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산이 좋다
산이 좋다.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냥 산이 좋다.
대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그곳에 오르면 맥박이 고동치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
뭇 생명을 잉태한 어머니 품속 같은 그곳에 들면 요람(搖籃)에 누운 듯 안온함을 느낀다.
나무들이 어깨를 겯고 더불어 숲을 이룬 그곳에 오르면 흐뭇함에 겨워 얼굴 가득 미소가 벙근다.
주말마다 M 산악회 회원들과 산을 찾는다. 첫째와 셋째 일요일에는 전세 버스로 전국의 명산들을, 그 외 일요일에는 수도권의 둘레길을 밟는다. 둘레길은 7년 전부터이고 전세 버스 산행은 까마득히 50년 전 M 산악회를 창립 하면서부터다. 1972년 6월, 왕십리 쪽에 지역구를 둔 민주공화당 소속 국회의원이 표밭 다지기 차원에서 만든 게 M 산악회였다.
지구당 간부들이 회장과 총무를 맡고 동 단위 조직원들의 권유로 지역 내 자영업자들이 대거 참여해서 성대하게 창립총회를 열었다. 자영업자들의 열띤 호응은 아마 세무서, 보건소, 파출소 같은 관의 눈치를 살피는 처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무소불위 권력의 한 축을 담당하는 여당 국회의원과 연을 맺음은 든든한 뒷배가 생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도 그때 왕십리 쪽에서 자영업을 하고 있었다. 창립총회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두 달 뒤 합류하여 그해 연말 ‘대한 산악 연맹’에 제출한 회원 명단에는 이름이 올라 있다.
서른여덟의 나이, 그때는 산이 좋은 줄 몰랐다. 권유자에 등 떠밀려 공부 못 하는 학생 학교 가는 심정으로 산에 올랐다. 여느 자영업자들과 마찬가지로 한 달에 딱 두 번만 쉬는 첫째, 셋째 일요일에 쌓인 피로를 풀지 못하고 산에 간다는 게 영 마뜩잖았을 것이다.
산이 좋아진 것은 얼마 후 아내와 함께하면서부터였다. 오가는 긴 시간 동안 아내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게 좋았다. 깔딱고개를 만나면 등을 밀어주고 미끄럼 내리막에서는 손을 잡아 끌어줄 수 있음 또한 흐뭇했다. 석유 버너로 밥을 짓고 국을 끓여 아내에게 점심 공양(?)을 올릴 때는 그지없이 행복했다.
산이 좋아지면서 자연 산악회 운영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이사직과 부회장직을 거쳐 입회 11년 만에 회장직에 올랐다. 아내가 쉽지 않은 일을 겁도 없이 맡는다며 걱정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도리어 회장직을 멋지게 해내어 아내에게 밖에서도 빛나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었다.
등산에 필요한 공부를 시작했다. 먼저 대한적십자에서 실시하는 ‘응급 처치법’ 강습에 참여하여 ‘수료증’을 받았다. 다음으로 코오롱 정보센터에서 실시한 독도법(讀圖法) 강습회에 참석해서 ‘회원권’을 취득했다. 거금을 들여 전임 회장이 장만한 무전기 사용법도 익혔다. 달리 통신 수단이 없는 그 시절에는 무전기가 안전 산행의 필수품이었다.
그때는 등산 인구가 적었기에 국립공원 외에는 알려진 등산로가 별로 없었다. 등산용품을 판매하는 코오롱 상사에서 산을 답사해서 ‘코오롱 지도’를 제작해 판매했으나 종류가 그리 많지 않았다. M 산악회에서 독도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선배인 전임 회장과 나뿐이었다. 내가 을지로 ‘국토 지리 정보원’에서 산의 높낮이인 등고선(等高線)이 그려진 지도를 사 와서 선배와 함께 지도위에 나침반을 놓고 등산 지도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지도는 등산 버스 안에서 배포되었다. 나침반으로 출발지에서 어디까지는 몇 도, 거기서부터 정상까지는 몇 도, 정상에서 하산 지점까지는 몇 도라고 자세히 표시되어 있었다. 거기다 각 지점에 도착할 시간까지 적혀 있었다. 나침반을 목에 건 5, 6, 명의 임원들이 지도에 표시된 대로 일사불란하게 회원들을 이끌었다. 아마 그때 서울에 있는 여러 산악회 중에 M 산악회처럼 짜임새 있게 운용되는 곳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몰려와 버스를 두 대로 해야 할 때도 있었다. 당 쪽 사람들이 물러나고 자영업자들이 산악회를 장악하는 문민화(?)(文民化)도 이루어졌다. 마음이 가는 곳에 재물도 따라간다고 했던가. 봄 개산제(開山祭)와 가을 정기총회 때마다 찬조금이 쏟아져 기금도 쌓이기 시작했다.
산악회가 활성화되면서 회원들 간의 친목도 날로 깊어졌다. 좋은 일이 생기면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에는 같이 울어 주었다. 가족처럼 서로 아껴주고 챙겨주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는 이런저런 간식들이 줄을 잇고 산속 점심때는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밥 짓고 찌개 끓이고 고기 구워 서로 자기 음식 맛보라고 성화를 부리기도 했다. 나는 젓가락만 들고 여기저기 다니며 문전걸식(門前乞食)하는 게 그렇게 기꺼울 수가 없었다.
나라 경제가 좋아지고 그에 따라 회원들의 살림살이 또한 좋아지면서 산행 양태도 다양해졌다. 삼복더위 때는 3박 4일 동안 피서지를 찾았고 추석과 설날에는 2박 3일, 신정에도 1박 2일 동안 등산을 겸한 여행을 다녔다. 그 패턴은 해외로도 이어졌다. 일본의 북알프스, 대만 옥산(玉山), 중국의 황산(黃山)과 태산(泰山) 그리고 북한의 백두산과 금강산에도 다녀왔다. 단순 해외여행도 부지기수다. 가까운 일본과 중국이 압도적으로 많고 태국 등 다른 나라들도 드문드문 끼어 있다.
한창 푸른 나이로부터 해넘이 저물녘인 지금의 나이까지 50년 세월 동안 산을 쏘다녔다. 산이 좋아 행복했고 선한 마음씨의 회원들과 함께였기에 더욱 행복했다. 요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집콕’ 처지가 되면서 M 산악회의 등반일지를 책으로 편찬한 《발자취》를 보고 있다.
회장직 14년 동안의 애환 모두가 그 속에 담겨있었다. 팔뚝만 한 무전기를 목에 걸고 “감 잡았다, 오버!” “선두 정상 부근 도착, 오버!” 호기로운 목소리의 내 젊음이 그 속에 있었다. 성취의 기쁨에 환호하는 내 모습과 실패의 쓰라림에 한숨짓는 내 모습 또한 그 속에 있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아슴아슴 아지랑이로 피어오르는 아련한 그리움, 목이 메고 눈시울이 뜨겁다.
산이 좋다.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냥 산이 좋다.
코로나 난리가 끝나면 부리나케 배낭을 꾸려 산으로 달려갈 것이다.
(계간수필 2021년 봄호 게재)