과 김정(金淨)이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자, 이를 반대하였다. 1517년에 대사성, 도승지, 대사헌이 되었으나, 신진사류의 배척을 받아 고향인 충청도 면천으로 내려갔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실각하자 부제학, 공조참판, 대사헌, 대제학이 되었다. 1521년 공조판서, 좌우참찬, 우찬성을 거쳐, 1524년 이조판서, 좌찬성이 되었다. 1527년 우의정에 올라 대제학을 겸하였고, 1530년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논박하다가 판중추부사로 좌천되고, 다음해 평안도 함종에 유배되어 죽었다.
‘서리와 달’ 시에 차운하다 (次霜月韻)
해질녘의 가랑비가 먼 하늘을 씻더니
밤이 되자 높은 바람은 어두운 안개를 걷어갔네.
새벽 종소리에 꿈을 깨니 추위가 뼈에 사무치는데
흰 달과 푸른 서리가 아름다움을 다투는구나.
晩來微雨洗長天 入夜高風捲暝烟 夢覺曉鍾寒徹骨 素娥靑女鬪嬋娟 (容齋集 卷8)
이 시는 ‘동사록(東槎錄)’에 실려 있는데, 그가 40대 중반에 명나라 사신 당고(唐皐)와 사도(史道)를 응대하던 여가에 지은 칠언절구로 선(先)운이다. 차가움과 맑음이 드러내는 처절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는데, 제목은 당나라 이상은(李商隱)의 ‘서리와 달(霜月)’의 운을 따랐다는 것으로 하였다. 기구와 승구는 송나라 진여의(陳與義)의 ‘산에 들며(入山)’에서 “보슬비가 봄빛을 씻어 여러 봉우리가 저녁 한기를 띠었네.(微雨洗春色 諸峯生晩寒)”의 구를 따왔고, 전구와 결구는 이상은의 ‘서리와 달’에서 “푸른 서리와 흰 달이 함께 차가움을 견디니 달과 서리가 아름다움을 다투는구나.(靑女素娥俱耐冷 月中霜裏鬪嬋娟)”를 변형한 것이다. 기구와 승구에서, “보슬비가 봄빛을 씻어 여러 봉우리가 저녁 한기를 띠었다”는 구절을 이용하여 비가 하늘을 씻었다는 뜻을 살리면서 바람이 안개를 걷었다는 새로운 대구를 이끌어냈다. 비록 옛 사람의 뜻을 이용했지만 전혀 새로운 표현을 얻는다는 환골탈태(換骨奪胎)의 방법이다. 전구에서 시인이 꿈을 깨서 느끼는 뼈에 사무치는 추위를 말하여, 결구에서 차가움과 아름다움이라는 주지(主旨)를 자연스럽게 살려냈다. 푸른 서리(靑女)와 흰 달(素娥)이 함께 차가움을 견디니 달과 서리가 아름다움을 다툰다는 구절에서, 서리와 달이 반복되는 것을 피하여 한 구로 줄였다. 옛 사람의 말을 변용하여 값지게 쓰는 것을 점철성금(點鐵成金)이라고 하는데, 그는 이렇게 옛 사람의 시를 끌어와 교묘하게 그 말과 의경을 살리거나 변용해 썼던 것이다. 허균은 <국조시산>에서 “당나라 시인이 지은 잘된 곳에 뒤떨어지지 않는다(不減唐人高處)”고 했다.
세밑에 박은을 생각하며 (둘째 수) (歲暮有懷仲說)
한 해가 마침내 저물었다더니 바로 오늘인데
내가 생각하는 사람 누구인지 그 벗이 없구나.
괴로이 오늘을 붙잡아도 머무르지 않는데
친구를 어느 곳에서 이웃하리요?
내 인생이 이와 같으니 이미 우습고
세상 일 복잡한데 부질없는 봄이로다.
동풍에 홀로 서서 인생의 아득함을 묻노니
일생토록 몇 번이나 수건을 적셨는가.
歲律其暮只今日 我思者誰無故人 今日苦留不肯駐 故人何處與爲隣 吾生如此已堪笑 世事多端空自春 獨立東風問冥漠 百年能復幾霑巾 (容齋集 3卷)
이 시는 가까웠던 친구 박은(朴誾)을 그리워하며 혼자 살아남은 것이 무의미함을 읊은 칠언율시로 진(眞)운이다. 수련은 구조가 특이한데, 시경의 구절을 끌어와서 처음에 배치했다. <시경> 당풍 실솔(蟋蟀)에 나오는 ‘한 해가 마침내 저물었다(歲聿其莫)’라는 말로 친구 없이 지낸 세월의 절망감을 충격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다음의 대구도 의문사를 포함한 두 개의 문장을 하나의 구에 집어넣어 순탄하지 않은 느낌을 준다. 이렇게 구의 구조를 특이하게 하는 것은 두보(杜甫)나 강서파(江西派)의 시에서 연유된 것으로, 이런 기교로 친구의 부재(不在)를 절실하게 표현하였다. 함련에는 앞 연에서 나온 ‘오늘(今日)’과 ‘친구(故人)’를 다시 사용하여 시상을 연결하였는데,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더욱 새로워지는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강조하였다. 경련에서는 친구를 잃은 세월의 공허하고 무의미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여러 조어(助語)를 동원하였는데, ‘이와 같다(如此)’, ‘이미(已堪)’, ‘복잡하다(多端)’, ‘부질없다(空自)’ 등으로 대구를 만들어 시인의 공허한 심정을 표현하였다. 미련에서 아득한 인생길에서 벗을 그리워하며 느끼는 슬픔으로 이 시를 마무리하였고, 변칙적 운율인 요체(拗體)를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송시(宋詩)에서 배운 여러 가지 기교를 구사하여(李鍾黙, 海東江西詩派硏究, 태학사, 1995. 참조.) 죽은 벗에 대한 상실감과 그리움을 형상화하여 시적 재능을 과시하였다.
그림에 쓰다 (둘째 수) (題畵)
쓸쓸하게 내리는 상강(湘江)의 비요 흐릿하게 보이는 얼룩무늬 대숲이다.
여기에 그려 넣기 어려운 것은 그 날, 두 왕비가 지녔던 마음이구나.
浙瀝湘江雨 依俙斑竹林 此間難寫得 當日二妃心 (容齋集 卷1)
이 시는 그림을 감상하고 그 느낌을 쓴 오언절구로 침(侵)운인데, 대를 그린 그림을 보고 정절을 생각했다는 것은 별로 특이할 것이 없다. 그런데 제화시는 대체로 그림을 자세히 묘사하여 시가 그림에 대응되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인데, 여기에서는 그림 묘사는 대강 해 놓고 그림 속에 담겨있는 정신을 읊어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것이다. 기구와 승구에서 비 내리는 대숲을 그린 그림을 제시하였는데, 시인은 이 그림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떠올리기 위하여 먼저 상강의 반죽(斑竹)이라고 규정하였다. 즉 소상반죽(瀟湘斑竹)이라고 해야 순임금이 남순(南巡)하다가 죽자 따라죽은 아황(娥皇) 여영(女英)의 정절이 연상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시인이 감상한 본래 그림은 어느 고관 집에 걸린, 비 내리는 배경의 대 그림일 것이다. 이 그림을 두고 소상반죽과 아황여영을 떠올려서 대와 정절을 연결한 것이다. 전구에서는 그려 넣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였다가, 결구에서는 두 왕비의 정절이라고 밝혀서, 잠깐 연상을 막았다가 다시 부각시키는 교묘한 기교를 사용하고 있다. 같은 제목의 앞 뒤 수에도 전반은 그림 묘사이고 후반은 자신의 느낌을 배치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렇게 제화시에서 그림 묘사보다 자신의 정감이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은 송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시에서 영향받은 것이다. 이렇게 그는 송나라 강서파(江西派)의 시에서 크게 영향 받아 여러 가지 기교를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는 강서파의 표면적 기교를 본받으려는 게 아니라 내면적인 의도나 품격을 본받으려 하였다.
주운 (朱雲)
허리춤에 칼이 있다면 무엇 하러 수고롭게 청했겠는가.
죽어 지하에 가서 사람 없어도 또한 족히 노닐 만했으리라.
불쌍하구나, 한(漢)나라 조정의 괴리령(槐里令) 주운이여.
일생에 아첨하는 자들의 머리 벨 것만 알았으니.
腰間有劍何勞請 地下無人亦足遊 可惜漢庭槐里令 一生唯識侫臣頭 (容齋集 卷1)
이 시는 1512년에 지은 칠언절구 우(尤)운으로 한나라 성제(成帝) 때의 직간신(直諫臣)인 주운의 고사를 빌려서 나라를 그르치는 무리를 제거하고 싶은 열망을 표현한 것이다. 주운은 괴리령(槐里令)을 지낸 인물인데,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가 국권을 전단하는 왕씨 무리를 두호하여 성제의 총애를 얻자, 이를 탄핵하되, 지금 조정의 대신들은 자리만 지키고 있으니 신에게 참마검(斬馬劍)을 내려주면 아첨꾼 한 사람의 목을 자르겠고 했다. 황제가 누구를 말함이냐고 하자 장우라고 했다. 황제가 노하여 낮은 관리가 대신을 헐뜯으면 기강이 무너진다며 끌어내 죽이라 하니 주운이 전각 난간을 부여잡아 난간이 부러졌다. 주운이 외치기를 용방(龍逄)과 비간(比干)을 따라 지하에 노닐어도 좋으나 성조(聖朝)에 누(累)가 될 것이라 하니, 좌장군 신경기(辛慶忌)가 직간신을 죽일 수는 없다고 간청해서 황제가 화를 풀었다. 그 후 부러진 난간을 갈지 않고 고치기만 하여 직간신의 충간을 기렸다고 한다.(班固, 漢書 卷67, 朱雲傳.) 기구와 승구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말하고 있다. 황제와 고관들 앞에서도 꿋꿋하게 조정의 비리를 따지는 곧은 신하의 기개, 걸왕과 주왕에게 직간하다 죽은 용방과 비간을 따르겠다는 마음은 시인 자신의 각오이기도 했으리라. 연산군에게 직언을 하여 왕과 고관에게 미움을 사 죽은 친구 박은이나, 유배당했던 자신이 바로 직간신이 되기를 바랐던 바였다. 전구와 결구에서는 시인의 느낌을 토로했는데, 아첨꾼의 목 벨 것만 생각했다가 황제의 분노를 샀던 주운이 불쌍하다고 했다. 주운의 의기에 감동하여 그에게 자신을 동일시한 것이다. 어숙권(魚叔權)은 이 시를 두고 “고금에 주운을 읊은 것이 많지만 이만한 의사를 가진 게 없었다. 비록 당송의 시집 속에 넣어도 부끄럽지 않다”(魚叔權, 稗官雜記. 李容齋 詠朱雲詩…古今詠朱雲者 無此意思 雖置之唐宋集中 無愧矣.)고 칭찬했다. 직간신의 기개를 살린 높은 뜻을 평가한 것이리라. 그는 연산조에서도 직언으로 고초를 겪었지만, 38살에 대사간이 되어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와 대립하다가 벼슬을 내놓고 낙향한 사실은 구차한 처신을 싫어하고 그 나름의 보수적 원칙에 투철하려 했던 고집 때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이행은 조정에서 주운과 같은 직신이 되고자 하였다.
방 한 칸, ‘축융봉 꼭대기에 올라’의 운을 씀 (一室 用登祝融峯絶頂韻)
아래는 맑은 냇물 흐르고 위에는 푸른 산 솟았는데
그 사이 몇 칸 집에 숨어있듯이 묵묵히 앉았네.
경치는 절로 네 철이 되고 눈과 귀로 오직 그것을 즐기네.
높은 산꼭대기에 오르지 말고 푸른 바다 물결을 건너지 말라.
산에는 호랑이와 큰 곰 있고 바다에는 고래와 큰 자라 있다네.
혹시라도 조금만 경계하지 않으면 생명은 터럭같이 날아간다네.
세상길 어찌 그리 쉽지 않은지 권세와 이익은 날카롭게 갈라졌네.
아뿔사, 앞으로 나가지 말라, 탐욕이 너를 죽일 것이라.
쓸쓸히 한 칸 방안에서 누워서 쉬고 노력하지는 말아야지.
세월은 늘어나지 않으니 이 양쪽 귀밑털을 어찌하나.
긴 밤은 어찌 이리 더디고 늙은이의 생각은 어찌 이리 끝없는고.
책읽기만한 게 없느니 흡사 가려운 데 긁는 것 같거든.
下有淸溪流 上有靑山高 其間數間屋 黙坐如藏逃 景物自四時 耳目惟爾遭
莫登喬岳頂 莫涉滄海濤 岳有虎與羆 海有鯨與鼇 頃刻或不戒 性命輕秋毫
世路豈不夷 勢利分錐刀 咄哉亦莫前 死汝以貪饕 蕭然一室內 偃息可無勞
歲月不相貸 奈此雙鬢毛 長夜何漫漫 老懷何滔滔 莫如讀我書 恰似痒處搔
(容齋集 卷8)
이 시는 그가 54살(1531,중종26년)되던 해에 지은 ‘주문공의 <남악창수집>에 화운하여(和朱文公南岳唱酬集)’에 들어 있는 오언고시로 호(豪)운이다. 주희(朱熹)의 시집을 읽고 그 풍류여운에 감동하여 그 운을 빌려서 자신의 뜻과 정감을 표현한 것이다. 남산 청학동 서재에 홀로 앉아 세상사 특히 정치 현실의 험난함을 반추하고 이를 풍자하는 내용이다. 대략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처음 세 줄은 그가 일상에서 잠깐 떠난 서재 주위의 경관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상을 일으키고 있다. 그 다음 세 줄은 높은 산과 푸른 바다에 가지 말라는 말로 험한 세상을 풍유하였고, 그 다음 세 줄은 권세와 이익을 다투는 현실의 비정함을 직서하고 이를 떠나고 싶은 결심을 말하고 있다. 마지막 세 줄에서는 현실 도피와 공명 성취에 대한 심리적 갈등을 드러내다가 최종적으로 자연과 현실이 접하는 공간을 발견하고 안주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각 부분들은 유기적으로 이어졌는데, 이를테면 셋째 줄에서 경물을 말한 후에 넷째 줄에서 산과 바다에 대하여 경계하고, 여섯째 줄에서 생명에 대한 조심을 말한 다음에 일곱째 줄에서 권세와 이익을 다투는 세상의 험함을 연결시키며, 아홉째 줄에서 세상을 도피한 자의 은일을 말한 다음에 열째 줄에서 공명 성취에 대한 미련을 대비시켜서 긴밀한 상관관계를 유지하도록 했다. 자연 속의 ‘한 칸 방’이라는 외면적인 한적함 속에 현실의 험난함을 풍자하는 내면적 긴장이 잘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허균은 <국조시산>에서 이 시를 평하여 “황정견(黃庭堅)과 진여의(陳與義)의 영향을 받고 지은 여러 편 중에서 가장 예스럽다(諸篇從黃陳中來殊蒼古)”고 하였다. 어쨌건 이 시에서 이행이 찾아낸 이상적인 공간이란, 유배 중에 마음속으로 지향했던 농부의 생활과 벼슬길에서 다짐했던 적극적 현실 참여의 중간적 장소인 남산 청학동 속의 방 한 칸이 아닐까 한다. 즉 출사하면 재상이요, 퇴사하여 한가히 노닐면 전원이 되는 그런 공간이다. 왜냐하면 그는 농부가 되지도 않았고 은거하지도 않았으며 다만 정치 현실의 소용돌이만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벼슬길에서 체험한 인생의 부침(浮沈)을 시정으로 승화시켰다.
박은이 쓴 그림 병풍의 시 뒤에 쓰다 (書仲說題畵屛詩後)
묵은 종이에 번져날 듯한 먹물 흔적은 남아 있는데
푸른 산 어느 곳에도 혼백을 불러볼 곳이 없구나.
적막한 한 평생에 머리털은 온통 하얗고
비바람 치는 빈 방에서 홀로 문을 닫네.
古紙淋漓寶墨痕 靑山無處可招魂 百年寂寞頭渾白 風雨空齋獨掩門 (容齋集 卷1)
이 시는 30대 중반에 쓴 작품인 듯하다. 박은이 죽은 지 10년이 되기 전에 친구를 회상하고 그를 그리워한 칠언절구로 원(元)운이다. 제목에 쓴 대로 그림을 그린 병풍에다가 언젠가 박은이 제화시를 썼고, 그가 죽은 뒤에 그 시를 보고 이행 자신이 시를 썼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친한 벗을 잃은 상실감과 그에 대한 그리움을 볼 수 있다. 그는 “시란 뜻을 말하는 것이다.(詩者所以言志)”라고 하였다.(李荇, 皇華集附錄序 및 外舅 成堯叟 淸風錄序, 容齋集 卷9. 참조.) 이는 물론 <서경> 순전(舜典)에 나오는 ‘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고 노래는 말을 길게 한 것이다.(詩言志 歌永言)’라는 말에서 온 것이지만, 그가 말하는 ‘뜻을 말한다(言志)’라는 것은 언어표현의 차원과 의경(意境)의 차원을 나누어서 의경을 기르는 것이 언어표현을 연마하는 것보다 먼저라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뜻(志)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하여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므로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뜻을 말한다(言志)’고 하면서 아울러 뜻(志)을 기른다고 하였으므로 이 때 뜻(志)이란 의미만이 아닌, 의미와 정서의 측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다면 이행의 시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의미와 정서란 무엇일까? 이것을 여기에서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상실감과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다.
기구에서 그림 병풍에 쓴 박은의 시를 묘사했는데, 먹물 흔적이 지금도 뚝뚝 떨어질 듯하다고 하여, 그 글씨가 힘차서 마치 글을 쓴 이가 살아있는 듯함을 표현했다. 승구에서 친구는 죽어서 이제는 혼백조차 불러볼 곳이 없고 청산만 푸르다고 하여 벗을 잃은 처절한 상실감을 청산과 대비시켜 드러냈다. 허균은 이 구가 비창한 말(愴語)이라고 평했다. 전구에서는 시상을 전환하여 자신의 처지로 돌아왔는데, 벗을 잃고 난 후의 시인은 평생이 적막하고 공허해서 온통 머리털이 하얗게 되었다고 했다. 결구에서 시인은 벗이 없는 세상은 비바람 치는 곳이고 삶의 의미도 없는 곳이므로 홀로 문을 닫고 친구만을 생각하겠다는 것이다. 친구를 잃은 상실감이 지나쳐서 정서가 폐쇄적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한갓 ‘기이한 생각과 기이한 말(奇想奇語)’을 고집하는 송시(宋詩)의 영향만이 아닌 박은에 대한 우정의 절실함에서도 기인한다고 해야 하겠다. 그는 박은이 죽은 후에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를 간행했고, 박은과 함께 시 짓고 노닐었던 일을 회상하는 많은 시를 지었다. 그는 박은에 대하여 말하기를, 함께 자라고 함께 배웠으며 뜻한 바도 같은 지기(知己)였는데, 조정에서 직언을 다하다가 끝내 화를 당했다고 하고, 그의 시가 사람들의 의표를 뛰어넘어 거짓된 수식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글이 되니 아마 천고에 드문 글이라(李荇, 朴仲說墓誌 및 挹翠軒遺稿序, 容齋集 卷9, 참조. 洪萬宗, 小華詩評. 참조.)고 하여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그는 이렇게 천재시인과 벗했음을 자랑으로 여기고 유고를 간행하고 그를 추억했으며 또 그와 같은 시인이 되기를 기약하여 결국 시인으로 대성했다는 평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정서에는 친구와 함께 했던 젊은 날에 대한 상실감과 그리움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천마록 뒤에 쓰다 (題天磨錄後)
책 속의 천마산(天磨山) 모습이 아직도 희미하게 눈앞에 열리네.
이 사람은 지금 가고 없는데 옛길은 날로 아득하구나.
가랑비 내리는 영통사(靈通寺) 해 저무는 만월대(滿月臺).
삶과 죽음은 일찍이 멀리 떨어졌다 하더니 흰 머리로 홀로 배회하는구나.
卷裏天磨色 依依尙眼開 斯人今已矣 古道日悠哉 細雨靈通寺 斜陽滿月臺 死生曾契闊 衰白獨徘徊 (容齋集 卷2)
이행이 박은과 더불어 개성 천마산에 놀 때 지은 시집 ‘천마록(天磨錄)’을 보고, 죽은 벗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오언율시로 회(灰)운이다. 그는 박은이 혼란한 시대에 아깝게 죽었으니 하늘이 모질고 잔인하다며 그와 연관된 사물만 보아도 그를 그리워했다. 수련에서 지금도 ‘천마록’을 펼치면 거기서 노닐던 때의 천마산색(天磨山色)이 어렴풋이 눈앞에 어린다고 하여 세월이 지났지만 벗과 놀던 기억이 되살아남을 말하였다. 함련에서 친구는 갑자사화에 죽고 지금은 이 세상에 없다는 상실감과, 함께 가기로 했던 옛사람의 도(道)와, 함께 노닐었던 옛 길(자취)이 아득해지고 말았다며 허무한 심사를 토로했다. 경련에서 친구와 더불어 기억에 되살아나는 가랑비 내리는 영통사와 해 저무는 만월대를 감각적 상관물로 제시하여 조락(凋落) 이미지로 구체화된 서글픈 정서를 드러내었다. 더구나 영통사(靈通寺)는 혼령과 통한다는 절이요 만월대(滿月臺)는 보름달이 떠오른 집이니 고유명사의 선택도 공교하다. 미련에서 <시경> 패풍 격고(擊鼓)의 ‘삶과 죽음은 멀리 떨어졌다(死生契闊)’를 끌어와서 자신이 느끼는 삶과 죽음의 단절감을 표현하고 벗을 잃고 홀로 고독하게 늙어가는 자신의 처지를 읊어서 죽은 벗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담았다. 허균은 이 시가 고아(古雅)하고 심후(深厚)해서 아무리 찬양해도 모자란다(公詩篇 古雅深厚 歷劫讚揚 所不能盡)고 평했다. 친구와 노닐던 추억에 차츰 젖어들었다가 허망하고 고독한 심사로 깨어나는 구성에서나 전고(典故)와 어휘를 자신의 정서와 의미로 새롭게 창조하는 언어 구사에서 그의 솜씨는 과연 찬양할 만하다. 어쨌건 이 시에서도 주된 정서는 친구를 잃은 슬픔과 그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팔월 십팔일 밤 (八月十八夜)
평생에 사귀던 벗들 모두 사라지고
흰머리 되어 내 몸과 그림자가 서로 보는구나.
높은 다락에 달 밝은 오늘 같은 밤이면
피리소리 구슬퍼서 듣고 있을 수가 없구나.
平生交舊盡凋零 白髮相看影與形 政是高樓明月夜 笛聲凄斷不堪聽 (容齋集 卷7)
이 시는 1520년 가을 그가 영호남 증고사(證考使)가 되어 영남을 돌아보고 지은 ‘영남록(嶺南錄)’에 실려 있다. 기구에서 평생 사귀던 벗들이란 그가 젊어서부터 가깝게 지냈던 박은(朴誾), 정희량(鄭希良), 홍언충(洪彦忠), 권달수(權達手) 등일 것이다. 이들은 이행과 더불어 문장사걸(文章四傑)로 칭해지며 가깝게 지냈으나, 윤씨추숭(尹氏追崇) 반대와 갑자사화에 걸려서 권달수와 박은은 죽고 홍언충은 중종반정 후 풀려났으나 곧 죽었으며 정희량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승구에서 친구들은 사라지고 혼자 살아남아 느끼는 그의 처절한 고독과 상실감을 이밀(李密)의 ‘진정표(陳情表)’에 나오는 “몸과 그림자가 서로 위로한다(形影相弔)”라는 말을 빌려 표현했다. 흰머리 되어 옆에는 아무도 없고 오직 제 몸과 그림자가 서로 불쌍히 여기며 바라본다 했으니 그 외로움과 비감(悲感)을 짐작할 만하다. 전구에서 이런 사람이 높은 다락에 올라가 한가위가 사흘쯤 지난 기울어지는 달을 보면 인생무상의 감회가 뼈를 저밀 듯이 느껴질 것이다. 결구에서 게다가 구슬픈 피리소리마저 듣는다면 자신의 감개를 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그러니 기우는 달밤의 피리소리는 친구 잃은 외로운 사람에게 한없는 슬픔을 자아내기에 듣고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허균도 무한한 감개가 읽을수록 슬픈 작품이라(無限感慨 讀之愴然)고 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친구 잃은 슬픔과 그들에 대한 그리움을 읊어낸 시라고 하겠다.
‘동네 어귀의 저녁을 읊음’에 차운하여 (次洞口晩賦韻)
어슴푸레하게 봄날은 저물어 가는데 청학동 어귀는 아득하게 깊구나.
조용한 곳이라 세속 자취도 없고 봉우리가 높아 저녁 그늘이 쉬이 지네.
그윽한 꽃은 느린 걸음을 맞이하고 우는 새는 새로운 시를 고민하는구나.
이미 말을 잊은 경지에 이르렀으니 누구에게 이 마음을 말 하리요.
依依春事晩 杳杳洞門深 地靜無塵迹 峯高易夕陰 幽芳迎緩步 啼鳥惱新吟 已得忘言趣 從誰說此心 (容齋集 卷8)
이 시는 ‘주문공의 <남악창수집>에 화운하여(和朱文公南岳唱酬集)’에 들어 있으므로, 주희(朱熹)의 <남악창수집>에 실린 ‘동네 어귀의 저녁을 읊음(洞口晩賦)’이라는 시의 운율을 빌려서 자신의 시정을 노래한 오언율시로 침(侵)운이다. 그가 54살(1531년)로 좌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일이 없는 여가에 남산 청학동에서 전원적 흥취에 젖어본 작품이라 하겠다. 수련에서 늦은 봄날 초목이 어우러진 사이로 인가와 떨어진 청학동의 호젓한 저녁 풍경을 그려놓고, 함련에서 그 분위기를 더욱 구체화하여 세상의 번잡함이 전혀 없고 그 아취(雅趣)가 봉우리처럼 높고 그 한적함이 저녁 그늘같이 깃들이는 곳이라고 부연하여 묘사하였다. 경련에서 시인이 자연과 동화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윽한 곳에 핀 꽃은 한가롭게 거니는 그를 맞이하고 지저귀는 새는 마치 시인이 시를 읊듯이 시상을 떠올리며 운다는 것이니, 시인과 꽃과 새가 자연 속에 동화되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미련에서 이렇게 주객일체의 무아경에 들었으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경지이고, 현실의 번뇌를 떠난 초월적인 신비경이다. 이것은 또한 도연명의 전원취향과도 상당히 근접한 것으로, 그가 바라던 전원지향이 도달한 곳이다. 그는 옛사람의 자연성을 사모하여 “추우면 털옷 입고 더우면 칡 베옷 입고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며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지면 쉬는 것이 바로 옛 사람의 삶이다.”(李荇, 信古堂記, 容齋集 卷9. 寒裘暑葛 飢餐渴飮 日出而作 日入而息 無非古也.)라며 자연에 동화하여 사는 삶을 바랐다. 이처럼 이 작품에는 그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원했던 초월적 전원지향이 표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